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자신의 모습이었다. - P216

춘희는 비로소 생전의 점보가 말하던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파리가 눈에 앉아도 눈을 깜박여 쫓지 못하는 거였고 차가운 비가 내려도 피하지 못하는 거였으며 다리가 아파도 앉아서 쉴 수 없는 거였다. - P218

춘희가 느낀 슬픔은 쌍둥이자매만큼 강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상실감은 그네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훗날 그녀가 공장에서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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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 양복을 사야 한다. 그것이 그로첸스키의 유령이 내게 하는 말 아니었을까? 나는 아이작을 창피하게 할 수 없었고 날 자랑스럽게 여기게도 할 수 없었다. 그애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 P129

새 양복을 차려입고 선반에서 보드카를 꺼냈다. 한 모금을 마시고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알코올의 예리함이 슬픔의 예리함을 대체하는 것을 느끼며, 내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눈을 반쯤 감고서 백 번은 했을 그 몸짓을 반복했다. 그러다 술병이 비고 나서는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지만 점점 빨리. 발을 쿵쿵 굴렸고 관절에서 뚝뚝 소리가 나도록 발길질을 했다. 내 아버지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춘 춤을 나도 추며 발을 쾅쾅 차고 쭈그리고 다리를 내뻗었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또 추어서 발이 까지고 발톱 밑에 피가 맺히는데도,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대로 춤을 추었다. 삶을 위해, 의자에 부딪히고 빙글빙글 돌다가 쓰러지면 일어나 다시 춤을 추었다. - P129

나는 세상이 날 맞을 준비를 못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쩌면 내가 세상을 맞을 준비를 못했다는 게 진실일 것이다. 나는 인생의 현장에 항상 너무 늦게 도착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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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점보는 자기만의 시간대에서 살아갔다. 그는 일 분에 겨우스물다섯 번밖에 뛰지 않는 심장을 가지고 느릿느릿 움직였으며 춘희 또한, 그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의 세계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대신에 길 한쪽에 비켜서서 질주하는 자동차를 지켜보는 것처럼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하루살이의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 P185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죠. 아무리 우물이 깊어도 반드시 바닥은있게 마련이에요. - P187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 P188

죽으면 사라지는 거야. 그리고 헤어지는 거지. 영원히. - P197

떠도는 자들의 소망이란 본시 소박하기 짝이 없어, 그저 입에 풀칠할 걱정 하지 않고 두 다리를 뻗을 데만 있으면 그들에겐 그곳이 바로 꿈에 본 내 고향이요, 복숭아꽃 흐드러진 정원이었던 것이다. - P200

춘희에게 금복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도 같았으며, 춘희의 바람은 끝내 채워질 수 없는 허기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그녀를 평생 따라다닐 아득한 그리움이 되고 말았다. - P200

본시 뜨내기들이란 들어올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데다 염량빠르기로 치면 장사꾼 못지않았고 거칠기로 치면 건달 못지않았으며 음험하기로 치면 거간꾼 못지않았다. 또한 그들 가운데에는 뭔가 틈이 있으면 그 틈을 더욱 넓게 벌려 그 속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 P202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죽이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물론, 일꾼들을 부추기고 충동질해서 그곳까지 끌고 온 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말엔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것은 그 어떤 백 마디 말보다도 힘이 있었고 그 어떤 논리보다도 설득력이 있었으며 그 어떤 선전문구보다도 자극적이었다. 그것은 구호의 법칙이었다. 재청에 뒤이어 봇물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온갖 종류의 구호들이 쏟아져나왔다. - P205

금복은 자신에게 돌아온 엄청난 행운이 곧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 운명의 아이러니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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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들어보라고! 머리를 탁 때리는 생각이, 살아 있어서 이 얼마나 좋은가. 살아 있어서! 그러다 네게 말하고 싶어졌어. 무슨 말인지 알아?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브루노, 아름다운 것이자 영원한 기쁨이라고. - P118

세상이 더는 똑같이 보이지 않았다. 너는 바뀌고, 그러다 또 바뀌는구나. 개가 되고, 새가 되고, 항상 왼쪽으로 기우는 화초가 되는구나. 내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만큼 그애를 위해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것은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고,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고, 책을 쓴 것도 읽을 수 있는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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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둘이 처음 만났던 여름만큼 생생하게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을 외면했다. 때로 엄마는 물과 공기만으로 며칠을 버티기도 했다. 알려진 고등 생명체 중 그렇게생존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로서, 엄마의 이름을 딴 생물종이 하나있어야 마땅하다. - P72

언젠가 줄리언 삼촌이 해준 얘기에 따르면,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머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때로는 몸 전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뭇잎을 그리기 위해서는 전체 풍경을 희생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한계를 지우는 것 같을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하늘 전체를 다루는 척 할 때보다 무언가의 4분의 1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부분을 다룰 때, 우주에 대한 어떤 느낌을 붙잡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엄마는 나뭇잎이나 머리를 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택했고, 어떤 느낌을 붙잡기 위해 세상을 희생했다. - P72

진화라는 개념은 너무 아름답고도 슬프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래로 지금까지 오십억에서 오백억 정도의 생물종이 생겨났는데, 그중 겨우 오백만에서 오천만 종 정도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니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종의 구십구 퍼센트는 멸종한 것이다. - P81

내가 자라서 절대로 하지 않을 것 한 가지는 사랑에 빠져 대학을 중퇴하고 물과 공기로만 버티는 법을 배워서, 내 이름을 딴 종의 시조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 P85

소포를 보내야 한다는 것, 내가 맘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드는 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당하지 않은 일이 아주 많다. - P94

나중에 아주 오랜 뒤에, 그는 두 가지 후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는데, 첫째는 그녀가 고개를 젖혔을 때 전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목에 자신이 만들어준 목걸이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잘못된 문장을 택했다는 것. - P98

그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또한 어둡고 육중한 차이가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어서, 로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쓰다보니 더욱 그에게 이끌리게 되었다. 하지만 리트비노프는 자신의 과거나 잃어버린 모든 것에 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았다. - P102

인간의 최초 언어는 손짓이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언어는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으며, 손가락과 손목의 섬세한 뼈를 이용한 무한한 조합의 동작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손짓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미묘했으며, 그 움직임을 통해 발휘되었던 섬세함은 그때 이후로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 P111

언어의 손짓과 삶의 손짓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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