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둘이 처음 만났던 여름만큼 생생하게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을 외면했다. 때로 엄마는 물과 공기만으로 며칠을 버티기도 했다. 알려진 고등 생명체 중 그렇게생존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로서, 엄마의 이름을 딴 생물종이 하나있어야 마땅하다. - P72

언젠가 줄리언 삼촌이 해준 얘기에 따르면,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머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때로는 몸 전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뭇잎을 그리기 위해서는 전체 풍경을 희생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한계를 지우는 것 같을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하늘 전체를 다루는 척 할 때보다 무언가의 4분의 1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부분을 다룰 때, 우주에 대한 어떤 느낌을 붙잡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엄마는 나뭇잎이나 머리를 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택했고, 어떤 느낌을 붙잡기 위해 세상을 희생했다. - P72

진화라는 개념은 너무 아름답고도 슬프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래로 지금까지 오십억에서 오백억 정도의 생물종이 생겨났는데, 그중 겨우 오백만에서 오천만 종 정도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니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종의 구십구 퍼센트는 멸종한 것이다. - P81

내가 자라서 절대로 하지 않을 것 한 가지는 사랑에 빠져 대학을 중퇴하고 물과 공기로만 버티는 법을 배워서, 내 이름을 딴 종의 시조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 P85

소포를 보내야 한다는 것, 내가 맘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드는 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당하지 않은 일이 아주 많다. - P94

나중에 아주 오랜 뒤에, 그는 두 가지 후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는데, 첫째는 그녀가 고개를 젖혔을 때 전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목에 자신이 만들어준 목걸이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잘못된 문장을 택했다는 것. - P98

그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또한 어둡고 육중한 차이가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어서, 로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쓰다보니 더욱 그에게 이끌리게 되었다. 하지만 리트비노프는 자신의 과거나 잃어버린 모든 것에 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았다. - P102

인간의 최초 언어는 손짓이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언어는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으며, 손가락과 손목의 섬세한 뼈를 이용한 무한한 조합의 동작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손짓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미묘했으며, 그 움직임을 통해 발휘되었던 섬세함은 그때 이후로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 P111

언어의 손짓과 삶의 손짓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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