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보이는 벽에 에밀 놀데의 커다란 수채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그 유명한 꽃그림이었다. 나는 놀데의 꽃 그림을 전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이건 난생 처음 보는 그림들 같았다. 발산하듯 넓은 붓질로 두껍게 칠한 강렬한 색채의 꽃에 어떤 의도가 있음을 그제야 느닷없이 깨달았다. - P157

놀데의 의도는 꽃이 선사한 타오르는 열정을 진지한 인내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주제에 명확하고 완고하게 천착하는 예술가가 있었다. 그림의 의미가 그제야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작품에 힘을 주는 건 집중력이구나. 내 안의 공간이 넓어진다. 내 안의 직사각형 공간 속으로 빛과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사고가 명장해지고 언어가 풍부해지고 지성이 작동을 개시한다. 외로움, 불안, 자기연민으로 가득했던 내면의 공간이 놀데의 꽃을 보며 점점 확장된다. - P158

그 공간이란 뭘까. 내 이마 한복판에서 시작돼 가랑이에서 끝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은 내 몸만큼 넓기도 하고 화살 구멍만큼 좁아지기도한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날이면,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할수록 명확해지는 날이면 감사하게도 이 공간은 무한히, 아름다운 날씨처럼 확장된다. 그러나 불안과 자기연민이 치고 들어오는 날이면 쪼그라든다. 얼마나 삽시간에 쪼그라드는지! 이 공간이 넓어져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 안의 공기를 맛보고 또 느낀다.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호흡한다. 마음은 평화롭고 기대감에 차서 사는게 즐겁고 어떤 영향력이나 위협에서도 놓여난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지니. 나는 안전하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과의 전쟁에서 지면 경계선은 좁아지고 공기는 오염되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사방이 수증기와 안개뿐이다.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 P159

우리는 속으로 숨기는 생각과 겉으로 표현하는 생각의 차이를 처음 소개받았고 하나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집안에서 불순분자가 되어갔다. - P162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엄마를 분노로 떨게 하고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건 내가 생각하는사람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학교에 간다는 게 곧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라는 것, 조리 있고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P166

눈앞에 있는 경험에만 집중하게끔 생겨먹은 나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미래의 가능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따져보자. 우리 중에 그렇게 미래를 내다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가는 존재이지 어느 누구도 유예된 만족과 희열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 P176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 살 뿐이다. - P176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 각자는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 P177

나는 사랑의 경험이란 이전과 비슷하지만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것, 그러면서도 동일한 열병과 환멸과 걱정과 부정으로가득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저주를 받은 현대여성이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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