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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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래쇼크, 제 3의 물결, 권력이동’등 그들의 전작에서 볼 수 있듯이
 
토플러 부부는 이제 미래지식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지 오래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 예측이 단지 우공이산(愚公移山)이 아닌,
 
현재와 과거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것임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바꿀 것은 ‘부의 이동’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아시아에 있었던 부가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 하에 종속되었지만,
 
이제 다시 부의 흐름이 아시아로 돌아온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2003년은 아시아의 분수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과 인도는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도 싱가포르, 한국, 대만, 중국의 총 GDP가
 
유럽의 5개 경제 대국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의 총계와 거의 맞먹었다.’고
 
 우리나라를 넣은 결과 치를 책에서 밝히고 있다손 치더라도,
 
60먹 인구와 비밀이 많은 그들의 경제구조를 우습게 봤다가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기에 그저 웃고 넘길 수가 없다.
 
 
 
실상을 따져보면 중국이 반을 넘기는 점유율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큰 파도 안에서 중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위성국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위성국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정체성부터 확립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매스컴에선 연일 세계화를 외치지만,
 
먼저 우리의 세계화가 도대체 어디까지 왔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태 대한민국 안에서만 세계를 찾았지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을 찾지 않은 것은 

한류가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인기가 계속될 것인지 만을 묻는
 
저급한 세계화는 한류(韓流)가 아닌 한류(寒流)만을 양산할 뿐이다.
 
 
 
작지만 강한나라, 식민지를 40년도 안 되어 벗어난 나라,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뀐 유일한 나라.
 
그러나 아무리 많은 수사법을 동원해도 독도와 간도는 아직도 영유권 싸움을 하고 있으며,
 
2002년 월드컵을 치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세계 모두가 아는 나라는 아니다.
 
우리가 진정한 세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좀더 엉거능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 힘을 내자고 말하는 것도 좋지만, 경제 위기에 세계인에게 힘을 내자고 하는 것은 어떤가.
 
 한국만을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우리 것을 이야기 할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우리의 얘기를 들을 여유가 생길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오직 시간만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수없는 반추의 작업을 거듭해야겠지만, 전혀 부당한 이야기라고 보기도 힘들다.
 
 실제로 시간을 끄는 사이 중국이 북한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커지고 있으며
 
이는 남북한이 맺어야 할 ‘형제애’가 북한과 중국의 것으로 변질되는 조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통일 정책은 북한이 그 ‘중국형제’에게 백두산의 30퍼센트를 팔아먹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통일을 이루더라도 간도뿐 아니라
 
 백두산 영토 문제를 놓고 중국과 교묘한 외교전에 돌입해야 할 것이다.



거대한 부의 혁명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계의 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함께 파도를 타거나, 바위처럼 우뚝 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럽회의에서 세계화의 기준을 세계도시화로 결정했다고 한다.
 
 EU로 따지자면 EU가 있고, 런던과 파리는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의미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세계가 있고, 연방이 있고, 나라가 있고, 도시가 있고, 개인이 있다.
 
어느 도시도 개인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며, 어느 나라나 연방도 개인의 연합이 아닌 곳이 없다.
 
이렇게 세계는 개인을 통해 만들어진다. ‘둑도 개미굴로 무너뜨릴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개미는 지나가는 소에게 밟혀죽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
역자 김중웅씨가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물리학, 의학 등 과학의 영역에서부터 경제학, 사화학, 사회심리학 등
 
사회과학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변화가 이제 단독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위의 모든 것들이 융합되어 이루어짐을 알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실히 아는 사람을 드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독자는 세계의 미래 흐름과 그 안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책의 발간이 2006년인 것을 생각한다면, 
 
기회를 얻었을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
 
그러니 우리도 모두 손을 쓰기 전에 준비를 마쳐야 할 것이다. 



20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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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키프키프
파이자 게네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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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키프키프. -파이자 게네.
 
 

 
 
 
 
 
‘키프키프’는 아랍어로 ‘사랑하다, 행복하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의 실제 삶을 마치 옆에서 이야기 하듯이 풀어쓴 이 책은
 
 페이지를 슥슥 넘기고 나면 마음속에서 힘찬 에너지가 꿈틀꿈틀 차오른다.
 
 
 
작가가 글을 쓸 당시가 17세로 자신이 쓴 글이 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며 운 좋게 책이 나오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이 운 좋은 소녀는 이혼 가정에 엄마와 단 둘이 살면서 돈이 부족해 외상을 밥 먹듯이, 아니 빵 먹듯이 한다.
 
 외상을 척척 그어주는 아지즈 아저씨 덕분일까.
 
한참 민감한 시기에 외상을 해오려니 쑥스러울지도 모르는 데 그녀는 오히려 힘든 엄마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
스스로를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그녀를 돈 많은 부모와 명석한 두뇌를 타고 나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말하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보면 어떨까.
 
 
 
급격한 산업혁명을 지나 이제 우리나라에서 끼니 걱정을 하는 가정은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도 희귀 금속만큼이나 줄어가고 있다.
우리는 왜 태어난 걸까?
 
모기에게 밥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자본주의 시대에 필요한 말 잘 듣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서?
 
 
 
여태껏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노력해서 훌륭하게 되신 분들을 많이 보아왔고,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청소년시기 이전인 유년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천재들이 많아
 
우리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에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보다는 옆집 언니, 혹은 누나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읽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위로와 미래의 비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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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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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사실 나는 그의 회색빛 문체가 너무도 싫어 일부러 그의 책들이 있는 길들을 돌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그의 책 중에 정말 좋아하는 책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1Q84>다.

나는 이 책에서 회색이 아닌 흰색과 검정색을 만났다.

아오마메도 덴고도 회색이 아니다.

<40이 넘은 얼굴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되는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란 지나가는 이의 눈길을 잡아 끈다.

우울한 유년기를 보낸 주인공들이 운명을 탓하며 주저 앉지 않고 운명을 개척한다.

그렇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트레이너와 킬러(?)로 수학선생과 소설가로 열심히 살아가는 두 주인공이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인물일지언정 아오마메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합리화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그녀의 일이 장진의 영화 <킬러들의 수다>에서와 같이, 법률로 심판할 수 없는 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본다.

보이지 않게 괴롭히는 <아메리칸 싸이코> 같은 화이트 컬러의 범죄는 법률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이 느끼는 심리적 박탈감은 더해지고 영웅의 등장을 소원하게 된다.

그러나 임꺽정, 로빈훗 같이 일파를 형성하는 영웅은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현대 사회에서 지나치다고 할 만큼 눈에 띄어 받아들이기 힘이 든다.

그 대신 살인의 대가로 받은 돈을 현금뭉치로 은행 대여 금고에 고스란히 맡기라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외로운 늑대 같은 아오마메가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책에서 작가가 이념문제를, 여성문제를, 또 그와 함께 두 개의 달로 이어지는 사랑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 얘기를 조합해보면 사랑문제가 좀더 앞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2권이야 어쨌든 그 시대의 모습을 천천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며 독자들을 끌고 가려고 했던 노작가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된것 만으로도

내게는 600쪽이 넘는 페이지를 넘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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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のしずく 19 (コミック) 神のしずく (コミック) 19
오키모토 슈 / 講談社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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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물방울을 읽으면서 아- 정말이지 작가는 계속 공부해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것에도 호기심을 잃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공부해나가야만 하는 운명.

한줄, 한 줄을 쓰기위해 엄청나게 공부했을 작가에게

감동의 박수를 보내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쉽게, 그마저도 어려우면 적당히 흘려버리는 내용을 작가는 이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계속해서 고민하며 썼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숙연한 마음마저 들 정도다.

독자 중 과연 어느 만큼이나 작가가 쓴 내용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10퍼센트? 아니 이러한 전문적인 내용이라면 5퍼센트 이하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독자라는 존재도 참 우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 그 책을 읽지 않고 는 못 배기는...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서로가 닿지 못하는 작가의 능선에 도달했다고 자랑하는 행동이란.

아마 그러한 행동을 가장 많이 해보았던 사람 중 하나로 꼽힐 나이기에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렇다고 어렵기만 해서 될 문제도 아니다.

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독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나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가벼운 면모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도 지치지 않고 언젠가는 노력하면 작가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구나,

언젠가는 작가가 쓴 내용의 전모를 파해 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고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독자의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텍스트는 작가의 손을 떠나자마자

작가와는 또 다른 하나의 생명체로 변모하고 만다.

작가가 그것을 쓸 때에야 온전히 자기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몇 개월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그 내용을 처음처럼 기억할 수 있을까?

작가에게 메모는 필수 사항이다.

언제나 종이와 펜이 그의 수족처럼 따라 다녀야 하는 것이다.

어느덧 찾아왔다가 떠나버리는 신기루 같은 문장들이 온전히 작가의 것이 되어줄리 만무하다.

이래서 같은 책을 읽어도 같은 느낌일 리가 없고 같은 텍스트일 리가 없는 것이다.

글이란 정말 누가 말하듯이 신이 보내준 내안의 천사가 대신 써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도 다 모르는 것을 독자인 우리가 다 파헤치려고 해봐야 허사인 일이다.

과연 이래서 책이란 생물은 누구에게 정답을 물을 수 없이

혼자 즐기는 취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란성 쌍둥이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이 세상에,

누구나가 같은 책을 읽고 완벽히 같은 생각을 가지기는 과연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니 독서에는 왕도 따윈 없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말일 것이다.

너무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말만 주절거렸나보다.

책 내용? 아마 당신의 짐작대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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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방랑기
가쿠타 미쓰요 지음, 신유희 옮김 / 해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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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틀로 제목은 묶여 있지만, 이 소설은 성장 소설의 냄새를 폴~폴~ 풍긴다.

고3에서 대입 재수생이 되는 나 ‘야지마 리리코’. ‘리리코’는 자신의 이름을 남몰래 ‘리코’라고 개명하고 노트에 적는 인물일 만큼 자의식의 세계가 확실하다. 그런 그녀의 자의식을 지탱해주는 중심에는 태어나지 못한 남동생 ‘폰키치’가 있다.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지난 날 자신의 상처로 놀란 어머니가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다 유산한 일을 그녀는 자기 책임이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 한 맺힌 영혼을 기억하기 위해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건다. “폰키치, 폰키치…”하며 말이다.

주류상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결혼해서 가끔 놀러오는 큰언니, 프리터 둘째언니, 다마노코시를 꿈꾸는 셋째언니까지. 요즘 보기 드문 여섯이라는 대식구는 몇 번이나 말해야 밥 먹으러 나오지만, 기쁜 일에 차등을 두어 외식을 나가는 화목한 가정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장난스럽게 웃고 떠들며 계속될 것 같던 시절들은 둘째 언니의 문학상 수상으로 궤도 이탈을 감행한다. 첫째는 책에 나왔던 옛 연인과 다시 불이 붙고, 셋째는 집안을 일으키겠다며 별안간 들고 일어선다. 리리코는 리리코대로 고모의 죽음이다, 큰언니의 미행이다, 이러저러한 일에 휘말려 재수생이 되고 만다.

그 뒤에 이어지는 가게 리모델링과 둘째의 독립선언. 시노자키 레이지와 마쓰모토 겐 사이에서 방황하는 리리코.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 이렇게 소소한 사건들로 리리코에게 가장 중점을 두는듯하면서도 가족의 일상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 간다.

그 중,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언제나 삶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작가의 삶에 대한 의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작가는 말한다. “뭔가 늘었다면 말 그대로 늘어난 거지 그걸 가지고 이제부터 뭔가 줄어들 거라 여기는 건 잘못이야. 건전하지 못해.”

줄어든 것도 마찬가지다. 줄면 줄었을 뿐 그것이 뭔가 생겨날 거란 의미는 아니다.

종합쇼핑센터 체리제이가 생긴다는 사실은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모든 상점가 사람들을 불안하게하고 압박하는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새 파도인 것이다. 그러나 상점가 사람들은 ‘야지마 주류’처럼 개장을 하기도 하고 혹은 업종을 바꾸며 새로운 파도에 적응하는 몸놀림을 익히게 된다.

책을 읽으며 삶이란 밀물과 썰물이 공존하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델링 후에도 개점 세일만 반짝 했을 뿐, ‘야지마 리큐어숍’은 다시 한산한 예전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밀물일지 썰물일지 모르지만 곧 새 파도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파도에 익숙해짐으로서 체리제이라는 새 파도는 어느새 헌 파도가 될 거시다. 시간이 더 흐르면 또 다른 파도가 왔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그 새 파도에 적응해 헌 파도로 만들 것이다. 그게 어떤 방법일지는, 역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엇이 시작된 건 시작된 거고 무엇이 끝날지 미리부터 걱정하는 건 이상해.”

그렇지만 모른다고 걱정한다면 그건 이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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