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 집단을 벗어나, 참된 개인으로 비상하라
박성현 지음 / 들녘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체주의에 대한 회의도 적지 않지만, 개인주의에 대한 느낌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했지만 사회생활을 통해서 보여지는 개인주의적 개인들에 대해서는 반감 정도는 아닐지라도 함께 일하기 껄끄러운 존재들이란 생각을 종종 하곤했다.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행태로, 자신만을 내세우고 자신 위주로 행동하는 모습들이 그랬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강조하듯 "한국 사람들이 개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와도 이어지는 것같다.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새마을 운동을 실천하며 공동체적 삶을 몸에 익히고 살았던 때문이다.  남들 하는만큼 하면서 적당히, 눈치껏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은 법을 배우며 자란 우리 세대는 ’개인’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리고는 ’개인’임을 강조하는 무엇이든, 공동체 분열을 가져오는 공공의 적이라고 여겼다.   

저자는, 주의主義를 담은 이념적 개인을 다시 쓰려는 게 아니다. 개인을, 민주주의나 전체주의의 구성원으로서 일부가 아니라 독립적 존재 가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유럽, 서구의 전통 사회에서 개인은 늘 ’떼’속의 일부로 정의되어졌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는 ’떼’는 순응하는 개인을 양성하는 정신적 독재자이다. 육체적이진 않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폭력이 정신을 죽이고 결국엔 자아를 망각한 개인의 껍데기만 남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와 그가 개인주의의 초석으로 삼는 니체는, 개인주의를 다시 쓰고 개인의 정체성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를 가진 듯 하다.  



요즘 대두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저자는, 일반적으로 공동체 의식이 함양된 민주시민이 가졌던 고무적인 시각과는 거리가 멀다. 공리주의를 제외하고라도 ’정의분배’에 관한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도덕적 관념에 비추인 개인의 양심은 ’머리와 상관없는 양심, 진실과 상관없는 양심’을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나는 최근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하지만 이 저작물의 저자가 주장하기까지 개인의 양심이 도덕적 관념 아래 있다는 것에 아무런 저항감도 갖지 못했다. 그만큼 내가 가진 개인, 개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강했던 때문이다. 

"진실은 지식의 쪼가리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저자의 말을 상기할 때, 어느 것도 완벽한 진실일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변질시키는 게 ’떼의 힘’이 될지, 아니면 ’개인주의’의 그릇된 방종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자의 글은 명료하면서도 직관적 해석으로 읽는동안 첫키스의 짜릿한 기억처럼 나를 전율케했다. 하지만 키스가 끝난 후의 객쩍음처럼 무언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남는다. 존재 가치로서의 ’개인’은 인정하는 반면, 공동체속에서 두드러지는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묘한 갈등이 남는다. 당연한 인문적 결론이다.  

인문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은 수학처럼 확실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만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은, 학문적 논지와 생활, 환경등을 망라해 모든 분야로 들어가는 문일 뿐,  어는 길 어느 방향으로 갈지의 선택은 각자에게 주어진다는 명제를 충실히 담당한 저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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