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 말과 글을 단련하고 숫자, 언어,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
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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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나 지면을 통해 그날의 사건 사고를 비롯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어쩌면 습관적인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다변화되었다고는 하나 시시각각으로 쏟아지는 정보나 일방성으로 인해 우리는 곧잘 판단을 유보하기에 이른다. 그 전달되는 정보란 것도 대단히 한정적이며 대부분은 현상을 보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도 많다. 지극히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멘트들에 별다른 저항감없이 수긍하게 된다. 때로는 근거와 통계, 인용 자료들을 내비치지만 그것들에 대한 객관성을 입증할 만한 우리의 노력은 아쉽게도 미진하다. 아니,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는 노력조차도 너무 쉽게 포기한다. 그러는 사이, 뉴스는 가십거리처럼 자극적인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광고와의 구분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보도매체의 주관이 어디냐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편파적인 기삿거리와 그 폐해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기껏해야 자신이 선호하는 경향의 매체를 이용해 보도를 접하는 것이, 현대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처럼 보여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계속해서 한정적이고도 대안없는 선택에 안주해야 하는가. 민주주의가 걸어 온 자취에서 보았듯,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다양한 정보나 기사, 사상, 양식)이 허구성을 내세워 공격하더라도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련 정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을 단련할 필요가 있으며 생각의 전환을 필요로한다.


한.미 FTA의 협정문에서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연일 듣고 있다. 걱정을 넘어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충분히 감지되었을 오류들이 대부분이다. 그중 대부분은 ’단어’선택에서 비롯된 오류들이다. 품목의 이름이나 숫자등 글자로는 사소할 수 있지만 그 초래될 결과는 상당히 큰 것들이다. 이 사건(?)은 대단히 유감스럽긴 하지만 일반인들의 검증이 쉽지 않은 비근한 예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정보들에 대해서는 다를까?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와 유사하거나 이보다 더 지독한 거짓 정보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화려하고 유명한 모델을 내세운 광고 상품을 구입하고 후회해 본 적이 있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한다는 문구가 붙은 책을 아무 저항없이 읽었다가 뭔가 당한 기분이 든 적도 있다.  마치 그 식품을 먹으면 비타민이 전부 보충되는 것처럼, 늘씬한 몸매의 비결이 그 식품 하나에 농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 적도 있고, 어떤 화장품을 쓰면 피부가 좋아지다 못해 얼굴까지 바뀔것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언어도단이다. 불쾌함으로 끝날 일이 아닌데 그렇게 하고 만다. 그런가하면 환경 단체와 개발을 주장하는 단체, 노조와 사주의 전혀 상반된 주장에 대해서도 충분한 정보와 비판적 자세로 함께 고민하기를 꺼린다. 고민을 대신해주는 미디어들은, 오늘 환경보호 다큐를 방송했다가 내일은 발전을 통해 번영하는 한국의 미래를 보여준다. 오늘의 기사도 수긍하고 내일의 정보도 받아들인다. 비판없는 수용은 적정선에서 여전히 유보되고 겉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하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첫째로는 우리 뇌를 세척해야 하고, 둘째로는 모든 세뇌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 노엄 촘스키


촘스키처럼 생각하는법을 연마해야하므로 먼저는 그의 생각 관련 저술을 읽어야 수순이 맞겠지만, 우선은 그의 짤막한 생각을 필두로 이 책에 대한 일반적 해석을 이끌어내기로 한다.  저자는 크게 두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이 책을 시작한다. 하나는 ’인식론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문제’로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를 피력하고 있다. 개괄이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책에서, 정보에 이용되는 다양한 도구, 즉 숫자, 언어, 미디어를 직시하는 통찰력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언어] 챕터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접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모든 언어 술수의 대변이 되는 단어 ’족제비 말’의 뜻을 읽으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족제비 말들에 현혹되었는지를 알게되니 씁쓸하다. 여기서 그치면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지라 난 곧바로 비판적 태도를 모색한다. 유야무야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속에서 명확한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 장황한 설명속에서 핵심을 간파해야 한다. 주어진 정보에 만족하지 말고 정보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를 얻고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은 말 할 나위가 없다.   

토론회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면, 상대방의 의견은 틀리다면서 명확한 반박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우기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결론없이 끝나는 맥없고 객쩍어하는 토론자들을 들 수 있다.  답답하고 곤혹스럽기는 보거나 듣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98% 부족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이 책에서 말하는 총체적인 결과물이다. 즉 나의 정보 전달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정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객관적 반증을 통해, 설득력과 이해력을 높이려는 노력이 여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토론자들의 답답한 우격다짐으로부터 혹은, 전반적으로 팽배해진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다면 권리를 찾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출처를 따져가며 비교하고 공부하는 것이 그것들의 구체적 방법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비판적 시각으로만 해결되어지는 건 곤란하다.  


"제시되는 모든 가정을 끈질기게 의심하면서 따져 보려는 욕구와  새로운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욕구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p.317) 


쉬운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 있다. 혹자는 쉬워도 길은 길이지 않느냐고 우기겠지만 암튼 그런 말이 있다. 우리가 만연해진 거짓 정보들을 따라잡으려면 한참을 가야하는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그래도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는 조금씩이라도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비단 나만 살겠다는 짧은 생각에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내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임은 물론, 극히 현실적으로는 상술적 거짓 현혹으로부터 안전해야 할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결코 불필요한 모색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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