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역자 노트 + 프랑스어 원문 + 영역판 수록)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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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왕자

p.30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운 친구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선 결코 묻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어떠니? 좋아하는 게임은 뭐니? 나비를 수집하니?" 그들은 당신에게 묻는다. "몇 살이니? 형제가 몇이니? 몸무게가 어떻게 되니? 아버지 수입은 얼마나 되니?" 그러면 단지 그들은 그를 안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른들에게, "나는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집이 있는"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 집의 이미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그러면 그들은 소리칠 것이다. "정말 멋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왕자를 읽는다. 정치인도, 사업가도, 범죄자도 모두 어린왕자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들의 행보에 큰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집에 어떤 화분이 있는지, 페인트질은 어떻게 했는지, 벽돌재인지 시멘트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집값만 중시하는 어른들의 속물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읽던 아이들은, 이후 그 사람의 성격은 어떠한지, 취미는 무엇인지보단 그 사람의 학벌과 연봉에 더 관심을 가지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고로 어린 시절 어린왕자를 읽는 것은 삶에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어른의 몸이 되어버렸지만 아직 아이의 감수성을 지닌 이십 대 때 이 책을 읽어야 한다.

p.51 "사실 나는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거예요! 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만 했어요. 그녀는 나를 향기롭게 하고 빛나게 했어요. 나는 결코 그녀로부터 달아나지 말았어야 해요. 나는 그녀의 가여운 속임수 뒤에 숨어 잇는 다정함을 꿰뚫어 봤어야 했어요. 꽃들은 그렇게 모순적이에요! 그러나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알기엔 너무 어렸어요."

이 문장만으로도 아이들이 완전히 어린왕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아이들은 까칠한 사랑의 존재를 모른다. 수용 받거나 거절 받는 극단적 양자택일의 사랑, 즉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서로 거리를 두며 가까워졌다 멀어짐을 반복하는 애인의 사랑에 대해 아이들은 모른다. 고로 이 문장, 사랑하는 방법을 알기엔 너무 어렸어요는 어린 왕자의 후회이자 동시에 정말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이였던 자신에 대한 어른의 후회이기도 한 것이다. 굳이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 생애를 관통했던 수많은 그들을 이해하기엔 그들은 너무 모순적이었고 그들을 제대로 사랑하기엔 너무 어렸다.

p.109-110 "내 비밀은 말이야. 그건 매우 단순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봐야 잘 볼 수 있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네 장미를 그렇게 중요하게 만든 것은 네가 장미를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고 있어." 여우가 말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은 영원히 네 책임이 되는 거야.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어린왕자의 핵심 내용은 이 문장들에 축약된다. 어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이다. 그 결과, 정말 중요한 행복과 사랑, 희망들은 놓치기 일쑤다. 상대를 소중히 여기고 상대방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길들임의 과정이 지극한 노력의 결과물이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그 노력을 줄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상대방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잃고 권태와 무기력에 시달린다. 그들은 책임을 져야하지만 그들은 책임을 질 의사가 없다. 스스로의 삶을 건사하는데 바빠서 그들이 같이 행복하고자 맹세했던 우정과 가정을 내팽개치곤 한다. 우리는 어린 왕자와 여우에게 배워야 한다. 어른이 된다고 해도 잊으면 안 되는, 그러한 작은 비밀들을 말이다.

p.113-114 그는 갈증을 진정시켜 주는 완벽한 약을 파는 상인이었다. 일주일에 한 알을 삼키면 더 이상 물 마실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너는 왜 그것들을 팔고 있니? "엄청난 시간을 절약해 주거든" "일주일 동안 53분을 절약한대." '내가' 어린 왕자가 자신에게 말했다. '만약 내게 53분의 여유가 있다면, 나는 아주 천천히 샘을 향해 걸을 거야……."

어린왕자갈증을 진정시키는 약은 소설 상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김밥을 구매하고 전자레인지 20초에 돌려 입 속에 구겨 넣어 허기를 진정시키는 우리의 모습은 갈증 없애는 약을 마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인스턴트 음식은 우리의 식사시간을 절약시켜준다. 하지만 절약한 시간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정작 먹는 즐거움과 식사 시간의 따뜻함, 느긋함을 희생해서 원하는 것을 한다곤 하지만 대개는 TV와 스마트폰을 건드리는 게 다일 경우가 많다. 자신을 살리는 것, 자신에게 소중한 것에 대한 시간적 투자는 얼핏 비효율적이게 보일지라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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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인간학 - 비움으로써 채우는 천년의 지혜, 노자 도덕경
김종건 지음 / 다산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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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어느 때고 찾아올 수 있다. 삶이 아무런 문제없이 순탄하게 지나갈 때 혹은 이전까지 미루어오던 문제가 곪아터졌을 때 상관없이 그렇게 도둑처럼 온다. 무의미라는 폭풍은 그전까지 이루어놓았던 삶의 의미라는 가건물을 쓸어가 버린다.


사람의 성장은 곧 의지와 능력의 성장이다. 사람은 이후의 일을 계획하고 목표를 설정하면서 정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미래’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내 의지로 되지 않은 일들을 경험하고, 동시에 타인(他人)이라는 지옥에 휩싸이면서 늘 자신을 옥죄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부러 무언가를 작위적으로 하는 삶, 하지만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 삶. 그럴수록 내면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우리는 지쳐간다. 내 삶에 주어진 온전한 자유는 부담이 되고, 삶의 무의미는 그나마 관습적으로 돌아가던 삶의 궤적을 차츰 녹슬게 한다.


이러한 실존적 불안 속에서 지친 중생들은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어보고자 종교에 귀의하곤 한다. 종교는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한 의미부여 방법이다.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나는 그의 뜻에 따르면 된다. 마치 유년기에 부모의 뜻이 하늘과 같았던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많이 힘든 방법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나에게 주어진 실존적 문제와 어려움을 직시하고, 굳이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을 통해서 도리어 의미를 찾는 방법. 사르트르가 ‘기투’라고 부르고, 까뮈가 ‘시지프스적 삶’이라고 불렀던 그 방법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이런 실존적 삶의 태도와 닿아있다. 거대한 것을 본받으나 사소한 것을 쉬이 여기지 않는 태도. 그 과정 하에서 굳이 일부러 무언가를 하기 보단 자연스레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스며들어가 생명과 도(道)를 베푸는 삶. 그런 삶의 모습을 도덕경은 보여준다.


《노자의 인간학》은 도덕경을 풀어낸 소설이다. 쉽게 말해 《미움 받을 용기》의 도덕경 판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직장 생활 속에서 삶의 의지와 의미를 잃어버린 중년 남성이 도덕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깨우친다는… 어디에선가 자주 접해본 플롯이지만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저자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도덕경의 중요성과 그로 인해 변화하는 삶을 설파하는 동시에, 도덕경의 에센스를 뽑아내서 우리에게 제시한다. 도가 사상의 도 자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입문서다. 요즘 가치 실용을 따지는 시대에서는 이만한 책도 없다.


이 책이 보여주는 ‘직장 처세술’의 수준을 넘어서서 노자와 장자를 포괄한 도가 사상에 대해 더 깊게 알고 싶다면 최진석 교수의 저서를 추천한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읽으면 이 책에선 가볍게 넘어간 부분들을 깊게 설명해준다.


동양 철학들은 어떤 절대적 존재의 의탁하기보단 스스로 그 부분을 극복하기를 요구한다. 도덕경도 그러하다. 다만, 그 과정 하에서 의지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인 도(道)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해줄 뿐이다. 그 도(道)가 바로 ‘하지 않음으로서 이룰 수 있는 힘’이라고 책은 말한다.


자아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이 ‘하지 않음’을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드러내야하고 자신의 의견을 드높여야 하고 쟁취하고 내 몫을 챙겨야하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인간에게는 이 ‘무위(無爲)’라는 건 자연스럽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무위는 내가 내 시선과 아집에 묶여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준다. 경쟁에 치여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이루는 역설은 여기서 온다. 그리고 그 길을 이루는 열쇠는 바로 이 도덕경에 있다.

p.50 "저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지고 오라. 그러면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라."
… "아무리 찾아도 가져올 불안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그대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노라."

p.208 … 바쁘다는 생각없이 그저 눈앞의 일을 하나씩 처리해나가면 된다. 어차피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문제가 등장할 것이다. 앞으로도 모든 일이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져 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삶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저 받아들이려는 마음 없이 받아들이면 된다.

p.107 도덕경은 거대하고 큰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작은 것, 사소한 것, 부드러운 것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거대한 것을 본받으면서도 작고 부드러운 것을 가까이하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159 도덕경 48장 : 위학일익 위도일손 //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 무위이무불위
-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더해가는 것이고, 도의 길은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에 이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p.79 도덕경 63장 : 도난어기이 위대어기세 // 천하난사필작어이 천하대사필작어세 // 시이성인종불위대 고능성기대
- 어려운 일은 그것이 쉬울 때 계획을 세우고, 큰일은 그것이 작을 때 해야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비롯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유로 서인은 끝내 큰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큰일을 이룬다.

p.133 도덕경 7장 :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 비이기무사사 고능성기사
- 성인은 자신을 뒤로하여 오히려 앞서고, 자신을 밖으로 하여 지킨다.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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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대한민국 스토리DNA 13
채만식 지음 / 새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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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태평천하: 오냐, 우리만 빼고 다 망해라!

1.

채만식의 태평천하는 염상섭의 삼대와 더불어,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면서 그것에 적응해가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상당히 명확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삼대에 비해, 태평천하는 작품 전체가 비꼬는 투라서 처음엔 읽기가 좀 거북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태평천하를 교과서의 지문으로 접했을 때 윤직원의 오줌 건강법(세수+음용)을 소개한 부분과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둘째 아들이 일본에서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윤직원이 속된 말로 멘붕하는 장면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생각보다 길이가 길었다. 300페이지 내외니 중편 소설쯤 되려나? 그리고 태평천하의 내용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실은 삼대의 내용이었다. 삼대가 미니시리즈라면 태평천하는 시트콤 같은 느낌이랄까? 폭소와 실소를 오고 가는 내용이었다.

2.

기승전결이 딱딱 떨어지는 삼대는 상당히 모던하다. 조의관-조상훈-조덕기로 이어지는 삼대 간의 의식 변화와 유산을 가지고 벌어지는 암투, 그리고 조선의 독립과 계급적 평등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버려진 첩과 주인공 친구의 자살, 한 편의 연극이어라!

하지만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은 70대가 되어서도 어떻게 하면 10대 여자 아이를 꼬실까 고민한다. 게다가 그의 아들들, , 며느리들, 심지어 증손자 윤경손까지 어떻게 하면 돈을 윤직원한테서 뜯어낼까 혹은 그 돈으로 뭘 할까 고민하는 내용이 이 책의 팔할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삼대보다 태평천하를 높게 평가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으로 치부하는 친일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채만식이 작품 내내 보여주는 비꼼체는 덤덤한 듯 보이면서도 그들의 행태가 잘못됐음을 넌지시 보여준다.

3.

일제는 제국주의 국가인 동시에 근대적 국가 체계를 조선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이전까지 조선은 외척들이 다 해먹으면서 나라의 기본적 시스템마저 거의 무너진 상황이었다. 막판에 대원군이나 고종이나 복구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막차는 떠난 지 오래였다.

과거 화적 때들과 고을 군수들에게 하도 시달림을 당한 윤두섭(윤직원)은 국가가 나서서 치안을 다스리고 법률로 제한을 두는 일제를 보고는 이런 태평천하가 어딨냐고 말한다. 나라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구한말을 살아간 그에겐 일제야말로 축복이고 평화인 것이다.

하지만 윤직원의 평화는 그 속에서부터 천천히 무너져간다. 어떠한 시대정신도 없고 단지 부에 집착할 뿐인 윤직원을 그의 가족들은 마음속으로 멸시하고, 그나마 싹수가 있어보이던 둘째 아들은 오히려 사회주의에 눈을 떠 그의 기대를 배신한다.

4.

시니컬한 묘사, 막장가족 그리고 숨겨진 풍자. 이 세 가지 요소 때문에 태평천하를 읽으면서 미국 애니메이션 The Simpson이 떠올랐다. 다양한 인물군이 있지만 특히 번즈와 스미더즈의 관계가 태평천하의 윤직원과 전대복의 관계와 닮았다.

번즈는 엄청난 부자이지만 더 부유해지고 싶어 돈을 아낄 궁리만 한다. 그의 비서 스미더즈는 그를 돕는 게 인생의 낙이다. 윤직원과 전대복도 비슷하다. 일단 에누리를 걸고 보는 윤직원과 목욕 주기를 일주일에서 보름으로 늘려 돈을 아끼는 전대복의 행태는 놀라울 지경이다.

이외에도 온갖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 응축되어 있는 소설이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술술 읽히면서도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곱씹을수록 진한 맛이 나는 소설이다. 역시 고전은 고전인가 보다.

p.60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 "오-냐. 우리만 빼고 어서 망해라!"

p.173 윤직원 영감의 이 계집애에 대한 흥미는 일찍이 고향에 있을 때부터 촌 계집애들을 주무른 솜씨라 오늘날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아니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계집애들은 열칠팔 세가 아니면 기껏 어려야 열육칠 세이었었지, 열네 살베기의 정말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에까지는 이르질 않았습니다.

p.125 "……여보게 이 사람아……! 아 자네버텀두 날더러 팔자 좋다구 그러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팔자가 존 게 다아 무엇잉가! 속 모르구서 괜시리 허넌 소리지…… 그저 날 같언 사람은 말이네. 그저 도둑놈이 노적가리 짊어져 가까 버서, 밤새두룩 짖구 댕기는 개, 개 신세여! 허릴없이 개 신세여!"

p.146 "참 장헌 노릇이여……! 아 이사람아 글시, 시방 세상으 누가 무엇이 그리 답답히여서 그 노릇을 허구 있겄넝가……? 자아 보소. 관리허머 순사를 우리 죄선으루 많이 내보내서, 그 숭악헌 부랑당놈들을 말끔히 소탕시켜 주구, 그래서 양민덜이 그 덕에 편히 살지를 않넝가? 그러구 또, 이번에 그런 전쟁을 히여서 그 못된 놈의 사회주의를 막어내 주니, 원 그렇게 고맙구 그렇게 장헐 디가 어디 있담 말잉가…… 어 참, 끔찍이두 고맙구 장헌 노릇이네……!"

p.310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병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고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자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 … "……그놈이, 만석꾼의 집 자식이, 세상 망쳐 놀 사회주의 부랑당패에, 참섭을 히여. 으응, 죽일 놈! 죽일 놈!"

p.145 "아 글씨, 누가 즈더러 부자루 못 살래서 그리여? 누가 즈 것을 뺏었길래 그리여? 어찌서 그놈덜이 그 지랄이여……? 아, 사람 사람이 다아 제가끔 지가 타구난 복대루, 부자루두 살구, 가난허게두 살구, 그러기루 다아 하눌이 마련한 노릇이구, 타구난 팔잔디…… 그래, 남은 잘살구 즈덜은 못산다구, 상판 남의 것을 뺏어다가 즈덜 창사구(창자)를 채러 들어? 응……? 그게 될 말이여……? 그런 놈덜은 말끔 잡어다가 목을 숭덩숭덩 쓸어 죽여야지……! 야 이 사람아, 만약에 세상이 도루 그 지경이 되구 보면 그 노릇을 어쩐담 말잉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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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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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삶에서 겪는 수많은 고난들을 극복해도, 궁극적 고난인 죽음만큼은 극복할 수 없다. 극복할 수 없음은 곧 수용 외엔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자체를 피할 수 없어도, 그 죽음 앞에 당당할 수는 있다.

브릿마리는 63세의 여성으로 커트러리 서랍(싱크대 서랍) 안을 어떻게 정리하느냐를 비롯하여 얼마나 교양있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잔소리꾼이다. 그녀는 남편 켄트의 외도로 인해 충격을 받고 살던 집을 떠나 일자리를 구하러 보르도라는 외딴 마을로 떠나게 된다.

보르도에서 브릿마리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로만 살아왔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녀는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남겨진 자신이 혹시나 꼴사납게 죽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그녀가 불안할수록, 그녀는 청소를 하고 주변을 정리한다. 그것만이 그녀의 일인 듯이.

 

남편에게서 도망치듯 떠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남편의 일이라고 여겼던 일들에 도전한다. 운전과 커피 내리기, 일자리 구하기 등 남편에게 의존하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지금까지 못해왔던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며 바닥을 쳤던 그녀의 자존감도 점차 회복되어 간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 과제처럼 남겨진 일이 있으니, 바로 이케아 가구 조립하기다. , 이케아!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들을 절망에 빠트린 그 조립 가구를 63세의 브릿마리 혼자서 조립하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무서운 건지 그녀는 조립을 차일피일 미룬다.

그녀가 가구 조립에 실제로 착수한 것은, 보르도에 오고 나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다. 그녀는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고 아이들을 돌보고, 스스로를 구속하던 몇 가지 편견들을 이겨낸 후에야 드디어 이케아 가구를 조립한다. 마치 밀림의 성인식에서 들짐승을 때려잡는 것처럼.

 

브릿마리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는 축구의 힘이 개입한다. 공과 공터, 그리고 사람들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쉬운 놀이, 축구. 가지고 놀게 공 밖에 없는 경제적으로 쇠락한 동네인 보르도에선 모든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 물론, 그 실력은 형편이 없지만 말이다.

작중에서 브릿마리와 축구의 인연은 아이들이 날린 축구공에 그녀의 머리를 맞아 기절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엔 도대체 왜 저들이 공이면 환장을 못하는지 이해 못하던 브릿마리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열정에 설득당한 그녀가 그들의 코치직을 맡으면서 점차 두터워진다.

고집스럽고 자신의 기준이 명확하던 브릿마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몸이 다치면서도 축구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은 언제 저렇게 열정을 가져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언니의 교통사고, 부모의 방치, 그리고 자신을 잃어갔던 결혼 생활을 찬찬히 돌아보며 말이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BRITT-MARIE WAS HERE)는 계속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죽어가는 도시, 보르도. 언제 죽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의 브릿마리. 그럼에도 우울하지 않은 건 일단 공을 차고 보는 축구에 대한 열정과 보르도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 때문이다.

브릿마리는 보르도의 아이들로부터 열정을 배우고, 보르도의 아이들은 그녀로부터 애정을 배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관계를 맺고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 직면할 실존적 용기를 얻는다. 무의미와 죽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방, 바로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죽음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 존재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억해줄 사람들. 내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울어줄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를 이어줄 인연의 끈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이 책에선 보여준다.

p.11 포크, 나이프, 스푼.
그 순서로.
브릿마리는 남을 평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하지만 교양인이라면 커트러리 서랍을 커트러리 서랍에 맞지 않는 이상한 순서로 정리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지 않은가.

p.39 "내가 일을 하려는 이유는 악취로 이웃 주민들을 괴롭히는 건 본받을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무라도 알아주었으면 하거든요."

p.149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공이 길거리를 굴러오면 발로 찰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같다.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p.382 몇 개의 순간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의 흐름을 놓아버리고 그 속으로 빠져들어 그 순간에 머물 찰나의 기회를 몇 번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격렬하게 살아할 기회를, 열정으로 폭발할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어쩌면 허락된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몇 번 그런 기회를 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의 한계 너머에서 몇 번이나 숨을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순수한 감정으로 거리낌 없이 우렁차게 환호성을 지를 수 있을까? 얼마나 여러 번 기억상실이라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
모든 열정은 어린애 같다. 진부하고 순수하다.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기에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를 뒤집어놓는다. 우리를 휩쓸고 간다. 다른 모든 감정은 이 땅의 소산이지만 열정은 우주에 거한다.
열정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게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요구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인간으로서의 품위. 곤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잘난 척 고개를 젓는 그들의 반응.

p.384 "축구할 땐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아요." ... "어떤 고통?" "모든 고통요."

p.393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p.431 "축구는 인생을 끌고 가는 힘이 있죠. 늘 새로운 경기가 있으니까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니까요. 모든 게 더 좋아질 거라는 꿈도 있고요. 경이로운 스포츠예요.

p.468 인간이라면 누구나 눈을 감으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린 결정을 모두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모두 남을 위한 결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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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김성한 지음 / 새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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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달콤한 인생: 다 속여도 네 자신은 못 속여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특이점

특이점은 그 이전과 이후 완전히 달라지게 하는 지점이다. 예를 들면, 특이점을 넘어간 별은 블랙홀이 되고, 특이점을 넘어선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해, 특이점을 넘어간 존재는 그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도 이전과 이후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아이와 어른처럼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 있는 반면,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도 있다. 그것 중에 하나가 바로 범죄. ‘범죄자의 삶은 죄를 짓는 것을 기점으로 그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달콤할 줄 알았던 인생, 뒤통수를 맞다

범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 사람의 똑똑함과 성실함과 상관없이 누구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보다도 범죄 현장을 많이 봐온 검사와 변호사 출신들이 결국 범죄의 유혹에 넘어가 철창 속에 갇히거나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를 더러 들었을 것이다.

소설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인 박상우는 변호사로 아름다운 아내와 잘 나가는 로펌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다. 행복이 끊이지 않을 줄 알았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연히 붙은 시비로 인해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다.

어떻게 죄 값을 치룰까 고민하던 찰나, 그는 지금의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아진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관련된 증거를 숨기고 근처를 지나던 다운증후군 청년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그러고 나선 무슨 배짱인지 그 청년의 변호를 맡는다. 자신의 완전범죄를 꿈꾸면서 말이다.

하지만 박상우 변호사는 계속적으로 진실이 드러나려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를 은폐하기 위한 그의 선택은 바로 더 큰 범죄다. 그의 손과 정신은 점점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죄악으로 범벅이 된다. 그러면서 사건의 방향은 그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신마저 속일지라도 네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책을 읽으며 그리스 비극 중 하나인 오이디푸스가 떠올랐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신을 원망하지 않고 다만 이 비극적 운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리라 다짐한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운명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예언을 성취하듯, 박상우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오히려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이는 결코 우연히 아니며 그가 여태까지 행해온 탐욕의 씨앗들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날까지만 해도 신을 찾던 그는, 오히려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신을 찾지 않는다. 신조차 저버린 그에게는 이제 고통과 절망의 영역만이 존재한다. 그는 그가 고통스럽다는 사실조차 부모, 아내, 친구 중 그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며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유대인들은 질병과 고통마저도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소설의 박상우가 겪는 모든 고통과 고민들은 그 자체로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보여준다. 세상에 모든 이들, 심지어 신까지 속인다고 할지라도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삶의 중요성

한 편의 훌륭한 범죄 스릴러 소설이었다. 읽는 동안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다. 특히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일단 시작한 이상 계속적으로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박상우의 심리 묘사가 뛰어난 책이다.

인간은 왜 만족을 모르고 권태라는 함정 속에 빠지는 것일까? ‘범죄자박상우의 삶을 통해 지금 내가 권태롭게 여기는 것들이 실은 정말 귀중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삶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p.8 ‘하나님, 이 모든 일들이 당신의 계획임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 제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테지요. 허나 제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 당신과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p.171 "나는 범인이 지금 이 뉴스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잘 들어두세요.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든, 그 계획은 실패하고 말 겁니다."

p.306 자신은 소중한 것들에 감사하는 법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했다. 날카로웠던 죄책감은 빠르게 무뎌져 갔고 거짓말과 위선들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행복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지난날 꿈꾸고 바라던 것을 손에 쥐고 난 다음에도 그때의 간절함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p.334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매순간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았던 기회들을 단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후회라는 감정은 미안해서라도 찾아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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