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대한민국 스토리DNA 13
채만식 지음 / 새움 / 201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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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태평천하: 오냐, 우리만 빼고 다 망해라!

1.

채만식의 태평천하는 염상섭의 삼대와 더불어,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면서 그것에 적응해가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상당히 명확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삼대에 비해, 태평천하는 작품 전체가 비꼬는 투라서 처음엔 읽기가 좀 거북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태평천하를 교과서의 지문으로 접했을 때 윤직원의 오줌 건강법(세수+음용)을 소개한 부분과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둘째 아들이 일본에서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윤직원이 속된 말로 멘붕하는 장면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생각보다 길이가 길었다. 300페이지 내외니 중편 소설쯤 되려나? 그리고 태평천하의 내용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실은 삼대의 내용이었다. 삼대가 미니시리즈라면 태평천하는 시트콤 같은 느낌이랄까? 폭소와 실소를 오고 가는 내용이었다.

2.

기승전결이 딱딱 떨어지는 삼대는 상당히 모던하다. 조의관-조상훈-조덕기로 이어지는 삼대 간의 의식 변화와 유산을 가지고 벌어지는 암투, 그리고 조선의 독립과 계급적 평등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버려진 첩과 주인공 친구의 자살, 한 편의 연극이어라!

하지만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은 70대가 되어서도 어떻게 하면 10대 여자 아이를 꼬실까 고민한다. 게다가 그의 아들들, , 며느리들, 심지어 증손자 윤경손까지 어떻게 하면 돈을 윤직원한테서 뜯어낼까 혹은 그 돈으로 뭘 할까 고민하는 내용이 이 책의 팔할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삼대보다 태평천하를 높게 평가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으로 치부하는 친일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채만식이 작품 내내 보여주는 비꼼체는 덤덤한 듯 보이면서도 그들의 행태가 잘못됐음을 넌지시 보여준다.

3.

일제는 제국주의 국가인 동시에 근대적 국가 체계를 조선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이전까지 조선은 외척들이 다 해먹으면서 나라의 기본적 시스템마저 거의 무너진 상황이었다. 막판에 대원군이나 고종이나 복구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막차는 떠난 지 오래였다.

과거 화적 때들과 고을 군수들에게 하도 시달림을 당한 윤두섭(윤직원)은 국가가 나서서 치안을 다스리고 법률로 제한을 두는 일제를 보고는 이런 태평천하가 어딨냐고 말한다. 나라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구한말을 살아간 그에겐 일제야말로 축복이고 평화인 것이다.

하지만 윤직원의 평화는 그 속에서부터 천천히 무너져간다. 어떠한 시대정신도 없고 단지 부에 집착할 뿐인 윤직원을 그의 가족들은 마음속으로 멸시하고, 그나마 싹수가 있어보이던 둘째 아들은 오히려 사회주의에 눈을 떠 그의 기대를 배신한다.

4.

시니컬한 묘사, 막장가족 그리고 숨겨진 풍자. 이 세 가지 요소 때문에 태평천하를 읽으면서 미국 애니메이션 The Simpson이 떠올랐다. 다양한 인물군이 있지만 특히 번즈와 스미더즈의 관계가 태평천하의 윤직원과 전대복의 관계와 닮았다.

번즈는 엄청난 부자이지만 더 부유해지고 싶어 돈을 아낄 궁리만 한다. 그의 비서 스미더즈는 그를 돕는 게 인생의 낙이다. 윤직원과 전대복도 비슷하다. 일단 에누리를 걸고 보는 윤직원과 목욕 주기를 일주일에서 보름으로 늘려 돈을 아끼는 전대복의 행태는 놀라울 지경이다.

이외에도 온갖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 응축되어 있는 소설이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술술 읽히면서도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곱씹을수록 진한 맛이 나는 소설이다. 역시 고전은 고전인가 보다.

p.60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 "오-냐. 우리만 빼고 어서 망해라!"

p.173 윤직원 영감의 이 계집애에 대한 흥미는 일찍이 고향에 있을 때부터 촌 계집애들을 주무른 솜씨라 오늘날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아니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계집애들은 열칠팔 세가 아니면 기껏 어려야 열육칠 세이었었지, 열네 살베기의 정말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에까지는 이르질 않았습니다.

p.125 "……여보게 이 사람아……! 아 자네버텀두 날더러 팔자 좋다구 그러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팔자가 존 게 다아 무엇잉가! 속 모르구서 괜시리 허넌 소리지…… 그저 날 같언 사람은 말이네. 그저 도둑놈이 노적가리 짊어져 가까 버서, 밤새두룩 짖구 댕기는 개, 개 신세여! 허릴없이 개 신세여!"

p.146 "참 장헌 노릇이여……! 아 이사람아 글시, 시방 세상으 누가 무엇이 그리 답답히여서 그 노릇을 허구 있겄넝가……? 자아 보소. 관리허머 순사를 우리 죄선으루 많이 내보내서, 그 숭악헌 부랑당놈들을 말끔히 소탕시켜 주구, 그래서 양민덜이 그 덕에 편히 살지를 않넝가? 그러구 또, 이번에 그런 전쟁을 히여서 그 못된 놈의 사회주의를 막어내 주니, 원 그렇게 고맙구 그렇게 장헐 디가 어디 있담 말잉가…… 어 참, 끔찍이두 고맙구 장헌 노릇이네……!"

p.310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병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고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자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 … "……그놈이, 만석꾼의 집 자식이, 세상 망쳐 놀 사회주의 부랑당패에, 참섭을 히여. 으응, 죽일 놈! 죽일 놈!"

p.145 "아 글씨, 누가 즈더러 부자루 못 살래서 그리여? 누가 즈 것을 뺏었길래 그리여? 어찌서 그놈덜이 그 지랄이여……? 아, 사람 사람이 다아 제가끔 지가 타구난 복대루, 부자루두 살구, 가난허게두 살구, 그러기루 다아 하눌이 마련한 노릇이구, 타구난 팔잔디…… 그래, 남은 잘살구 즈덜은 못산다구, 상판 남의 것을 뺏어다가 즈덜 창사구(창자)를 채러 들어? 응……? 그게 될 말이여……? 그런 놈덜은 말끔 잡어다가 목을 숭덩숭덩 쓸어 죽여야지……! 야 이 사람아, 만약에 세상이 도루 그 지경이 되구 보면 그 노릇을 어쩐담 말잉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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