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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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삶에서 겪는 수많은 고난들을 극복해도, 궁극적 고난인 죽음만큼은 극복할 수 없다. 극복할 수 없음은 곧 수용 외엔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자체를 피할 수 없어도, 그 죽음 앞에 당당할 수는 있다.

브릿마리는 63세의 여성으로 커트러리 서랍(싱크대 서랍) 안을 어떻게 정리하느냐를 비롯하여 얼마나 교양있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잔소리꾼이다. 그녀는 남편 켄트의 외도로 인해 충격을 받고 살던 집을 떠나 일자리를 구하러 보르도라는 외딴 마을로 떠나게 된다.

보르도에서 브릿마리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로만 살아왔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녀는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남겨진 자신이 혹시나 꼴사납게 죽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그녀가 불안할수록, 그녀는 청소를 하고 주변을 정리한다. 그것만이 그녀의 일인 듯이.

 

남편에게서 도망치듯 떠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남편의 일이라고 여겼던 일들에 도전한다. 운전과 커피 내리기, 일자리 구하기 등 남편에게 의존하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지금까지 못해왔던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며 바닥을 쳤던 그녀의 자존감도 점차 회복되어 간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 과제처럼 남겨진 일이 있으니, 바로 이케아 가구 조립하기다. , 이케아!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들을 절망에 빠트린 그 조립 가구를 63세의 브릿마리 혼자서 조립하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무서운 건지 그녀는 조립을 차일피일 미룬다.

그녀가 가구 조립에 실제로 착수한 것은, 보르도에 오고 나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다. 그녀는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고 아이들을 돌보고, 스스로를 구속하던 몇 가지 편견들을 이겨낸 후에야 드디어 이케아 가구를 조립한다. 마치 밀림의 성인식에서 들짐승을 때려잡는 것처럼.

 

브릿마리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는 축구의 힘이 개입한다. 공과 공터, 그리고 사람들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쉬운 놀이, 축구. 가지고 놀게 공 밖에 없는 경제적으로 쇠락한 동네인 보르도에선 모든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 물론, 그 실력은 형편이 없지만 말이다.

작중에서 브릿마리와 축구의 인연은 아이들이 날린 축구공에 그녀의 머리를 맞아 기절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엔 도대체 왜 저들이 공이면 환장을 못하는지 이해 못하던 브릿마리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열정에 설득당한 그녀가 그들의 코치직을 맡으면서 점차 두터워진다.

고집스럽고 자신의 기준이 명확하던 브릿마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몸이 다치면서도 축구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은 언제 저렇게 열정을 가져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언니의 교통사고, 부모의 방치, 그리고 자신을 잃어갔던 결혼 생활을 찬찬히 돌아보며 말이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BRITT-MARIE WAS HERE)는 계속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죽어가는 도시, 보르도. 언제 죽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의 브릿마리. 그럼에도 우울하지 않은 건 일단 공을 차고 보는 축구에 대한 열정과 보르도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 때문이다.

브릿마리는 보르도의 아이들로부터 열정을 배우고, 보르도의 아이들은 그녀로부터 애정을 배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는 관계를 맺고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 직면할 실존적 용기를 얻는다. 무의미와 죽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방, 바로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죽음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 존재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억해줄 사람들. 내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울어줄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를 이어줄 인연의 끈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이 책에선 보여준다.

p.11 포크, 나이프, 스푼.
그 순서로.
브릿마리는 남을 평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하지만 교양인이라면 커트러리 서랍을 커트러리 서랍에 맞지 않는 이상한 순서로 정리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지 않은가.

p.39 "내가 일을 하려는 이유는 악취로 이웃 주민들을 괴롭히는 건 본받을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아무라도 알아주었으면 하거든요."

p.149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공이 길거리를 굴러오면 발로 찰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같다.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p.382 몇 개의 순간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의 흐름을 놓아버리고 그 속으로 빠져들어 그 순간에 머물 찰나의 기회를 몇 번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격렬하게 살아할 기회를, 열정으로 폭발할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어쩌면 허락된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몇 번 그런 기회를 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의 한계 너머에서 몇 번이나 숨을 쉴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순수한 감정으로 거리낌 없이 우렁차게 환호성을 지를 수 있을까? 얼마나 여러 번 기억상실이라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까?
모든 열정은 어린애 같다. 진부하고 순수하다.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기에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를 뒤집어놓는다. 우리를 휩쓸고 간다. 다른 모든 감정은 이 땅의 소산이지만 열정은 우주에 거한다.
열정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게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요구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인간으로서의 품위. 곤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잘난 척 고개를 젓는 그들의 반응.

p.384 "축구할 땐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아요." ... "어떤 고통?" "모든 고통요."

p.393 어느 나이쯤 되면 인간의 자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p.431 "축구는 인생을 끌고 가는 힘이 있죠. 늘 새로운 경기가 있으니까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니까요. 모든 게 더 좋아질 거라는 꿈도 있고요. 경이로운 스포츠예요.

p.468 인간이라면 누구나 눈을 감으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린 결정을 모두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모두 남을 위한 결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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