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자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최필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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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범죄소설의 여왕 "카린 포숨(Karin Fossum)"이 2009년에 발표한 "발신자(Varsleren/The Caller)"입니다. 이 작품 "발신자"는 시인으로 노르웨이 문학계에 발을 디딘 "카린 포숨"을 세계적인 범죄소설 작가로 만들어준 "콘라드 세예르(Konrad Sejer)" 경감 시리즈 열 번째 작품입니다. 국내에 출간된 다른 "콘라드 세예르(Konrad Sejer)" 시리즈로는 '글래스 키' 상을 수상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돌아보지 마"와 세 번째 작품 "누가 사악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가 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오후, 한 여인이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에 행복해 하며 남편을 위해 저녁을 만듭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은 집 뒷마당에 놓인 유모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함께 맛있는 음식들을 즐깁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딸을 집안으로 데려 오기 위해 뒷마당으로 나간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처음처럼 유모차는 집 뒤뜰에 안전한 상태로 있기에, 담요가 살짝 구겨진 듯 느껴져도 아이가 자다가 뒤척여서 그런 것 이라며 자신을 안심시킵니다. 하지만 유모차로 다가간 그녀는 유모차 안에서 피 범벅이 된 딸 아이을 보고 경악합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엄청난 패닉에 빠진 채 응급실로 달려갑니다.


"아이에겐 아무 이상이 없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카르스텐이 간호사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았다. 자그마한 몸이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아이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걷어냈다. 마르그레테는 일회용 기저귀만을 걸친 채였다.

"아무 이상이 없어요." 간호사가 다시 말했다. "아이 피가 아니었어요.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작은 도시의 평범한 가정집 뒷마당 안, 유모차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피를 뒤집어 쓴 채 발견됩니다. 아이 부모는 아이가 다친 것 인지, 피를 토한 것 인지 패닉에 빠져 어리둥절해 하며 병원 응급실로 달려갑니다. 다행이 아이에겐 아무런 상처가 없으며 피도 아이의 피가 아님이 밝혀집니다. 병원은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고 "콘라드 세예르" 경감과 파트너인 "야코브 스카레"가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병원으로 도착합니다.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는 도시 전체에 퍼지고, "세예르" 경감은 심각한 범죄로 간주하며 수사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도시에는 이상한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집니다. 70세 생일을 보낸 노부인의 부고 소식이 지역신문에 실리고,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남자와 그의 아내가 사는 집에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왔다며 장의사가 찾아오고, 누군가 양 목장의 양들을 다 풀어버린 후 한 마리의 몸에 오렌지색 스프레이를 칠해 놓고, 한 여인은 딸의 가짜 사고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이는 장난질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며 그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 아기 사건은 장난이었을 뿐이잖아요." 한 흑인 아이가 말했다. "그래도 잡히면 감옥에 가야 하나요?"

"그건 장난이 아니야." 세예르가 말했다. "아저씨 말 잘 들어라." 그가 아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가 한 건 절도다. 부모 마음의 평온을 훔쳐간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건 아주 심각한 범죄야. 마음의 평온이 사라지면 인생이 끔찍해진다는 걸 명심해라."


너무나도 악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장난과 그 장난이 발생시키는 파장들을 다룬 범죄소설 "발신자"는 작가 "카린 포숨"의 대표적인 시리즈인 "콘라드 세예르" 경감 시리즈 열 번째 작품입니다. 노르웨이의 작은 도시를 점점 공포로 몰아가는 장난은 얼핏 보면 심각한 범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난의 당사자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후 그 충격이 발생시키는 불안과 슬픔에 잠식당합니다. 뉴스나 신문들에게는 흥미로운 기사거리가 되고 그것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범인은 장난을 멈추지 않습니다. "카린 포숨"의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 "발신자"에서도 범인의 정체는 일치감치 밝혀집니다. 범인의 행동이나 심리상태, 범행수법들은 "세예르"경감과 파트너의 수사 장면과 동시에 그대로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소설 속 형사들만 범인의 정체를 모르지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중요한 정보들을 먼저 알게됩니다. 이런 구성은 작가 "카린 포숨"이 범죄소설을 통해서 항상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을 극대화 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심리탐구입니다. 노련하고 인간적인 주인공 "세예르"경감과 그의 젊은 파트너 "스카레"가 범죄를 수사하며 느끼는 심리적 변화는 물론이고 사이코패스 적 기질이 다분한 범인의 분노와 원망, 애증이 뒤섞인 심리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카린 포숨"이 항상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범죄의 대상이 되거나 그 범죄가 일어난 주위의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입니다. 범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삶은 범죄의 대상이 되기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 "발신자"에서도 장난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심리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정신적, 심리적 충격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후 그들의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누군가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누군가는 슬픔에 무너지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자신 안에 내재 되어있던 분노를 키워갑니다. 모두 장난이라는 범죄의 희생양이 되지만 각자 다른 방법으로 그 후의 삶을 극복해가거나 받아들입니다.

전 세계에 북유럽 스릴러의 열풍에 일조한 작가이긴 하지만 "카린 포숨"은 범죄를 매개로 언제나 지독할 정도로 인간 심리 탐구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들을 기대하고 읽는 사람들에겐 간혹 밋밋하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 "카린 포숨"의 작품들이 주는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힘듭니다. 섬세하고 따뜻하지만 날카로운"카린 포숨"의 시선과 특유의 시적인 문장들이 합해져 창조한 그녀만의 독특한 범죄소설 세계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세계입니다. 피와 뼈 조각들이 난무 하지 않는 일상적인 공포의 세계.


경찰은 이번 사건을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과 경감이라는 직함이 화면 아래서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착찹한 마음으로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했다. 머리는 더 하얘졌고, 얼굴도 몰라보게 수척해져있었다. 광대뼈와 턱은 특히 두드러져 보였고, 짙은 잿빛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다. 안으로부터 서서히 자라나온 그것은 그의 이목구비를 차례로 덮쳐나가고 있었다.

내가 간다. 두개골과 뼈만 앙상히 남은 채로.


"콘라드 세예르"경감 시리즈가 나온지 올해로 딱 20년이 되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세예르"는 사람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하지만 평범한 캐릭터입니다. 오히려 평범하기에 범죄소설 캐릭터로는 보기 드물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에게 느끼는 인간적인 연민을 숨기지 않고, 범죄에 순수하게 분노하는 노련한 형사이지만 딸 부부와 아프리카에서 입양한 손자를 사랑하며, 그들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일찍 부인을 떠나 보냈지만 여전히 결혼서약을 지키며 그녀를 그리워하는 낭만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급히 판단하지 않으며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노련한 수사관입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보편적이기에 "카린 포숨"이 추구하는 일상과 범죄가 섞이는 세계의 중심축이 되는 수사관이자 관찰자로서의 임무에 딱 맞는 캐릭터입니다. 그러고 보면 "루이즈 페니"의 "가마슈"경감과 캐릭터 적으로 흡사한 부분이 꽤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나 피해자들에게 느끼는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부분은 많이 비슷합니다. 시리즈 초창기부터 함께 다니는 젊은 파트너 "야코브 스카레"와의 콤비 플레이도 이 시리즈 팬들이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집에는 폭력도, 취태도 없었다. 하지만 식구들 중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세예르는 몸을 웅크리고 프랑크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들의 고통을 부모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부모의 탓으로 돌려야 할 건 많았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상태와 분노, 의심과 비통함과 결점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버지의 절망과 부재와 무관심에도 고통받았다.


간혹 "카린 포숨"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녀의 뛰어난 심리묘사가 가끔 제 마음 속 밑바닥을 들킨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럴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단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통찰력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카린 포숨"의 작품들 속에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카린 포숨"의 작품들이 계속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발신자"는 훌륭한 범죄소설이자 범죄가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속에 일으킨 파장과 균열들을 다룬 소설입니다. 모호하고 찜찜한 결말 뒤에 숨겨진 충격적인 사실은 깨지기 쉬운 사람들의 심리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느리고 조용하게 비극을 그리는 초창기 북유럽 스릴러의 감성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발신자"가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돌아보지 마"가 원작인 이탈리아 영화 "​Gril By The Lake"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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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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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이언 랜킨(Ian Rankin)"이 1991년에 발표한 "존 리버스(John Rebus)"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숨바꼭질(Hide and Seek)" 입니다. 첫 데뷔작 "The Flood"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 된 "매듭과 십자가"의 처참한 실패이후, 제2의 "존 르 카레"를 꿈꾸며 집필한 스파이소설 "Watchman"과 "Westwind" 역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자"이언 랜킨"은 그나마 평이 좋았던 "매듭과 십자가"의 캐릭터 "존 리버스"를 다시 불러내서 이 작품 "숨바꼭질"을 출간하면서 오늘날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시리즈 중 하나가 된 "존 리버스"시리즈를 이어가게 됩니다.


노숙자들이나 마약중독자들 같은 부류가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는 한 건물에서 한 청년이 죽은 채로 발견됩니다. 현장으로 출동한"존 리버스"경위는 벽에 오각형의 별이 그려져 있는 방 바닥의 다 타버린 두 개의 초 사이에 두 팔을 벌리고 다리를 오므린 상태로 죽어있는 청년의 시체를 보며 묘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직감합니다. 온 몸이 멍투성이인 청년 손에는 마약 한 봉지가 쥐어져 있고 마약 투약에 쓰인듯 한 주사기들이 병에 담겨져 있었지만, 검시 결과로 죽은 청년이 쥐고 있던 순도 높은 마약과는 달리 몸에 투여한 마약에는 다량의 쥐약이 섞여 있었던 것이 밝혀집니다.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용의자들이 모두 포복절도하며 나간다면 내가 심문을 제대로 못한 거겠지."

경사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필뮤어 마약 과다 투여 사건 말이야. 피해자의 이름을 알아냈어. 로니 맥그래스. 스털링 출신이라고 하더군. 그 친구 부모부터 찾아봐야겠어."

경사가 노트에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아들이 에든버러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면 많이 기뻐하겠네요."

"그래." 리버스가 경찰서 정문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있는 빈민촌 필뮤어의 한 건물에서 흑마술이나 악마주의 의식에 바쳐진 제물의 형상으로 죽은 마약중독자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자신의 관할구역이 아니지만 휴가 중인 동료를 대신해서 현장으로 출동한 "존 리버스"경위는 시체에 남겨진 타박상의 흔적과 손에 쥐고 있던 마약봉투 그리고 벽에 그려진 오각형의 별에 주목합니다. 검시 결과로 밝혀진 사인은 쥐약이 섞인 마약 투여였고 최초 신고자인 피해자의 여자친구 "트레이시"의 증언으로 피해자가 죽기 직전 상당히 불안해하며 그녀에게 어딘가에 숨으라고 했으며, 시체가 죽은 후 나중에 오각형 별이 그려진 방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갑자기 총경의 지시로 지역 사업가들이 후원하는 새로운 마약 퇴치 캠페인의 담당자로 정해진 "존 리버스"는 새로운 파트너 "브라이언 홈스"와 함께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 어디에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 마약중독자의 죽음을 파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사건의 실체와 관계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하는 너무 많은 파편들이 사건 주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무슨 사건?"

리버스가 크게 소리 내어 말했다. 무슨 사건? 형사 법원이 이걸 사건으로 인정할 것 같아? 인물이 있고, 악행이 있고, 답이 없는 의문도 있었다. 불법행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사건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사건만 있었어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유형의 무언가만 있었어도.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모든 게 녹아내리는 촛농만큼이나 공허했다. 하지만 촛농은 흔적이라도 남지. 안 그래? 세상에 완전히 사라지는 건 없다. 사라지는 대신 형태와 본질과 의미를 바꾸어놓을 뿐이다. 동심원 속 오각형 별도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버스의 눈에는 그것은 주석으로 된 보안관 배지로만 보였다. 어린 시절 6연발 화약총과 함께 늘 지니고 다녔던 장난감 배지.

남들 눈에는 악 그 자체로 보일지 모르지만.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의 범죄 수사과인 CID(Criminal Investigation Department)의 "존 리버스"경위의 두 번째 이야기인"숨바꼭질"은 첫 번째 이야기인 "매듭과 십자가"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전작에서 보인 약간의 미숙함과 투박함을 지우고 더욱 복잡하고 흥미로운 플롯의 작품입니다. 조금 더 전통적인 범죄소설, 형사소설에 가까워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여전히 최악의 빈민촌인 필뮤어의 버려진 한 건물에서 마약중독자 청년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존 리버스" 경위가 수사를 진행합니다.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더욱 발전하는 에든버러의 치부 같은 곳에서 쓸모없는 마약중독자의 죽음은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리버스" 역시 총경과 도시 사업가들이 주도하기로 한 마약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수사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수사를 하는 "리버스"도 살인이라고 보기엔 확실한 정황과 증거가 부족해서 골머리를 앓지만 묘한 상황들이 이 죽음을 중심으로 벌어지면서 "리버스"는 에든버러의 빈민가의 죽음에 이끌려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에든버러의 중심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에든버러가 쓰고 있는 화려한 가면들 중 하나를 벗겨내어 추악한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관광도시였지만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 부동산 시장은 요동치기 시작하고 그에 맞물려 몰려온 재개발 열풍으로 겉은 점점 현대적으로 화려해지지만 속은 더욱 썩어 들어가던 80, 90년대의 에든버러. 시대가 흐를수록 도시란 더 빨리 변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도시의 화려한 부분은 더욱 빛나고 어두운 부분은 더 어두워지는게 보편적인데 "이언 랜킨"에게는 에든버러가 자신이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에 지냈던 런던처럼 변할까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언 랜킨"은 이번 작품 "숨바꼭질"에서 에든버러에 대한 자신의 애증을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에든버러와 범죄, 악을 표현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다시 끌어들여 중요한 소재로 사용합니다. 비유적으로 내용과 문장에 녹여낸 부분 이외에도 소설 속 문장, 캐릭터 이름들까지 차용하면서 인간과 도시의 이중성을 표현하는데 온힘을 쏟습니다. 심지어 이 작품의 가제는 "Hyde And Seek" 였습니다.


존 리버스 경위.

진급 한 번 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래도 그동안 참고 버틴 보람이 있긴 하네.

솔직히 리안과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어젯밤 파티에서 그런 꼴을 보였으니. 섹스도 형편없었고. 이번 교제도 실패였다. 리안과 나란히 누워 있을 때 그는 깨달았다. 그녀도 질 템플러 경위의 눈을 가졌다는 걸. 대리 파트너라도 찾아봐야 하나? 하긴,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늙긴 했지.

"넌 너무 늙었어, 존." 그가 중얼거렸다.


보통 이런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의 숨겨진 아픈 과거를 사건과 연결 지어 시리즈 중간 작품의 내용으로 써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작가 "이언 랜킨"은 범죄소설 시리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첫 작품 "매듭과 십자가"에서 주인공 "존 리버스"의 아픈 과거사를 탈탈 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번 작품에서는 전작 보다 더욱 사건과 수사에 집중 되어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물론 "존 리버스"라는 캐릭터도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에 더 충실하며 캐릭터 자체의 매력도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경위로 진급했지만 여전히 귀찮은 일에는 나서고 싶어 하지 않고, 기선제압을 위해 기 싸움을 했던 부하 직원이 애인과 같이 있는 곳에 그가 나타나자 모른 척 했을 때는 삐지는 소심함도 보여줍니다. 자학적 개그 역시 한 단계 더 발전했고, 자신을 떠나버린 전 애인의 남자친구가 잘 못 되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박장대소하며 좋아하는 찌질함도 있습니다. 딱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보았던 전형적인 영국계 중년남자입니다. 단지 직업만 형사일 뿐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소시민.


리버스는 불편했다. 소박한 지방 대학교에서부터 명문 에든버러 대학까지, 모든 고등교육기관들을 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든 말과 행동이 심판과 해석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똑똑한 사람이 더 똑똑해지려 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글을 쓰는 재능은 있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확고해서 그 이야기를 쓰기위해 범죄소설의 형식에 무리하게 맞추느라 "매듭과 십자가"에서 약간의 미숙함을 보여줬던 "이언 랜킨"은 이 작품 "숨바꼭질"에서는 범죄소설의 틀을 확고하게 다지고 나서, 이것을 기본바탕으로 범죄현상과 사건과 수사를 제대로 사용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많은 복선과 단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리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미스터리적 요소에 많은 힘을 쓰고, 경찰 수사과정과 경찰 조직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들도 늘어나 독자들의 흥미를 더욱 유발시킵니다.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와 피식 거리게 만드는 유머도 전작에서 보다 훨씬 세련되어 졌고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센스있는 대사들도 상당히 늘어났습니다. 확실히 이 작품 "숨바꼭질"이 전작 보다 많은 발전을 보인 후속작이며, 아직까지도 전 세계적인 인기를 유지하는 "존 리버스"시리즈의 큰 도약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항상 모든 걸 숨기려고 하는 거죠?

여기서도 그 단어가 등장했다. 숨기려고(hide). 동사, 행동, 그리고 명사, 장소, 그리고 인물. 얼굴은 없지만 리버스는 그를 깊이 알아가고 있었다. 적은 교활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하지만 존 리버스는 그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다. 로니와 커루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작가들은 모두가 글을 잘 쓴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쪽 작가들의 책을 펼칠 때면 항상 내용이 실망스러워도 글 읽는 맛은 끝내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 제 생각은 단 한번도 빗겨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런 편견이 더 확고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이언 랜킨"는 역시도 상당히 글을 잘 쓰는 작가입니다. 이건 전작인 "매듭과 십자가"에서도 확인했던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 "숨바꼭질"에서는 전작에서 살짝 묻어난 미숙함과 신인 작가가 의례 숨기지 못하는 과도한 욕심이 사라지고 재미와 속도감을 더 더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Tooth and Nail"에서부터는 "이언 랜킨"의 감춰져 있었던 범죄소설가로서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운 좋으면 이 작품도 연말에 읽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전에 "존 리버스"시리즈의 역사적인 시작점인 "매듭과 십자가"와 이 작품 "숨바꼭질"을 읽고 워밍업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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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매드 픽션 클럽
도널드 레이 폴록 지음, 최필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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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작가 "도널드 레이 폴록(Donald Ray Pollock)"이 2011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The Devil All the Time)"입니다. 30여년을 오하이오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다 57세라는 늦은 나이로 작가가 된 "도널드 레이 폴록"은 이 작품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추리 문학상을 수상하고 2012년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 Top 10에 선정되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유럽에서 히트를 하며 여러 추리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추리소설을 생각하시고 읽으신다면 상당히 실망하실 겁니다. 이 책에 항상 딸려오는 수식어인 '핏빛 고딕 누아르'처럼 인간의 악행을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써낸 르포 같은 소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윌러드 러셀"은 여전히 일본군이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십자가에 매달아 놓아 파리에 뒤덮혀 있던 미군 병사를 발견한 장면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에마"는 자신이 거두어 드린 가엾은 "헬렌"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 시키겠다고 하느님과 약속했지만 "윌러드"는 고향에 오늘 길에 들렀던 오하이오 미드의 작은 식당 종업원 "샬럿"과 결혼하고 고향을 떠나 미드에 자리를 잡고 가정을 꾸립니다. 아들 "아빈"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샬럿"이 암에 걸리고 "윌러드"는 아들 "아빈"과 함께 아내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만의 기도용 통나무에서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샬럿"은 점점 암에 의해 죽어가고 "윌러드"는 죽은 동물들의 시체를 주어와 통나무 주위에 피를 뿌리거나 십자가에 거는 방식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제물에 점점 집착하는 "윌러드"는 길거리의 개를 죽이거나 살아있는 양을 사서 제물로 바치다가 결국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제물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게 바로 죽음이야." 어느 날 저녁, 윌러드가 음울하게 말했다. 그와 아빈은 피에 절고 악취 풍기는 통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네 엄마가 이렇게 되길 바라니?"

"아뇨." 소년이 말했다.

윌러드가 주먹으로 통나무를 탁 내리쳤다. "젠장 그럼 기도를 하란 말이야!"


전쟁이 끝난 후, 웨스트 버지니아로 돌아온 "윌러드"는 한눈에 반한 "샬럿"과 결혼해서 오하이오 미드로 떠나 "아빈"을 낳고 생활합니다. "에마"는 아들 "윌러드"와 자신이 돌보던 "헬렌"을 결혼시키겠다고 한 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아들은 웨이트리스와 결혼해서 미드로 떠나고, "헬렌"마저도 떠돌이 전도사와 결혼을 합니다. 어느 날, 전도사 "로이"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생명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증명하려 아내 "헬렌"를 죽여버리고, 딸 "레노라"를 "에마"에게 맡긴 채 사촌과 도망을 갑니다. "샬럿"을 살리기 위해 제물을 바치며 기도에 집착하던 "윌러드"도 그녀가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혼자 남은 "아빈"은 할머니 "에마"가 있는 웨스트 버지니아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냅니다. 한편, 오하이오 미드에선 보안관의 여동생 "샌디"와 그녀의 남편 "칼"이 여름휴가 기간에 히치하이킹을 하는 남자들을 골라 살해하며 차를 타고 떠돌아 다닙니다.

이 작품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힘들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적인 캐릭터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아빈"이 중심 캐릭터에 가깝기는 합니다.)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남자, 신과 소통한다고 믿으며 아내를 죽이는 전도사와 그의 사촌, 뇌물을 받고 사람을 죽여주는 보안관, 어린 소녀들을 꼬셔내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죄는 기도로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목사. 식당에서 일하며 짬짬이 몸도 팔아 남편을 먹여 살리는 아내와 아내가 번 돈으로 생활하는 남편. 이 부부는 함께 도로에서 모델이라고 부르는 희생자들을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마입니다. 소설 속의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가 괴물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지옥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건 신시아가 더 이상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과의 동침을 지옥에 떨어질 엄청난 죄악으로 여길 줄 아는 여자들을 원했다. 선과 악, 순수와 욕정의 숙명적인 싸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들은 그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어린 여자를 꼬셔내 범할 때마다 프레스턴은 강한 죄의식을 느꼈다. 단 몇 분 동안이나마 양심의 가책에 빠져 허우적거릴 줄 알았다. 그런 감정은 그에게 아직 천국에 오를 기회가 남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아무리 타락하고 잔혹했어도 숨을 거두기 전에만 그의 끔찍한 오입질을 회개하면 주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그는 확신했다. 중요한건 타이밍이었다. 그런 생각이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1940년대부터 60년대의 오하이오의 작은 마을 미드와 웨스트 버지니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폭력적이고 역겨우며 인간에 대한 연민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게 만드는 지독한 소설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정신적으로 괴물들입니다. 욕망과 집착, 맹신 그리고 무지(無知)로 인해서 탄생된 괴물들입니다. 권선징악 따위는 이 작품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모두가 점점 더 타락하며 스스로를 파멸시킬 뿐입니다. 아름답거나 일상적인 풍경 묘사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죽은 동물들의 시체와 공장 굴뚝이 뿜어내는 연기가 대신 차지하고 있으며 감탄할 만한 화려한 수사를 배제하고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는 건조하고 냉정한 문체는 소설의 분위기를 더욱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문학적으로 아주 훌륭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역겨운 뒷맛에 괴로워하며 감탄한 작품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런 작품이 탄생한 배경엔 작가 "도널드 레이 폴록"의 인생이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32년간 오하이오의 제지공장에서 노동자로, 트럭 운전수로 살았던 그는 약물중독과 알코올중독으로 재활치료를 여러 번 받은 후,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합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받고 발표한 단편집 "Knockemstiff"로 호평을 받은 뒤 3년 만에 발표한 이 장편소설로 '진정한 미국 고딕 문학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 Top 10에 선정됩니다. 특히나 유럽에서 극찬을 받았는데 프랑스와 독일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프랑스판 '롤링 스톤즈'와 프랑스 잡지 'LIRE', 네델란드 신문 'Het Parool'가 뽑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잠깐. 맙소사, 설마 전도사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응?"

"넌 전도사가 아니야. 인간쓰레기지."

티가딘이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반바지 차림으로 싸돌아다니던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보인 눈물이었다. "먼저 기도부터 할 수 있게 해줘." 그가 흐느끼며 두 손을 모았다.

"기도는 내가 대신 해줬어." 아빈이 말했다. "네놈을 지옥으로 떨어뜨려달라고 빌었지."


쉽사리 추천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불쾌하지만 영상이 아닌 활자이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감안하고 읽으셔야할 작품입니다. 작가는 악마적인 캐릭터들에게도 나름대로 약간의 인간미를 부여하긴 합니다만 단지 그뿐입니다. 특히나 작가는 소설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습니다. 소설 속 목사나 전도사들은 맹목적인 신앙심을 담보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이며 이용하면서도 당당합니다. 이용당하는 신도들 역시 무지(無知)도 죄라는 듯이 미련하게 묘사하며 독자가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 속에 어떤 등장인물에게도 감정이입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작가 "도널드 레이 폴록"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는 멍청하거나 악한 인간들만 있을 뿐 신 따위는 존재 하지 않는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하는 걸 보니 훌륭한 기독교인 같네요." 남자가 말했다.

샌디가 피식 웃었지만 칼은 못 들은 척했다. "뭐 그런 셈이죠. 하지만 예전처럼 독실하진 않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하게 사는 건 쉽지 않죠." 그가 말했다. "악마가 늘 곁에 있으니까."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에 대해 쓰면서 계속 잔인하다. 폭력적이다. 불쾌하다. 역겹다. 이런 말들만 너무 많이 한 것 같은데, 종전 이후 미국의 외진 마을의 현실과 지금보다는 더 본능에 충실하게 살던 시대의 인간들의 광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훌륭한 작품입니다. 정말로 인간이란 동물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 본 '아메리카 고딕 누아르'의 걸작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사실 도덕이니 양심이니 이런 것만 믿고 살기에는 선하게 산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이니, 인간은 아직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라는 악마가 늘 곁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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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아티스트
스티브 해밀턴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브 해밀턴(Steve Hamilton)"이 2010년에 발표한 "록 아티스트(The Lock Artist)"입니다. 1998년에 발표한 데뷔작이자 "알렉스 맥나이트" 시리즈 첫 작품인 "A Cold Day in Paradise"로 '에드거 상' 최우수 신인상, '세이머스 상'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며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스티브 해밀턴"은 자신의 두 번째 스탠드언론인 이 작품 "록 아티스트"로 '에드거 상' 최우수 작품상, '배리 상' 최우수 작품상, 영국의 'CWA 스틸 대거 상', 전미 도서관연합(ALA) '알렉스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보다 몇 년 전에 번역 출간된 일본에서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여러 나라에서 평단과 독자들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았습니다.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비극적인 사고의 생존자였지만 지금은 감옥에 갇혀있는 스물여덟 살의 청년 "마이클". 그는 석방이 되어서 다시 사회로 나갈 그날을 조용히 기다리며, 사고의 충격으로 말을 하지 않기 시작한 여덟 살 때부터 자신의 저주 받은 재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죄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될 때까지의 이야기와 FBI에 쫓기며 여러 범죄를 저지르다가 자신이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마지막 범죄를 저질러 잡히게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고백합니다. 비극에서 살아남은 소년으로서의 삶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자신의 저주받은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어떻게 범죄의 길로 빠지게 되어 어떤 이유로 잡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스스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자, 정신 바짝 차리길.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이야기, 한때 '기적의 소년'이었던 내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까. '밀포드의 벙어리', '희대의 총아', '어린 유령', '새파랗게 어린 아이', '금고털이', '자물쇠 예술가'. 이것들이 전부 다 나를 따라다녔던 이름이다.

하지만 그냥 마이클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1990년 여름, 전국을 술렁이게 했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는 여덟 살짜리 남자 아이 "마이클"뿐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사건 이후 말을 하지 않게 된 "마이클"은 주류점을 운영하는 삼촌과 같이 살면서 정신과 치료도 받지만, 대부분 외롭고 우울한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농아학교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다시 일반학교로 전학가게 된 "마이클"은 우연히 그림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깨달으며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입니다. 하지만 "마이클"이 지닌 재능은 미술뿐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가지고 놀게 된 낡은 자물쇠로 인해 "마이클"은 열쇠를 따는 재능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재능들 덕분에 "마이클"은 여러 일들을 겪으며 첫 사랑 "어밀리아"를 만나게 되지만, 범죄자들 역시 말을 하지 않는 소년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재능을 알아보게 됩니다. 결국 금고털이의 귀재인 '고스트'의 제자가 되어 금고를 여는 기술을 전수 받은 "마이클"은 열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어떤 금고라도 열어주는 전문 금고털이가 됩니다.


이때부터가 어려웠다. 불가능에 가깝다 못해 절대 완벽을 기대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조금도 모난 곳 없이 완벽하게 둥근 휠은 있을 수 없고, 휠 두 개의 크기가 한 치의 틀림없이 똑같을 수도 없기 때문에 각 휠의 홈이 지나갈 때 손끝에 닿는 느낌이 제각각 다르다. 아무리 잘 만든 금고라도 예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홈을 지나쳐 접촉지점으로 돌아갈 때마다 느낌이 조금씩 달라진다. 휠의 홈이 접촉지점의 숫자 근처를 지날 때 접촉지점의 범위가 좁아진다.

싸구려 금고라면? 평평한 도로에 움푹 팬 구멍처럼 선명하게 차이가 느껴지리라. 잘 만든 금고는 어떨까? 이 집주인처럼 드레스 룸에 설치해놓은 우수하고 값비싼 금고라면 어떨까? 손끝에 전해지는 차이가 극히 미미하다. 미미하다는 말을 갖다 붙이지도 못할 정도다.


비극적인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말을 하지 않는 소년이 특별한 두가지 재능을 발견하지만 잔인한 세상은 어떤 자물쇠라도 딸 수 있는 재능만을 원하고, 그로 인해 소년은 운명적으로 금고털이가 되어서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 "록 아티스트"는 범죄 스릴러인 동시에 슬픈 운명을 지닌 청년의 가슴 아픈 성장담이기도 합니다. 끔찍한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년 "마이클". 여러 전문가가 뭐라고 진단을 하건 결국 자기 스스로 말을 하지 않기로 한 "마이클"은 자신이 목격한 그 사건에 대한 모든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기억 한 곳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를 향한 동정의 시선들은 사라지고, 그 대신에 말을 하지 않는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던 "마이클"은 우연히 자신이 그림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미대 진학을 상상하며 조금씩 안정된 학교생활을 하던 "마이클"은 어느 날,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아무도 알면 안 되는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을 과시합니다. 바로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재능. 이 단 한번의 실수로 "마이클"의 인생은 다시 한번 정상적인 선로를 이탈합니다. 물론 그 실수로 인해 자신의 일생의 사랑 "어밀리아"를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만 그녀와의 사랑은 "마이클"로 하여금 전문 금고털이가 되는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범죄자의 길을 선택한 "마이클"은 점점 빛을 발하는 자신의 자물쇠를 따는 천부적인 재능 덕분에 단시간 내에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 더 깊은 범죄세계로 들어갑니다.

이미 10년 동안 감옥에 갇힌 "마이클"의 이야기로 시작하며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상하는 구조로 소설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 회상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기적의 소년이라 불리우던 여덟 살 때부터 금고털이범이 되는 열일곱 살 때까지의 이야기와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러 범죄조직들에게 호출을 받아서 금고를 열어주며 범죄생활을 하다 잡히는 순간까지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회상합니다. 끔찍한 기억 속의 자신을 어두운 곳에 스스로 가두어 놓고 말을 하지 않는 소년 "마이클"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그림이라는 재능을 발견하고 다시 정상적인 인생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지만, 모든 자물쇠를 딸 수 있는 또 다른 능력때문에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와 최고의 금고털이가 되어 위험천만한 범죄행각을 벌이는 열일곱 때 이야기를 작가 "스티브 해밀턴"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능수능란하게 풀어냅니다. 그와 동시에 "마이클"이 어릴적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금씩 힌트를 주면서,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어릴 적 사건의 어두운 그림자와 누군가가 죽기 전에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범죄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이클"이 벌이는 마지막 한탕과 과거 사건의 전모를 교묘히 교차시켜 스릴 넘치는 범죄소설에서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늦게나마 다시 세상과 소통하려는 청년의 성장소설로 완성됩니다.


언어치료사, 카운슬러, 정신과 의사......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나는 몽정의 대상과도 같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헝클어진 머리에 커다란 갈색 눈의 아이, 슬픔에 젖어 말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였다. 죽음의 손길을 용케 피했던 운명의 그날 이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기적의 소년이었다. 의사나 언어치료사, 카운슬러, 정신과 의사 할 것 없이 모두가 적절한 치료와 적절한 지도로, 적절한 공감과 적절한 격려로 상처 입은 내 마음을 여는 마법의 열쇠를 찾아내서, 자신들의 팔에 안겨 엉엉 우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꿈이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 하지만 장담컨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도어락, 자물쇠, 번호열쇠, 최첨단 금고 등 어떠한 것도 열수 있는 능력은 정말 예술로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능력 중 하나입니다. 물론 불법이고 범죄이지만 자물쇠나 금고가 열리기까지의 과정과 열리는 순간에는 모두가 숨죽이며 주목하게 되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작가 "스티브 해밀턴"는 실제 유능한 금고털이에게 도움을 받아서 정말 생생하고 스릴 넘치는 금고털이 이야기를 써냈습니다. 거기다 스릴 넘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비극적 운명의 소년을 설정해 그 소년의 인생을 이야기에 녹여 놓아 단순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가 아닌 감동과 여운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탄탄한 플롯과 잔인한 장면 없이도 탁월하게 서스펜스를 유지시키는 훌륭한 스릴러가 이 작품 "록 아티스트"의 외형이라면 그 속은 풋풋하고 매력적인 십대의 로맨스와 가슴 아픈 성장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끔찍한 기억의 금고 안에 여덟 살 당시의 자신을 가둬놓은 천재 금고털이의 이야기를 위해 작가는 작품 속 작은 소재 하나하나, 에피소드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구성하고 배치해 놓아 마지막에 작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놓습니다. 아주 훌륭하고 멋진 그림을.


그때 나는 그 정도밖에 몰랐다.

나쁜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고 나면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작가 "스티브 해밀턴"은 국내에는 생소한 작가이지만 미국뿐 아니라 영국이나 유럽, 일본 등에는 꽤 알려진 베스트셀러 범죄소설 작가입니다. "리 차일드"는 "스티브 해밀턴"이 쓰는 건 무엇이든 읽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심장 근처에 총알이 박혀있는 디트로이트 경찰 출신의 사립탐정 "알렉스 맥나이트"시리즈가 "스티브 해밀턴"의 대표적인 작품들인데, 시리즈를 쓰는 사이 사이에 발표한 두 권의 스탠드언론 중 이 작품 "록 아티스트"는 '에드거 상'과 '배리 상'과 '스틸 대거' 등을 거머쥐며 2010년 최고의 범죄소설로 등극했습니다. 자신의 데뷔작으로 '에드거' 신인상을 이미 수상한 "스티브 해밀턴"은 역사상 두 번째로 '에드거' 신인상과 최우수 작품상을 모두 탄 작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에드거' 신인상의 저주라고도 불릴 만큼 '에드거 상' 신인상을 탄 작가가 최우수 작품상을 타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올해 9월, 새로운 시리즈의 첫 작품 "The Second Life of Nick Mason"을 출간하는데 이미 Liongate에 영화 판권이 팔렸을 정도로 작품이 훌륭하다고 합니다.


"여자를 만지듯이 금고를 다뤄야 해. 그 점을 잊지 마. 알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퍼즐이 바로 여자의 심장이야, 젊은 친구. 남자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거리지." 고스트는 천천히 의자를 굴려 금고 하나로 다가갔다.

"이건 여자야. 이쪽으로 가까이 와봐." 고스트가 금고 문에 왼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나는 원 안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갔다.

"이게 여자의 심장이야." 고스트가 다이얼에 오른손을 올렸다.


이 작품 "록 아티스트"가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많은 분들이 그냥 넘기시기엔 너무나 아까운 작품입니다. 올해 꼭 읽어야할 범죄 소설 중 한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훌륭한 스릴러입니다. 금고털이라는 생소하지만 매력적인 소재에 긴장감 넘치는 스릴, 재미, 감동과 여운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 "록 아티스트"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지만 아직까지도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감옥에서 나온 "마이클"이 오랜만에 "어밀리아"를 만나서 이십 여년 만에 처음으로 어떤 말을 하게 될 지가 너무도 궁금합니다. 정말로 감동적인 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물쇠를 딸 수 있는 재능이 아닌 기억을 불러들여 정확히 묘사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또 다른 재능으로 "마이클"이 새로운 인생을 살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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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 출신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요 네스뵈(Jo Nesbø)"가 2014년에 발표한 "아들(Sønnen/The Son)"입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언론으로는 2008년에 출간된 "헤드헌터" 이후로 두 번째 작품인 "아들"은 미국에서 출간된 직후 배우"채닝 테이텀"이 소설의 영화 판권을 사기위해 직접 "요 네스뵈"를 만나러 노르웨이로 간 사실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큰 이변이 없다면 아마 "채닝 테이텀"이 이 작품 "아들"의 주인공 "소니 로프투스"를 연기할 것 같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위치한 스타텐 교도소의 죄수들은 신비롭고 이상한 죄수에게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교도소 내에서 적이나 친구도 없이 조용히 홀로 지내며 다른 죄수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그 죄수의 이름은 "소니 로프투스". 그는 한때 촉망받는 레스링 선수였고, 두 사람을 살해한 범죄자이자 자살한 부패경찰의 아들입니다. 언제부터, 누가 시작한 것인지 모르고 "소니"의 축복이 정말로 영적인 어떤 힘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게 받던 축복을 받아서 나쁠 것이 없기에 스타텐의 죄수들은 관례처럼 그에게 고해성사 비슷한 고백을 하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죄수가 "소니"의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고백합니다.


요하네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곧 있으면 감방 문이 잠길 것이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제 말할 차례였다. 말하기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하고 싶은 말. 가슴에 너무 오래 담아둬서 뿌리를 내리지나 않았을까 두려운 말.

"네 아버지는 자살한 게 아니다, 소니."

나왔다. 마침내 말했다.


15살 때 까지 노르웨이 국가대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레스링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자신의 부정부패를 고백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이후 헤로인 중독이 되어 두 명을 죽인 죄로 스타텐 교도소에서 12년 동안 복역 중인 "소니 로프투스""소니"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에 대한 죄도 대신 자백을 하고 그 대가로 헤로인을 공급받을 정도로 이미 인생을 포기한 헤로인 중독자이기도 합니다. 서른처럼 보이지 않는 소년 같은 외모, 신비한 눈동자, 조용히 잘 들어주는 그의 태도 등 어떤 이유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죄수들은 "소니"를 찾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은 그에게 다른 누구에게도 말 못한 진실들을 고백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한 죄수가 "소니"에게 고백을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패경찰이 아니라 살해당한 뒤 자살로 꾸며졌다고. 얼마 뒤 "소니"는 스타텐 교도소를 유유히 탈옥을 하고, 오슬로를 뒤흔드는 핏빛 응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소니"의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시몬 케파스"경정이 "소니"의 뒤를 쫓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뛰어내려야 해요. 왜냐하면 아들은 늘 자신을 아버지와 비교하고, 딸은 어머니와 비교하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요?"

"모든 아들은 언젠가 자기가 아버지처럼 될 거라고 믿죠. 안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봤을 때 그렇게 실망하는 거예요. 자신의 결함, 미래의 패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가끔은 그 충격이 너무도 커서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해버리죠. 당신은 어땠나요?"


작가 "요 네스뵈"의 두 번째 스탠드언론인 "아들"은 아버지의 불명예스러운 자살로 인해 인생이 망가진 남자가 아버지의 죽음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를 하는 단순한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러나 잔인한 핏빛 복수 이외에도 희생, 속죄, 구원, 희망 등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 소설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레스링을 배우고 아버지 같은 경찰이 되고 싶었던 소년 "소니 로프투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아버지의 자살로 무너집니다.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이 된 어머니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 역시 헤로인 중독자가 되어버린 "소니"는 미성년자인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헤로인을 공짜로 얻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죄들를 자백합니다. 그러다 18살이 되던 해에 두 건의 살인사건까지 대신 인정하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12년을 보냅니다. 서른이 되어도 소년같은 신비한 외모의 "소니"는 교도소 안에서 신성하고 상징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한 죄수의 고백으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 탈옥을 하는 "소니"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들에게 응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몬 케파스" 경감이 "소니"를 쫓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소니"의 아버지 "아브 로프투스"와 친구였던 그는 도박중독으로 나락에 떨어졌다가 지금의 부인 "엘세"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시몬"에게 죽은 절친한 친구의 아들 "소니"의 탈옥과 일련의 의심스러운 살인사건에 얽혀지지만 이 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 꼬여버린 실타래가 이미 연결시켜 놓은 필연입니다.

탈옥한 "소니"의 복수는 아버지의 죽음에 연관된 사람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대신 누명을 써서 제대로 죗값을 치루지 않은 사람들도 복수의 대상이 됩니다. 마치 그들을 죽여야만 자신의 죄가 온전히 사라진다는 듯이. "소니"의 응징은 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복수를 다루는 스릴러에서는 남자 주인공인 경우 불 같이 뜨거운 느낌을, 여자가 주인공인 경우 얼음 처럼 차갑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들"의 주인공 "소니"의 복수는 뜨거움과 서늘함의 경계에 걸쳐있습니다. 이건 어쩌면 작가 "요 네스뵈"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속의 "소니"는 언제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관점에서 묘사됩니다. 직접적인 "소니"의 심리 묘사나 생각, 행동은 될 수 있으면 배재한 채 제 3자의 시선과 느낌으로만 보여줍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쉽사리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고 다음 행동 조차 예측하기 힘듭니다. 물론 나중에서야 결국 "소니"를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것은 "소니" 때문이라기 보다 죽어 마땅한 악랄한 악당들에 대한 혐오의 힘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거기에 가끔 소년으로 지칭될 정도로 서른 처럼 보이지 않는 앳된 외모와 예의 바르며 상냥한 태도, 신비한 아우라를 내뿜는 "소니"의 외모와 행동 때문에 그는 복수의 화신 이라기 보다 천국에서 떨어진 천사 같은 모습으로 우리들의 뇌리에 남습니다. "요 네스뵈"가 그리는 타락천사. 정확히 제가 느낀 주인공 "소니"의 모습입니다. 온화한 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악인을 잔인하게 처단하는 천사.


그러니까 소년은 뭘 복수하고 싶은 걸까? 뭘 이루고 싶은 걸까?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는 세상을 구원하는 것? 사실은 우리가 필요로 하지만 결코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세상의 모든 악을 말살시키는 것? 하지만 범죄 없는 세상, 바보들의 멍청한 반란도 없고 새로운 움직임과 변화를 야기하는 비합리적인 사람들이 없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살 수 없다. 더 나은 혹은 더 나쁜 세상에 대한 기대 없이는. 이런 지독한 불안감, 산소 결핍으로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상어처럼.

 

지금까지 작가 "요 네스뵈"는 단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기 캐릭터 "해리 홀레"가 없이도 여전히 멋진 범죄소설을 쓸 수 있다고 스스로 증명합니다. 오히려 "헤드헌터"나 "아들"처럼 "해리 홀레"시리즈가 아닐 때 더 거칠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복수극처럼 느껴 질 수 있지만 이 작품엔 정말 많은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작품 곳곳에 뿌려져 있는 수많은 은유들과 비유들은 복수 이외에 원죄와 속죄, 응징과 구원 등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냐?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자제하고 싶지만 속된말로 쩝니다. 독자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만 딱 보여주며 조금씩 긴장감을 끌어 올려 한순간에 폭발 시키는 "요 네스뵈"의 특기는 여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던 사족들이 점점 한 곳에 모이며 완벽한 그림을 완성시키는 결말 또한 완벽에 가깝습니다. 조금 잔인하고 우연에 의한 작위적 부분 한두군데를 제외하고는 단점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작품 "아들"도 일류 작가가 쓴 일류 스릴러라고 확신합니다.


"가끔씩 우리는 부모님의 실체를 안다고 착각하죠. 어쩌면 그분들은 우리 생각만큼 약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런 오해를 받는 걸 수도 있죠. 사실 그분들은 강한 사람들일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오명을 뒤집어쓰고, 불명예를 감수하고, 남의 죄를 뒤집어쓴 걸 수도 있죠.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강하다면 아마 우리도 그럴 거예요."


세상의 아들들의 대부분은 아버지를 너무 존경해서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까지 닮고 싶을 정도로 아버지처럼 되고싶어 하거나 반대로 너무나 증오하고 경멸해서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란 존재는 아들들에게 있어서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마주해야할 커다란 장벽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남자가 아버지의 자살 이후로 스스로 성장을 멈춘 채 소년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뛰쳐나와 뒤늦게 어른이 될 준비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 "소니"는 12년 만에 다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자신의 나이에 맞게 어른이 되기 위해 사랑을 시작하고 언젠가 누구의 아들이 아닌 누구의 아버지가 될 겁니다. 그리고 '아들의 역할이란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라는 소설 속의 한 문장처럼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을 뛰어넘어 더 높이 날기를 바라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사악하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잘못된 선택, 집단에 해가 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도덕성이란 하늘에서 정해줬거나 영원한 개념이 아니다. 그저 집단에 이로운 규율일 뿐이다. 그리고 그 규율과 용인된 행동 패턴을 따르지 못하는 자들은 끝까지 순응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는 환상이다. 우리가 그렇듯 범법자들도 자기들이 할 일을 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번식하여 부정적인 행동 유전자로 집단에 악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작가 "요 네스뵈"는 정말 타고난 작가인 것 같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사람을 빨아들여 쉴새없이 긴장감을 안겨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속력으로 달립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무리 소설이라도 법을 무시하는 이런 개인의 복수극에 거부감을 느끼실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엄청난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감동을 마주하게 되실 겁니다.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극과 극의 선과 악 캐릭터들 사이의 간극은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주변캐릭터들로 중화되고, 잔인함 역시도 마지막 감동으로 어느 정도 희석됩니다. 정말 멋진 범죄소설입니다. 만일 "채닝 테이텀"처럼 제가 능력만 있다면 가장 먼저 영화 판권을 사고 싶을 정도로. 영화판이라는게 우리나라나 허리우드나 마찬가지라 판권이 팔렸다고 전부 영화화 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꼭 스크린으로 만나보고 싶습니다. 평균 이상의 연출 능력이 있는 감독이라면 그동안 보아오던 흔하디 흔한 복수극으로 만들어 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원작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들" 북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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