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이언 랜킨(Ian Rankin)"이 1991년에 발표한 "존 리버스(John Rebus)"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숨바꼭질(Hide and Seek)" 입니다. 첫 데뷔작 "The Flood"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 된 "매듭과 십자가"의 처참한 실패이후, 제2의 "존 르 카레"를 꿈꾸며 집필한 스파이소설 "Watchman"과 "Westwind" 역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자"이언 랜킨"은 그나마 평이 좋았던 "매듭과 십자가"의 캐릭터 "존 리버스"를 다시 불러내서 이 작품 "숨바꼭질"을 출간하면서 오늘날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시리즈 중 하나가 된 "존 리버스"시리즈를 이어가게 됩니다.


노숙자들이나 마약중독자들 같은 부류가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는 한 건물에서 한 청년이 죽은 채로 발견됩니다. 현장으로 출동한"존 리버스"경위는 벽에 오각형의 별이 그려져 있는 방 바닥의 다 타버린 두 개의 초 사이에 두 팔을 벌리고 다리를 오므린 상태로 죽어있는 청년의 시체를 보며 묘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직감합니다. 온 몸이 멍투성이인 청년 손에는 마약 한 봉지가 쥐어져 있고 마약 투약에 쓰인듯 한 주사기들이 병에 담겨져 있었지만, 검시 결과로 죽은 청년이 쥐고 있던 순도 높은 마약과는 달리 몸에 투여한 마약에는 다량의 쥐약이 섞여 있었던 것이 밝혀집니다.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용의자들이 모두 포복절도하며 나간다면 내가 심문을 제대로 못한 거겠지."

경사가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필뮤어 마약 과다 투여 사건 말이야. 피해자의 이름을 알아냈어. 로니 맥그래스. 스털링 출신이라고 하더군. 그 친구 부모부터 찾아봐야겠어."

경사가 노트에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아들이 에든버러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면 많이 기뻐하겠네요."

"그래." 리버스가 경찰서 정문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있는 빈민촌 필뮤어의 한 건물에서 흑마술이나 악마주의 의식에 바쳐진 제물의 형상으로 죽은 마약중독자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자신의 관할구역이 아니지만 휴가 중인 동료를 대신해서 현장으로 출동한 "존 리버스"경위는 시체에 남겨진 타박상의 흔적과 손에 쥐고 있던 마약봉투 그리고 벽에 그려진 오각형의 별에 주목합니다. 검시 결과로 밝혀진 사인은 쥐약이 섞인 마약 투여였고 최초 신고자인 피해자의 여자친구 "트레이시"의 증언으로 피해자가 죽기 직전 상당히 불안해하며 그녀에게 어딘가에 숨으라고 했으며, 시체가 죽은 후 나중에 오각형 별이 그려진 방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갑자기 총경의 지시로 지역 사업가들이 후원하는 새로운 마약 퇴치 캠페인의 담당자로 정해진 "존 리버스"는 새로운 파트너 "브라이언 홈스"와 함께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 어디에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 마약중독자의 죽음을 파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사건의 실체와 관계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하는 너무 많은 파편들이 사건 주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무슨 사건?"

리버스가 크게 소리 내어 말했다. 무슨 사건? 형사 법원이 이걸 사건으로 인정할 것 같아? 인물이 있고, 악행이 있고, 답이 없는 의문도 있었다. 불법행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사건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사건만 있었어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유형의 무언가만 있었어도.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모든 게 녹아내리는 촛농만큼이나 공허했다. 하지만 촛농은 흔적이라도 남지. 안 그래? 세상에 완전히 사라지는 건 없다. 사라지는 대신 형태와 본질과 의미를 바꾸어놓을 뿐이다. 동심원 속 오각형 별도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리버스의 눈에는 그것은 주석으로 된 보안관 배지로만 보였다. 어린 시절 6연발 화약총과 함께 늘 지니고 다녔던 장난감 배지.

남들 눈에는 악 그 자체로 보일지 모르지만.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의 범죄 수사과인 CID(Criminal Investigation Department)의 "존 리버스"경위의 두 번째 이야기인"숨바꼭질"은 첫 번째 이야기인 "매듭과 십자가"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전작에서 보인 약간의 미숙함과 투박함을 지우고 더욱 복잡하고 흥미로운 플롯의 작품입니다. 조금 더 전통적인 범죄소설, 형사소설에 가까워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여전히 최악의 빈민촌인 필뮤어의 버려진 한 건물에서 마약중독자 청년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존 리버스" 경위가 수사를 진행합니다.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더욱 발전하는 에든버러의 치부 같은 곳에서 쓸모없는 마약중독자의 죽음은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리버스" 역시 총경과 도시 사업가들이 주도하기로 한 마약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수사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수사를 하는 "리버스"도 살인이라고 보기엔 확실한 정황과 증거가 부족해서 골머리를 앓지만 묘한 상황들이 이 죽음을 중심으로 벌어지면서 "리버스"는 에든버러의 빈민가의 죽음에 이끌려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에든버러의 중심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에든버러가 쓰고 있는 화려한 가면들 중 하나를 벗겨내어 추악한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관광도시였지만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 부동산 시장은 요동치기 시작하고 그에 맞물려 몰려온 재개발 열풍으로 겉은 점점 현대적으로 화려해지지만 속은 더욱 썩어 들어가던 80, 90년대의 에든버러. 시대가 흐를수록 도시란 더 빨리 변하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도시의 화려한 부분은 더욱 빛나고 어두운 부분은 더 어두워지는게 보편적인데 "이언 랜킨"에게는 에든버러가 자신이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에 지냈던 런던처럼 변할까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언 랜킨"은 이번 작품 "숨바꼭질"에서 에든버러에 대한 자신의 애증을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에든버러와 범죄, 악을 표현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다시 끌어들여 중요한 소재로 사용합니다. 비유적으로 내용과 문장에 녹여낸 부분 이외에도 소설 속 문장, 캐릭터 이름들까지 차용하면서 인간과 도시의 이중성을 표현하는데 온힘을 쏟습니다. 심지어 이 작품의 가제는 "Hyde And Seek" 였습니다.


존 리버스 경위.

진급 한 번 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래도 그동안 참고 버틴 보람이 있긴 하네.

솔직히 리안과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어젯밤 파티에서 그런 꼴을 보였으니. 섹스도 형편없었고. 이번 교제도 실패였다. 리안과 나란히 누워 있을 때 그는 깨달았다. 그녀도 질 템플러 경위의 눈을 가졌다는 걸. 대리 파트너라도 찾아봐야 하나? 하긴, 그러기엔 내가 너무 늙긴 했지.

"넌 너무 늙었어, 존." 그가 중얼거렸다.


보통 이런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의 숨겨진 아픈 과거를 사건과 연결 지어 시리즈 중간 작품의 내용으로 써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작가 "이언 랜킨"은 범죄소설 시리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첫 작품 "매듭과 십자가"에서 주인공 "존 리버스"의 아픈 과거사를 탈탈 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번 작품에서는 전작 보다 더욱 사건과 수사에 집중 되어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물론 "존 리버스"라는 캐릭터도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에 더 충실하며 캐릭터 자체의 매력도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경위로 진급했지만 여전히 귀찮은 일에는 나서고 싶어 하지 않고, 기선제압을 위해 기 싸움을 했던 부하 직원이 애인과 같이 있는 곳에 그가 나타나자 모른 척 했을 때는 삐지는 소심함도 보여줍니다. 자학적 개그 역시 한 단계 더 발전했고, 자신을 떠나버린 전 애인의 남자친구가 잘 못 되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박장대소하며 좋아하는 찌질함도 있습니다. 딱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보았던 전형적인 영국계 중년남자입니다. 단지 직업만 형사일 뿐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소시민.


리버스는 불편했다. 소박한 지방 대학교에서부터 명문 에든버러 대학까지, 모든 고등교육기관들을 보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든 말과 행동이 심판과 해석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똑똑한 사람이 더 똑똑해지려 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글을 쓰는 재능은 있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확고해서 그 이야기를 쓰기위해 범죄소설의 형식에 무리하게 맞추느라 "매듭과 십자가"에서 약간의 미숙함을 보여줬던 "이언 랜킨"은 이 작품 "숨바꼭질"에서는 범죄소설의 틀을 확고하게 다지고 나서, 이것을 기본바탕으로 범죄현상과 사건과 수사를 제대로 사용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많은 복선과 단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리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미스터리적 요소에 많은 힘을 쓰고, 경찰 수사과정과 경찰 조직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들도 늘어나 독자들의 흥미를 더욱 유발시킵니다.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와 피식 거리게 만드는 유머도 전작에서 보다 훨씬 세련되어 졌고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센스있는 대사들도 상당히 늘어났습니다. 확실히 이 작품 "숨바꼭질"이 전작 보다 많은 발전을 보인 후속작이며, 아직까지도 전 세계적인 인기를 유지하는 "존 리버스"시리즈의 큰 도약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항상 모든 걸 숨기려고 하는 거죠?

여기서도 그 단어가 등장했다. 숨기려고(hide). 동사, 행동, 그리고 명사, 장소, 그리고 인물. 얼굴은 없지만 리버스는 그를 깊이 알아가고 있었다. 적은 교활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하지만 존 리버스는 그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다. 로니와 커루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작가들은 모두가 글을 잘 쓴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쪽 작가들의 책을 펼칠 때면 항상 내용이 실망스러워도 글 읽는 맛은 끝내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 제 생각은 단 한번도 빗겨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런 편견이 더 확고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이언 랜킨"는 역시도 상당히 글을 잘 쓰는 작가입니다. 이건 전작인 "매듭과 십자가"에서도 확인했던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 "숨바꼭질"에서는 전작에서 살짝 묻어난 미숙함과 신인 작가가 의례 숨기지 못하는 과도한 욕심이 사라지고 재미와 속도감을 더 더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Tooth and Nail"에서부터는 "이언 랜킨"의 감춰져 있었던 범죄소설가로서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운 좋으면 이 작품도 연말에 읽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전에 "존 리버스"시리즈의 역사적인 시작점인 "매듭과 십자가"와 이 작품 "숨바꼭질"을 읽고 워밍업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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