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자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최필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 범죄소설의 여왕 "카린 포숨(Karin Fossum)"이 2009년에 발표한 "발신자(Varsleren/The Caller)"입니다. 이 작품 "발신자"는 시인으로 노르웨이 문학계에 발을 디딘 "카린 포숨"을 세계적인 범죄소설 작가로 만들어준 "콘라드 세예르(Konrad Sejer)" 경감 시리즈 열 번째 작품입니다. 국내에 출간된 다른 "콘라드 세예르(Konrad Sejer)" 시리즈로는 '글래스 키' 상을 수상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돌아보지 마"와 세 번째 작품 "누가 사악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가 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오후, 한 여인이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에 행복해 하며 남편을 위해 저녁을 만듭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은 집 뒷마당에 놓인 유모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함께 맛있는 음식들을 즐깁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딸을 집안으로 데려 오기 위해 뒷마당으로 나간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처음처럼 유모차는 집 뒤뜰에 안전한 상태로 있기에, 담요가 살짝 구겨진 듯 느껴져도 아이가 자다가 뒤척여서 그런 것 이라며 자신을 안심시킵니다. 하지만 유모차로 다가간 그녀는 유모차 안에서 피 범벅이 된 딸 아이을 보고 경악합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엄청난 패닉에 빠진 채 응급실로 달려갑니다.


"아이에겐 아무 이상이 없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카르스텐이 간호사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았다. 자그마한 몸이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아이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담요를 걷어냈다. 마르그레테는 일회용 기저귀만을 걸친 채였다.

"아무 이상이 없어요." 간호사가 다시 말했다. "아이 피가 아니었어요.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작은 도시의 평범한 가정집 뒷마당 안, 유모차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피를 뒤집어 쓴 채 발견됩니다. 아이 부모는 아이가 다친 것 인지, 피를 토한 것 인지 패닉에 빠져 어리둥절해 하며 병원 응급실로 달려갑니다. 다행이 아이에겐 아무런 상처가 없으며 피도 아이의 피가 아님이 밝혀집니다. 병원은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고 "콘라드 세예르" 경감과 파트너인 "야코브 스카레"가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병원으로 도착합니다.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는 도시 전체에 퍼지고, "세예르" 경감은 심각한 범죄로 간주하며 수사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도시에는 이상한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집니다. 70세 생일을 보낸 노부인의 부고 소식이 지역신문에 실리고,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남자와 그의 아내가 사는 집에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왔다며 장의사가 찾아오고, 누군가 양 목장의 양들을 다 풀어버린 후 한 마리의 몸에 오렌지색 스프레이를 칠해 놓고, 한 여인은 딸의 가짜 사고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이는 장난질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며 그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 아기 사건은 장난이었을 뿐이잖아요." 한 흑인 아이가 말했다. "그래도 잡히면 감옥에 가야 하나요?"

"그건 장난이 아니야." 세예르가 말했다. "아저씨 말 잘 들어라." 그가 아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가 한 건 절도다. 부모 마음의 평온을 훔쳐간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건 아주 심각한 범죄야. 마음의 평온이 사라지면 인생이 끔찍해진다는 걸 명심해라."


너무나도 악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장난과 그 장난이 발생시키는 파장들을 다룬 범죄소설 "발신자"는 작가 "카린 포숨"의 대표적인 시리즈인 "콘라드 세예르" 경감 시리즈 열 번째 작품입니다. 노르웨이의 작은 도시를 점점 공포로 몰아가는 장난은 얼핏 보면 심각한 범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난의 당사자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후 그 충격이 발생시키는 불안과 슬픔에 잠식당합니다. 뉴스나 신문들에게는 흥미로운 기사거리가 되고 그것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범인은 장난을 멈추지 않습니다. "카린 포숨"의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 "발신자"에서도 범인의 정체는 일치감치 밝혀집니다. 범인의 행동이나 심리상태, 범행수법들은 "세예르"경감과 파트너의 수사 장면과 동시에 그대로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소설 속 형사들만 범인의 정체를 모르지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중요한 정보들을 먼저 알게됩니다. 이런 구성은 작가 "카린 포숨"이 범죄소설을 통해서 항상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을 극대화 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심리탐구입니다. 노련하고 인간적인 주인공 "세예르"경감과 그의 젊은 파트너 "스카레"가 범죄를 수사하며 느끼는 심리적 변화는 물론이고 사이코패스 적 기질이 다분한 범인의 분노와 원망, 애증이 뒤섞인 심리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카린 포숨"이 항상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범죄의 대상이 되거나 그 범죄가 일어난 주위의 사람들의 심리적 변화입니다. 범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삶은 범죄의 대상이 되기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 "발신자"에서도 장난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심리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정신적, 심리적 충격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후 그들의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누군가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누군가는 슬픔에 무너지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자신 안에 내재 되어있던 분노를 키워갑니다. 모두 장난이라는 범죄의 희생양이 되지만 각자 다른 방법으로 그 후의 삶을 극복해가거나 받아들입니다.

전 세계에 북유럽 스릴러의 열풍에 일조한 작가이긴 하지만 "카린 포숨"은 범죄를 매개로 언제나 지독할 정도로 인간 심리 탐구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들을 기대하고 읽는 사람들에겐 간혹 밋밋하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 "카린 포숨"의 작품들이 주는 매력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힘듭니다. 섬세하고 따뜻하지만 날카로운"카린 포숨"의 시선과 특유의 시적인 문장들이 합해져 창조한 그녀만의 독특한 범죄소설 세계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세계입니다. 피와 뼈 조각들이 난무 하지 않는 일상적인 공포의 세계.


경찰은 이번 사건을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과 경감이라는 직함이 화면 아래서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착찹한 마음으로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했다. 머리는 더 하얘졌고, 얼굴도 몰라보게 수척해져있었다. 광대뼈와 턱은 특히 두드러져 보였고, 짙은 잿빛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은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다. 안으로부터 서서히 자라나온 그것은 그의 이목구비를 차례로 덮쳐나가고 있었다.

내가 간다. 두개골과 뼈만 앙상히 남은 채로.


"콘라드 세예르"경감 시리즈가 나온지 올해로 딱 20년이 되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세예르"는 사람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하지만 평범한 캐릭터입니다. 오히려 평범하기에 범죄소설 캐릭터로는 보기 드물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에게 느끼는 인간적인 연민을 숨기지 않고, 범죄에 순수하게 분노하는 노련한 형사이지만 딸 부부와 아프리카에서 입양한 손자를 사랑하며, 그들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일찍 부인을 떠나 보냈지만 여전히 결혼서약을 지키며 그녀를 그리워하는 낭만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급히 판단하지 않으며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노련한 수사관입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보편적이기에 "카린 포숨"이 추구하는 일상과 범죄가 섞이는 세계의 중심축이 되는 수사관이자 관찰자로서의 임무에 딱 맞는 캐릭터입니다. 그러고 보면 "루이즈 페니"의 "가마슈"경감과 캐릭터 적으로 흡사한 부분이 꽤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나 피해자들에게 느끼는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부분은 많이 비슷합니다. 시리즈 초창기부터 함께 다니는 젊은 파트너 "야코브 스카레"와의 콤비 플레이도 이 시리즈 팬들이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집에는 폭력도, 취태도 없었다. 하지만 식구들 중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세예르는 몸을 웅크리고 프랑크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들의 고통을 부모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부모의 탓으로 돌려야 할 건 많았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상태와 분노, 의심과 비통함과 결점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버지의 절망과 부재와 무관심에도 고통받았다.


간혹 "카린 포숨"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녀의 뛰어난 심리묘사가 가끔 제 마음 속 밑바닥을 들킨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럴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단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통찰력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카린 포숨"의 작품들 속에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카린 포숨"의 작품들이 계속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발신자"는 훌륭한 범죄소설이자 범죄가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속에 일으킨 파장과 균열들을 다룬 소설입니다. 모호하고 찜찜한 결말 뒤에 숨겨진 충격적인 사실은 깨지기 쉬운 사람들의 심리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느리고 조용하게 비극을 그리는 초창기 북유럽 스릴러의 감성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발신자"가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돌아보지 마"가 원작인 이탈리아 영화 "​Gril By The Lake" 트레일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