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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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세기의 셔츠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다. 화려한 영상미와 짜임새있는 스토리, 사람과 호랑이의 이야기, 그리고 믿음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던 영화로 기억한다. 덕분에 영화의 원작 소설인 <파이 이야기>도 주목을 받았다. 난파된 배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동물들과 함께 구명보트를 탄 채 태평양을 떠돌던 소년 파이의 표류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번 <20세기의 셔츠> 역시 동물들이 주된 역할을 하지만 전달하는 내용은 다르다. 

    마텔이 동물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인간의 목소리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띠더라도, 똑같은 이야기가 동물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는 사뭇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부터 우화 형식의 이야기가 발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_ 옮긴이의 말 中


  <20세기의 셔츠> 역시 위에서 언급했듯 동물의 입을 빌려 소설을 풀어나간다. <파이 이야기>에서의 주제가 믿음에 관한 것이었다면, <20세기의 셔츠>는 홀로코스트다. 홀로코스트는 원래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전에 바치는 유대교의 제사인 전번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 홀로코스트의 의미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한다. 오늘날 통용되는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다룬 글은 많다. 하지만 작가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글들이 사실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주목했다. 그리하여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에 얀 마텔의 상상력과 창조적인 비유 첨가했다. 그 작품이 <20세기의 셔츠>다. 이 소설은 홀로코스트의 의미인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즉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현상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소설에서 홀로코스트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치와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지만, 홀로코스트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온다.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웃사이더이지만, 역사가 예술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20세기의 셔츠>에서도 <파이 이야기>에서처럼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파이 이야기>에서 처럼 살아 움직이며, 사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동물이 아니라 박제된, 즉 죽었지만 형체는 유지되어 있는 동물들이다. 요즘은 박제라는 단어를 찾기 힘들다. 속은 사라지고 없거나 완전히 감추어진 박제. 왜 마텔은 박제된 동물을 등장시켰을까? 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이름을 동물들에게 붙여준 것일까? 어쩌면 박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만 반듯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들끓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런 모습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껍데기만 인간을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신곡>에서처럼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안내자로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홀로코스트와 세상을 정확히 보려면 그런 안내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마텔은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을 그런 안내자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두 동물이 나누는 대화, 지독히 상징적인 대화와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희곡의 인상적인 첫 부분에서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배에 대해서 긴 대화를 나눈다. 배를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베아트리스를 위해 버질은 배의 모양과 빛깔과 촉감, 향과 맛과 식감 등 다양한 면을 설명하고, 베아트리스가 익히 아는 개념, 사과와 바나나와 아보카도를 끌어들여 비교한다. 흔한 과일인 배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 주제가 홀로코스트나 인간, 삶에 대한 것이라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개념을 고안하고 반짇고리에 기록하듯, 독자 역시 스스로의 경험과 말이라는 한정된 도구를 통해 이 소설을, 그리고 세계화된 자본주의 현상을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설령 마텔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더라도 그 방향은 마텔의 방향일 뿐이다. 독자가 그 방향을 따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내 생각에 믿음은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것과 비슷한 거야. 햇살을 받고 있을 때 그림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어? …그림자는 의심을 뜻해. 햇살을 받고 있는 한 네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는 따라다녀. 그런데 햇살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_ 버질의 말 中

  버질의 말처럼 세상에는 빛과 어둠, 확신과 의혹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흑과 백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2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포용하기가 힘들어 항상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답은 우리를 틀에 가두기 마련이다. 우리 스스로 죄수복을 입는 셈이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텔은 죄수복을 스스로 벗어내는 방법의 하나로, 소설의 끝에 구스타브를 위한 게임을 제시한다. 한결같이 고민스러운 질문들이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빈칸으로 남겼다. 그것은 결국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각자가 채워가야 하는 몫이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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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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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향해 뛰어본 적이 있는가

  험악한 인상 때문에 평생 범죄의 그늘에서 살아온 야가미. 새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골수 이식이라는 선행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식 수술 하루 전날 터진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중요 참고인이자 용의자로 수색 명령이 떨어진 야가미. 경찰에 붙잡히면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없게 되고, 이식을 받을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진범인 연쇄 살인마와 정체불명의 사교 집단까지 합세하여 야가미를 추적해 오는 상황에서, 백혈병 환자를 구하기 위한 야기미의 목숨을 건 도주가 시작된다. 힘내라 야가미. 


  니시카와가 말하는 이야기는 결코 허황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징후는 이미 지금의 사회에서 간파할 수 있다. 국정원이 극우나 극좌 등의 사상단체뿐 아니라 시민 옴부즈맨이나 언론 관련 단체, 나아가 교원 조합에까지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형 제도 폐지, 일장기 반대, 원자력 반대, 무엇이든 간에 현실을 바꾸려는 자들은 모두 적으로 간주된다. 민주주의국가의 그늘에서 꾸물대는 마녀재판의 논리. 현대사회의 이단 심문제도 였다. _ <그레이브 디거> 303쪽.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 건 <제노사이드>에서 였다. <13계단>이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제노사이드>의 주제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어서 <제노사이드>를 먼저 읽게 되었다. 그 결과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작가를 신뢰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철저한 자료조사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스릴있게 풀어쓰는 재주. 그것이 이 작가에게 충분했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영화 감독을 지망하여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독립영화를 제작하고는 했다. 영화감독 오카모토 가하치의 문하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1984년부터 영화와 텔레비전 촬영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고, 1989년 LA에서 영화에 대한 공부를 했다. 그의 작품 <6시간 후 너는 죽는다>가 일본에서 드라마로 촬영될때 각본과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인지, 그의 작품들의 특징은 충분히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장면의 이동과 이야기의 서사가 영화로 구성하기 딱 좋은 상태인 것이 특징이다. 몰입하기 더 없이 좋은 구조다.

  <그레이브 디거>는 SBS에서 방영중인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의 추격전을 생각해보면 이야기의 구조가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추격과 도주를 테마로 삼았던 탓에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쫓는 자의 집념과 쫓기는 자의 공포, 초조함을 부각시키면서 공감대도 형성한다. 

  "이 추측이 옳다면… 어느 쪽이 정의일까요?" 겐자키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후루데라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정의라니?" "그레이브 디거의 범행을 막는게 정의일까요? 아니면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 살인 집단을 없애는 게 정의일까요?"

_ <그레이브 디거> 322쪽.

  책의 주인공은 야가미 도시히코. 험악한 인상 때문에 어둠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10년이 넘었다. 악당 얼굴이 판에 박혀있고, 애늙은이 외모를 소유한 악당이었던 주인공. 유명 정치인의 목소리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무실에 전화해 감쪽같이 50만 엔을 가로채거나 조직 폭력배의 보험증을 위조해 사채를 끌어쓰던 악당. 그게 야가미 도시히코다. 하지만 연예인을 지망하던 여고생들에게 사기친 뒤 꽤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남을 돕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골수 이식이다. 그의 골수를 통해 백혈병 환자의 목숨을 살리는 일을 하나의 책임감으로 생각한다. 

  이식을 받을 환자가 결정되고, 이식을 위해 입원을 하기로 결정하는 야가미. 입원을 앞둔 야가미는 허전한 주머니 사정을 해소하기 위해 돈을 빌리러 친구 시마나카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시마나카는 손과 발의 엄지가 엇갈린 모습으로 묶여서 벌거벗은 채로 뜨거운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욕조에서 삶아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놀랄 틈도 없이 방에 세 남자가 들이닥친다. 야가미는 시마나카의 노트북과 휴대폰이 든 가방을 집어 들고 베란다에서 상가의 아케이드 지붕으로 뛰어내려 도망가면서 추적자들과의 1차 추격전을 무사히 승리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시마나카가 살고 있는 집의 명의는, 사실 야가미와 시마나카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집을 바꾼 상태였던 것이다. 자신의 명의로 된 집에서 사마나키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에, 전과가 있는 야가미는 순식간에 경찰의 중요 참고인과 용의자로 수배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편 야가미가 말려든 사건과 동일한 수법의 살인 사건이 또 발견된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퇴근하던 여사원이 화살에 맞아 보이지 않는 불에 타 죽는 사건도 발생한다. 경시청은 연쇄 살인사건의 공통점을 찾아가면서 범인을 찾는데 주력한다. 물론 첫 번째 목표는 야가미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결국 야가미는 범행 장소에서 목격한 수상한 남자들에게, 경찰에게, 또한 진범에게 쫓기는 추격전이 이어지게 된다. 도쿄의 북단에서 병원이 있는 남단까지. 그것도 다음 날 아침까지 병원에 도착해서 이식 수술 준비를 하지 않으면 타임오버로 인한 미션실패. 

  무기도 없는 맨주먹, 심지어 싸움도 잘하는 편이 아니다. 돈도 1만 엔 정도. 여러 악조건이 겹친 상황에서 야가미는 오로지 골수 이식을 통해 선행을 베풀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려고 최선을 다한 도주를 시작한다. 그의 골수를 학수고대하는 환자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구질구질한 인생에 쫑을 내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에 서커스 묘기에 가까운 필사적인 보행까지. 선행을 전제로 한 탓인지, 야가미의 도주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게 된다.

  작품에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흥미로운 전설을 배경에 삽입했다는 점이다. 중세의 종교재판에서 잔학한 짓을 한 이단 심문관을 죽인다는 무덤에서 되살아난 사자, '그레이브 디거'를 삽입한 것이 그것이다. 전설을 설정함으로서 작품에 스릴러의 색채를 곁들인 점도 놓칠 수 없는 작품의 매력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그레이브 디거'라는 전설은 중세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작가의 창작 전설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게다가 이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국민들이 국회의원으로 뽑아 준 사람이야. 거리의 이름도 없는 서민보다는 내 생명을 구하는 게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이 반대 입장이었으면 정반대의 논리를 늘어놨겠지. 국회의원이라면 이름 없는 시민을 위해서 죽으라고 말이야."

_ <그레이브 디거> 424쪽.


  무엇이 야가미를 병원으로 이끄는가

  책의 마지막 장까지 즐겁게 넘겼다. 그리고 하나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과연 무엇이 야가미를 그렇게 병원으로 이끈 것일까? 청소년기를 지저분하게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그러한 목적만으로 야가미는 도주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러한 목적이 무슨 이유로 야가미에게 이렇게 강한 동기부여를 제공한 것일까. 의문이 의문을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가미의 이러한 동기부여는 아마도 '자기 만족'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사실상 골수 이식을 통해 백혈병 환자를 한 명 살린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이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금전적인 보상도 없고, 포상도 없다. 남는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스스로 구했다는 '자기 만족'이 남는다. 인간의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말처럼, 야가미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성악설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법이 아닌, 불법적인 방법으로 금전을 취득하며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처럼, 착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어서 골수 이식을 목숨걸고 했다는 이유는 납득하기 힘들다. 

  야가미의 행위를 인간 본성으로 논하는 것보다는, 골수 이식을 통한 자기 희생의 행위가 야가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에 조금 더 납득이 간다. 물론 악마가 한 가지의 착한 일을 통해 천사가 되진 않는다. 또한 그렇게 인식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악마가 천사로 바뀌는 가능성은 열린 것이다. 그 가능성에 야가미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지금의 기회마저 놓친다면 영영 악당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자기 불안감 또한 그에게 동기부여 되었을 것이다. 

  과거를 지워버릴 순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동물이다. 과거의 모습이 조금 지저분 할지라도, 현재의 모습이 깨끗하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 것인가. 고위급 인사의 청문회를 보면 이런 생각이 자주 떠오른다. 장관 후보에 오른 사람의 현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과거를 문제삼아, 과거가 지저분하니, 현재 그리고 미래가 지저분 할 것이라는 일반화의 오류를 서슴없이 범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무엇이 옳은지는 짧은 식견으로 섣부른 판단은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가? 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순 없다. 

  어쩌면 야가미의 인생 모든 것을 담보로 한 도주극은 이러한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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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호의 고전강독 1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최고의 인생을 묻다 공병호의 고전강독 1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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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다시 읽는 고전


  "나에게 소크라테스와 식사할 기회를 준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그 식사와 바꾸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철학자의 단단한 철학을 배우고픈 최고의 감각적 경영자 '스티븐 잡스'가 한 말이다. 


  성과사회.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만큼 유별난 곳도 없을 것 같다. 요즘의 대학교만 해도 그렇다. '취업 알선소'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학문에 대한 탐구는 일단 미뤄두고 취직이 우선시 되고 있다. 좋은 학점을 받야아 하고, 공인영어점수를 일정 수준이상 받아야 하며, 대외활동을 비롯한 일명 '스펙'을 쌓는다. 누군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면서 '스펙'을 쌓는다. 이렇게 어렵사리 자신을 포장해서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사회는 이러한 대학생들에 냉담하다. "요즘엔 바로 쓸 만한 인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과거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대학생들의 '스펙'은 인정한다. 자기계발에 혈연되어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정말 열심히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 같다. 자기계발 전문가이자 경영 전문가인 공병호 박사는 이것을 '철학의 부재'라고 대답했다. 철학 고전(古典) 속에는 경영학이나 경제학 같은 실용지식이 주지 못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책을 100여권이나 집필한 실용지식 전문가가 철학 고전을 해석했다. 저자 스스로가 외형적 성공과 실용적 지식만으로는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실존적 각성을 경험했고, 그에 대한 해결법으로 고전 강독서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국내 최고의 자기계발, 경제경영 전문서의 저자이지만 '실용 지식'의 기저에 근본적인 삶의 진수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며, 현대적 의미로 철학 고전들을 재해석했다. 그것이 <공병호의 고전강독>이다.


  '철학은 밥을 먹여준다.'

  물론 어느 시대나 보통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급급하게 마련이다.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 외형적인 것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는 심지어 젊은이들에게도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갖춰놓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부를 이루었는가는 성공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 얼마나 깨끗한지, 그의 정신이 어느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돈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만다.

_ <공병호의 고전강독 1> 47쪽 中

  <공병호의 고전강독 1>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다시 정의를 묻다'라는 부제를 포함한다. 서양 철학의 뿌리인 두 철학자에게서 저자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법의 실마리를 구한다. 위대한 철학자의 마지막 자기 변호를 담은 <소크라테스의 변론>, 올바른 생사관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파이돈>, 당당히 살기 위한 옳고 그름에 대한 원칙 <크리톤>,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향연>, 탁월함과 배움에 대해 고찰하는 <메논>, 훌륭한 리더의 자기 인식을 강조한 <알키비아데스 1>까지 6권의 철학 고전을 강독한다.


  '알아가야 할 영역은 우주처럼 한없이 넓기만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떠 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다. 가야 할 길은 아득히 멀기만 하지만 내가 지상에 머물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_ <공병호의 고전강독 1> 38쪽 中


  '고전'의 중요성은 높아만 지는데,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거나, 너무 어렵다고만 생각해서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점에서 <공병호의 고전강독>은 고전 읽기의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고전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텍스트 곳곳에 숨어있는 생각해볼 것들을 밝혀내는 과정,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유의 확장. 고전을 현대에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공병호 방식의 해석이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도 아니고, 그대로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저자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저자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크리톤>에 대한 해석 중 소크라테스에게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를 뽑아낸 것 자체가 상당히 거슬렸다. 실제로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의미로 독약을 마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군사독재시절, 그것을 정당화 시키기 위하여 억지로 짜낸 문장을, 그것을 강독하는 책에서 다시 보게되니 기분이 안좋아졌다.

  하나의 부정적인 면이, 그것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비록 <크리톤>의 강독에서 잘못된 흐름이 보였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했다고 보인다. 고전에서 나오는 텍스트를 발췌하여, 그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는 의미에 있어서는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고전을 읽었는데도,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거나 독서를 함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꼈다면, 추천해볼만한 책이다. 고전 읽기에 있어서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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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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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지금 피로한가?


  이 책의 핵심적인 태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_ <피로사회> 76쪽.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_ <피로사회> 6쪽.

  '피로'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들이 연상적으로 생각난다. 명(明) 보다는 암(暗)인 느낌들이 그것이다. '피로'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정신이나 몸이 지치고 힘든 상태'. 어떤가? 당신도 지금 피로의 정의에 속한 사람인가?

  현대인들은 점점 더 피로해진다. 피로감이 상승하면서 행복감은 느끼는 사람도 적어지고 있다. 과거보다 오히려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이 그 증거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세분화되면서 점점 요구조건들이 많아졌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대학을 평범하게 다니고, 졸업을 해도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3년 현재는 대학을 평범하게 졸업해서는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버렸다. 고득점의 영어성적은 기본이고, 각종 대외활동, 공모전을 통한 수상경력, 동아리 활동, 높은 학점, 봉사활동 등 요구조건이 엄청나다. 취업을 하면 피로하지 않을까? 대답은 'No!'다. 일명, 워커홀릭(workaholic)'이란 단어를 봐도 그렇다. 일중독이나 업무중독이라는 말로, 여가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가정에도 소홀한 직장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단어들을 들으면 생각나는 것은? '피로하다'일 것이다.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_ <피로사회> 18쪽.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책에서 현대인의 피로의 원인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긍정성의 과잉'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성의 과잉이 어떻게 피로를 일으키는 것일까? 우선 저자는 피로를 경색성 질병이라고 파악한다. 경색성 질병은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적 질병을 말한다. 이러한 경색성 질병들은 면역학적인 공격과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는 전염성 질병과는 다르게 면역학적 처방으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색성 질병, 혹은 신경증적 질병들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비면역학적 질병이다.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르는 면역학적 예방법은 비면역학적 질병에는 소용이 없다. 과잉으로 인한 소진, 피로, 질식이라는 비면역학적인 시스템에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면역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성 질병들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닌 '긍정성의 변증법'을 따라야 한다고 저자는 제시한다.


    입시 지옥에서의 해방을 약속한 최초의 교육부 장관이 내세운 구호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20개에 가까운 교과목의 무게에 신음하던 학생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들렸을 이 구호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 아니었을까?

_ <피로사회> 89쪽.

  이 책이 무엇보다 흥미를 끌고,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 이유는 현대사회를 너무 잘 진단했다는 것에 있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푸코의 규율사회가 맹목적인 의식이었다. 정신병자, 감옥, 공장으로 이루어진 판옵티콘에서 푸코의 규율사회는 금지, 규율, 강제, 타자에 대한 거부 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의 성과사회로 변화했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성과사회에서는 능력, 자기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성과사회의 질병을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치료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_ <피로사회> 16쪽.

  저자는 성과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인 성과주체를 노동만 하는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노동만 하는 동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가 된다. 그러나 성과 과잉을 위해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혼을 찌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자유로 인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자기 자신을 열심히 착취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성과사회의 심리적인 질병인 우울, 피로, 소진이라는 자폐적인 결과는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질병이 되어버린다. 또한 긍정성의 과잉에 따라 영혼이 경색되거나 탈진되고 나면 피로는 폭력이 된다. 그럴수록 자시 자신을 더욱 자학하는 괴물이 된다.

  현대사회가 우울한 까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로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이라는 시스템 위에서 모두가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는 필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한 멀티플레이를 강요한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한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_ <피로사회> 22쪽.

  그렇다면 이 피로를 어떻게 해야할까? 오늘날 우리는 피로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나 피로한 상태여서 심적으로 불안감과 우울을 느낀다.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달리해야 한다. 저자 한병철은 "깊은 심심함, 사색, 관조의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회복제를 건넨다.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상태에 놓여 있는 성과주체, 좋은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생존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을 힘, 즉 부정의 힘과 분노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러한 방법으로 '머뭇거리는 능력', '분노하는 법', '깊은 심심함', '돌이켜 생각하기'를 저자는 제시하면서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치유하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한다. 무한정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분노하고 돌이켜 생각하며 거부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그게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피로회복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과도한 노동과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는 성과주체로써 탈진과 고갈의 피로를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지, 깊은 사색을 통한 공동체의 가능성에 영감을 주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피로를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도 지금 피로한가? 라는 질문에 우선은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왜 피로한가?'라는 질문에는 각자가 선택한 삶에 따라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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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카미유 드 페레티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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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이것 역시 삶이다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는 이야기 그 자체로 속도감 있게 읽힐 수 있으며, 평범한 독서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 소설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미유 드 페레티는 노년의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금기의 장소, 약간은 두렵게 느껴지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은 그것만으로도 의미심장한 가치를 지닌다.

_ 옮긴이의 말 中


  어느 일요일 아침 9시에 시작해 다음날 밤 12시 45분에 막을 내리는 이 소설은 작가의 시선을 따라 각각의 방을 차례로 지나친다. 4막 64장. 죽음의 너울이 드리워진 한정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축소된 삶을 거울처럼 반사시킨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죽음의 그림자와 고독, 노망난 노인네들, 이빨 빠진 괴물들이 우글대는 곳'이 소설의 배경이다.

  이 작은 사회에도 질투와 갈등, 악의와 배신, 사랑과 우정, 환멸과 증오, 추억과 망각, 고독과 고통, 그리고 웃음이 존재한다. 옴니버스 형식을 빌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비추는 소설은 희로애락 가득한 인간사를 농축하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읽는 속도가 느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현재가, 그들의 과거가 나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작가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라도 나를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다. 

  베고니아.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공간이자 죽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 회색빛의 이미지가 맴도는 베고니아.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조차 제한되어 있다. 기계처럼 흘러가는 사회이지만, 여러가지 감정이 존재한다. 그곳 역시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의 미래


  '나의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난이도의 질문이다.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더욱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래도 대답을 한다면, 모호하거나 부정적인 대답이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노후'라는 말은 우리나라 문화에 있어서 결코 긍정적이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막바지에서 영화 하나가 떠올랐다. 2011년 추창민 감독이 연출한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그것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2011)

I Love You 
 9.6
감독
추창민
출연
이순재윤소정송재호김수미오달수
정보
로맨스/멜로 | 한국 | 118 분 | 2011-02-17
다운로드글쓴이 평점  

    노인들의 사랑. 사회에서 외면시 되었던 노인들의 사랑을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세세한 분위기는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와 다르지만, 노인들의 감정을 다루었다는 부분 때문에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가 당시 호평을 받았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영화를 접하는 모든 연령층의 미래가 영화와 같아 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긍정적 미래.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미래. 그것이 노인세대의 감정을 공유할 순 없었지만, 몰입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소설에서는 긍정적인 미래상만 등장하지는 않는다. 사랑과 우정 뿐만 아니라, 질투와 갈등, 악의와 배신, 환멸과 증오, 추억과 망각, 고독과 고통 등 부정적인 미래도 등장한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씁쓸하지만, 오히려 더 가슴으로 와 닿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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