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의 셔츠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다. 화려한 영상미와 짜임새있는 스토리, 사람과 호랑이의 이야기, 그리고 믿음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던 영화로 기억한다. 덕분에 영화의 원작 소설인 <파이 이야기>도 주목을 받았다. 난파된 배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동물들과 함께 구명보트를 탄 채 태평양을 떠돌던 소년 파이의 표류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번 <20세기의 셔츠> 역시 동물들이 주된 역할을 하지만 전달하는 내용은 다르다. 

    마텔이 동물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인간의 목소리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띠더라도, 똑같은 이야기가 동물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는 사뭇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부터 우화 형식의 이야기가 발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_ 옮긴이의 말 中


  <20세기의 셔츠> 역시 위에서 언급했듯 동물의 입을 빌려 소설을 풀어나간다. <파이 이야기>에서의 주제가 믿음에 관한 것이었다면, <20세기의 셔츠>는 홀로코스트다. 홀로코스트는 원래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전에 바치는 유대교의 제사인 전번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 홀로코스트의 의미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한다. 오늘날 통용되는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다룬 글은 많다. 하지만 작가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글들이 사실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주목했다. 그리하여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에 얀 마텔의 상상력과 창조적인 비유 첨가했다. 그 작품이 <20세기의 셔츠>다. 이 소설은 홀로코스트의 의미인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즉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현상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소설에서 홀로코스트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치와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지만, 홀로코스트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온다.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웃사이더이지만, 역사가 예술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20세기의 셔츠>에서도 <파이 이야기>에서처럼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파이 이야기>에서 처럼 살아 움직이며, 사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동물이 아니라 박제된, 즉 죽었지만 형체는 유지되어 있는 동물들이다. 요즘은 박제라는 단어를 찾기 힘들다. 속은 사라지고 없거나 완전히 감추어진 박제. 왜 마텔은 박제된 동물을 등장시켰을까? 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이름을 동물들에게 붙여준 것일까? 어쩌면 박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만 반듯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들끓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런 모습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껍데기만 인간을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신곡>에서처럼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안내자로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홀로코스트와 세상을 정확히 보려면 그런 안내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마텔은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을 그런 안내자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두 동물이 나누는 대화, 지독히 상징적인 대화와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희곡의 인상적인 첫 부분에서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배에 대해서 긴 대화를 나눈다. 배를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베아트리스를 위해 버질은 배의 모양과 빛깔과 촉감, 향과 맛과 식감 등 다양한 면을 설명하고, 베아트리스가 익히 아는 개념, 사과와 바나나와 아보카도를 끌어들여 비교한다. 흔한 과일인 배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 주제가 홀로코스트나 인간, 삶에 대한 것이라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개념을 고안하고 반짇고리에 기록하듯, 독자 역시 스스로의 경험과 말이라는 한정된 도구를 통해 이 소설을, 그리고 세계화된 자본주의 현상을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설령 마텔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더라도 그 방향은 마텔의 방향일 뿐이다. 독자가 그 방향을 따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내 생각에 믿음은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것과 비슷한 거야. 햇살을 받고 있을 때 그림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어? …그림자는 의심을 뜻해. 햇살을 받고 있는 한 네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는 따라다녀. 그런데 햇살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_ 버질의 말 中

  버질의 말처럼 세상에는 빛과 어둠, 확신과 의혹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흑과 백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2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포용하기가 힘들어 항상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답은 우리를 틀에 가두기 마련이다. 우리 스스로 죄수복을 입는 셈이다.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텔은 죄수복을 스스로 벗어내는 방법의 하나로, 소설의 끝에 구스타브를 위한 게임을 제시한다. 한결같이 고민스러운 질문들이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빈칸으로 남겼다. 그것은 결국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각자가 채워가야 하는 몫이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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