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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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에는 성(性)적인 부분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서양 쪽 사람들이라면야 닌자, 스시, 섹스 정도겠지만 일본에 대해 익숙하다면 일본의 성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개방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성을 꼭꼭 숨기고 추잡한 짓을 하는 것과 드러내 놓고 하는 것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다만 일본의 성(性)은 우리처럼 터부시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인식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열쇠』는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70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가장 원초적인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터부시되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56세의 남편과 45세의 아내의 섹스 이야기가 둘의 일기에, 서로 훔쳐본다는 전제로 쓰인 것이다. 이 정도라면 평범한 듯싶지만 남편의 제자와 아내의 이야기, 이를 묵인하고 부추기며 흥분하는 남편이라면 다를 것이다. 논란이 되긴 했지만 이 작품이 1956년에 쓰인 것이니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性)에 대한 인식은 역사가 깊다.

대학교수인 남편은 아내가 섹스에 적극적이지 않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음욕이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그 욕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내를 만족시키기 아내와 무리한 성관계를 지속한다. 아내는 유교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 조신하고 기품 있게 행동하려 하지만 가슴 속에 숨겨진 욕망에 몸을 떨고 있다. 아내는 남편의 섹스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성적인 갈등 관계에 딸과 결혼할 예정인 남편의 제자가 등장하게 된다. 제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아내를 보는 남편은 질투를 느끼게 되지만 그 질투는 비뚤어진 성적판타지로 나타나게 된다. 남편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욕망이 더 커져버린 아내는 제자와 관계하며 자신의 음욕을 채운다. 뿐만 아니라 제자와 결혼하기로 한 그들의 딸은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가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열쇠』는 인간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인 성(性)을 가장 비밀스러워야 할 일기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밀스러워야 할 것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일기는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여 있고 남편은 제자와 아내를 묵인하고 딸은 오히려 둘의 욕망을 도와준다. 남편과 아내, 제자의 관계는 흔한 에로물이 될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의아한 것은 딸이다. 왜곡된 인간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기 위해 등장시킨 것일지는 모르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은 딸의 속내는 알 수 없어 아쉬웠다. 제목이기도 한 『열쇠』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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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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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외국 작품을 읽을 때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분명히 우리말로 쓰인 것인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해가 쉽지 않은 철학서나 인문서도 아니고, 번역을 거치고 편집자가 어루만진 글일 텐데도 읽기 힘든 문장을 볼 때마다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혹시나 다른 번역자에 의해 번역된 같은 책을 가지고 있다면 비교해 보라, 번역에 따라 두 책이 전혀 다른 책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같은 문장을 번역해도 느낌이 상반되는 경우도 있을 뿐더러 단어 하나 때문에 전혀 다른 문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문장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쨌거나 평생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알기는 힘들 터, 어쨌거나 평범한 우리들은 번역자에 평생 기댈 운명인 것이다.

이윤기라는 이름은 소설가보다 번역자로 익숙하다. 『그리스인 조르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의 작품으로 그의 소설보다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기는 것에 대한 에세이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번역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천생 번역가인 듯  싶다. 하지만 이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책을 읽다보면 쉽게 드러난다. 기계적으로 외국어를 우리말로 치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다듬어 걸맞은 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윤기는 ‘단순한 물리적 변화’ 아닌 ‘화학적 변화’라 이야기한다. 또한 번역가는 모든 것에 능숙해야 한다. 언어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중세 철학에서 독일제 권총인 루거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장미의 이름』의 오독과 오역을 지적한 한 독자의 글은 번역가가 가진 숙명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번역서가 다른 나라의 것보다 못한 것을 알았을 때의 참담한 심정이 독자에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신화에 대한 이윤기의 애착과 네 번째 장인 ‘우리말 사용 설명서’는 현재의 우리말과 그것을 바라보는 번역가로서의 시선이 느껴져 흥미롭게 읽었다.


흔하게 하는 말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말이 절반 정도만 맞았으면 좋겠다. 번역은 온전히 창작이어서는 안 되고 죽은 언어로 글자만 바꾸어놓은 것이어서도 안 된다. 번역은 류신의 말처럼 시소게임이거나 외롭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으로 기울거나 조금만 헛디디면 그대로 떨어져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원문의 뉘앙스와 맞는 역어를 찾는 시소게임, 그 중심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나같이 평범한 독자는 그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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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넘브라의 24시 서점
로빈 슬로언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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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종이책은 많지만 그것에 대한 관심은 줄었노라고. 나이가 어릴수록 책보다는 디지털기기에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듯싶다. 터치 한 번에 웹사이트, 동영상, 게임, 디지털로 된 책까지 휙휙 바꿔볼 수 있으니 무겁고 빽빽하게 글자가 들어찬 책에 관심이나 있을까. 서점도 마찬가지다. 값싸고 편한 온라인 쇼핑은 동네 서점을 멸종시켰고 대형 서점만 남아 있는 것이 현대의 우리 모습이다. 몇몇의 사람들은 종이책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나 역시 종이책을 훨씬 더 사랑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 특히 유행에 민감하고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우리나라―최신  기술 자체를 흡수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신 기술로 생산된 제품을 흡수한다는 것, 그에 반하는 것들은 빨리 사장시켜버리는 것은 우리만큼 빠른 나라가 있을까―에서만큼은 서점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서점이라는 말 자체가 향수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로빈 슬로언의 『페넘브라의 24시 서점』은 어쩌면 이런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자체도 트위터 회사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하니 오늘날 서점의 이야기로는 딱 맞지 않은가. 실제 이 이야기는 오래된 고서점과 구글러와 컴퓨터라는 디지털로 대표되는 이야기가 맞물려 펼쳐진다. 이렇게 배경만을 놓고 보자면 현실에 너무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판타지에 더 가깝다.

평생 <용의 노래 연대기>라는 한 권의 책만을 읽은 클레이 재넌은 디지털 회사에서 실직 후 우연한 기회에 '페넘브라 24시 서점'의 구인광고를 보고 야간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손님도 오지 않는 이 서점이 왜 24시간 문을 여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점 뒤쪽의 책을 한밤중에 헐레벌떡 달려와 빌려 가는지 궁금해 하던 주인공은 서점의 규칙을 어기고 비밀의 책을 열어보게 되는데, 책은 수상한 암호 같은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컴퓨터의 3D 모델링 언어를 이용해 이 암호를 해독해 냈지만 이 일을 계기로 500년 동안 영업을 해 오던 페넘브라 서점을 불은 꺼지고 주인은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재넌은 친구들과 행방불명된 페넘브라 씨, 그리고 500년에 걸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날로그적인 활자와 디지털의 이야기가 맞물려 있지만 뒤로 갈수록 판타지 어드벤처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며, 그 시작만큼은 흥미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비밀결사처럼 보이는 단체의 암호 해독을 통해 영생을 뒤쫓는 이야기와 그 진정한 의미가 밝혀졌을 때의 그 허탈함이라니, 활자가 가지는 의미를 안다면 이런 뻔한 클리셰였던가 하고 씁쓸한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먼지가 훌훌 날리는 고전적 암호로 가득한 고서와 디지털 북스캐너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니, 우리는 지식에 관한 한 아날로그 최후의 보루인 종이책과 최첨단의 기술 사이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 즐거운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활자의 발명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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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샤일로에서 본 것 - 미국 남북 전쟁 소설선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2
앰브로즈 비어스 지음, 정탄 옮김 / 아모르문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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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욕망의 발현이다. 그 욕망의 시작은 한없이 복잡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종교전쟁이나 영토분쟁, 자원전쟁처럼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한없이 단순해 보인다. 미국에서 벌어진 내전인 남북전쟁(The Civil War)도 마찬가지다. 노예해방이라는 거룩한 목적을 가진 전쟁으로 단순히 알려져 있지만 그 내면이 가진 욕망은 역시 복잡하다. 실제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남부에서조차 노예를 소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노예제에 대한 우월함과 부유함의 상징에 대한 도전에 반발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남부의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조차도 노예제도는 남부의 자존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을 터, 이것이 훼손되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라도 막으려는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실제로 노예해방 이후에도 흑인들에 대한 대우가 거의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물론 외적으로 드러난 그 의미만큼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복잡한 욕망이건 단순한 외면이건 전쟁의 모습은 어느 것이나 똑같다. 참상이다. 부모형제를 잃고 연인을 잃고, 자신의 신체마저 잃어버리는 비극 이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목적이 숭고해도 그 과정은 참혹한 모습들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이다.

미국 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전쟁이라는 단순한 이면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도 마거릿 미첼이라는 작가가 아닌 비비안 리의 스칼렛 오하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끝도 없는 비극일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화의 배경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앰브로즈 비어스는 낯선 작가다. 그는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였고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신념과 개인적인 사정으로 군에 자원입대하여 남북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은 비어스가 일생에 겪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어스가 쓴 단편들은 공포와 남북전쟁에 관한 이야기들로 전쟁에 대한 것 뿐 아니라 공포에 관한 이야기들도 그가 겪은 전쟁의 생생하고 공포스러운 체험이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말년에 멕시코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된다. 『내가 샤일로에서 본 것』은 비어스가 쓴 남북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이기에 그 생생함이 더하다. 소설이기보다는 전쟁의 단면들을 기록한 수기에 가깝다. 실제로 이야기 속에는 전쟁에 대한 참상들과 더불어 전쟁 자체의 아이러니함과 인간의 비이성성에 대한 냉소적 풍자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런 냉소도 전쟁이라는 비현실적인 참혹함에 이성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연민에 가깝다.

“허! 과연 그 무엇이 이들을 홀려 전쟁이 지원하게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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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연애수업 - 31편의 명작 소설이 말하는 사랑과 연애의 모든 것
잭 머니건.모라 켈리 지음, 최민우 옮김 / 오브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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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작품들이 사랑을 주제로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를 제외하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 때문에 즐거워하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지 않았을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들락날락하는 것. 회사에서 연애하고 직장에서 연애하고 모든 것이 연애로 통하는 우리나라 TV 드라마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일 터, 사랑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한 것뿐이라는 말도 어쩌면 영 틀린 것이 아닌 것이다. 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전부터 현대의 소설까지, 비록 사랑이 주가 되지는 않더라도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축이었으며 사랑과 연애는 종교, 이념, 법률보다 위에 있다. 사랑이여 영원할지니.

『제인 오스틴의 연애수업』은 두 남녀 작가인 잭 머니건과 모라 켈리가 엄선한 31편의 고전소설을 통해 입체적이고 생생한 소설 속 인물들의 실전을 통해 사랑과 연애를 이야기한다. 고전이 달리 고전일까, 현대의 모든 사랑의 클리셰는 고전으로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 서로의 사회적 지위가 사랑을 방해하거나―『오만과 편견』, 아들의 연인을 질투하고 갈라놓으려는 엄마나―『아들의 연인』, 불구가 된 남편 대신 섹스 파트너를 찾거나―『채털리 부인의 사랑』, 바람둥이와 불륜을 저지르고 버림받아 자살하거나―『보바리 부인』처럼 고전에는 온갖 사랑과 연애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약간은 억지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남성들의 캐릭터를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부분도 있다. 헤밍웨이와 멜빌의 소설에서 마초적이고 알코올 중독자이며 집착하는 캐릭터들 역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등장한다. 흰 고래에 대한 집착이 여성과의 관계로 어떻게 치환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고래잡이 남편을 둔 여자라면 다른 작살잡이도 많다는 친절한 충고까지 해준다. 이처럼 몇 작품에서는 무리하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는 억지가 돋보이기도 한다. 채털리 부인은 억제된 성욕의 분출보다는 섹스 후에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에 촛점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은 『제인 오스틴의 연애수업』이다. 원제의 경우 <Much Ado About Loving>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Much Ado About Nothing, 헛소동>의 패러디임에 분명하고 연애소동쯤으로 번역이 될 듯하다. 책이 잘 팔려야 하는 출판사의 절박한 처지가 이해되기는 하지만 책의 제목마저도 요즈음의 유행이 되어버린 강좌나 강의 식으로 철저히 따르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긴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제목이 오히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소개되는 고전들에는 모든 연애의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연애가 전부는 아니다. 목차를 쭉 훑어보고 반드시 해당되는 책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당 작품에 대한 바보 같은 인상이 심어질 우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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