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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왜 읽을 수 없는 책은 더 탐하게 되는지.

절판되어 무지 비싼 몸값으로 애간장을 녹이더니 드디어 복간됐다.
만세!

 

알라딘 책소개

현대 독일어권 문학의 거장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쓴 자전적 소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나눈 기이한 우정에 대한 회고록이다. 소설치고는 짧지만 그 문체의 독특함, 광기와 천재가 기묘하게 결합된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병적인 인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 질병과 죽음, 예술에 대한 서늘한 통찰, 오스트리아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의 장광설 등은 베른하르트 문학의 정수를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배수아 작가의 개성 있는 번역은 베른하르트 소설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줌파 라히리 <저지대>

 

진심으로 다행이다.

3월 마지막 책이라서 이 목록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이.

줌파 라히리라면 무조건이다.

 

알라딘 책소개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선택으로 판이한 삶을 살아가는 두 형제와 가족의 70여 년간의 일대기다. 부조리와 사상과 혁명으로 어지러운 인도와 제3국 미국이 배경인 이 작품은, 누군가의 자식이자 형제이자 남편인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남은 가족이 어떤 상실감을 겪어나가는지, 거기서 어떤 선택이 비롯하며 어떤 인생행로가 뒤따르는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직선적으로 그려나간다.

 

 

 

 

 

 

 

데이비드 웨버 <바실리스크 스테이션>

 

SF 시리즈인 미래의 문학 여섯 번째 책이다.

미래의 문학, 이 과감하고도 멋진 시도를 사랑한다.

여성 함장이 등장하는 아너 해링턴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첫권이다.

이후 20여 년간 시리즈가 계속 이어져 본편만 14편, 하위 시리즈들도 20여 편이 출간됐다는데... 과연 얼마나 번역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알라딘 책소개

1990년대 스페이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아너 해링턴 시리즈'의 제1편으로, 1993년 미국에서 출간된 후 미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베스트셀러이다. 국내에서도 20여 년간 SF 독자들이 출간을 손꼽아 기다려온 책이기도 하다. '아너 해링턴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이자 국가 간 전쟁, 해군을 주요 소재로 삼는 밀리터리 SF이다. 군대를 다룬 작품치고는 이례적으로 여성 함장이 등장하는 이 시리즈물은, 주인공 아너 해링턴이 각종 고난을 헤쳐 나가면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상층부로 올라가는 단계를 그리고 있다.

 

 

 

허버트 조지 웰스 <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단편선이 선택하는 작가들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대실 해밋(추리),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공포),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SF)까지!

황금가지판 러브크래프트 전집이 있는 데다가 장편 외에 단편을 읽어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 허버트 조지 웰스 편을 기꺼이 선택한다.

 

알라딘 책소개

아이작 아시모프, 프랭크 허버트, 어슐러 르귄, 아서 클라크, 브라이언 올디스 등 영미권을 비롯해 카렐 차페크, 예브게니 자먀찐 등 20세기 SF의 대표 작가들이 웰스의 작품들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간증하고 그의 작품에 경배를 아끼지 않고 있다. 'SF의 아버지' 웰스가 남긴 작품들과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소설과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대중문화의 영역에 오늘날에도 쉬지 않고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표제작인 '눈먼 자들의 나라'를 비롯해 이 책에 실린 33편의 단편들은 웰스가 가장 왕성하게 단편소설을 집필했던 1894년부터 1909년까지의 작품 중에서 작가가 직접 고른 작품들이다. 웰스는 이 책이 자신의 단편선으로서 '결정판'이라고 서문에서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치고 해문 빨간책을 한 권씩 사 모았던 추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알라딘 책소개

전 세계적으로 40억 부가 넘게 팔린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개인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가 직접 쓴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는 100권이 넘는 장편 소설과 단편집과 희곡을 썼으며, 유네스코가 세계 번역 현황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만든 도구인 '번역 인덱스(Index Translationum)'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들은 103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이다. 그녀는 1967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영국 추리 협회의 회장이 되었으며 197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데임(남자의 기사 작위에 해당) 작위를 받아 데임 애거서가 되었다.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본인의 나이가 60세이던 1950년에 쓰기 시작하여, 총 15년에 걸쳐 75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써 내려간 회고록이다. 이 글은 그녀의 사후 1년 후인 1977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며, 작가로서의 인생뿐만 아니라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두 번의 결혼, 두 번째 남편 맥스 맬로원과 함께한 고고학 발굴에 대한 이야기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경험들로 가득하다. 책 내부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총 30장이 넘는 사진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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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아포리즘
에릭 호퍼 지음, 정지호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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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aphorism)―신조, 원리, 진리 등을 간결하고 압축적인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금언(金言), 격언(格言), 경구(警句), 잠언(箴言) 따위를 이른다. 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진리와 같은 짧은 경구를 의미한다. 흔히 잘 알려진 아포리즘이라면 히포크라테스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나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등과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속담이나 경구 같은 것도 아포리즘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창작의 주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아포리즘과 다르다. 이것은 작지만 매우 큰 변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집단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경구나, 잠언 등이 매우 보편적인데 반해 아포리즘의 경우는 개인적이고 내밀하다. 이것은 바로 개인의 경험과 사유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포리즘은 창작자의 삶에 무게가 실리게 된다.

『인간의 조건』은 평생을 길 위에서 일하며 사색한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의 두 번째 철학적 아포리즘의 결과물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색의 결과물인 이 책은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본질과 조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릭 호퍼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 창조에 대한 욕망 역시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 그 불완전성을 메우기 위해 사색과 성찰을 한다고 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자연은 완성되고 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무언가 변화할 필요 자체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은 태생부터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자기 완성을 거쳐 자연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창조는 곧 그 불완전함에 있다. 이 말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의 강렬한 대비인 동시에 인간이 인간인 이유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간의 불완전성은 완성된 것으로 나아가려는 욕망 이외에도 다른 것에 눈을 돌리게 한다. 사치, 탐욕, 분노 등과 같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함을 향해 가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완전한 상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평생을 불완전함 속에서 고민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자연 속에 속해 있지만 자연의 실수로 비롯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은 길지 않은 글귀에 에릭 호퍼 자신의 삶과 생각을 녹여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할까. 애초에 그런 시간, 아니 그런 생각 자체를 잊고 살지 않을까. 자신이 만들어 낸 아포리즘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나는 나의 삶을 얼마만큼 고민하고 있을까.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답변은 소리나 몸짓으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을 말로 해야 한다. 인간이 처음으로 질문을 했을 때, 드디어 인간성이 완성되었다. 사회 침체는 답변이 부족할 때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결여될 때 나타난다.” (132p)

“인간사에 예측 불가능성이 내재하는 이유는 주로 인간적 과정의 부산물이 생산물보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174p)

“우리는 홀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일까? 혼자 있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1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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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남자들의 이야기 댄디즘 - 최초의 멋쟁이 조지 브러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
쥘 바르베 도르비이 지음, 고봉만 옮김, 이주은 그림 해설 / 이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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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멀지도 않은 과거, 잘 생긴 외모에 반항아 기질을 물씬 풍기던 제임스 딘에 열광했던 것이나, 말보로 광고 간판처럼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담배를 문 거친 모습은 남자들의 이상향이자 거친 마초의 세계였다. 특히 이 마초의 세계는 가꾸지 않는 원시적인 야생의 모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어떨까. 남자들이 화장을 하고 연약한 모습에 깔끔하고 멋스러운 옷을 즐겨 입는다. 댄디의 사전적인 의미는 '멋을 많이 부리는 남자'일 뿐이며 현재의 남성의 모습은 댄디일 것이다. 이들-특히 어릴수록-은 옷을 사는데 드는 돈을 아끼려 하지 않고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 하며 남들의 시선에 크게 신경을 쓴다. 이것이 댄디(dandy)일까? 또한 문학에서 댄디는 세련된 문화취향을 가지고 기존의 사회와 모럴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 나르시즘 등으로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댄디일까? 댄디가 패션에 국한된다면 우리는 젊은 댄디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일 테고, 문학으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자칭 댄디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댄디의 나라인가? 쥘 바르베 도르비이 <멋쟁이 남자들의 이야기 댄디즘: 최초의 멋쟁이 조지 브러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는 댄디의 시작과 삶을 통해 실체적인 이해를 하려 한다. 특히 이 책은 <댄디즘과 조지 브러멀>을 번역하고 고봉만의 해설과 이주은의 그림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 글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을 그림이 이해를 도와준다. 

댄디의 탄생 배경을 본다면 댄디를 하나의 모습-특히 패션으로만 본다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댄디는 산업혁명과 계급혁명 시절의 서구의 시민사회가 낳은 독특한 산물이다. 당시 영국의 상류 사회의 젊은이들에게는 독특하면서 사치스러운 스타일이 유행했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고 잠깐의 우스꽝스러운 현상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베르베는 이 시기의 젊은이들이야말로 댄디의 원류이며 핵심이고 그 태도와 심리에 담긴 사회학적 현상을 읽어내려 했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는 그들 자신을 스스로 고립되게 만들었다. 신 부르주아의 속물근성, 전통과 권위를 내세우던 귀족들의 몰락, 유행만 따르는 몰개성의 대중들, 댄디들은 이들 어디에서 섞일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무례함과 냉담함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을 세상에서 분리했다. 저자는 댄디의 원조인 조지 브러멀의삶을 통해 댄디를 조명한다.

어떤 것이라도 유행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면 실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 댄디의 껍데기는 패션이다. 유행에 민감하지만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돈이 많으면 명품으로 치장을 한다. 이것이 댄디인가? 댄디는 옷을 잘 입는 남자가 아니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어도 댄디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댄디즘이 존재하지 않는 댄디는 껍데기일 뿐이며 댄디즘은 삶의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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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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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그리 낭만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첫눈에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외모뿐이다. 외모에 이끌려 어떤 감정이 순간적으로 들끓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감정이 상대가 가진 외모로 필연코 품게 마련인 착각 혹은 환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오해는 위태롭다. 환상 속 그대는 언제든 실망스러운 현실로 추락할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세워놓은 환상과 그대가 진짜 서 있는 현실의 간극이 적을수록 일시적인 감정은 ‘추락’ 속도를 늦춰 진정한 사랑으로 견고하게 ‘안착’할 수 있다. 외모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려면 시간을 들여 그가 어떤 인격과 성품과 취향 등등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그에 민감하게 조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 시작이 외모였더라도 외모는 상관없어져야 사랑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스 에리히 노삭은 『늦어도 11월에는』(1955년)에서 첫눈에 서로의 영혼까지 들여다봤다고 확신하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죽어버린 여자의 시점으로 서술함으로써, 운명적인 상대라는 것을 첫눈에 감지한 그 사랑의 결말이 죽음임을 아예 처음부터 설정해 놓고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로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년)처럼 서술자인 ‘나’가 사자(死者)임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 대해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독자는 책장을 거의 모두 넘긴 후 네다섯 장 남겨두고서야 지금껏 내내 이야기한 여자가 이미 죽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나는 노삭의 의도를 어떻게 처음부터 알았을까? 어쩌면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의 김을 새게 만들 수도 있는 폭로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출판사 보도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나 말고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추리소설의 중요한 반전을 떠벌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디 화내지 마시길!

『늦어도 11월에는』의 첫 문장은 “우리는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이다. 부유한 유부녀 마리안네가 이혼남인 희곡작가 베르톨트 묀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러고 나서 곧이어 “아니지, 차근차근 얘기해 나가야 한다”는 문장으로 이어져 마리안네는 베르톨트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떠올린다.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처음 만난다. 마리안네는 그 문학상을 제정한 기업가 남편 대신 참여한 아내로, 베르톨트는 그 문학상을 받는 작가로. 그들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베르톨트가 곧장 마리안네에게 다가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쏟아놓은 고백이 그들 사이의 첫마디였다. 그리고 마리안네는 베르톨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그 고백을 듣자마자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됐을 뿐인 그들의 첫 만남과 베르톨트의 고백과 마리안네의 행동 사이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연결 고리가 없다. 마리안네가 수상식에 참여하기 전에 베르톨트의 작품을 미리 읽어보긴 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읽으면서 영혼의 깊은 교감을 느꼈다든가 하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이고 숙명적인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르톨트는 수상식장에서 마리안네를 보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해 까맣게 몰랐다. 그러나 노삭은 이다지도 턱없어 보이는 사랑, 이해받지 못하는(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성적 혹은 논리적으로! 서로 사랑이라는데 이성이나 논리, 상식이 웬 말이야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사랑에도 다른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뭔가가 분명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입으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수상 강연을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탁자 아래로는 다리를 잠시도 가만두지 못한 채 발 장난을 하는 베르톨트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직감한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금방 눈에 띄는” “좀 드문 사람”, “품위 있는 귀부인”임을 첫눈에 알아본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의 특별한 ‘품위’에 대해 줄곧 상기시키는데, 초면에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고백까지 하게 만든 그 품위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단지 그들은 ‘문학상 수상식장’이라는 공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둘만 억지로 끌려 나온 이질적인 존재임을 서로 단박에 알아차렸다고 짐작할 뿐이다. 속마음을 숨긴 채 적당히 섞여드는 척하지만, 그 ‘적당히’를 잘 견디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배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들뜨게 되어 있고 또한 동류를 금세 알아본다.

베르톨트가 받은 ‘문학상’ 이름은 ‘상공인협회’ 문학상이다. ‘상공(商工)’과 ‘문학’이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편견일지 모르지만 왠지 내게는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 문학상을 제안하고 거액의 상금을 후원한 사업가는 마리안네의 남편 막스 헬데겐이다. 막스에게 문학을 향한 열정이나 애정, 혹은 사명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문학상 제정이 자기 명성을 높여주고 자기 기업을 좋은 이미지로 광고하는 기회가 되어줄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뿐이다. 그가 익명으로 남겠다고 면치레했던 것도 수상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상공인협회 문학상이 막스의 작품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막스는 돈을 투자해 자신이 얻고 싶었던 것을 모두 얻었다. 누구의 어떤 작품이 수상했는지는 자기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사업상 중요한 일을 밀쳐두고 수상식장에 참석하는 것은 더더욱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막스는 대신 아내 마리안네를 밀어 넣었다.

수상식장에서 남편을 대신하는 마리안네는 결코 ‘마리안네’ 자신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마리안네에게 궁금해 하는 것은 ‘마리안네’가 아니라 ‘막스’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마리안네의 생각이 아니라 막스의 의견이다. 베르톨트 역시 당분간의 생활비가 아쉬워 마지못해 수상식을 참고 있을 뿐, 자신이 그들만의 성대한 교양 잔치에 근사한 들러리가 되어주는 역할이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마리안네는 뜨거웠으나 불안정했던 첫사랑의 상처에서 도망치기 위해 성공한 기업가이자 막대한 자산가인 막스의 견고한 성채에 안착해 물리적인 안정을 얻은 대신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 마리안네가 베르톨트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경계하지 않고 100퍼센트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그 말이 그녀조차도 억누르느라 한동안 잊었던 자신을 화들짝 일깨웠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 말이 그녀에게는 이제껏 숨죽이며 기다려온,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버리고 다르게 살아보라는 일종의 신호였을지도.

그리하여 그날 밤, 마리안네는 자신을 다시 발견해 준 베르톨트와 함께 훌쩍 떠나버린다. 마리안네가 가정을 순식간에 버리는 과정(평범하지 않다!)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과연 그들은 황홀한 고백과 사랑에 대한 확신만큼 행복하기만 할까? 그들은 알아가면서 사랑하게 되는 보통 연인들과 달리 먼저 사랑하고 나서 뒤늦게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밟는다. 커피에 설탕을 넣는지, 안 넣는지부터 지나간 사람, 어린 시절부터 마리안네가 좋아한 자장가,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베르톨트의 어머니, 그리고…… 서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에 대해 불안해지는지, 그리하여 결국 무엇을 원하는지까지. 그 단계는 별로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괴로우며 이내 슬퍼진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영혼이 교감하는 듯했던 마법의 효력은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으로 인해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서로 숨기는 ‘배려’는 상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가령 마리안네는 다만 베르톨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그가 쓴 글이라도 읽으려 했을 뿐인데 베르톨트는 질색한다. 베르톨트가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글을 완성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라는 것을 마리안네는 몰랐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일에 대해서는 마리안네의 관심조차 거부한다. 그가 마리안네와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늦어도 11월에는……” 일종의 대가로 주어질 미래이다.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지만, 약간의 돈과 낡은 폭스바겐 한 대로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미래만 말이다. 마리안네는 앞뒤 재지 않고 충동적으로 대담한 고백도 서슴지 않는 남자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힐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남자가 약속하는 11월은 멀었고, 마리안네는 지금 그의 곁에서도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불행해진다. 마리안네가 스스로를 위해 그의 곁에서 존재하려 했다면 그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리안네는 그를 위해 존재하고 싶었고, 그를 떠올리면 자신은 ‘방해, 속박, 구속, 짐, 잘못’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리안네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 때마침 시아버지가 그녀를 회유하러 찾아왔고 그것은 그녀에게, 막스를 떠나올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싸는 것으로 베르톨트를 버리고 막스에게 돌아가도 된다는 신호가 되어준다. 베르톨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고 말하지만 마리안네는 처음에는 그를 버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마리안네가 베르톨트 곁에서 더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되돌아온 자리는 더더욱 끔찍했다. 그녀의 외도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가짜로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리안네는 더욱 움츠러든 채 저들이 마음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까 두려워하면서 자신이 ‘극복’했음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모욕감 속에 질식해 간다. 드디어 11월, 베르톨트가 마리안네를 막스에게 잠깐 맡겨둔 것처럼 그녀를 당당하게 찾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버렸다는 것을 망각한 채 그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잠깐 떠나 있었다고, 그가 자기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생각한다. 베르톨트가 찾아왔고, 마리안네는 이번에는 가방조차 쌀 필요 없이 막스 앞에서 두 번째로 미련 없이 베르톨트를 따라나선다.

어쩌면 마리안네가 막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제멋대로 편리하게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떠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남편을, 다른 남자를 기다리는 간이역으로 취급하다니! 마리안네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막스도 마리안네를 사랑하지 않았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막스에게 마리안네는 ‘완전한 가정’이라는 평판을 완성해 주는 역할이다. 마리안네가 처음 집을 떠났을 때 막스가 취한 행동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의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가정이라는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발생한 불의의 사고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을 뿐이다. 마리안네의 귀가를 환영한 것도 아내의 외도까지 감싸주는 남편의 넉넉한 품이 아니었다. 아내의 부재를 요양으로 눈속임해 둔 임시방편이 들통 나서 자신이 쌓아온 명성에 흠결이라도 생길까 봐 초조해 하던 막스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단지 마리안네와 막스의 셈이 맞았다가 어긋나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막스의 억울한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막 집을 나선 마리안네와 베르톨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나서 그가 침착하게 발휘한 사업가 기질은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든다.

마리안네처럼 사랑해 보지 않는 이상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사랑이라고 하니까 일단 그렇게 믿기로 한다. 『늦어도 11월에는』를 처음 읽어나갈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들의 사랑이 끝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폭로는 황홀한 고백에 죽음의 씨앗부터 심어놓은 노삭이 먼저 했음을 알겠다. 마리안네는 자신과 함께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베르톨트를 데리고 수상식장을 빠져나와 자기 집으로 향하다가 “죽음은 영원하다”는 위험 표지판에 문득 눈길을 둔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될까? 그리하여 사랑은 죽음처럼 영원해질까? 어쩌면 베르톨트가 낡은 폭스바겐을 사기 위해 무대에 올린 희곡(프란체스카, 파올로, 말라테스타, 단테 이야기)에 노삭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지만 노삭이 왜 그들 연인을 위해 죽음을 미리 예비해 두었는지 잘 모르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결국 하나의 욕구에서 잉태한 것이라지만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다. 죽음이 영원할지라도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이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사랑하는 순간 죽었기 때문에 사랑의 기억만 남더라도,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이 통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마리안네와 베르톨트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사랑도 남루해졌을 것이다. 곧 낡은 폭스바겐은 고장 날 테고 약간의 돈도 바닥나겠지. 진짜 사랑이든 더는 아니든, 사랑의 과정이 뒤바뀌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행복해지기 위해 행동할 용기가 되어주고, 그로 인해 좀더 불행했을지라도 행복했다면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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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
파스칼 보나푸 지음,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성(性)은 욕망이다. 오죽하면 식욕,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3대 욕망의 하나로 말할까. 하지만 이런 욕망, 특히 성에 대한 욕망은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일까? 성에 대한 대부분의 것들은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같은 이유로 이런 은밀함을 훔쳐보는 것에 대한 쾌감은 강할 수밖에 없다. 관음증이란 ‘에로틱한 광경을 몰래 엿보면서 만족을 느끼는 행위’인데 이런 감추어진 것을 훔쳐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맞다. 부끄러워도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은 관음증 환자다. 그리고 이런 에로티즘은 여성의 나체―성행위가 아닌―를 훔쳐보는데서 극대화된다.

파스칼 보나푸의 『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는 제목과 표지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거울을 보고 몸을 단장하는 여자와 열쇠구멍을 통해 그것을 훔쳐보고 있는 남자, 그림을 보는 행위 역시 관음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는 책의 서두는 놀라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이 만든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훔쳐보기를 가장 정확하게 되새길 수 있는 방법은 그리는 것이다. 글로 기록된 욕망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이게 만들지만 그려진 욕망은 상상보다 더 에로틱하다. 사진처럼 적나라한 드러냄도 그 풍성한 색의 욕망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서양미술사의 누드화를 이야기하고 욕망을 이야기한다. 요즈음 같은 성이 넘쳐나는 세상에 누드화 정도로 선정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누드화는 얼굴과 몸으로 드러나는 욕망을 억지로 잠재우며 감상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드화가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서도 나체는 원죄였고 금기였다. 하지만 이후 이교의 조각상들의 무수한 발견과 신학의 새로운 해석―신의 형상대로 빚은 인간의 육신은 아름다운 것이라는―이 등장하면서부터야 여신과 신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파스칼 보나푸의 책은 여성의 몸치장의 과정을 서양사의 누드화로 대입해 보여준다. 마지막 양말 한 짝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물에 몸을 담근 후 몸을 말리고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마지막 치장을 한다. 이런 여성의 행위에 대한 그림, 특히 누드화는 욕망의 기록이다. 누드화뿐만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욕망의 기록일 것이다. 이는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미술의 역사, 즉 그림이 욕망이고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라면 누드화야말로 그 꼭대기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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