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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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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예술 분야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작품이 크게 성공하고 끊임없이 따라붙는 성공작의 꼬리표는 작가에게 힘보다는 부담을 주는 것이 사실일 것이고, 과거 사례만 보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물며 적지 않은 나이에 낸 첫 작품이 그렇다면 어떨까. 천명관에게 『고래』는 그런 작품일 것이다. 문단과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그야말로 혜성같이 등장한 천명관에게 『고래』는 뛰어넘기 힘든 꼬리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장편 『고령화 가족』에서도 천명관의 이야기는 여전했지만 『고래』를 기준점으로 삼은 독자들의 눈높이에는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명관을 『고래』에서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들일 것이다. 『고래』가 이야기의 정점이었을 뿐 천명관은 자신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고 있다. 그리고 7년 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단편집인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어떨까?

십일 톤 덤프트럭을 몰며 지갑에 두툼히 돈을 넣고 다니며 한때 잘 나가던 경구가 도박에 빠져 아내와 이혼을 하고, 트럭까지 빼앗기고 찾아든 곳은 냉동 창고 노가다였다. 일을 끝내고 얻은 꽁꽁 언 냉동 칠면조 덩어리에 경구는 어쩔 줄을 모른다. 돌처럼 딱딱한 칠면조 덩어리는 삶아먹는 건지, 몇 시간을 삶아야하는지도 모른다. 하루 일당만큼 값비싼 칠면조이지만 경구에게는 불길한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외상값을 닦달하는 노래주점 최 사장과 실랑이를 하다 칠면조 덩어리로 최 사장을 내리친다. 당구장 앞에 세워진 남의 트럭을 타고 달리며 조수석에 놓인 칠면조 덩어리를 보고 아내에게 내밀며 피식 웃는 아내를 상상한다. 아이와 함께 다리를 뜯는 모습을 상상하며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그래, 까짓것. 거칠게 한판 살다 가는 거다. 인생 뭐 있나? 백반 좀 먹고 빠구리 좀 치다 가면 그뿐이지.” (p.110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다른 단편들도 다르지 않다. 밥을 먹고 소화제를 먹고,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섹스를 위해 비아그라를 먹고 비타민제를 먹어야 하는 화학적 인생들. 그럼에도 보형물을 넣어야 되는 물리적 인생이 아니라고 자위하는 사람들. 이 단편집의 등장인물들은 무언가를 잃고, 삶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사람들이다. 삶의 목표는커녕 하루하루가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독히도 우울하고 어둡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건지도,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디로든 향하고 있다.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다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 떨 일도 없단다.” (p.182 우이동의 봄)

작가의 첫 번째 단편집인 『유쾌한 하녀 마리사』와 이 책은 7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닮은 듯 다르다. 전 단편집이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부조리와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계에서 어쩔수 없는 개인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 더 진지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두 단편집 모두 녹록치 않은 하루하루의 삶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비극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닮아 있다. 본 단편집이 더 무겁고 덜 유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 삶의 모습과 더 닮아 있기 때문일까. 우리 삶이 왜 이렇게 우울해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교과서에나 어울릴 법한 허울 좋은 말들인 ‘노력’, ‘정직’이 이 사회에 통용되기나 할까?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엉뚱하고 극단적인 방법뿐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삶은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우리 삶은 피곤하고 피폐해졌다. 지지고 볶던 마누라, 싸우고 집을 나가도 슬그머니 돌아와 있던 마누라와 이혼한 지 칠 년이나 지나버린 것이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됐다(p.121).”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고, 뭐 하여간 그렇게 된 거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우리 대신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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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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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낙관주의에 관한 짧은 ‘농담’ 하나로 루드빅은 당시 낙관적인 사회주의에 희망을 품고 있던 사회와 대학에서 축출당하고 인생은 송두리째 엉망이 된다. 농담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와 세계의 경직성에 대해 이야기하던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그것을 넘어 농담이 거짓말이 되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6월의 어느 날, 파리의 거리를 지나던 알랭은 배꼽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차림의 아가씨들을 보며, 배꼽에 여성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남자의 에로티시즘에 대해 생각한다. 허벅지와 엉덩이가 매력인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고 정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꼽은 어떻게 매력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때 다르델로는 자신의 몸에서 발견된 의심스러운 증상들이 암 때문이었는지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가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는 웃음기 가득한 의사의 얼굴을 보고 자신은 더 오래 살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르델로는 우연히 만난 직장 동료인 라몽에게 자신은 암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 거짓말에 다르델로는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거짓말, 오히려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는 거짓말에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까.

자기 거짓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p.19)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거짓말을 한다. 우리 주위만 보아도 흔한 일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학창시절, 군대에 대해서도 실제 자신이 겪은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사실은 자기 자신이 겪은 일은 그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히. 실제 부모에게 폭행을 당한 사람이 그에 대해 덧붙여서 거짓말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부모에게 회초리나 꿀밤을 맞은 사람이 훨씬 부풀려 이야기를 한다. 암에 걸리지 않은 다르델로가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자신이 현재 안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도감 때문에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다르델로가 실제로 암에 걸렸고 자신은 암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한들 그의 기분이 나아졌을까? 다르델로의 거짓말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분마저 좋아질 수 있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p.147)


밀란 쿤데라의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그의 첫 번째 이야기인 <농담>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것이 첫 이야기라면 농담을 하며 즐거움을 느끼고 그 농담이 거짓말이 되는 세계가 마지막 쿤데라의 세계다. 80이 훌쩍 넘은 노작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농담도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거짓말도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삶이 존재가 무의미하고 하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즐거운 것 뿐만이 아니라 힘들고 괴로운 것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애정이 아닌-이다. 그런 이유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노인들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은 결국 삶이 무의미하며 보잘 것 없는 축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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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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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해버렸다. 세상은 더 이상 수줍음을 바라지 않고 머뭇거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더 튀어야 살 수 있고, 남들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주목받는다. 세상이 이러니 사람들도 카멜레온처럼 변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대를 겁내지 않는다. 아니 모든 것을 겁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부일 뿐 세상은 여전히 ‘신중함’으로 가득하다. 그 신중함은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애쓰는 것, 남들과 충돌을 하지 않고 자기가 손해를 감수하는 것, 포기하고 조용히 사는 것. 이승우의 <신중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다. 신중한 사람, 남들에게 ‘싫다’고 하지 못하고 자기에게서 그 이유를 찾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얼핏 신중한 사람이 아니라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한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닌, 무언가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현상을 받아들이고 자기 가슴만 쿵쿵 치는 신중한 사람들.

표제작이기도 한 [신중한 사람]은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는 Y의 이야기다. 그는 아내와 결혼할 때부터 전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단월에 집을 지었다. 하지만 스물 한 살 된 Y의 딸은 시골에서 사는 것을 거부했고 신중했던 Y는 신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고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자신의 집을 이웃에게 관리를 맡긴 후 해외로 떠난다. 3년이 지난 후 돌아온 집은 아끼던 정원이 엉망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낯선 남자가 살고 있었다. 자신의 왕국이 무너진 Y는 장팔식을 내쫒지도 못하고 엉망이 된 정원만을 신중하게 복구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무너진다.


신중한 자는 보수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신중하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며 산다. 현상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길 수 있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때때로 비겁해진다. 그럴 때 먹은 것이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서 가끔 쿵쿵 소리 나게 가슴을 때렸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신중한 사람 p46)


유는 곧 대도시로 이주할 예정이었다. 회사를 옮기며 일이 잘 풀리지 않던 유에게 외삼촌의 제안은 삶의 돌파구였다. 유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살던 집을 정리했다. 외국의 삶에 대비하기 위해 여관방에 자리를 잡고 비자를 신청했다. 비자 업무가 늦어지고 여관 주인의 일처리 때문에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늦게 비자를 받게 된 유는 떠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했지만 유에게 집행관이 찾아와 목을 누른다. 예전의 범죄로 감옥에 있다 풀려난 유였지만 행정착오로 형기가 남았다는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여관 주인은 그에게 아무 말도 도와주지 않고 야릇한 미소만 남길 뿐이었다.


이승우의 이번 이야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한 그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속의 인물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잃는다. 익숙한 곳, 있어야 할 곳을 잃고 주변에서 자신의 자리를 바라만 보는 이야기, 그곳에 가기에는 너무나도 신중해서 가슴만 치고 애처롭게 바라만 보고 있다. 자신의 집을 두고 월세방을 전전하거나 외국의 삶이 눈앞에 있는데 여관방에서 붙잡혀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신중함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이승우는 집요할 정도로 한계까지 몰아붙인다. 여기에서 필요한 장치는 우유부단한 주인공만이 아니다. 제아무리 신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울릴만한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대화가 통하지 않는 타자다. 대화는커녕 침묵하기까지 하는 타자다. 끔찍한 소통의 부재는 부자간에 칼을 품게 만든다. 이런 세상의 불합리에 소설의 주인공들은 묵묵히 견디며 자신은 신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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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M. 허치슨 엮음

<글쓰기를 말하다 - 폴 오스터와의 대화>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 폴 오스터를 손꼽은 적은 별로 없지만 그의 책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왜지? 이 책도 궁금하다.

 

 

알라딘 책소개

폴 오스터의 주요 작품들 거의 모두를 소개하는 인터뷰 모음집인 까닭에도 불구하고 성장소설 한 편을 읽은 것과 같은 감동을 주며, 글쓰기에 대한 책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젊은이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폴 오스터는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글쓰기에서 돌아오는 보상은 거의 없으며,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또한 엄청난 고독의 경지를 사랑하는 취향을 갖춰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과도한 선인세로 악명 높은 하루키의 인기를 내가 조금이라도 더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잠자>는 굉장히 궁금하다.

 

 

출판사 책소개

제목처럼 ‘여자 없는 남자들’을 모티프로 삼은 이번 소설집에는 말 그대로 연인이나 아내로서의 여성이 부재하거나 상실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병으로 인해 사별하거나(「드라이브 마이 카」),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이혼하고(「기노」), 본인의 뜻으로 일부러 깊은 관계를 피하는 경우도 있으며(「독립기관」), 혹은 이유도 모르는 채 타의로 외부와 단절되기도 한다(「셰에라자드」).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구성의 「예스터데이」와 카프카 소설 속의 세계를 무대로 한 「사랑하는 잠자」를 제외하면 모두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데, 그 때문인지 예전 작품들과 비교해 현실적이고 진중한 분위기가 강하고, 남녀를 비롯한 인간관계의 깊은 지점을 훨씬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한때 방황하는 청춘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하루키 소설이 현실과 맞닿아 보편적인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냈다는 면에서, 이번 소설집은 기존의 팬들은 물론 보다 폭넓은 연령대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어서 복간되길 기다렸던 소설이다.

읽고 싶다!

 

출판사 책소개

삼십 년 넘게 이틀에 한 번씩 빈 미술사 박물관에 와서 보르도네 홀의 의자에 앉아 오직 틴토레토의 ‘하얀수염의 남자만’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특이한 습관의 예술 비평가 레거. 수십 년 넘게 글을 쓰면서도 단 한 번도 출판하지 않은 철학자 아츠바허. 그리고 레거가 보르도네 홀의 의자를 독점하도록 뒷배를 봐주는 박물관 감독관 이르지글러. 이 세 사람이 등장하는 연극 무대 같은 설정의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서양문화사 전체를 압축해 펼쳐내는 예술 철학의 블랙코미디.

 

 

 

 

필립 로스 <유령 퇴장>

 

네이선 주커먼이 등장하는 필립 로스의 소설 전부가 번역됐으면 좋겠다.

 

출판사 책소개

필립 로스의 작품에 네이선 주커먼이 처음 등장한 건, 1974년에 출간된 <남자로서의 나의 삶My life as a Man>에서였다. 여기서 주커먼은 직접적인 화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쓴 단편소설 속 주인공인 작가로 나왔다. 그리고 1979년 <유령작가The Ghost Writer> 때부터 주커먼은 직접적인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후 30여 년간 <주커먼 언바운드Zuckerman Unbound>(1981) <해부학 강의The Anatomy Lesson>(1983) <프라하의 주연The Prague Orgy>(1985) <카운터라이프The Counterlife>(1986) <미국의 목가American Pastoral>(1997)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I Married a Communist>(1998) <휴먼 스테인The Human Stain>(2000) <유령 퇴장Exit Ghost>(2007)까지 총 9편의 작품에 등장했다. 필립 로스는 이 9편을 묶어 ‘주커먼 시리즈Zuckerman Books’라 명명했다.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처음 만나는 작가, 흥미롭다.

 

출판사 책소개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허구를 잘 쌓아올린 망명문학의 걸작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을 “거의 완전무결”하며 “제거스가 쓴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은 바 있다. ‘나’는 2차대전 파시즘의 물결이 온 유럽에 몰아치는 와중에 독일에서 강제수용소를 탈출해 빠리로 도망쳤다가 우연히 마주친 수용소 동료로부터 바이델이라는 작가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바이델을 만나러 간 ‘나’는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엉겁결에 미완성 유고와 멕시꼬 비자가 든 그의 가방을 떠맡는다. ‘나’는 다시 나치의 침공을 피해 마르세유로 떠나고, 누군가를 찾아 온 거리를 헤매는 여인을 운명처럼 발견한다.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없이 홀린 듯 그녀를 뒤쫓던 ‘나’는 복잡하게 얽힌 인연 속에서 피난을 온 한 의사의 연인인 그녀, 마리를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도주 중”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버리는 것에 불과”한 곳에서 ‘나’ 역시 마리를 쫓아 유럽을 떠나려는 난민 무리에 휩쓸려들어가고, 바이델의 신분과 비자를 빌려 영원히 반복되는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서류 전쟁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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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14-09-03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베른하르트 작품 많이 출간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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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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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이라는 게 있다. 긴 소설이라는 의미의 장편소설이 아니라 손바닥 장(掌) 자를 써서 콩트와 비슷한 아주 짧은 소설을 가리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보고 그 독특함에 반해 구매했던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는 당시에 보기 힘든 길이와 유머를 가진 책이었다. 엽편소설이라는 굉장히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이 책의 작가는 성석제였다. 이후 성석제의 글은 꾸준히 찾아 읽게 되었고 이 작가는 특유의 입담과 해학을 가진 작가로 새겨졌다. <투명인간>은 성석제가 새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한강 다리 위에서 서 있는 한 남자. 마치 자살을 하려 하는 것 같지만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 그는 투명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또 다른 투명인간 하나가 알아보고 그에게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투명인간이 되기까지의 그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의 이름은 김만수, 두메산골 ‘개운리’에서 3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난 만수는 어려서부터 ‘큰 머리에 비해 가느다란 몸통에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다리’와 ‘토끼처럼 커다란 앞니’가 두드러진 볼품없는 외모에, 어리숙하지만 마냥 착하고 순박하기만 하다. 그 시절의 대가족답게 큰형은 타고난 명석함으로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있으며 여인네들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살아간다. 평범하게 살던 집안은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큰형이 고엽제로 목숨을 잃고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서 고난의 삶이 이어진다. 단칸방에서라도 살기 위해 고단한 노동을 하는 누이와 연탄까스를 마시고 반병신이 된 명희, 술꾼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된 만수씨. 온갖 고생을 하며 결혼까지 하게 된 만수씨는 작은 행복이나마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회사의 도산의 책임까지 떠안게 된 만수씨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그는 삶의 고통 속에서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쉽다고 이야기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투명인간이 된 삶이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성석제의 <투명인간>은 흔한 이야기다. 당연히 투명인간의 된 사람의 이야기가 흔하다는 것이 아니라 김만수씨의 삶이 흔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연세가 있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라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로 소설만큼 극적인 삶은 아니었겠지만 서사 자체가 주는 재미는 덜한 편이다. 그렇다면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어떨까. 투명인간은 고전적인 메타포다. 고전적인 메타포를 현실화시킴으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평범해질 수 밖에 없다. 과거의 삶에서나 현재의 삶에서 투명인간처럼 되는 것은 보기 힘든 일도 아니다. 조금 더 고약한 수법의 왕따의 경우 왕따되는 대상을 투명인간처럼 만들어 버린다. 바로 옆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이야기도 걸지 않고 존재 자체를 무시한다. 사회의 경우 역사와 환경이 개인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그 잘난 역사 속에서, 다수의 이익 속에서 개인들의 삶은 소수들은 죽거나 죽지 못해 살아 있는 투명인간이 된다. 이런 것이 역사가, 다수가 행하는 왕따, 이지메가 아니고 무엇일까. 투명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성석제는, 성석제니까 이런 개념을 실제로 확장시켜 버렸지만 이런 전개 자체가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뭐가 대수일까. 만수씨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실제로 투명인간들이 되어 버렸고 실제로 투명인간이 되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삶의 무게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가족이지만 자신들 말고는 그것을 알아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투명인간이 아니었을 때에도 투명인간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고 투명인간이 된 이후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무시하는 사회에서는, 특히 요즈음 같은 사회에서는 투명인간이 된 소수들이 얼마나 많을까. 어쩌면 나 역시도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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