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펠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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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자>

 

2007년 10월 18일 목요일 한겨레 매거진 <Esc>에는 동물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표지 기사 제목은 ‘코식이가 쓰는 동물원대박과사전’이었고 한 장을 넘기면 ‘과천의 동물들은 이명박을 반대한다?’라는 다소 조잡하고 억지스러운 제목이 눈에 띈다. 그 기사에서 내 눈에 띈 이 책은 단박에 ‘읽을 책 목록’으로 들어왔다.




잔뜩 기대하고 읽어서인지 다소 실망이다. 깔끔하지 못한 번역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니겔 로스펠스라는 사람 자체가 글을 그다지 잘 쓰는 사람은 못되는 듯 하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인 목차에서부터 세부적인 소제목 하의 글에서까지 느낄 수 있는, 읽는 이를 뭔가 답답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무엇보다 하겐베크라는 한 인물과 그의 사업, 회사를 중심으로 책을 서술하고 있는데, 주제가 ‘동물’이 아닌 ‘동물원’인 이상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동물원이 아닌 하겐베크가 책의 주제라고까지 느꼈다면 오버일까. 물론 그가 현대의 ‘동물원의 탄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지만 말이다.




제목에서 분명히 이 책이 ‘역사서’라는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는데도 그 냄새를 못 맡은 내 탓이 크겠지만 나는 이 책이 좀 다른 성격의 책이면 좋겠다. 작가가 살짝 언급한 동물원에 간 인간과 동물의 시선이 마주치느냐 안 마주치느냐의 문제, 동물원이 자연스러워질수록 동물들의 감금 상태는 은폐된다는 사실 등 따로 연구 주제로 삼아도 될 정도로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카프카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작품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 책의 뒷표지에는 ‘빨간 피터’의 고백을 따라 동물원을 살펴본다고 되어 있지만 정작 빨간 피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숲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이 숲을 보호하고 가꾼다.’는 말조차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지 보여줄 뿐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동물원의 역사를 알고 나면, 동물원이 동물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이야기하고 또 일정부분 그것이 사실인 상황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느끼게 된다. 정말로, 본문에 나오는 존 버거의 말마따나 동물원은 ‘이제 인간과 동물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장소’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새끼를 잡기 위해 인간들이 어미를 죽이자 새끼 코끼리가 다리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어 뒷다리에 코를 감고 쓰러져서는 그대로 질식해 죽었다는 부분이다. 이건 자살이다.

사람 전시야 뭐 오늘날에도 그 형제들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2002년에야 고국 남아공에 돌아온 사끼 바트만의 유해는 186년 동안이나 뇌와 생식기가 절단되어 병에 보관된 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엉덩이가 조금 더 튀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엘리펀트맨’은 그리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한데 다른 동물까지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까. 브레히트의 ‘후손들에게’라는 시에 등장하는 구절이 생각난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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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유하자면, “리더십이 모든 것의 답이다”라는 식의 관점은 암흑시대에 물리세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이해를 퇴보시킨 “신이 모든 것의 답이다”식 관점의 현대판이다.




2.

큰 사람들이 없는 큰 비전은 쓸모가 없다.




3.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우리는 교수 클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듭된 고문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스톡데일의 뻣뻣한 다리가 연신 절뚝거렸다. 100미터쯤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내가 물었다.

“견뎌 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가 말했다.

“아, 그건 간단하지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낙관주의자요? 이해가 안 가는데요.”

나는 정말 어리둥절했다. 백 미터 전에 그가 한 말과 배치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4.

좋은 회사를 위대한 회사로 도약시킨 사람들은 두려움에 자극받지 않았다.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바보처럼 비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자기들이 못하는 사이에 남이 빅히트를 치는 것을 지켜보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경쟁자에게 한 방 얻어맞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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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순간에도 휘발유만 넣어주면 되죠. 잠이 부족하다거나,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거나,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하는 문제들로 일을 그르친다면 곤란하죠. 그것은 결코 프로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런 태도로는 현대사회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식단이 이런 문제점을 낳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빵과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식단은 인간을 결국 신뢰할 수 없고 게으른 존재로 만들죠. 휘발유는 인류의 새로운 대안입니다. 주위를 보세요.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속도의 천국이죠. 그러니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2.

나는 혜성의 충돌, 기상이변, 한 미치광이에 의해 잘못 눌러진 원자폭탄의 발사, 공기전염되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출현, 인공지능과 기계문명의 가공할 발전 등등의 이유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질서 때문에 스스로 종의 역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것은 도대체 무얼 뜻하는 것일까? 마치 인류가 이백년 전에 만들어낸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인간사회의 이곳저것을 빨아먹고서 이제 인류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괴물로 자라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일까?




3.

예를 들어 뱃속에서 강력한 메탄가스가 생성되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트림을 할 때 입 앞에서 라이터를 켜면 화염방사기 수준의 엄청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어릴 때는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다가 가족들의 머리카락을 홀랑 태워버린 적도 있었다. 수줍음이 많고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성장한 이 사내는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을 움켜쥔 채 오랫동안 방에서 혼자 지냈다. 이 사내가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골방을 뛰쳐나와 의사를 찾아갔을 때 의사가 그에게 내려준 과학적 처방은 이런 것이었다.

“트림을 할 때 입 앞에 라이터를 갖다대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시오. 그리고 위험한 화기 앞에서는 절대 트림을 하지 마시오.”

우리들의 과학이란 이렇게 편리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존재를 무시당한 이 남자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 남자의 끔찍한 두려움과 공포는 ‘나는 왜 입에서 불이 나가는 걸까?’가 아니다. 이 남자의 두려움과 공포는 ‘나는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를까?’이다.




4.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5.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가 ‘제멋대로의 시계’를 가지고 있는 우주의 본질적 질서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우주적 질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관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바벨의 시계를 세우고 거기에 맞춰 하나의 파시즘적 질서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영혼이 이런 파시즘적 질서에 끝없이 투쟁하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이런 멋있는 이유로 인류의 역사에 다시 파시즘이 나오지 않는다면 멋진 일이겠지만 나는 인간이 그렇게 근사한 존재라고 믿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가 제멋대로 시계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의 시계 밑에 얌전히 있다보면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뭔가 아귀가 안 맞고, 인생이 자꾸 꼬여만 간다는 느낌이 들고,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일을 자주 저지르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멍청해서라기보다는 서로 시간이 안 맞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큰맘 먹고 파시즘적 질서에 따라주려고 해도 질서는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




6.

그런데 뚱딴지같이 웬 회오리바람 이야기냐고? 나는 열다섯 살에 평범하고 그저 그런 아이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분노라는 것을 할 줄 알았다. 이 식사시간을 보라. 이것은 정말 13호 캐비닛만큼이나 비현실적이지 않는가? 단지 직장 상사하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 돼지 같은 년 어떻게 안 보고 사는 방법 없나?” 따위의 말을 면전에다 할 수 있는가. 그건 솔직히 진짜 돼지한테도 해선 안 되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7.

“저는 심토머들이 여전히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같은 종  말입니다. 단지 심토머들은 조금 아픈 거죠. 정체 모를 병에 걸려서.”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아니기를 바라지만.”

“아니기를 바라세요?”

“자넨 인간이라는 종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나?”

“예,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반성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니까요.”

“반성하는 존재라. 웃기는 소리군. 내가 스무 살 때 전쟁이 있었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개울가에서 깔깔거리며 같이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두 패로 나누어졌지. 끝없는 살육과 복수가 있었어. 어느 날 나는 한패가 다른 한패 모두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걸 봤어.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서. 한 사람이 한 명씩 찔렀지. 그리고 그들은 초등학교 뒤편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거기에 밀어넣었어. 아이들이 뛰어노는 초등학교 뒤편에 말이야. 자네는 그것이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

“지난 오십 년간 인간에게 그 시대를 반성하는 역사가 있었나?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있지. 자신의 아파트 평수나 지키기 위한 하찮은 이유들로. 나는 인간이라는 종을 증오해. 치욕스러워. 인간은 그것보다 더한 짓도 할 만한 생물이지.”




8.

한센 브라운은 착한 사람이다. 그는 성실한 가장이고, 좋은 아버지며, 지역사회를 위해 보이스카우트 시절부터 쉰 살이 된 지금까지 이민자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해왔다. 자기 재산의 반을 털어 심장병에 걸린 이웃 흑인 소녀를 살려낸 일은 지역신문 일면에 ‘우리 마을의 장발장’이라는 기사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한센 브라운은, 매일 아침, 모압을 제조하는 군수회사로 출근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한센 브라운의 딸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사람들 말로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큰 폭탄을 만든다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한센 브라운은 창백한 얼굴로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 아빠는 날마다 거대한 불행을 제작하지. 하지만 아빠가 지구 반대편에서 터질 불행을 제작하지 않는다면 그 불행은 우리집 응접실이나 너의 예금통장 같은 데서 터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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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짐 콜린스 지음, 이무열 옮김 / 김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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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굿 투 그레이트’인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스스로 선택한 책이 아닌 것들을 읽어야 할 때 으레 그렇듯 머릿속에는 ‘내가 이걸 왜 읽고 앉아 있지?’ 류의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런 시각으로 책을 읽어 나갔다. ‘위대한 기업 따위 나랑 상관없잖아!’ 책을 읽어가면서 한편으로는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책의 두께에서 비롯된 완독의 욕심이 생겼다. 반드시 끝까지 읽고 말리라, 끝까지 읽었을 때도 내 시각은 여전히 삐딱함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결과는?




책을 조금 읽다보면,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이게 단지 ‘기업’에 국한된 내용들이 아님을 알게 된다. 기업이 아닌 조직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일뿐더러 구태여 조직일 필요도 없는, 개인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소개하고 있는 개념들은 평이한 것이 많았다.




책의 1장을 읽으면서 내가 메모한 것들을 보면, ‘Good to Great는 결국 성과중심?! 정도의 차이일 뿐인가, Great로 가야할 필연성은? 비기업의 경우 좋은 것에서 만족할 수는 없나?’ 이런 것들이다. 첫 장에서부터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왜 위대해져야 하나?’라는 것이었으며(이 문제는 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제시된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good과 great를 가르는 기준은 ‘성과’였다는 것이다.




2장은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런지 개인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의 11명의 리더들 중에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하고 묻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물어볼 정도라면 그들은 위대한 기업을 이루고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분명하다. 우리는 ‘말해진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말해진 것들은 곧 들리는 것들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고, 듣지 못했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대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관심분야에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위대한 리더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나’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우리나라에서 좀 생각해볼만한 사실이 아닌가 싶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비정상적으로 조직과 단체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으므로 개인주의가(이기주의가 아닌) 좀 더 활개를 쳐야한다고. 글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고 조금 신선하게 느낀 것이 있다면 그건 ‘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의 한계’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화 [보노보노]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난다. ‘생각하는 건 언제나 하나, 많을 땐 두 개, 세 개는 필요 없다. 세 번째는 분명 자신을 생각할 테니까’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이건 만고의 진리인 ‘너 자신을 알라’와 배치되는 의미가 아니다.




‘창문과 거울’의 개념도 인상적이고 쓸 데가 많을 것 같다. 잘 될 때는 창문을(밖을) 보며 공을 외부로 돌리고, 일이 잘 안 될 때는 거울을(자신을) 보며 책임을 외부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모든 좋은 소리가 그렇듯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2장의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영업일당 100만 달러의 손실을 내고 있던 패니 마이라는 회사의 CEO가 된 맥스웰이라는 사람이 이후 9년 동안 위대한 기업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물러난다. 그 눈부신 실적을 근거로 2000만 달러라는 퇴직금이 맥스웰에게 돌아가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논쟁을 일으키자 맥스웰은 후계자에게 편지를 보내 잔액 550만 달러를 기부하라고 주문한다. 이 일화를 소개하는 소제목은 ‘회사에 바치는 야망: 성공을 겨냥한 후계자 세우기’이다. 하지만 이건 논쟁을 무마시키려는 시도 혹은 생색내기 아닌가? 어쩌면 이건 기업인들을 기본적으로 비윤리적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시각에 길들여진 탓도 있겠다. 




3장의 원제목은 first who, then what이고 이것이 모든 내용을 압축하고 있다. 사람이 먼저고 그 다음이 할 일이라는 것.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그 일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내가 듣던 상식적 차원이었는데 이 책은 그걸 뒤집어 놓았다. 적합한 사람을 뽑아두면 그 사람을 관리한다거나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게 된다. 4장의 주 내용은 스톡데일 패러독스(현실을 직시하되 믿음은 잃지 않는 것)지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리더가 일차적 현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과 ‘붉은 깃발’이었다. 상사가 일차적 현실이 된다면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들에 대해 내가 뭐 얼마나 알겠냐마는, 상사가 일차적 현실이 아닌 기업이 얼마나 될까.




‘붉은 깃발’ 이야기도 신선했다. ‘진실이 들리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정보가 윗사람에게 전달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붉은 깃발 장치는 이를테면 발언권과 같은 개념이다. “질문 있습니까?”라는 말 다음에 손을 들어 얻게 되는 그런 발언권이 아니라 ‘절대적’ 발언권이다. 이 깃발을 들게 되면 말하는 사람은 말을 멈춰야 하고 발언권을 얻은 사람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중간에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당사자와 직접 이야기를 해도 말이 통하기 힘든 것이 커뮤니케이션인데 중간에 누군가를 거치면 어떤 식으로든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무시당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위로 전달한다는 것. 이런 일이 어렵다는 증거는 우리네 정치판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왜 ‘국민의 뜻’은 항상 당신들 마음인 걸까.




이 책에서 의아한 것은 ‘가치’에 대한 부분이었다. 핵심가치를 갖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특별히 ‘올바른’ 핵심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 가치를 조직 속에 명확하게 불어넣는 것이 포인트라고 한다. 그건 이 프로젝트 자체가 귀납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과학적’ 연구 안에는 ‘위대한 담배회사’도 들어가는 것이다. 브라보!




내가 책을 펼치자마자 궁금해졌던 것, ‘왜 위대해져야 하나?’에 대해 저자가 주는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것이 평범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 어렵거나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있는 일을 찾기 위함이다. 열정을 넘어선 애정이 있는 일이라면 저런 물음은 불필요하다. 결국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좋다(good), 위대하다(great)의 차이가 아니라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벌어라’다.  

 

전혀 읽고 싶게 생기진 않았지만 완독하고나니 완독 후의 뿌듯함 이외에 무엇인가를 더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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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법정
마이클 S. 리프.H. 미첼 콜드웰 지음, 금태섭 옮김 / 궁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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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은 아트다>




이 책을 번역한 금태섭씨부터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2006년 가을 <한겨레>신문에 1회 연재로 그 화약 냄새만 살짝 풍겨주고 폭탄이 되려다 말았던,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획 연재물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수사 받는 법’이라고 줄여서 불리기도 한다.)을 썼던 사람이었다. 연재 중단에 대해 그는 검찰의 외압을 부인했지만 그걸 누가 믿겠는가? (1회 연재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피의자가 되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 모든 것을 변호사에게 맡기라는 것.) 그 후 그는 검사직에서 물러났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며 CBS에서 토요일 오전에 방송되는 ‘뉴스레이다 스페셜-책과 문화’를 진행 중이다. (잠깐의 검색으로 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번역이 아주 깔끔하다. ‘법정’이라는 어렵고 딱딱할 것 같은 제목에 635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이렇게 ‘열렬하게’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깔끔한 번역 탓이 크다. 낯선 법률 용어나 사건, 인물을 페이지 밑에 주석을 달아 설명해 독서의 흐름을 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괄호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변론은 아트다. 책에 별을 주거나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카렌 앤 퀸란과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절반도 읽지 않은 채 ‘이건 별 다섯 개짜리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 생각이 끝까지 책을 읽으면서 틀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고 내 예상은 맞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일단 하나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 끝날지 너무나 궁금해서 그 편을 다 읽기 전에는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책 제목에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는 ‘법정’이라는 단어나 책의 두께는 내용의 흥미진진함에 날아가 버린다. 재판은 법정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저자는 그 싸움의 현장을 독자의 눈앞에 펼쳐놓고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재판의 과정과 변론들은 물론 사건의 배경 설명과 재판이 있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싸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기 있는 여덟 편의 재판에서 논의되고 있는 쟁점들은 ‘안락사에 대한 논의, 노예제도의 철폐, 냉전과 매카시즘, 여성의 투표권, 언론의 자유와 통제, 음란물에 대한 사회적 규제, 생명을 담보로 한 의료보험 회사의 횡포, 정신박약자의 불임시술’이다. 현재까지 논란이 되는 것들도 있지만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어느 편에 서야할지가 나온다. 오늘날 노예제도에 찬성하거나 여자는 법적으로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테니까. 물론 몇몇 쟁점은 국내에서는 상황이 좀 다를 수도 있고 심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작가의 방향은 꽤나 분명해 보인다. 앞에 배치된 일곱 개의 재판은 훌륭한 변론과 판결로 세상을 좀 더 ‘좋은 쪽’으로 바꾼 것들이고 마지막 재판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비극으로, 앞의 재판들과 대조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 앞에 일곱 개는 ‘좋은 판결’이고, 뒤의 하나는 ‘나쁜 판결’이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 속에도 ‘우리 편’과 ‘저쪽 편’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책의 방향이 이렇듯 분명한대도 ‘저쪽 편’의 변론을 듣고 감동받거나 하는 건 내가 귀가 얇은 탓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여기 실린 변론들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은 정의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헌신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변호사라는 직업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나 또한 그랬었고 영화에서도 종종 변호사들의 이런 모습이 비판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책이야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변호사들이 훌륭한 변론을 해서 사건을 ‘세상을 바꾼’ 재판으로 만들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승소를 했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판결을 받았을까? 세상 모든 사건은 시시비비가 있지만 세상 모든 변호사는 승소해야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변론은 예술이 되고, 설사 상대방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논리 전개와 마음을 움직이는 변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이 책에 제시된 ‘방향’ 중 몇몇에 심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가히 ‘아트’라 할만한 양측의 논리 공박은 책을 읽는 내내 흥미를 유지하게 해 준다.




세상에는 합의가 불가능한 쟁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형제 폐지나 안락사 논쟁이 그렇고 신의 존재 여부가 그렇다. 사형제 폐지는 결국 “흉악범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고 이 질문에는 중간이 없다. 안락사 역시 “살아있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생명과 죽을 권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타협이 불가능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신의 존재 여부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길게 이야기를 해봐도 서로가 아예 기본 전제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끝없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질문들에는 자신의 신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질문들에 법이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신념까지 바꿀 수 있을까?

 

일례로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안락사 논란만 봐도 그렇다. 주인공 카렌 앤 퀸란은 재판으로 이른바 ‘죽을 권리’를 얻었지만 그렇다고 이 판결에 판대한 사람들의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편지와 그 마음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안락사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나 또한 ‘죽을 권리’나 ‘편안한 죽음’에 동조하는 바이지만 이에 반대했던 변호사들의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증언한 카렌 앤의 어머니의 증언처럼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이 사건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거나 혹은 삶의 질이 생물학적인 생명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삶의 질’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볼 수 있는 능력입니까? 들을 수 있는 능력입니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까? 생명의 존엄성을 잊고 삶의 질로 대체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일단 그 문을 열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법정에는 이 사건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건이 이 법정이나 또 다른 법정에서 제기될 것입니다. 만일 삶의 질이 이 사건의 결정에 한 요소가 된다면 또 다른 병든 아이들의 부모들이 법정에 와서 자신의 자녀는 이런 식으로 살기 원하지 않았다거나 온전한 삶을 살기 원했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의 부모를 둔 자녀도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고령으로 망령이 난 사람들을 두고도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삶의 질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 정신지체 장애인, 다운증후군-을 두고도 같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재난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삶의 질’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순간 재난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카렌 퀀란은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카렌은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을 우리도 쉽게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일지도 모릅니다.”

 

 




여기 실린 재판들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몇몇의 재판들은 정말 ‘세상을 바꿨다’고 할 만큼 재고의 여지가 없는 올바른 판결로 끝이 났다.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아미스타드 선상 반란을 일으킨 노예제도 관련 재판이나, 생명의 가격을 담보로 횡포를 부린 의료보험 회사에 대한 한 환자의 투쟁이 그렇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기소된 수전 B.앤서니의 재판은 조금 다른데, 사실 수전 B.앤서니의 투표권을 얻기 위한 투쟁은 당시의 사회적 벽 앞에서 사실상 실패했다. 그녀는 재판에서 패소했다. 하지만 그 재판이 있은 후부터 50여 년에 걸친 여성들의 투쟁 끝에 결국은 결실을 보았다.(우리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오늘날 일정한 나이만 되면 누구나 얻게 되는 투표권이라 그런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거기 담긴 투쟁의 역사는 물론 그 소중함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투표도 안 하고.)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래리 플린트 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 수정헌법1조를 언급할 때 항상 거론되는 사건이다. 수정헌법 1조는 이렇다.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거나, 또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약화시키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 나는 영화 <래리 플린트>도 보지 못했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사건의 전말을 보다 상세히 알게 되었고 손톱을 씹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영화도 곧 보게 될 것 같다. (플린트가 직접 출연할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노튼이 나온다고 하니 볼 수밖에)




내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념비적인 사건인 래리 플린트 사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 했다고 하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나를 파시스트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물론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세계에서 법의 영토로 옮겨와서 그토록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절대적으로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극과 극은 좋지 않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표현의 자유를 ‘이런 식으로’ 보장하는 것도 내 생각에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수정헌법 1조와 더불어 세계최초의 언론 자유선언문으로 불리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작성한 영국의 존 밀턴은 ‘사상의 자유시장’을 주장했지만 자신이 의원이 된 다음에는 직접 언론을 검열했고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로 유명한 토머스 제퍼슨 역시 후에 ‘신문에 난 것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진실 그 자체는 오염된 전달 수단에 실림으로써 의심스럽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거짓과 오류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사람이듯이, 나는 전혀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이 신문을 읽은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은 물론 상황의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모순이고 이것이 ‘아레오파지티카’나 제퍼슨의 언론의 자유를 위한 노력에 먹칠을 하지는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수정헌법 1조는 심지어 인터넷을 통한 포르노를 규제하기 위한 ‘성인인증제도’의 도입 역시 부결시켰다. 단적으로 말해 ‘표현의 자유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선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책에는 수정헌법 1조와 관련한 예외적인 판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단순한 욕설(정치적 의견이 담긴 욕설은 수정헌법1조의 보호를 받는다.), 즉각적인 위협이 되는 말들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받지 못한다. 미국은 이처럼 거의 무한대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다. 미국은 그런 나라다. 단지 그뿐이다.

 

촘스키가 자주 인용하는 조지 오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는 말을 떠올리면, 더 나아가 베르베르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언급한 검열의 문제까지 생각해보면(‘절대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국 주목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단지 그뿐’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공적 인물은 비판을 감수할 만큼 낯짝이 두꺼워야 하며 단지 감정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공적 인물은 래리 플린트 같은 ‘쓰레기’(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고 이 책을 읽은 내 생각도 그렇다. 그는 위선을 증오했고 명백히 폴웰 목사를 공격하기 위해 광고를 패러디했지만 법정에서는 그것은 단지 술 광고를 패러디했을 뿐이고 폴웰 목사가 모델이 된 것은 그 패러디 광고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서라는 위선을 내보였다.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이 사건 외에도 플린트의 수많은 사건을 맡았던 아이작맨 변호사는 결국 그를 떠나고 만다.)가 자기 엄마와 화장실에서 그 짓을 했다는 광고를 실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면’ 허위 사실 유포가 아니며 이런 종류의 감정적 고통과 ‘부시는 꼴통이다’라는 종류의 감정적 고통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에서 경찰이 네오나치의 거리 집회를 보호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저지하는 일까지 만든다. 미국은 정말 ‘특이한’ 나라다.




수많은 고민을 안겨준 6장 ‘포르노 황제와 전도사’의 표현의 자유와 짝을 이루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재판은 책의 3장 ‘우리 안의 적’ 매카시즘 광풍과 관련한 사건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사실 굳이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지 않아도 당장 선거법93조-‘선거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게시 및 상영을 할 수 없다’-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판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상검증은 히틀러가 자행한 일과 마찬가지로 후대 사람들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것이다. 8장 캐리 벅의 강제 불임시술에 대한 재판 역시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선거법 93조 역시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가?’라고 묻고 싶지만 ‘대한민국이라서 가능하다’는 우울한 대답이 고개를 든다. 7장 ‘생명의 가격’을 읽을 때는 정말 화가 나고, 8장 ‘훌륭한 태생을 위한 유전자 개량’을 읽을 때는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유념할 것은 여덟 개의 재판이 모두 미국 내에서 일어난 재판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재판 제도는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고 내년부터 도입할 예정인 ‘국민참여재판제’ 또한 미국의 ‘배심제’와는 많이 딴판이다. 8편의 예술을 보며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 어떤 영화보다 우리의 실제 삶이 훨씬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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