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주의가는 은자가 아니다. 공심의 결여나 비사교성은 개인주의와 무관하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개인과 연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의 노마드들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과 노트북은 그들이 지구 문명의 망 속에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표지다. 개인주의는 또 이기주의와도 무관하다. 개인주의는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춘다는 고전적 자유관의 심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시대' 중..

 

 

2.

문화적 상대주의는 인종적 문화적 집단이나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일종의 신인종주의로 귀결한다. 상대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다양한 문화적 차이, 곧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에다가 서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때 '차이의 권리'는 교묘하게도 '권리의 차이'로 전복된다. 이것은 '선의의' 식민주의자들이 지닌 순진한 보편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인류의 단일성과 가치의 보편성을 부정하며 차이를 특권화함으로써, 그들은 자아로의 퇴각과 소통의 부재와 타인의 배제를 부추긴다. 그러니까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주의자들처럼 보편적 가치들을 포기하는 순간, 화해의 기본 원리인 톨레랑스나 상호존중이 존재 근거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그들'' 중..

 

 

3.

우익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이것이 첫 번째 다위니즘이다. 이 다위니즘에 따르면 다윈은 평등의 적이고 모든 진보주의의 적이다. 만약에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에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위니즘이 있다. ..(중략).. 토르에 따르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론이나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사회생물학은 '진짜' 다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토르는 진정한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중략).. 이 지점에서 토르는 <종의 기원>의 인기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다윈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를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이 책에서 다윈은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창시자이지만, 그 선택의 법칙이, 특히 그 도태의 측면에서, 문명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두 개의 다위니즘' 중..

 

4.

사르트르도 옳고 리카르두도 옳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구토>를,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런 깨달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다.

 

-'문학을 위하여' 중..

 

 

5.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부활시킨 1896년은 노동자 계급의 물질적 정신적 빈곤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있을 때다. 물론 쿠베르탱이 그것을 의식해서 올림픽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의 욕구불만을 잠재워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도와주는 데 필요한 세 가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를 술에서 떼어놓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둘째, 스포츠는 사회 질서를 흩뜨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파괴 욕망을 발산하게 할 수 있었다. 셋째, 스포츠는 평화와 공정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할 수 있었다. ..(중략)..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었다면, 시모노가 보기에는 스포츠야말로 인민의 새로운 아편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하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중략)..실상 쿠베르탱도 인종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다른 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우월함을 공언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정치 선전장이 된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중략).. 경기 종목과 그 종목들에 배당된 메달 수를 보아도 올림픽은 여전히 부유한 나라들의 행사다. 게다가 자기 나라의 운동 선수들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쏟아 붓는 민족주의적 열정들은 전체주의의 토양이 되고 있다. 끔찍한 것은 이 모든 상업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광란들이 올림픽 경기라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종교의 외투 속에 안전하게 몸을 가추고 있다는 점이다.

 

-'호모 스포르티부스' 중..

 

 

6.

이혼과 재혼이 흔하게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 동안 그의 가족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 여러 가족에 차례로 소속될 것이고, 아이들도 차례로 여러 부모를 갖게 될 것이다. 가족이 유연화되는 것이다. 그때 가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소속돼온 여러 가정들 가운데 하나를 일컫는 말이 될 것이다.

 

-'가족의 유연화' 중..

 

 

7.

노동자가 줄어든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역사가 목격해본 적이 없는 기괴한 방식의 세대 교체를 겪고 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자리를 물려받을 그 신세대 노동자는 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리프킨이 '실리콘칼라'라고 부르는 기계 노동자다. ..(중략).. 최초의 목화따는 기계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을 농장 경제의 착취로부터 '해방'시켰을 때,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북부 도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로 변신해 제조업 분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산업에서 서비스 부문까지 생산 활동의 전 영역을 감당하고 있는 실리콘칼라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21세기의 노동력은 어디로도 흡수되지 않는다.

 

-'노동의 종말' 중..

 

 

8.

냉전이 끝난 뒤에도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크고 작은 분쟁 뒤에는 어김없이 민족주의가 있다. 그전적 민족주의 시기를 비롯한 역사의 드문 국면을 제외하고는, 민족주의는 대체로 이성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것은 낭만주의로 시작해서 전체주의로 끝났다. 민족주의에 대한 제어, 더 나아가 애국심에 대한 경계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진보의 디딤돌, 진보의 걸림돌' 중..

 

 

9.

이를테면 '좌익'이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교조적인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냉혹한 테러리스트들이지만, '좌파'라는 말에는 뭔가 합리적이고 온건하고 지적인 이미지가 배어 있다. 마찬가지로 '우익'이라는 말에서는 해방기 서북청년단이나 칠레의 피노체트 같은 광신적 반공주의자가 연상되지만, '우파'라는 말에서는 예컨데 소설가 카뮈나 사회학자 레몽 아롱 같은 부드럽고 지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얼굴이 연상된다. ..(중략).. 물론 이념적 적대자로서의 상대편을 지칭할 때는 '좌익', '우익'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좌우의 지형' 중..

 

 

10.

호모 사피엔스, 곧 '지혜로운 인간'의 지혜는 무엇보다도 다른 호모 사피엔스를 어떻게 죽일까를 궁리하는 데 쓰여왔다.

 

-'전쟁과 평화' 중...

 

 

11.

실상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중략).. 그렇다면 복잡한 경어체계를 지닌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지닌 셈이다. ..(중략).. 그렇다면 경어법에 서툰 젊은 세대가 반드시 계도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와 위계' 중..

 

 

12.

실제로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답변으로 쓰여졌다. '희망의 원리'의 반대 명제로서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 유토피아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로흐가 보기에, 유토피아는 인간 의식의 본질적 구성 부분이다. ..(중략).. 그리고 이런 희망의 원리는 베이컨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를 구상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였다.

요나스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휴머니즘이다. ..(중략).. 요나스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다의적인 존재이고, 선과 악 사이에서 환원불가능하게 분열된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내재한 불행과 고통과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지만 우리가 존중하고 복종해야 할 진리는 '진정한 인간'이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진정한 인간은 그 자신의 귀함과 천함, 위대함과 비참함, 행복과 고통, 정당함과 죄업, 요컨대 그 자신의 이 모든 양가성과 분리할 수 없다."고 쓴다. 요컨대 양가성은 요나스가 보기에 인간의 본질이다.

 

-'유토피아와의 결별' 중..

 

 

13.

그러나 이것과는 정반대의 시나리오가 있다. 이 시나리오가 그리는 미래는 조지 오웰의 <1984년>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섞어놓은 악마적 세계다. ..(중략).. 이 시나리오의 지지자들은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 사회적 정치적 경향에 주목한다. 첫째, 인터넷에 내재한 동질화 성향이 대중의 획일화를 부추길 것이다; 둘째,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이 커지면서 지배계급의 성원들 사이에 공공 안전 심리가 크게 상승할 것이다; 셋째, 국가와 거대 기업의 이해관계를 또렷이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중략)..

사이버 세계에서는 단발적 행위가 인간 관계보다 중시되고, 전문가가 정치가보다 중시되며, 지식이 정의보다 중시되고, 가상이 현실보다 중시된다.

 

-'인터넷과 자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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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생활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 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 걸치지 않고서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일까.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했을까.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서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 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 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상태가 결과한 인간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치피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하는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2.

한 작품의 해피 엔딩은 과정의 줄거리가 가열찰수록 더욱 행복하게 느껴진다. 고뇌와 비참과 과오가 아무리 처절했어도 종말이 행복하면 그 과정은 그것으로 잊혀진다...(중략)...그러나 해피 엔딩으로써 슬펐던 과정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관객의 경우다. 슬픔을 겪은 주인공은 종말의 행복보다도 불행했던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 차이는 불행을 체험한 사람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의 차이이다. 

 

3.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4.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라는 것은 대개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을 마비시키고 마는 것만 같다. 텔레비전 분야의 전문가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장면의 시청자 군중을 볼 때마다 완전한 사고정지증 환자들을 보는 듯한 딱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5.

얼마 전 정부는 외국인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한다는 의도에선지 외국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성들에게 통행금지 시간을 면제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관광안내양'인가 뭔가 하는 공식명칭으로 이 특전이 부여된다는 말이다. 그러고 그 이유는 물론 외화획득이라는 국책에 이들의 공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는 마음이 무거웠다.

외화획득! 참 좋은 말이다. 개인도 돈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행세를 할 수 있는 사회이고 보면 정부도 국민도 외화를 버는 일이면 무엇이든 '성스러운 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풍미해 있다.

..(중략)..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 면책 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댓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6.

몇천년이 지났는데도 소크라테스를 죽인 독배는 아직도 넘쳐 있는 듯하다.

 

7.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대에 미국정부 농무성에서 사회과학 여러분야를 망라한 지도급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국민생활, 특히 농민생활의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는 문제를 토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지도적 권위자라고 하는 경제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들은 며칠 동안의 토의 끝에 그 문제를 무시하는데 합의했다. 이유인즉 과학자라는 것은 오직 '사실'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목표'라든가 '바람직한 것'의 문제는 '가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철학이나 종교의 지도자들이 할 일이라는 견해 때문이었다.

 

8.

권력조작과 관료통제가 심할수록 민중은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무관심의 도피방법을 택하게 마련이다.

 

9.

하나는 모든 정부 정책이나 방침이나 결정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현명'이겠고 하나는 그것을 애써 구분하려는 '우둔'일지도 모른다.

신문사 논설도 그렇고 라디오의 해설이 그렇고 텔레비전의 대담이 그렇고, 어쩐지 모든 사람들이 '현명'하기만 한 것 같아 때로 우둔한 사람도 하나 둘쯤 있어줬으면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10.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경제, 재계, 정계의 상층부에서 어울리는 동안 기자는 자기의 물질적 소속이 그 사회의 하층민중임을 망각한다.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이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이 나라의 현체제의 수익집단인 지배계층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의 동화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의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중략)..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의 한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 따위가 아무런 내적 저항감도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의 환자가 레지던트의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천 342개 면 가운데 거의 반절인 630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중략)..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11.

필자의 견해로서는 오히려 식민지적인 가치관, 문제의식,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이 나라의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보다는, 차라리 공장노동자나 농사꾼이나 지게꾼이 뭣인가를 느끼고 분발해서 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었다면 우리의 기자풍토가 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학지식을 자못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 사회가 타파해야 할 권위주의가 아닐까 한다.

..(중략)..

사이비 기자란 사실을 보고도 기사화하지 못하거나, 기자가 애써 취재해온 기사를 사리와 권력 때문에 자의로 조작, 요술을 부리거나, 백성의 이익이 뭣인지를 알면서도 강자의 대변자 노릇에 만족하는 각급의 기자 이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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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창비신서 4
리영희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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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줄여서 <난쏘공>이라고 하듯 이 책에도 별칭이 있는데 이른바 <전론>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전부 6부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그 중에서 짝수 부를 생략하고 읽었다. 생략한 짝수 부는 각각 중국에 대한 내용(2부), 베트남 전쟁을 주로 다룬 내용(4부), 한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을 담은 내용(6부)이다. 읽다가 포기했으면 포기했지 완독을 나름 독서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제 그 기준이 깨져버린 것이다.

 

예전 신문에 독서하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나는 독서하는 방법까지 누가 가르쳐줘야 하나, 시키는대로 해야 하나하는 삐딱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전부 다 읽을 필요가 없는' 책도 있다는 부분에서는 코웃음까지 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이 두꺼운 책의 절반을 읽은 나는(분량으로 따지면 절반도 되지 못한다. 짝수 부가 훨씬 두껍기 때문이다.) 은근 슬쩍 내 모습을 정당화하는 나를 발견한다. 책의 절반도 읽지 않고 책에서 발췌한 부분을 쓰고, 이렇게 독후감을 쓰고 앉아있다. 읽은 책 목록에도 올릴 것이다.(물론 양심상 생략한 부분은 적어야 한다.) 사실 앞서서 나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청하 출판사)또한 도덕의 계보만 봐놓고도 같은 짓을 해버렸다.

 

 독서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게다가 이 책은 70년대에 나온 책이다. 이런 사실들로 나를 속이려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전부 다 읽을 필요는 없는' 그런 책이 아님을 알기에 아직도 스스로 부끄럽다.  

 

리영희씨의 글은 사실 처음 읽어보는데 기자생활을 오래 하시다보니 글에 참으로 힘이 있다는 느낌이다. 참 명료하다. 이런 글은 단지 글을 많이 써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1부를 읽으면서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서문을 읽는 기분이었다. 리영희 씨의 책을 접해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스운 감이 있지만 내 느낌에는 리영희 씨는 한국의 조지 오웰이 아닐까 싶다. 조지 오웰의 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듯 70년대에 나온 리영희 씨의 글들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기정사실=현실=타당=필연성'의 역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는데 사회적으로 만연해있는 오늘날의 '무력함'의 근원이 그 모두를 동일시함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 수 없지 뭐", "사는게 다 그렇지", "살려면 별 수 있냐", "억울하면 출세해", "현실이 그런걸 어떡해" 이런 류의 말들이 저런 공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또 공자의 정명론을 언급하는 것도 인상깊었다. 정명론이란 공자가 제왕이 되면 제일 먼저 '바른 말을 쓰도록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데서 나온 말로 리영희 씨는 이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다.(아무래도 기자출신이다보니 그의 언어 감각에 대한 민감성도 분명 한몫했겠다.) 이런 생각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 '바른 말'이 무엇이냐에서부터 국가가 그런걸 가르치겠다니 권위적이고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또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가하는 철학적 물음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언어가 계속 변화하는 것이라면 '완벽한 커뮤니케이션'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언어습관에서 비롯하는 온갖 개인적인 오해들과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그릇된 영향들을 바꾸어가는 쪽으로 변화시킬 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바른 말'이란 너무 삐딱하게 볼 것이 아니라 '적절한 어휘'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리영희 씨의 글을 읽으면서 하나의 딜레마를 발견했다. 그의 글이 발표될 당시는 물론 기자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매우 취약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기자가 자신의 소속 계층을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조금 비약해서 '기자가 배부르면 안된다'는 말과 같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기자라는 자리가 이것저것 배부를 수 있는 길이 많아진다면 지배층의 논리와 사고방식을 닮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조,중,동의 기자들이 받는 연봉과 그 신문들의 보수성은 상당히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게 되면서도 온 사회의 목소리가 그런 소리로 가득 차 있으니(예를 들면 "뭐든 하나만 잘해라")책을 덮으면 곧 잊어버리게 되는 내 머리를 탓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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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08-08-08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영희씨의 전제를 동의할수 없습니다. 탁월하지만 단편적인 입장에서 서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막스주의는 역사철학이며, 역사해석의 틀이라고 하지만, 자멸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을 요즘에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1.

(중략)...원한의 인간은 결코 솔직하거나 순진하지 않으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하거나 순진하지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을 한다. 그의 정신은 은닉처를 은밀한 길을, 뒷문을 사랑한다. 모든 비밀스런 것이 그에게는 자기의 세계로서, 안전과 위안으로서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그는 침묵을 지키는 법, 잊어버리지 않는 법, 기다리는 법, 잠정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비굴해지는 법을 안다. 이러한 원한의 인간들의 종족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귀족적 종족보다도 영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또한 영리함을 굉장할 정도로 존중하는데, 말하자면 제일 중요한 생존조건으로서 존중하는 것이다. 반면 귀족적 인간들에게는 영리함이란 사치나 세련과 같은 은은한 풍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리함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러한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적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사실 그가 적으로 삼는 것은 경멸할만한 점이 조금도 없고 진실로 존경할 만한 자에 국한된다. 이에 반해서 원한의 인간이 생각하는 적을 상상해 보자. 바로 여기에서 그의 행위, 그의 창조가 드러난다. 그는 우선 사악한 적을, 즉 악인을 마음 속에 품고, 이것을 사실상 기본개념으로 해서 그 다음 바로 거기에서 그것의 반대, 대조되는 상으로서 선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데-이 선인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3.

인간이라는 맹수를 잘 길들여서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만드는 데 모든 문화의 의의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어쨌든 진리로서 믿어지고 있지만, 만일 그것이 정말이라고 한다면, 귀족적 종족과 그 이상을 결국은 결판내고 전복시키는 힘이 된 저 모든 반동본능과 원한 본능이야말로 바로 실질적인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우리는 인간에 지쳐버린 것이다.

 

5.

따라서 어떤 사물, 어떤 기관, 어떤 관습의 모든 역사도 꼭 같은 방식으로 항상 해로운 해석과 조정의 계속적인 기호의 연쇄일 수 있는 것이며, 그 해석과 조정의 원인들은 서로 연관성을 지닐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단지 우연히 계속되고 교체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 어떤 관습, 어떤 기관의 발전이란 결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진보는 아닌 것이며, 더구나 최소한의 힘으로 최단 경로를 통해 도달하는 논리적 진보 같은 것도 결코 아닌 것이다.

 

6.

단지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만이 정의될 수 있다.

 

7.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해진다.-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소 훨씬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개발해 냈다. 원래는 두개의 얇은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빈약했던 저 전체 내면세계는, 인간본능의 밖으로의 발산이 저지됨에 따라 더욱 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8.

그리스의 신들은 고귀하고 전제적인 인간 모습의 반영으로서 그것에 비추어 보면 인간 속의 야수는 자신이 신화(神化)됨을 느꼈으며 따라서 결코 자신을 물어뜯거나 자신을 학대하지도 않았다.! 이들 그리스 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피하고 그 영혼의 자유를 즐길 수 있게끔 아주 오랜동안 그들의 신들을 이용했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그 신을 이용한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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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 이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8
프리드리히 니체 / 청하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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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철학 전공자도 아니다.(같은 말처럼 보이겠지만 아다시피 전혀 같은 말이 아니다.)철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멋진 사람들처럼 니체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그를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이전에 니체의 저작을 한 권 읽었었다. 그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었고 몇몇 구절은 상당한 공감과 웅장함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만큼의 이해하지 못한 문장들로 채워진 인상적인 책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을 완독했고, 스스로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다.

<도덕의 계보>는 정말 급작스럽게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다. 전형적인 철학서의 텍스트라기보다는 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 가까운 니체의 글들에 다시금 익숙해지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익숙해지고 나자 다시 그의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니체의 글은 '말'에 가깝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이 책은 세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논문은 '<선과 악>,<우와 열>'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비이기적 행동의 심리적 모순성을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공감했다. 이 비이기적 행동의 심리적 모순성을 좀 더 친숙하게 유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인(仁)를 행하되 그 행한 사실을 잊으라'는 가르침은 심리적으로 모순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속 강요되고 교육되는 한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모순성이다.(하지만 이 유교적 번역은 순전히 개인적인 번역이므로 서로 다른 개념일 수도 있고,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아니 니체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고도 니체가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과 그의 '초인'에 대해서는 들어봤음직하다. 여기서도 니체의 가치 지향이 수동적이고, 약하고, 순종하는 것보다는 파괴하고(다른 말로는 창조하고), 행동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쪽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귀족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개념을 제시한다. 앞서 설명한 가치들의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노예의 도덕이며 후자는 귀족의 도덕이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노예는 악인을 먼저 가정하고 그 반대 개념으로서 선인을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인 반면, 귀족은 스스로에게서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하고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더 부각시키기 위해 악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번째 논문은 '<죄>,<양심의 가책> 및 기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번에는 양심과 죄의 탄생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앞서 선악, 우열의 탄생을 다룰 때도 그렇지만 명확히 계보학적이라기보다는 계보학적으로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문학적이고 웅변적인 문체 때문일까? 그는 기억보다는 오히려 건망이 인간 본연의 능력이며 그에 반하는 기억, 약속, 책임과 같은 것들은 채무관계의 불이행에 따르는 고통, 형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형벌은 죄에서 비롯하는가? 그럴거라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형벌은 분노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잔인함의 쾌감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특질이 나타난다. 여기서 푸코에 미친 영향도 살펴볼 수 있는데, 나는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인간의 이 특징에 대한 지금의 논의를 떠올렸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 문제를 직시할 것을 제안했다.(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만큼 비난할 것도 못된다. 니체와 푸코, 그리고 고통과 죽음이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는(확실히 그것은 삶에서 지나칠 정도로 격리된 감이 있다.) 이야기를 하는 이 쪽 편이 있다면 수잔 손탁과 같이 그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다른 편의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에코도 수잔 손탁과 같은 편으로 떠올릴 수 있는데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에서 불관용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특징임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놔두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구분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확실히 끄집어낼 수 있는 문제는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자연스러움은 다 좋은가? (니체는 확실히 본래부터 인간이 갖고 있는 자질들이 문명화와 도덕화로 인해 쇠퇴함으로해서 인간이 인간에 지치고 지겨워하는 비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확실히 외로워했다.)

-또 하나 건진 것은 목적과 기원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도 종종 이것을 섞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그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더 확장해서 후손과 조상의 관계까지 끄집어낸다. 조상은 신이 되고 신에 대한 채무의 죄책감이 기독교의 죄의식으로 변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세 번째 논문의 제목은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니체는 여기서 혐오와 동정이라는 병이 든 자와 건강한 자를 대립시키고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역할은 병든 자로 하여금 건강한 자를 병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병든 자로 하여금 원한이라고 하는 감정을 외부로 노출시키기보다 스스로의 내부로 돌리게 하여 건강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와 기독교로 인해 병든 자는 비로소 '죄지은 자'가 된다. 니체는 금욕주의는 극단적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세 번째 논문은 가장 난해하게 다가왔다.  

 

책 전체를 통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니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들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착한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나로서는 그의 생각이 거대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이라고 하기에는 자주 '세상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을 보면 니체는 확실히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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