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주의가는 은자가 아니다. 공심의 결여나 비사교성은 개인주의와 무관하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개인과 연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의 노마드들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과 노트북은 그들이 지구 문명의 망 속에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표지다. 개인주의는 또 이기주의와도 무관하다. 개인주의는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멈춘다는 고전적 자유관의 심리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시대' 중..
2.
문화적 상대주의는 인종적 문화적 집단이나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일종의 신인종주의로 귀결한다. 상대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다양한 문화적 차이, 곧 사람의 다양한 정체성에다가 서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때 '차이의 권리'는 교묘하게도 '권리의 차이'로 전복된다. 이것은 '선의의' 식민주의자들이 지닌 순진한 보편주의보다 더 위험하다. 인류의 단일성과 가치의 보편성을 부정하며 차이를 특권화함으로써, 그들은 자아로의 퇴각과 소통의 부재와 타인의 배제를 부추긴다. 그러니까 '우리'와 '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주의자들처럼 보편적 가치들을 포기하는 순간, 화해의 기본 원리인 톨레랑스나 상호존중이 존재 근거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그들'' 중..
3.
우익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이것이 첫 번째 다위니즘이다. 이 다위니즘에 따르면 다윈은 평등의 적이고 모든 진보주의의 적이다. 만약에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에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위니즘이 있다. ..(중략).. 토르에 따르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론이나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사회생물학은 '진짜' 다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토르는 진정한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중략).. 이 지점에서 토르는 <종의 기원>의 인기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다윈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를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이 책에서 다윈은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창시자이지만, 그 선택의 법칙이, 특히 그 도태의 측면에서, 문명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두 개의 다위니즘' 중..
4.
사르트르도 옳고 리카르두도 옳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구토>를,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런 깨달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다.
-'문학을 위하여' 중..
5.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부활시킨 1896년은 노동자 계급의 물질적 정신적 빈곤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있을 때다. 물론 쿠베르탱이 그것을 의식해서 올림픽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의 욕구불만을 잠재워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도와주는 데 필요한 세 가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스포츠는 프롤레타리아를 술에서 떼어놓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둘째, 스포츠는 사회 질서를 흩뜨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파괴 욕망을 발산하게 할 수 있었다. 셋째, 스포츠는 평화와 공정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할 수 있었다. ..(중략)..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었다면, 시모노가 보기에는 스포츠야말로 인민의 새로운 아편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하나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중략)..실상 쿠베르탱도 인종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다른 인종들에 대한 백인종의 우월함을 공언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의 정치 선전장이 된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중략).. 경기 종목과 그 종목들에 배당된 메달 수를 보아도 올림픽은 여전히 부유한 나라들의 행사다. 게다가 자기 나라의 운동 선수들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쏟아 붓는 민족주의적 열정들은 전체주의의 토양이 되고 있다. 끔찍한 것은 이 모든 상업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광란들이 올림픽 경기라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종교의 외투 속에 안전하게 몸을 가추고 있다는 점이다.
-'호모 스포르티부스' 중..
6.
이혼과 재혼이 흔하게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 동안 그의 가족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 여러 가족에 차례로 소속될 것이고, 아이들도 차례로 여러 부모를 갖게 될 것이다. 가족이 유연화되는 것이다. 그때 가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소속돼온 여러 가정들 가운데 하나를 일컫는 말이 될 것이다.
-'가족의 유연화' 중..
7.
노동자가 줄어든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역사가 목격해본 적이 없는 기괴한 방식의 세대 교체를 겪고 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자리를 물려받을 그 신세대 노동자는 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리프킨이 '실리콘칼라'라고 부르는 기계 노동자다. ..(중략).. 최초의 목화따는 기계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을 농장 경제의 착취로부터 '해방'시켰을 때,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북부 도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로 변신해 제조업 분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산업에서 서비스 부문까지 생산 활동의 전 영역을 감당하고 있는 실리콘칼라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21세기의 노동력은 어디로도 흡수되지 않는다.
-'노동의 종말' 중..
8.
냉전이 끝난 뒤에도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크고 작은 분쟁 뒤에는 어김없이 민족주의가 있다. 그전적 민족주의 시기를 비롯한 역사의 드문 국면을 제외하고는, 민족주의는 대체로 이성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것은 낭만주의로 시작해서 전체주의로 끝났다. 민족주의에 대한 제어, 더 나아가 애국심에 대한 경계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진보의 디딤돌, 진보의 걸림돌' 중..
9.
이를테면 '좌익'이라는 말에서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교조적인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냉혹한 테러리스트들이지만, '좌파'라는 말에는 뭔가 합리적이고 온건하고 지적인 이미지가 배어 있다. 마찬가지로 '우익'이라는 말에서는 해방기 서북청년단이나 칠레의 피노체트 같은 광신적 반공주의자가 연상되지만, '우파'라는 말에서는 예컨데 소설가 카뮈나 사회학자 레몽 아롱 같은 부드럽고 지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얼굴이 연상된다. ..(중략).. 물론 이념적 적대자로서의 상대편을 지칭할 때는 '좌익', '우익'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좌우의 지형' 중..
10.
호모 사피엔스, 곧 '지혜로운 인간'의 지혜는 무엇보다도 다른 호모 사피엔스를 어떻게 죽일까를 궁리하는 데 쓰여왔다.
-'전쟁과 평화' 중...
11.
실상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중략).. 그렇다면 복잡한 경어체계를 지닌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지닌 셈이다. ..(중략).. 그렇다면 경어법에 서툰 젊은 세대가 반드시 계도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와 위계' 중..
12.
실제로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답변으로 쓰여졌다. '희망의 원리'의 반대 명제로서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 유토피아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로흐가 보기에, 유토피아는 인간 의식의 본질적 구성 부분이다. ..(중략).. 그리고 이런 희망의 원리는 베이컨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를 구상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였다.
요나스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휴머니즘이다. ..(중략).. 요나스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다의적인 존재이고, 선과 악 사이에서 환원불가능하게 분열된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내재한 불행과 고통과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지만 우리가 존중하고 복종해야 할 진리는 '진정한 인간'이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진정한 인간은 그 자신의 귀함과 천함, 위대함과 비참함, 행복과 고통, 정당함과 죄업, 요컨대 그 자신의 이 모든 양가성과 분리할 수 없다."고 쓴다. 요컨대 양가성은 요나스가 보기에 인간의 본질이다.
-'유토피아와의 결별' 중..
13.
그러나 이것과는 정반대의 시나리오가 있다. 이 시나리오가 그리는 미래는 조지 오웰의 <1984년>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섞어놓은 악마적 세계다. ..(중략).. 이 시나리오의 지지자들은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 사회적 정치적 경향에 주목한다. 첫째, 인터넷에 내재한 동질화 성향이 대중의 획일화를 부추길 것이다; 둘째,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이 커지면서 지배계급의 성원들 사이에 공공 안전 심리가 크게 상승할 것이다; 셋째, 국가와 거대 기업의 이해관계를 또렷이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중략)..
사이버 세계에서는 단발적 행위가 인간 관계보다 중시되고, 전문가가 정치가보다 중시되며, 지식이 정의보다 중시되고, 가상이 현실보다 중시된다.
-'인터넷과 자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