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 / 이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8
프리드리히 니체 / 청하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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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철학 전공자도 아니다.(같은 말처럼 보이겠지만 아다시피 전혀 같은 말이 아니다.)철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멋진 사람들처럼 니체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그를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이전에 니체의 저작을 한 권 읽었었다. 그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었고 몇몇 구절은 상당한 공감과 웅장함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만큼의 이해하지 못한 문장들로 채워진 인상적인 책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을 완독했고, 스스로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다.

<도덕의 계보>는 정말 급작스럽게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다. 전형적인 철학서의 텍스트라기보다는 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 가까운 니체의 글들에 다시금 익숙해지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익숙해지고 나자 다시 그의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니체의 글은 '말'에 가깝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이 책은 세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논문은 '<선과 악>,<우와 열>'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비이기적 행동의 심리적 모순성을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공감했다. 이 비이기적 행동의 심리적 모순성을 좀 더 친숙하게 유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인(仁)를 행하되 그 행한 사실을 잊으라'는 가르침은 심리적으로 모순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속 강요되고 교육되는 한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모순성이다.(하지만 이 유교적 번역은 순전히 개인적인 번역이므로 서로 다른 개념일 수도 있고,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아니 니체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고도 니체가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과 그의 '초인'에 대해서는 들어봤음직하다. 여기서도 니체의 가치 지향이 수동적이고, 약하고, 순종하는 것보다는 파괴하고(다른 말로는 창조하고), 행동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쪽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귀족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개념을 제시한다. 앞서 설명한 가치들의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노예의 도덕이며 후자는 귀족의 도덕이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노예는 악인을 먼저 가정하고 그 반대 개념으로서 선인을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인 반면, 귀족은 스스로에게서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하고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더 부각시키기 위해 악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번째 논문은 '<죄>,<양심의 가책> 및 기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번에는 양심과 죄의 탄생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앞서 선악, 우열의 탄생을 다룰 때도 그렇지만 명확히 계보학적이라기보다는 계보학적으로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문학적이고 웅변적인 문체 때문일까? 그는 기억보다는 오히려 건망이 인간 본연의 능력이며 그에 반하는 기억, 약속, 책임과 같은 것들은 채무관계의 불이행에 따르는 고통, 형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형벌은 죄에서 비롯하는가? 그럴거라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형벌은 분노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잔인함의 쾌감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특질이 나타난다. 여기서 푸코에 미친 영향도 살펴볼 수 있는데, 나는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인간의 이 특징에 대한 지금의 논의를 떠올렸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 문제를 직시할 것을 제안했다.(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만큼 비난할 것도 못된다. 니체와 푸코, 그리고 고통과 죽음이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는(확실히 그것은 삶에서 지나칠 정도로 격리된 감이 있다.) 이야기를 하는 이 쪽 편이 있다면 수잔 손탁과 같이 그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다른 편의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에코도 수잔 손탁과 같은 편으로 떠올릴 수 있는데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에서 불관용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특징임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놔두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구분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확실히 끄집어낼 수 있는 문제는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자연스러움은 다 좋은가? (니체는 확실히 본래부터 인간이 갖고 있는 자질들이 문명화와 도덕화로 인해 쇠퇴함으로해서 인간이 인간에 지치고 지겨워하는 비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확실히 외로워했다.)

-또 하나 건진 것은 목적과 기원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도 종종 이것을 섞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그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더 확장해서 후손과 조상의 관계까지 끄집어낸다. 조상은 신이 되고 신에 대한 채무의 죄책감이 기독교의 죄의식으로 변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세 번째 논문의 제목은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니체는 여기서 혐오와 동정이라는 병이 든 자와 건강한 자를 대립시키고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역할은 병든 자로 하여금 건강한 자를 병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병든 자로 하여금 원한이라고 하는 감정을 외부로 노출시키기보다 스스로의 내부로 돌리게 하여 건강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와 기독교로 인해 병든 자는 비로소 '죄지은 자'가 된다. 니체는 금욕주의는 극단적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세 번째 논문은 가장 난해하게 다가왔다.  

 

책 전체를 통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니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들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착한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나로서는 그의 생각이 거대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이라고 하기에는 자주 '세상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을 보면 니체는 확실히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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