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한 소년의 우화는 그 소년의 순진함이나 용기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진실은 반드시 진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인간생활의 진리를 말하려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우화의 해석은 대체로 그 우화를 구성하는 일련의 인과적 요인들이 엮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보이지 않는 비단옷이라는 것을 팔러온 형제 상인은 어째서 그토록 맹랑한 술책이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임금에게 있지도 않은 옷을 입혀놓고 아름답다고 한 임금 측근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디를 향해 있던 것일까. 임금이란 으레 아첨배에 속게 마련인 것일까. 그리고 옷을 걸치지 않고서도 입었다고 우기는 '통치자의 진리와 권위'는 임금의 것인가 측근 아첨배의 것일까. 이와 같은 '허구와 허위'는 통치자들의 속성이어야 하는가. 허위가 진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는 그 사회의 제도와 풍토는 어떤 것일까.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알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모두들 입을 다물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또는 못했을까.

가장 어리석은 소년에 의해서 온 사회의 허위가 벗겨지기까지 그 임금과 재상들과 어른들과 학자들과 백성들은 타락과 자기부정 속에서 산 셈이다. 마침내 한 어린이가 나타나서 보다 현명한 어른들을 타락에서 구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왕국을 지배한 타락과 비인간화와 비굴과 자기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상태가 결과한 인간파괴와 사회적 해독은 무엇으로 측량할 것인가.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치피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하는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맡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영광(또는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2.

한 작품의 해피 엔딩은 과정의 줄거리가 가열찰수록 더욱 행복하게 느껴진다. 고뇌와 비참과 과오가 아무리 처절했어도 종말이 행복하면 그 과정은 그것으로 잊혀진다...(중략)...그러나 해피 엔딩으로써 슬펐던 과정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관객의 경우다. 슬픔을 겪은 주인공은 종말의 행복보다도 불행했던 과정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그 차이는 불행을 체험한 사람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위치의 차이이다. 

 

3.

오늘의 현실을 수정하지 않으면 내일의 현실이 우리를 구속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사관만이 이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4.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라는 것은 대개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을 마비시키고 마는 것만 같다. 텔레비전 분야의 전문가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장면의 시청자 군중을 볼 때마다 완전한 사고정지증 환자들을 보는 듯한 딱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5.

얼마 전 정부는 외국인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한다는 의도에선지 외국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성들에게 통행금지 시간을 면제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관광안내양'인가 뭔가 하는 공식명칭으로 이 특전이 부여된다는 말이다. 그러고 그 이유는 물론 외화획득이라는 국책에 이들의 공이 지대하다는 것이다. 기사를 읽는 마음이 무거웠다.

외화획득! 참 좋은 말이다. 개인도 돈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행세를 할 수 있는 사회이고 보면 정부도 국민도 외화를 버는 일이면 무엇이든 '성스러운 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풍미해 있다.

..(중략)..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 면책 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댓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6.

몇천년이 지났는데도 소크라테스를 죽인 독배는 아직도 넘쳐 있는 듯하다.

 

7.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대에 미국정부 농무성에서 사회과학 여러분야를 망라한 지도급 학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국민생활, 특히 농민생활의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는 문제를 토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지도적 권위자라고 하는 경제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들은 며칠 동안의 토의 끝에 그 문제를 무시하는데 합의했다. 이유인즉 과학자라는 것은 오직 '사실'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목표'라든가 '바람직한 것'의 문제는 '가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철학이나 종교의 지도자들이 할 일이라는 견해 때문이었다.

 

8.

권력조작과 관료통제가 심할수록 민중은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무관심의 도피방법을 택하게 마련이다.

 

9.

하나는 모든 정부 정책이나 방침이나 결정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현명'이겠고 하나는 그것을 애써 구분하려는 '우둔'일지도 모른다.

신문사 논설도 그렇고 라디오의 해설이 그렇고 텔레비전의 대담이 그렇고, 어쩐지 모든 사람들이 '현명'하기만 한 것 같아 때로 우둔한 사람도 하나 둘쯤 있어줬으면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10.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경제, 재계, 정계의 상층부에서 어울리는 동안 기자는 자기의 물질적 소속이 그 사회의 하층민중임을 망각한다.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이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이 나라의 현체제의 수익집단인 지배계층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의 동화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의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중략)..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의 한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 따위가 아무런 내적 저항감도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의 환자가 레지던트의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천 342개 면 가운데 거의 반절인 630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중략)..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11.

필자의 견해로서는 오히려 식민지적인 가치관, 문제의식,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는 이 나라의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보다는, 차라리 공장노동자나 농사꾼이나 지게꾼이 뭣인가를 느끼고 분발해서 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었다면 우리의 기자풍토가 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대학지식을 자못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 사회가 타파해야 할 권위주의가 아닐까 한다.

..(중략)..

사이비 기자란 사실을 보고도 기사화하지 못하거나, 기자가 애써 취재해온 기사를 사리와 권력 때문에 자의로 조작, 요술을 부리거나, 백성의 이익이 뭣인지를 알면서도 강자의 대변자 노릇에 만족하는 각급의 기자 이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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