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략)...원한의 인간은 결코 솔직하거나 순진하지 않으며,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하거나 순진하지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을 한다. 그의 정신은 은닉처를 은밀한 길을, 뒷문을 사랑한다. 모든 비밀스런 것이 그에게는 자기의 세계로서, 안전과 위안으로서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그는 침묵을 지키는 법, 잊어버리지 않는 법, 기다리는 법, 잠정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비굴해지는 법을 안다. 이러한 원한의 인간들의 종족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귀족적 종족보다도 영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또한 영리함을 굉장할 정도로 존중하는데, 말하자면 제일 중요한 생존조건으로서 존중하는 것이다. 반면 귀족적 인간들에게는 영리함이란 사치나 세련과 같은 은은한 풍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리함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러한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적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사실 그가 적으로 삼는 것은 경멸할만한 점이 조금도 없고 진실로 존경할 만한 자에 국한된다. 이에 반해서 원한의 인간이 생각하는 적을 상상해 보자. 바로 여기에서 그의 행위, 그의 창조가 드러난다. 그는 우선 사악한 적을, 즉 악인을 마음 속에 품고, 이것을 사실상 기본개념으로 해서 그 다음 바로 거기에서 그것의 반대, 대조되는 상으로서 선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데-이 선인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3.

인간이라는 맹수를 잘 길들여서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만드는 데 모든 문화의 의의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 어쨌든 진리로서 믿어지고 있지만, 만일 그것이 정말이라고 한다면, 귀족적 종족과 그 이상을 결국은 결판내고 전복시키는 힘이 된 저 모든 반동본능과 원한 본능이야말로 바로 실질적인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우리는 인간에 지쳐버린 것이다.

 

5.

따라서 어떤 사물, 어떤 기관, 어떤 관습의 모든 역사도 꼭 같은 방식으로 항상 해로운 해석과 조정의 계속적인 기호의 연쇄일 수 있는 것이며, 그 해석과 조정의 원인들은 서로 연관성을 지닐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단지 우연히 계속되고 교체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 어떤 관습, 어떤 기관의 발전이란 결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진보는 아닌 것이며, 더구나 최소한의 힘으로 최단 경로를 통해 도달하는 논리적 진보 같은 것도 결코 아닌 것이다.

 

6.

단지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만이 정의될 수 있다.

 

7.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해진다.-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인간의 '내면화'라는 것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소 훨씬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개발해 냈다. 원래는 두개의 얇은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빈약했던 저 전체 내면세계는, 인간본능의 밖으로의 발산이 저지됨에 따라 더욱 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얻게 되었다.

 

8.

그리스의 신들은 고귀하고 전제적인 인간 모습의 반영으로서 그것에 비추어 보면 인간 속의 야수는 자신이 신화(神化)됨을 느꼈으며 따라서 결코 자신을 물어뜯거나 자신을 학대하지도 않았다.! 이들 그리스 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피하고 그 영혼의 자유를 즐길 수 있게끔 아주 오랜동안 그들의 신들을 이용했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그 신을 이용한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