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러한 점에서 결정론적 유물론자인 니체는 모든 물질과 사건은 ‘힘의 양자들’ 사이의 물리적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단지 힘의 양자들이 배열된 하나의 특별한 배열일 따름이다. 당신의 생일이나 음악에 대한 취미와 같은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양자들은 결합과 재결합을 계속하여 새로운 현실을 형성하는데,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해체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에 양자들은 언젠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로 다시 재배열될 것이다. 사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그것들은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배열을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역사는 영겁의 과정 속에서 되풀이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지옥이다. 그것이 니체 주장의 진짜 핵심이다. 그는 우리가 인생을 되풀이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기 위해 영겁회귀를 주장하였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셈이다. 즉 당신은 ‘노예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초인’이다.
-‘영겁회귀’ 중...
2.
사실 그는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와 같은 초기의 견해들을 거의 포기하였다. 대부분의 언어 철학자들처럼, 젊었을 때의 비트겐슈타인은 말을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것 또는 나타내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나중의 비트겐슈타인은 지칭하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였다.
..(중략)..
그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다. 즉 일련의 규칙들(언어적 협약)에 따라 사용되는 ‘조각들’ 또는 ‘도구’(말)들의 세트라는 것이다.
..(중략)..
여기에 따르면, 지식은 우리의 언어에 상응하는 어떤 ‘실체’를 발견(또는 발명)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언어가 작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일상 언어야말로 철학의 훌륭한 주제가 된다. ‘존재’나 ‘진리’와 같은 개념과 관계된 전통적인 철학문제들은 단지 용어에서 비롯되는 혼란이거나, 그 말이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실체’를 발견하려는 잘못된 시도에서 발생하는 혼란일 뿐이다.
-“세계는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이다.” 중...
3.
우선, 키에르케고르는 선과 악은 객관적 또는 본질적 실체를 가진다는 이상주의적 믿음을 부정하였다. 그것들은 오히려 ‘주관적 진리’로서,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확대 적용할 수는 없지만 개인행동의 유일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살인이 ‘악’이라고 어떤 객관적이거나 논리적 방법으로도 단언할 수 없다. 살인이 ‘선’으로 여겨지는 상황들이 정말 있다.(자기방어나 전쟁 등에서) 대개의 경우 올바른 행동을 논리적으로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불의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또는 신을 믿어야 할지 인간의 계산으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결정이나 믿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객관적 진리도 일부 있긴 있다. 2더하기 2는 4이며,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진리들은-비록 흥미로울지는 모르지만-우리의 일상적인 존재나 중요한 결정 및 행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는 우리라는 존재는 바로 우리가 하는 행동이라고 믿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존재한다면,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가진 가치들-순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진리와 믿음들-위에 바탕을 둔다.
자연도 사회도 우리에게 선과 악, 옳음과 그름에 관하여 확실성을 주지 않는다. 우리 행동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러한 불확실성 앞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중..
4.
이 미래는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無)’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모든 행동은 이 무에서 비롯된다. 만약 당신이 언제나 현재만 생각하며 살도록 조절되어 있고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다면, 당신은 상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할 수 없다. 현재는 단지 있는 그대로이며,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떤 행동도 취할 동기가 없다. 사르트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현재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바탕을 둔 우리의 행동 또한 불필요한 것이다.
목표란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며, 그와 함께 우리 자신의 가치들도 만들어 낸다.(여기에서 사르트르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원용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구토’는 선택의 절대적 자유(가능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인식)로부터 비롯된다. 예를 들면, 어느 순간에 당신은 자살하길 선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생각-자아에 큰 균열을 일으키는-이 불안과 구토를 발생시킨다.(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당신은 실제로 그것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자유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각각의 상황을 우리 자신의 ‘세계’로 만드는 데에-우리 자신의 목표, 대처 방법, 선태의 불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선택하는 데에-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선택을 계속하는 것을 최소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을 견뎌내지 못해 이러한 사실을 지기하기를 거부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우리 시대에 관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임 있는 성인으로서 보기보다는 희생자로 보려고 한다.
-“나는 자유의 형벌을 받았다.” 중..
5.
그렇다면 사과에 작용하는 지구의 힘은 지구에 작용하는 사과의 힘과 정확하게 똑같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지구의 운동량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사과의 질량에 비해 지구의 질량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물리 법칙의 세계에서는 두 물체 중 어떤 물체가 실제로 움직였느냐 하는 것은 관심 밖의 문제이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질 때 우리는 흔히 지구의 중력 때문에 사과가 떨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지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에 일어나는 반작용을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뉴턴의 법칙’ 중..
6.
패러다임의 장점은 연구 활동을 집중시켜 준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패러다임이 없다면, 각각의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임의적인 자료들을 모아 놓고서 혼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각자 다른 이론들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분주하게 애를 써야만 할 것이다. 반면에 패러다임이 지닌 문제점은 일단 자리를 잡으면 당연히 옳은 것으로 인식되어 다른 변화의 여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진보는 점점 더 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전해지게 된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흔히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쉽다...(중략)..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분명히 보게도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이동’ 중..
7.
종합하여 말하자면, 한 좌표계에서 시속 500마일의 속도로 보이는 물체의 운동이 다른 좌표계에서 보면 시속 1500마일도 될 수 있고, 시속 -500마일도 될 수 있고, 0도 될 수 있다.다시 말해 ‘절대’ 속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상대 속도만이 존재한다...(중략)..이것이 바로 ‘뉴턴식’의 상대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
다만 뉴턴이 한 가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은, 우리가 어떤 좌표계 안에 있는 간에 그리고 그것이 다른 좌표계에 대해 어떤 속도로 움직이든 간에, 빛의 속도는 언제나 일정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 옆을 지나가는 빛의 속도는 비행기 안에서 볼 때에도 우주 정거장에서 볼 때에나 지상에서 볼 때에나 모두 똑같이 측정된다. 빛의 속도-초속 약 30만Km-는 관습적으로 c로 나타낸다.
이 문제를 지상으로 가지고와 보자. 지금 우리는 시속 80마일로 달리는 열차를 타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 열차는 투명하다고 가정하자. 열차를 타고 있는 당신이 열차 앞쪽으로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ㅇ간다고 하면, 밖에 있는 관찰자에게 당신은 지상에 대해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은 상식이고 뉴턴의 상대론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이 관찰자가 열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열차 선로 뒤쪽에서 손전등을 비추었다고 하자. 그러면 손전등의 빛은 열차를 통과해 지나가면서 지상에 평행하게 나아간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이 때 만약 열차의 차장이 열차를 통과해 지나가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그 속도는 c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상에 서 있는 관찰자가 그 빛의 속도를 측정하더라도 그 속도는 여시 c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움직이는 열차에서 측정한 값과 지상에서 측정한 값이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앞의 경우를 다시 돌이켜보자. 열차에 대해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은 지상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빠른 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인다. 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상식적인 결과가 나오는데, 빛의 경우에는 이것이 왜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측정한 빛의 속도는 c에다가 시속 80마일을 더한 것이 되어야 당연하지 않은가?..(중략)..
여기에 상대성 이론의 비밀이 숨어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만약 당신이 열차 안에서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어간다면, 밖에 있는 관찰자가 볼 때에는 당신이 지상에 대해 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아주 약간 더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즉 이 경우에 80+3=83이 아닌 것이다. 이 덧셈이 정확하게 성립하는 경우는 당신이 열차 안에서 정지하고 있을 때뿐이다...(중략)..
0과 c 사이의 어떤 운동에 대해서도 지상에 있는 관찰자에게는 공간의 수추과 시간의 지연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빛의 속도의 절대성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론이 불가피하다. 열차 속에서의 시간과 공간이 지상의 것과 다르다면,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속도는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열차 속에서 측정한 당신의 속도는 시속 3마일인데, 지상에서 측정한 열차에 대한 당신의 속도가 3마일보다 약간 작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열차 속에서 측정한 거리와 시간이 지상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자신의 논문 속에서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중략)..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일정한 상대 운동을 하는 두 좌표계(예컨대 정지해 있는 지상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열차)에 대해 물리 법칙들은 똑같이 성립한다는 뉴턴의 상대론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법칙 주에서 가장 완전해 보이는 법칙 중 하나를 버렸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라는 개념이었다...(중략)..
사실,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1마일로 측정되는 거리는 지상에서 볼 때에는 1마일보다 약간 더 짧아 보인다. 도한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측정한 1초는 지상에서 1초보다 약간 더 길어 보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묘한 것은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1마일로 측정되는 거리는 열차 안에서 볼 때에는 1마일보다 야간 더 짧아 보이고, 지상에서 측정한 1초는 열차 안에서는 1초보다 약간 더 길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움직이는 것은 지상이 아니고 열차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상대성 이론에 어긋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운동하는 물체가 문자 그대로 실제로 수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길이 30cm의 핫도그가 바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그 기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대성 이론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은 열차가 아니라, 열차는 정지해 있고 땅이 움직인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어디서도 “봐라, 여기서는 30cm의 핫도그가 절대적으로 30cm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수축은 겉보기 수축을 말한다. 즉 상대 운동을 하는 당사자들이 누구의 측정이 정확한가를 놓고 논쟁을 벌일 때 나타나는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불행한 사실은 그 누구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또 그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보기 위해서는 빛이 눈의 망막에 들어와야 하는데, 빛이 이동하는 데에 도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당신이 받을 때-당신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달라진다...(중략)..
일반 상대성 이론
..(중략)..
1916년에 그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더욱 확대시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어떤 선택된 좌표점에 대하여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거나 속도가 변하는 어떤 계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상대성 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가속도는 본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음을 증명함으로써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중략)..
또한 상대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만이 아니고, 가속도와 중력도 상대적이며, 따라서 거기서 도출된 모든 다른 양(예컨대 힘과 운동량)도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였다. 따라서 1킬로미터나 1초 또는 1킬로그램의 진정한 값을 정할 수 있는 좌표계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중략)..
더 극단적으로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이들 개념은 자연의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아인슈타인에게는 ‘시공간’)의 모양은 중력에 따라 변한다. 그런데 중력은 물질의 존재에 의해 생겨나므로,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없는 시간과 공간이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다.
-‘상대성 이론’ 중..
8.
다시 말해서, 고에너지 복사를 사용하면 특정 시점에 전자가 존재하는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나, 전자의 최초 속도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얻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또 저에너지 복사를 사용하면 특정 시점에 전자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게 얻을 수 있으나, 전자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중략)..
다시 말해서, 불확정성은 결코 0으로 줄일 수 없으며, 하나의 양을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다른 양은 그만큼 더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측정 도구가 정밀하지 못해서 아원자 입자에 관한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양자 행동에는 본질저인 불확실성이 내재해 있어 결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원리의 요지이다. 전자들은 실제로는 정확한 속도로 움직이는 정확한 점처럼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자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불확정성의 원리가 의미하는 것은, 입자나 양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물체들과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물체들을 보고, “이것은 여기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입자의 본질적인 성질들(위치, 속도, 운동량, 에너지)을 동시에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기 위해 행하는 우리의 관측 행위 자체가 이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의 양을 불가피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중략)..
이러한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많은 유수한 물리학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불확정성 원리’ 중..
9.
크레타인의 거짓말 패러독스를 피하려면, 메타언어를 단순 언어로부터 분리하고 메타언어의 진리와 단순 언어의 진리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와 같은 패러독스는 모두 ‘무의미한 말’의 영역으로 내던져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들 진술은 단순 언어와 메타언어를 동일시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지만 단순 언어와 메타언어를 분리하는 것은 생각보다는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이 앞의 문장은 10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진술은 메타언어의 간단한 예이고, 또한 참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진술의 예를 보자. “이 문단은 8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메타언어 문장이 가진 문제는 스스로를 그러한 문장 중의 하나로 센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은 단순 언어들뿐만 아니라 메타언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메타메타언어 문장인가? 그리고 방금 그 진술은 또한 메타메타메타언어 문장인가? 그렇다면 이 문단이 8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메타메타메타메타언어 진술이 되는 셈인가?
..(중략)..
공리에는 항상 크레타인의 거짓말 패러독스가 숨어 있었다.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원리>에 숨어있던 패러독스는 18년 뒤에 한 오스트리아 수하자가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수학자는 러셀의 패러독스를 다시 러셀에게 던져 주었다.
-‘러셀의 패러독스(메타언어)’ 중..
10.
괴델이 주장한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표준 논리나 산술과 같은 어떤 공식적인 복잡한 사고 체계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유한한 수의 기본 가정(공리)과 규칙이 있을 때, 그 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는 참인 진술이 최소한 하나 이상 존재한다.” 순수 산술과 같은 공식 기호 체계는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의 완전성이나 비모순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요지이다.(완전한 계는 참인 진술만을 만들어낸다. 한편, 비모순적인 계는 모순적인 진술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체계를 보강한다든지 확장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체계 밖에서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밖에서 끌어 온 그 방법들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그 밖의 체계 내에서는 역시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중..
11.
키란 주관적이고 연속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몇 cm 이하의 키를 가진 사람들은 그 집합에 속하지 않는다고 딱 선을 긋기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180cm의 키를 가진 사람은 키가 큰 사람들의 집합에 속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179.999cm의 키를 가진 사람은 어떤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점점 퍼지(fuzzy)해질 것이다.
또 다른 퍼지 집합의 한 예를 든다면, 행복한 사람들의 집합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행복하기 때문이다...(중략)..따라서 “당신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직무 수해에 대해 만족합니까?”와 같은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퍼지논리’ 중..
12.
서방세계에서 잠시 유행한 후에, 파블로프의 거창한 주장들은 대부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구소련에서는 따뜻하게 받아들여졌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파블로프의 이론은 인간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조건과 생활 패턴에 따라 일어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견해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중..
13.
물론 왓슨은 우리가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곡예를 해야 했다. 어떤 난처한 경우에 그는 생각을 일종의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얼버무리고 넘어갔다.(처음에 그는 말은 단지 조건 행위일 따름이며, 결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감정 역시 본능적 행동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완고한 행위주의자들이 행위에 관한 자신들의 그림에서 의미를 완전히 제거한 사실이다.
그들은 똑같은 ‘자극’(예컨대 총 소리)이 어떻게 상황이나 시간에 따른 다른 ‘반응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의 모형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소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뿐이고, 의식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중략)..
더군다나 인간은 차치하고라도 동물들이 실제 세계에서(실험실과는 달리) 조건화를 통해 학습하는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분명치 않다.
-‘행위주의’ 중..
14.
해체의 목적은 그러한 대립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요소들(글, 기호 표현 등)이 첫 번째 요소들(말, 기호 내용 등)보다 더 좋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들 용어들을 구별하는 것이 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이나 동일성을 가려 버린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말과 글의 구분을 예로 들어보자. 전통적인 철학적 설명에서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하는 사람의 ‘존재’와 동일시된다. 말할 때 말하는 사람은 몸 안에 존재하지만, 그의 말은 그의 생각과 느낌을 즉각적으로 나타낸다. 이에 비하여 글은 글쓴이의 잠재적 ‘부재’라는 특징을 지닌다. 비록 루소는 죽었지만 루소의 글들은 읽을 수 있다. 루소의 육체적 부재는 또한 그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의 문장 가운데 모호하거나 혼돈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깨워서 그가 진정으로 뜻한 바가 무엇인지 물어 볼 수가 없다...(중략)..
여기에 대한 데리다의 반박은 부재나 혼돈 또는 실수 등에 대하여 말이 결코 글보다 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란 모두 부재에 관한 것이다. 만야 어떤 것이 눈앞이나 마음 앞에 명백하게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것의 의미나 목적이 자명하다면, 거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 없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들-물체나 생각이나 태도 등등-을 가리키기 위해 말한다. 그리고 말을 한다고 해서 말이 가리키는 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은 단지 그 부재를 강화시킬 따름이다.
..(중략)..
말은 글만큼 텍스트적이며, 똑같은 만큼 쉽게 혼동되고 잘못 해석된다. 누구나 결코 끝나지 않는 논쟁들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합의가 아니라 더 많은 차이를 새로 만들어 내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말은 사물이나 생각을 완전히 분명하게 존재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중략)..
요컨대 사람들은 영원히 이야기하고 도 이야기할 것이며, 어떠한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존재가 위에서 내려와 그들을 중단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를 실망시키는 사실인 동시에 위안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체주의’ 중..
15.
예를 들면, 글의 발명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록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인쇄 출판물과 책의 발명은 혼자만의 독서와 성찰을 촉진함으로서 17세기 개인주의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글의 ‘메시지(결과, 효과)’는 분석적 사고였고, 인쇄의 메시지는 개인주의였다.
-“매체는 메시지이다.” 중..
16.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예견하였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이상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중략)..
바꿔 말하면, 마르크스는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정치 체제를 일시적인 필요악으로 보았다. 수십 년에 걸친 압제와 부패는 그의 원래 계획 어디에도 없었다...(중략)..사실, 물질적 조건들을 강조하는 분석방법은 거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러도 좋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계급투쟁’ 중..
17.
그런데 마르크스는 종교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종교로 이끄는 사회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는 영원히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에는 가치와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중..
18.
만약 당신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 10분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10분 동안에 마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4시간이 있다면 4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것이 ‘파킨슨의 법칙’의 골자인데...(중략)..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일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변하는 것은 자유시간이 아니라 효율성이다...(중략)..파킨슨의 법칙은 사무실에서나 가정에서나 정말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바쁠수록 당신은 더 효율적으로 일한다. 한가한 날일수록 단순한 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면 결코 끝낼 수 없는 일-대청소와 같은-은 신이 주신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파킨슨의 법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