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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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한 연구

 


모든 천재들과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기리는 진정한 방법은 대상을 숭배하고 기념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그건 대상을 박제화하는 것이다.) 대상을 끊임없이 오늘에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말이다. 

20세기에 단 한명의 소설가를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문학에 있어서 ‘천재’가 있다면(엄밀한 의미에서의 '천재‘는 수학과 음악에서밖에 나올 수 없다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19세기를 살았던 21세기 철학자 니체가 오늘날에도 살아있듯, 20세기를 살았던 21세기 문학가 보르헤스도 오늘날 여러 모습으로 살아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나는 그를 패러디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제목도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땄다. 내 계획은 이랬다. 먼저 주석을 달아 또 다른 보르헤스를 만들어 낸다. 성이 다른 보르헤스를 중세에 살았던 가상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의 책 <픽션들>은 표절이나 패러디, 조금의 각색도 없는 번역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 모두 불태워졌다고 전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보르헤스가(혹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쓰는 어떤 작가가) 어디선가 이 책을 구해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내게 되고 그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기수로 칭송받게 된다. 이어 내가 쓰지도 않은 가상의 책, 혹은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 혹은 가상의 작가가 쓴 진짜 책 제목을 언급하며 이것이 모두 두 번째 <픽션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하며 글을 끝낸다. 

하지만, 내가 이 천재의 작품을 오늘에 살아 있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재주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의 작품은 오늘에 살아 있기 때문에,(사실 가장 큰 원인은 능력부족이자 그렇게 해봤자 더 이상 참신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동기부족이다.) 나 한명 정도는 그의 작품을 숭배하고 기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뭇 진지하게 <픽션들>, 그러니까 이 ‘구라의 향연’들을 대하기로 했다. 

 

이 책을 구라의 향연, 구라의 기술(skill)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부당한 지도 모른다. 책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 이것은 모두 <픽션들>이기 때문이다. 픽션은 구라다. 있지도 않은 책을 있다고 하거나, 가상의 작품에서 자신의 실제 단편의 영감을 받았다든가,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 낸다거나,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을 이야기한다거나 하는 기술들은 오늘날의 소설의 작법에 있어서 이제는 그리 신선하지도 못한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이 거짓말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섞고, 때로는 자기 자신도 이 거짓말에 동참시키기도 하는 모습은 보르헤스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만들어준다. 그는 기존의 소설작법을 벗어났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그가 자주 사용하고 좋아하는 개념들은 무한, 반복, 미로, 역설과 같은 것들이다. 책을 읽다가 내가 떠올린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4차원)’-<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헤겔의 역사철학’-<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보들리야르의 시물라크르'-<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니체의 영겁회귀’-<바벨의 도서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튜링테스트’-<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벤야민의 아우라’-<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제논의 역설’-<죽음과 나침판> 

<틀뢴…>에 나오는 ‘미래는 기다림이고 과거는 기억’이라든가, ‘모든 작품, 지식의 주체는 한 사람’이라든가, ‘신이 아닌 인간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든가 하는 개념들도 인상적이었다. 가상이 현실을 전복해버리는 것도 환상적이었다.

 

<알모따심…>은 순례의 대상이 순례자, 즉 찾으려는 대상이 찾는 자라는 생각도 흥미로웠고 허구적 텍스트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 대한 평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 자체가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여자친구를 통해서 듣고 놀랐다.

<삐에르 메나르…>는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세르반테스가 쓴 작품과 글자하나 다르지 않은 ‘돈키호테’를 쓰고 새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오늘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김만중의 <구운몽>을 글자 그대로 베낀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을 새로운 작품, 더 나아가서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작품에서 ‘튜링 테스트’를 생각한 것은 기본적으로 착상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질문자가 컴퓨터와 인간에게 동시에 질문을 던져 답을 받았을 때 어느 것이 기계의 것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컴퓨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튜링 테스트다. 삐에르 메나르 혹은 구운몽을 베끼는 누군가를 컴퓨터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생각은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질서에 우연을 개입시키는 이야기이다. 우리 삶의 혼돈과 무질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회사’에 책임이 있을 지도 모른다.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영원과 불사’의 개념도 흥미로웠다.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개념이고 불사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개념이다. 전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그리스 신들에 해당된다.

<끝없이…>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개념과 상대성, 여기에 니체의 영겁회귀 개념이 더해진 듯 느껴진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역자 후기에서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 사건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언급하는 소설’에 대해 인터넷에서의 하이퍼 텍스트를 언급하고 있다. 어쩌면 ‘맥락’에 대한 강조는 구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천재…>는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잠들기 싫은 순간들’ 때문에 푸네스를 다소 부러워했던 소설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하면서 어떤 차이점이나 공통점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 하지만 여자친구는 꽤나 다르게 읽었고 결말을 들어가며 푸네스처럼 모든 것에 의미부여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스스로 피곤해하는 이유도 아주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 역시 기억 속의 재료들을 취사선택해서 소설을 써야하는 문제에 대한 소설이라고 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푸네스는 분명 지향해서는 안 되는 존재일테지만 보르헤스의 시선은 따스하다.

<배신자와 영웅…>은 반란군의 지도자인 영웅이 사실은 배신자였고, 이 사실을 반란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역사의 암살 장면을 차용해 마치 연극처럼 꾸민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파헤친 화자 역시 이 연극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화자는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힌트, 이를테면 ‘미끼’를 문 것이다.

<죽음과 나침판>은 내 생각에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직선으로 된 미로’는 제논의 역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설’을 ‘미로’로 변형시킨 그의 재능에 정말 탄복했다.

<유다에 관한…>은 유다의 배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실적 의미에서 기독교의 업적이나 과실에 대한 것보다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 큰 나에게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유다는 예수를 반영하고 예수가 스스로를 낮췄듯 유다도 스스로를 낮춰 밀고자, 배신자가 되었다는 해석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찬탈할 수 없다는 겸손에서 비롯된 행동, 즉 선인이 되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는 해석 등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기 언급하지 않은 소설들 중에 인상적이지 않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역시 책은 혼자 읽고 끝내서는 안 된다.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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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현재란 규정될 수가 없는 거고, 미래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마치 현재적 기다림과 같고, 과거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현재적 기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작업은 사기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어떤 타협도 맺지 않아야 한다>는. 버클리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도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그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했다.




3.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현실 또한 질서정연하다고 반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리라. 아마 현실 또한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은 여태까지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신적인 법-나는 비인간적법이라고 번역한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이다.




-1,2,3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중에서..




4.

또 다른 텍스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화가에, 햄릿을 까나비에르 거리에, 또는 돈키호테를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 가져다 놓고 있는 그런 기생충 같은 작품들 중의 하나였다. 뛰어난 품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메나르는 그러한 헛되고 소란스러운 행태를 혐오했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것들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따른 천박한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보다 나쁜 것으로) 모든 시대가 동일하다거나, 또는 모든 시대가 서로 다르다는 그런 초보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5.

그 어떤 지적인 활동도 종국에 가서는 쓸모없게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는 시초의 세계에 대해 그럴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철학사 속에서 단순히 한 장-만일 한 단락이나 명사로 되어버리지 않는다면-으로 남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에 따른 쇠락현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그것은 애국주의적 취향, 문법적으로 오만함, 호화로운 장정으로 꾸민 각종 난잡한 판본들이 난무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뿐이다.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




-4,5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중에서..




6.

나는 인류가 점차로 보다 대담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세상에는 전사들과 도적들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싶다.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중에서..




7.

그는 청회빛 말이 자신을 내동댕이쳤던, 그 비가 뿌리던 날의 오후 이전에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종의 소경, 귀머거리, 얼간이, 건망증 환자.




8.

그는 다형적이고 순간적이고 그리고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세계에 대한 고독하고 명증한 관찰자였다. 바빌로니아, 런던, 그리고 뉴욕은 자신들이 가진 잔혹한 현란함을 가지고 인류의 상상력을 압도해 왔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그곳들의 건물이나,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는 큰길에서는 아무도 남아메리카의 황량한 한 변두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행한 이레네오 위로 수렴되는 것과 같은 전혀 지칠 줄 모르는 어떤 현실의 열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여 버리는 것과 같다.

...(중략)...

또한 그는 자신이 늘 물살에 흔들리고 휩쓸려가는 강바닥에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라틴어를 습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7,8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에서..




9.

그가 입을 열었다. 뢴로트는 그의 목소리에서 지친 승리의 감정, 우주의 크기만 한 증오심, 그 증오보다 결코 작지 않은 슬픔을 읽었다.




-‘죽음과 나침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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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픽션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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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이나 씨디장을 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기보다 책장과 씨디장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습성이 있는 나는 이 책도 그렇게 발견하게 되었다. 

수많은 책 중에 눈에 띄게 크지도 않고, 눈에 띄는 제목도 아니고, 눈에 띄는 표지도 아니었지만 책 등에 박힌 글자, '박형서 소설집-자정의 픽션'은 내게 익숙한 직감으로 다가왔다. '아, 이 책도 읽게 되겠구나' 

그렇게 머리에 박히는 책들이 있다. 작가와 제목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런걸 인연이라 해야하나?

모두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또 다른 젊은 소설가 김형중의 해설, 그리고 가장 실망스러웠던 작가 자신의 말까지 실려 있는 '친절한' 책이다. 유감스럽게도 단편 소설들의 경우 나는 불친절한 책들이 좋다. 작품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런 책 말이다.

김형중의 해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박형서의 소설은 기존의 소설에 대한 어떠한 정의에도 들어맞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개연성은 물론 알레고리도 없고, 작가가 이 소설들을 통해 의도한 것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외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해설로 전하고자 하는 말이 이 정도라면 일기장에 적는 편이 낫겠다 싶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의도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래도 좀 이해가 간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서문에서 이를 얼마나 운치있게 표현했던가. 

이 이야기에서 주제를 찾으려는 사람은 고소될것이며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사람은 추방될것이며
이 이야기에서 줄거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총살당할것이다.

작가가 아닌 사람(독자-그가 소설가든 뭐든 이 책을 쓴 사람이 아닌 한 그는 독자다.)이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가 없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외에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그런 소리를 활자로 읽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그렇다. 다 내 잘못이다.) 여덟개의 작품들에 바로 이어지는 이 해설은 여덟개의 단편들이 줬던 감흥을 무참히 깨버린다. 게다가 독자가 애써 찾아낸 현실에 대한 개연성과 알레고리, 작가의 의도 등을 순식간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그는 독자에 대해 무례하다. 나는 심적으로 반대편에 서고 싶은 사람이지만 수준낮은 독자에 대한 혐오는 때때로 작가의 천재성을 빛나게 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자기도 모르는 작가의 의도를 헛짚은 사람들을 가리켜 '병자, 강박증 환자' 등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랄이다. 지랄.

작가의 말은 없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작가의 말은 여덟개의 소설에 대한 집필동기와 착안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말처럼 뻔뻔하게 굴기로 마음 먹었다면 이런 구질구질한 말들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작가가 젊다는 걸 입증하기도 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안타깝다.('날개'의 착장 동기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니!)


이제 각 소설들을 보면,

처음 등장하는 단편인 <논쟁의 기술>은 썩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진진하게, 결론을 궁금하게 만든다. 역시 결말은 이런 류의 소설들이 그렇듯 황당무개하지만 오히려 이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단지 두 사람의 대결로는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뿐더러 논쟁으로 누군가가 승리한다면 그게 소설꺼리가 되겠는가. 소설 중간중간에 기술의 이름(유리한 주제의 선정, 은근히 겁주기, 무시하기, 얄밉게 웃기, 말허리 자르기, 반말하기 등등)을 소제목으로 넣는 것도 괜찮았다.  

두 번째 <날개>는 다 읽고 '아, 이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가상의 창작물은 작가의 집필 동기였다. 그는 애니메이션 광고에서 착안해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아무튼, 그다지. 

다음 <노란 육교>는 여덟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결말까지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 건조한 관찰자 시점으로 '망자의 길'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속으로 내내 '정말 이랬으면 좋겠다. 이런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 어쩐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던 소설이다.

<물 속의 아이>는 기절놀이를 즐기는 한 아이 때문에 평범했던 온 가족이 파멸한다는 내용인데 어떤 상황을 극한으로 밀고나갔다는 건 알겠으나 어딘가 좀 부족한 듯 싶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적인 장치 같은 것들이 조금 견고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만 웃겨버렸다. 첫 시작과 마지막이 쉼표 하나 없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나름 신선했다. 

다섯 번째<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일종의 패러디인데 유쾌하게 잘 읽었다. 달결에 대한 성적 은유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외할머니'를 통해 이 구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내는 데에서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럴싸하단 말이지. 웃기는 부분들이 논문이라는 딱딱한 형식의 글 속에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있어서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었다.
<존재, 혹은 고통 따위의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은 좀 에러였다. 노 코멘트다. 

<진실의 방으로>는 상당히 어두운 소설이다. 반전이 다소 충격적이지만 그렇게 새로운 반전은 아니다. 

마지막 <두유전쟁>은 제목만 보았을 때는 먹는 두유인 줄 알았으나 머리 두(頭)자에 기름 유(油) 전쟁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바로 씨네21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가 정훈이의 만화를 떠올렸다. 어떤 원본 영화에 대해 정훈이는 항상 패러디를 한다. 이 소설도 어떤 원본 영화에 대한 패러디 같다. 정훈이의 만화에서 남기남이 자주 납치되듯, 성범수 역시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고 코믹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결말 역시 패러디스럽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패러디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분명 흔한 경우는 아닐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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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화현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역사학도로서 우리 사회에서 문화가 승리를 거두며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등장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즐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려를 금할 수 없고, 이런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 또한 많이 있다. 왜일까? 이유는 많을 테지만 가장 비중이 큰 문제점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문화가 왜곡된 형태의 문화라는 사실이다. 문화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품이 될 수 있고 언어마저도 그에 편승하여 자본 증식의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문화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상업화되고 소비화된 문화에 대한 논의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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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점에서 결정론적 유물론자인 니체는 모든 물질과 사건은 ‘힘의 양자들’ 사이의 물리적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단지 힘의 양자들이 배열된 하나의 특별한 배열일 따름이다. 당신의 생일이나 음악에 대한 취미와 같은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양자들은 결합과 재결합을 계속하여 새로운 현실을 형성하는데,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세계의 해체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에 양자들은 언젠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로 다시 재배열될 것이다. 사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그것들은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배열을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역사는 영겁의 과정 속에서 되풀이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지옥이다. 그것이 니체 주장의 진짜 핵심이다. 그는 우리가 인생을 되풀이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기 위해 영겁회귀를 주장하였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셈이다. 즉 당신은 ‘노예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초인’이다.




-‘영겁회귀’ 중...







2.

사실 그는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와 같은 초기의 견해들을 거의 포기하였다. 대부분의 언어 철학자들처럼, 젊었을 때의 비트겐슈타인은 말을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것 또는 나타내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나중의 비트겐슈타인은 지칭하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였다.

..(중략)..

그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다. 즉 일련의 규칙들(언어적 협약)에 따라 사용되는 ‘조각들’ 또는 ‘도구’(말)들의 세트라는 것이다.

..(중략)..

여기에 따르면, 지식은 우리의 언어에 상응하는 어떤 ‘실체’를 발견(또는 발명)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언어가 작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일상 언어야말로 철학의 훌륭한 주제가 된다. ‘존재’나 ‘진리’와 같은 개념과 관계된 전통적인 철학문제들은 단지 용어에서 비롯되는 혼란이거나, 그 말이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실체’를 발견하려는 잘못된 시도에서 발생하는 혼란일 뿐이다.




-“세계는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이다.” 중...







3.

우선, 키에르케고르는 선과 악은 객관적 또는 본질적 실체를 가진다는 이상주의적 믿음을 부정하였다. 그것들은 오히려 ‘주관적 진리’로서,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확대 적용할 수는 없지만 개인행동의 유일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살인이 ‘악’이라고 어떤 객관적이거나 논리적 방법으로도 단언할 수 없다. 살인이 ‘선’으로 여겨지는 상황들이 정말 있다.(자기방어나 전쟁 등에서) 대개의 경우 올바른 행동을 논리적으로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불의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또는 신을 믿어야 할지 인간의 계산으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결정이나 믿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객관적 진리도 일부 있긴 있다. 2더하기 2는 4이며,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진리들은-비록 흥미로울지는 모르지만-우리의 일상적인 존재나 중요한 결정 및 행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는 우리라는 존재는 바로 우리가 하는 행동이라고 믿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존재한다면,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가진 가치들-순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진리와 믿음들-위에 바탕을 둔다.

자연도 사회도 우리에게 선과 악, 옳음과 그름에 관하여 확실성을 주지 않는다. 우리 행동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러한 불확실성 앞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중..







4.

이 미래는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無)’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모든 행동은 이 무에서 비롯된다. 만약 당신이 언제나 현재만 생각하며 살도록 조절되어 있고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다면, 당신은 상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할 수 없다. 현재는 단지 있는 그대로이며,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떤 행동도 취할 동기가 없다. 사르트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현재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바탕을 둔 우리의 행동 또한 불필요한 것이다.

목표란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며, 그와 함께 우리 자신의 가치들도 만들어 낸다.(여기에서 사르트르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원용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구토’는 선택의 절대적 자유(가능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인식)로부터 비롯된다. 예를 들면, 어느 순간에 당신은 자살하길 선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생각-자아에 큰 균열을 일으키는-이 불안과 구토를 발생시킨다.(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당신은 실제로 그것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자유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각각의 상황을 우리 자신의 ‘세계’로 만드는 데에-우리 자신의 목표, 대처 방법, 선태의 불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선택하는 데에-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선택을 계속하는 것을 최소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을 견뎌내지 못해 이러한 사실을 지기하기를 거부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우리 시대에 관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임 있는 성인으로서 보기보다는 희생자로 보려고 한다.




-“나는 자유의 형벌을 받았다.” 중..







5.

그렇다면 사과에 작용하는 지구의 힘은 지구에 작용하는 사과의 힘과 정확하게 똑같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지구의 운동량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사과의 질량에 비해 지구의 질량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물리 법칙의 세계에서는 두 물체 중 어떤 물체가 실제로 움직였느냐 하는 것은 관심 밖의 문제이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질 때 우리는 흔히 지구의 중력 때문에 사과가 떨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지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에 일어나는 반작용을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뉴턴의 법칙’ 중..







6.

패러다임의 장점은 연구 활동을 집중시켜 준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패러다임이 없다면, 각각의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임의적인 자료들을 모아 놓고서 혼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각자 다른 이론들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분주하게 애를 써야만 할 것이다. 반면에 패러다임이 지닌 문제점은 일단 자리를 잡으면 당연히 옳은 것으로 인식되어 다른 변화의 여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진보는 점점 더 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전해지게 된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흔히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 쉽다...(중략)..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분명히 보게도 하지만, 그 밖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이동’ 중..







7.

종합하여 말하자면, 한 좌표계에서 시속 500마일의 속도로 보이는 물체의 운동이 다른 좌표계에서 보면 시속 1500마일도 될 수 있고, 시속 -500마일도 될 수 있고, 0도 될 수 있다.다시 말해 ‘절대’ 속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상대 속도만이 존재한다...(중략)..이것이 바로 ‘뉴턴식’의 상대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

다만 뉴턴이 한 가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은, 우리가 어떤 좌표계 안에 있는 간에 그리고 그것이 다른 좌표계에 대해 어떤 속도로 움직이든 간에, 빛의 속도는 언제나 일정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 옆을 지나가는 빛의 속도는 비행기 안에서 볼 때에도 우주 정거장에서 볼 때에나 지상에서 볼 때에나 모두 똑같이 측정된다. 빛의 속도-초속 약 30만Km-는 관습적으로 c로 나타낸다.

이 문제를 지상으로 가지고와 보자. 지금 우리는 시속 80마일로 달리는 열차를 타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 열차는 투명하다고 가정하자. 열차를 타고 있는 당신이 열차 앞쪽으로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ㅇ간다고 하면, 밖에 있는 관찰자에게 당신은 지상에 대해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은 상식이고 뉴턴의 상대론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이 관찰자가 열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열차 선로 뒤쪽에서 손전등을 비추었다고 하자. 그러면 손전등의 빛은 열차를 통과해 지나가면서 지상에 평행하게 나아간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이 때 만약 열차의 차장이 열차를 통과해 지나가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그 속도는 c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상에 서 있는 관찰자가 그 빛의 속도를 측정하더라도 그 속도는 여시 c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움직이는 열차에서 측정한 값과 지상에서 측정한 값이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앞의 경우를 다시 돌이켜보자. 열차에 대해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은 지상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빠른 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인다. 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상식적인 결과가 나오는데, 빛의 경우에는 이것이 왜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측정한 빛의 속도는 c에다가 시속 80마일을 더한 것이 되어야 당연하지 않은가?..(중략)..

여기에 상대성 이론의 비밀이 숨어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만약 당신이 열차 안에서 시속 3마일의 속도로 걸어간다면, 밖에 있는 관찰자가 볼 때에는 당신이 지상에 대해 시속 83마일의 속도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아주 약간 더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즉 이 경우에 80+3=83이 아닌 것이다. 이 덧셈이 정확하게 성립하는 경우는 당신이 열차 안에서 정지하고 있을 때뿐이다...(중략)..

0과 c 사이의 어떤 운동에 대해서도 지상에 있는 관찰자에게는 공간의 수추과 시간의 지연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빛의 속도의 절대성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론이 불가피하다. 열차 속에서의 시간과 공간이 지상의 것과 다르다면,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속도는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열차 속에서 측정한 당신의 속도는 시속 3마일인데, 지상에서 측정한 열차에 대한 당신의 속도가 3마일보다 약간 작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열차 속에서 측정한 거리와 시간이 지상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자신의 논문 속에서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중략)..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일정한 상대 운동을 하는 두 좌표계(예컨대 정지해 있는 지상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열차)에 대해 물리 법칙들은 똑같이 성립한다는 뉴턴의 상대론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법칙 주에서 가장 완전해 보이는 법칙 중 하나를 버렸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라는 개념이었다...(중략)..

사실,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1마일로 측정되는 거리는 지상에서 볼 때에는 1마일보다 약간 더 짧아 보인다. 도한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측정한 1초는 지상에서 1초보다 약간 더 길어 보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기묘한 것은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1마일로 측정되는 거리는 열차 안에서 볼 때에는 1마일보다 야간 더 짧아 보이고, 지상에서 측정한 1초는 열차 안에서는 1초보다 약간 더 길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움직이는 것은 지상이 아니고 열차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상대성 이론에 어긋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운동하는 물체가 문자 그대로 실제로 수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길이 30cm의 핫도그가 바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 속에서 그 기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대성 이론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은 열차가 아니라, 열차는 정지해 있고 땅이 움직인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어디서도 “봐라, 여기서는 30cm의 핫도그가 절대적으로 30cm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수축은 겉보기 수축을 말한다. 즉 상대 운동을 하는 당사자들이 누구의 측정이 정확한가를 놓고 논쟁을 벌일 때 나타나는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불행한 사실은 그 누구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또 그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보기 위해서는 빛이 눈의 망막에 들어와야 하는데, 빛이 이동하는 데에 도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당신이 받을 때-당신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달라진다...(중략)..

일반 상대성 이론

..(중략)..

1916년에 그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더욱 확대시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어떤 선택된 좌표점에 대하여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거나 속도가 변하는 어떤 계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상대성 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가속도는 본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음을 증명함으로써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중략)..

또한 상대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만이 아니고, 가속도와 중력도 상대적이며, 따라서 거기서 도출된 모든 다른 양(예컨대 힘과 운동량)도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였다. 따라서 1킬로미터나 1초 또는 1킬로그램의 진정한 값을 정할 수 있는 좌표계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중략)..

더 극단적으로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이들 개념은 자연의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아인슈타인에게는 ‘시공간’)의 모양은 중력에 따라 변한다. 그런데 중력은 물질의 존재에 의해 생겨나므로,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없는 시간과 공간이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다.




-‘상대성 이론’ 중..







8.

다시 말해서, 고에너지 복사를 사용하면 특정 시점에 전자가 존재하는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나, 전자의 최초 속도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얻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또 저에너지 복사를 사용하면 특정 시점에 전자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게 얻을 수 있으나, 전자의 위치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중략)..

다시 말해서, 불확정성은 결코 0으로 줄일 수 없으며, 하나의 양을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다른 양은 그만큼 더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측정 도구가 정밀하지 못해서 아원자 입자에 관한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양자 행동에는 본질저인 불확실성이 내재해 있어 결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원리의 요지이다. 전자들은 실제로는 정확한 속도로 움직이는 정확한 점처럼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자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불확정성의 원리가 의미하는 것은, 입자나 양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물체들과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물체들을 보고, “이것은 여기에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입자의 본질적인 성질들(위치, 속도, 운동량, 에너지)을 동시에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기 위해 행하는 우리의 관측 행위 자체가 이들 중 최소한 하나 이상의 양을 불가피하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중략)..

이러한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많은 유수한 물리학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불확정성 원리’ 중..







9.

크레타인의 거짓말 패러독스를 피하려면, 메타언어를 단순 언어로부터 분리하고 메타언어의 진리와 단순 언어의 진리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와 같은 패러독스는 모두 ‘무의미한 말’의 영역으로 내던져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들 진술은 단순 언어와 메타언어를 동일시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지만 단순 언어와 메타언어를 분리하는 것은 생각보다는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이 앞의 문장은 10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진술은 메타언어의 간단한 예이고, 또한 참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진술의 예를 보자. “이 문단은 8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메타언어 문장이 가진 문제는 스스로를 그러한 문장 중의 하나로 센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은 단순 언어들뿐만 아니라 메타언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메타메타언어 문장인가? 그리고 방금 그 진술은 또한 메타메타메타언어 문장인가? 그렇다면 이 문단이 8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메타메타메타메타언어 진술이 되는 셈인가?

..(중략)..

공리에는 항상 크레타인의 거짓말 패러독스가 숨어 있었다.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원리>에 숨어있던 패러독스는 18년 뒤에 한 오스트리아 수하자가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수학자는 러셀의 패러독스를 다시 러셀에게 던져 주었다.




-‘러셀의 패러독스(메타언어)’ 중..







10.

괴델이 주장한 것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표준 논리나 산술과 같은 어떤 공식적인 복잡한 사고 체계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유한한 수의 기본 가정(공리)과 규칙이 있을 때, 그 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는 참인 진술이 최소한 하나 이상 존재한다.” 순수 산술과 같은 공식 기호 체계는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의 완전성이나 비모순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요지이다.(완전한 계는 참인 진술만을 만들어낸다. 한편, 비모순적인 계는 모순적인 진술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체계를 보강한다든지 확장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체계 밖에서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밖에서 끌어 온 그 방법들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그 밖의 체계 내에서는 역시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중..







11.

키란 주관적이고 연속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몇 cm 이하의 키를 가진 사람들은 그 집합에 속하지 않는다고 딱 선을 긋기가 불가능하다. 예컨대, 180cm의 키를 가진 사람은 키가 큰 사람들의 집합에 속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179.999cm의 키를 가진 사람은 어떤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점점 퍼지(fuzzy)해질 것이다.

또 다른 퍼지 집합의 한 예를 든다면, 행복한 사람들의 집합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행복하기 때문이다...(중략)..따라서 “당신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직무 수해에 대해 만족합니까?”와 같은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퍼지논리’ 중..







12.

서방세계에서 잠시 유행한 후에, 파블로프의 거창한 주장들은 대부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구소련에서는 따뜻하게 받아들여졌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파블로프의 이론은 인간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조건과 생활 패턴에 따라 일어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견해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중..







13.

물론 왓슨은 우리가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곡예를 해야 했다. 어떤 난처한 경우에 그는 생각을 일종의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얼버무리고 넘어갔다.(처음에 그는 말은 단지 조건 행위일 따름이며, 결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감정 역시 본능적 행동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완고한 행위주의자들이 행위에 관한 자신들의 그림에서 의미를 완전히 제거한 사실이다.

그들은 똑같은 ‘자극’(예컨대 총 소리)이 어떻게 상황이나 시간에 따른 다른 ‘반응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의 모형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소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뿐이고, 의식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중략)..

더군다나 인간은 차치하고라도 동물들이 실제 세계에서(실험실과는 달리) 조건화를 통해 학습하는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분명치 않다.




-‘행위주의’ 중..







14.

해체의 목적은 그러한 대립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요소들(글, 기호 표현 등)이 첫 번째 요소들(말, 기호 내용 등)보다 더 좋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들 용어들을 구별하는 것이 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이나 동일성을 가려 버린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말과 글의 구분을 예로 들어보자. 전통적인 철학적 설명에서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하는 사람의 ‘존재’와 동일시된다. 말할 때 말하는 사람은 몸 안에 존재하지만, 그의 말은 그의 생각과 느낌을 즉각적으로 나타낸다. 이에 비하여 글은 글쓴이의 잠재적 ‘부재’라는 특징을 지닌다. 비록 루소는 죽었지만 루소의 글들은 읽을 수 있다. 루소의 육체적 부재는 또한 그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의 문장 가운데 모호하거나 혼돈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깨워서 그가 진정으로 뜻한 바가 무엇인지 물어 볼 수가 없다...(중략)..

여기에 대한 데리다의 반박은 부재나 혼돈 또는 실수 등에 대하여 말이 결코 글보다 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란 모두 부재에 관한 것이다. 만야 어떤 것이 눈앞이나 마음 앞에 명백하게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것의 의미나 목적이 자명하다면, 거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 없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들-물체나 생각이나 태도 등등-을 가리키기 위해 말한다. 그리고 말을 한다고 해서 말이 가리키는 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은 단지 그 부재를 강화시킬 따름이다.

..(중략)..

말은 글만큼 텍스트적이며, 똑같은 만큼 쉽게 혼동되고 잘못 해석된다. 누구나 결코 끝나지 않는 논쟁들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합의가 아니라 더 많은 차이를 새로 만들어 내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말은 사물이나 생각을 완전히 분명하게 존재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중략)..

요컨대 사람들은 영원히 이야기하고 도 이야기할 것이며, 어떠한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존재가 위에서 내려와 그들을 중단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를 실망시키는 사실인 동시에 위안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해체주의’ 중..







15.

예를 들면, 글의 발명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록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인쇄 출판물과 책의 발명은 혼자만의 독서와 성찰을 촉진함으로서 17세기 개인주의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글의 ‘메시지(결과, 효과)’는 분석적 사고였고, 인쇄의 메시지는 개인주의였다.




-“매체는 메시지이다.” 중..







16.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예견하였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이상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중략)..

바꿔 말하면, 마르크스는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정치 체제를 일시적인 필요악으로 보았다. 수십 년에 걸친 압제와 부패는 그의 원래 계획 어디에도 없었다...(중략)..사실, 물질적 조건들을 강조하는 분석방법은 거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러도 좋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계급투쟁’ 중..







17.

그런데 마르크스는 종교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종교로 이끄는 사회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는 영원히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에는 가치와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중..







18.

만약 당신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 10분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10분 동안에 마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4시간이 있다면 4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것이 ‘파킨슨의 법칙’의 골자인데...(중략)..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일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변하는 것은 자유시간이 아니라 효율성이다...(중략)..파킨슨의 법칙은 사무실에서나 가정에서나 정말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바쁠수록 당신은 더 효율적으로 일한다. 한가한 날일수록 단순한 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면 결코 끝낼 수 없는 일-대청소와 같은-은 신이 주신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파킨슨의 법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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