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문명의 철학적 개념과 도덕적 규범을 재고할 수밖에 없는 현기증 나는 어지러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건강한 정신과 광기, 비도덕과 도덕성, 불합리와 합리성, 법과 윤리규범을 구분할 수 없다. 가상공간의 법은 현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상 세계의 존재 이유는 바로 현실 세계에서 금지된 것을 허락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2.

개인주의는 시민의 손에서 권력을 앗아가 순간적인 욕망의 이기적인 만족만을 권리로 내세우는 소비자 손에 쥐어줄 것이다. 소비자는 자신의 경제, 정치, 감정적인 선택을 언제든지 번복할 수 있는 권리도 요구할 것이다. 다시 말해 변덕스러운 독재 혹은 무책임한 민주주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

 

3.

정보는 본질상 희소성이 없는 자산이다. 자신도 갖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희귀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정보가 시장에서 유통되기는 힘들다.…(중략)…시장원리의 지배력을 지속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정보의 희소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 결과 상표와 암호화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이다. 이들이 없으면 물건에 가격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

 

4.

앞으로는 ‘광고’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오락, 교육과 한데 뒤섞이고자 할 것이다. 광고가 없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광고는 모든 매체를 이용하여 자신을 내보이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려고 할 것이다.

광고의 역할은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입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광고)

 

5.

사람들은 위험의 심각성을 깨달아야만 이러한 기구를 창설하거나 기존의 기구를 강화할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유럽도 탄생했다. 외계로부터 화성인의 위협이 없는 이상 순진하게 강자의 지혜를 믿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실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강자가 실패했을 경우 일부 사람의 패닉과 또 다른 자들의 반란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국제기구)

 

6.

아직까지 효율적인 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갈수록 정당성을 잃어 가는 기관이다. 미래에는 세계정부의 모태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일부 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고 있지만 미래에는 나서지는 않으면서 이익만 챙기고자 하는 강대국의 방패막이로 전락할 것이다. 현재 유엔의 대표성에 의구심을 표명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실 안전보장이사회는 인류의 절반(머지않아 3분의 2)을 제외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서방이 현재 상임이사 5석 가운데 3 내지 4석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연합)

 

7.

미래에는 시장이 꿈을 조작하거나 새로운 여행, 몽환적 유목, 불면의 방황, 마약 같은 알약 형태의 꿈을 제공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어느 무엇도 이러한 자유가 정신착란으로 귀결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정신의 또렷함이 광기로 이어지는 바로 전단계였던 셰익스피어처럼. (꿈)

 

8.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기 위해 조직은 우선 계층 체계를 줄이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늘려야 한다. 어떤 기관은 다른 기관보다 준비가 덜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장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계층 체계에 더 가깝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권한의 위임이 아닐 때, 다른 모든 네트워크에서처럼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지 않고 또 군중의 중심에 서지 않을 때에만 민주주의도 네트워크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

 

9.

그렇기 때문에 이들 두 생활방식, 미래의 두 계층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년층은 더 이상 자기만의 복지를 위해 소수의 젊은 층에 당장 큰 부담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부담은 한 국가의 생산적 경제를 파괴할 것이다. 부유한 국가에서는 노년층의 특권을 줄이고자 소수의 젊은이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중략)…세대간 갈등이 지역적이지 않은 곳에서 젊은이는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사회 보장비를 부담하느니 차라리 그 나라를 떠나는 쪽을 택할 것이다.

나이가 사회적인 무용성과 더 이상 동일시되지 않는 때가 오면 진정한 변혁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교육, 지식과 지혜의 전수에 기여하는 바를 귀중한 자산 또는 젊은이를 위한 혜택으로 간주하게 될 때가 바로 그때다. (노화)

 

10.

새로운 것을 반가운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불안한 것을 하나의 가치로 받아들이며 불안정한 것을 안락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혼합을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독특한 연대감을 지닌 새로운 유목민 부족의 창조자인 레고 문명을 끊임없이 쇄신시킬 것이다. (레고 문명)

 

11.

앞으로는 모성의 권리에 애정, 교육, 보살핌, 전수의 의무를 결합해야 할 것이다. 이토록 원해서 가진 아이에 대한 모성은 한결 더 깊고 정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를 낳는 것이 쉬워지고 막연해진다면 아이를 단순한 소비 대상 혹은 금방 싫증을 느끼고 바캉스를 떠나기 전에 동물보호소나 길거리에 버리고 가는 애완동물쯤으로 간주하기 쉬울 것이다. (모성母性)

 

12.

지문도 개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고유의 미로다. 뇌는 뉴런으로 이루어진 미로다. (미로)

 

13.

시장은 경제주체 사이에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많은 이의 정치권 행사를 방해할 것이다. 시장은 이타적인 시민을 변덕이 심하고 이기적인 소비자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수가 내린 결정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 결정이 소수 부유층의 세금을 통해 중산층 다수의 복지를 도모하자는 것일 때 더 그러하다. 가장 부유한 계층은 떠나가고 가장 빈곤한 계층은 인내하며 나머지는 오락에서 도피처를 찾으려 할 것이다.

…(중략)…

정당은 민주주의에 끼어들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전체주의는 민주적으로 권력을 잡고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민주주의)

 

14.

인간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영원성 추구에 대한 해답을 더 이상 내놓지 못하는 시점에서 복제 연구가 활성화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부모 없는 아기의 출생이 그다지 심각한 충격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한 인간과 그의 복제 이간이 두 쌍둥이보다도 서로 더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복제 인간은 원형 인간과 같은 세포질 환경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을 유전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복제를 금지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나라가 이를 지키지 않을 것이고 시장과 과학의 압력이 너무 강력해 이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생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복제를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다. (복제)

 

15.

꿈을 꾸기 위해서는 우선 멈춰야 한다. (부동不動)

 

16.

자연이 어머니를 만든다면 사회는 아버지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순적으로 사회는 갈수록 아버지를 없애고 있다. (부성父性)

 

17.

문맥 혹은 출전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쏟아지는 비슷비슷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는 선과 악의 차이나 가치의 순위를 아직 배우지 못한 갓난아기와 같다. 그 결과 타협이나 작은 차이라는 것을 모른 채 아무것도 아닌 일로 폭력만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분류)

 

18.

인간은 어떤 가치를 놓고 분배할 때마다 그 가치를 둘러싸고 다투게 될 것이다. (분쟁)

 

19.

불평등은 미래에 개인의 기회주의를 심화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혼자만 진보하기를 꿈꾼다. 개인주의는 더욱 정당화되고 불평등은 한층 악화된다.

…(중략)…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불평등의 한계가 존재하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작은 불평등은 반란보다는 단순히 부러움만을 유발하고, 거대한 불평등은 일반인들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평등)

 

20.

가장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대화의 주제이자 가장 나중에 소비하는 대상. 인간의 으뜸가는 정열이자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사랑)

 

21.

지불 능력이 있는 소비자에게 세계는 변덕스런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슈퍼마켓이 될 것이다. (소비자)

 

22.

소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을 피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책이나 음반을 사고 여러 작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이것을 다 훑어보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걸작품보다 먼저 사라질 수는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서다. (소유)

 

23.

21세기 초까지는 이 불멸의 신에게 승리가 보장될 것이다.

…(중략)…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야까지 시장이 확대될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 보건, 사법, 경찰, 시민권, 신분, 공기, 물, 피, 이식 가능한 장기에 가격이 매겨지게 될 것이다. 시민, 환자, 어머니, 아버지는 소비자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금전적인 능력만 있다면 함께 나눌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의식해 자기 욕구를 포기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시장은 모든 것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재판관의 판결은 바로 가격이다. 가격은 추상적인 정보로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를 고대 그리스 시대에 존재하던 여성 예언자의 횡설수설쯤으로 간주할 것이다.

시장은 사람들에게 그가 필요한 것이나 그가 받을 만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서비스에 해당하는 알 수 없는 등가의 것을 줄 것이다. 시장은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수익성이 바뀌는 즉시 결정을 번복할 것이다. 이로 인해 상황은 폭력적인 패닉 상태를 일으키기 직전까지 치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팔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완전무결할 것 같은 모습에다 시장 신봉자들의 무수한 약속되는 달리 시장은 정의나 평등, 존엄성을 보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육이나 식량은 물론이고 만인의 편안함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완전고용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시장은 사람들을 소비자로서만 필요로 할 뿐 그들의 과거나 미래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이나 생각에도 관심이 없다. 물론 이러한 것을 팔아야 할 때만은 예외다. (시장)

 

24.

네트워크에서 어떻게 항해하는지 터득하는 최상의 방법. (실패)

 

25.

나와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도,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 야만성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야만성)

 

26.

미래의 어머니에게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여러 세대를 가르치는 것과도 같다. (어머니)

 

27.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장 큰 승리자는 태연하게 양측에 무기를 제공하는 국가다. 사실 살상무기 상인에게 적은 없다. 오로지 경쟁자만 있을 뿐이다. (전쟁)

 

28.

법적 측면에서 책임감은 갈수록 집단적인 성격이 약해진다. 행정부, 병원, 기업의 책임으로 돌려진 실수에 대해 해당 조직에서는 그 실수를 범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할 것이다. (책임감)

 

29.

패닉은 자기 혼자만 소외될까 두려워 옆 사람이 누구든 그 행동을 따라 하는 군중의 맹목적인 모방 행위다. 이는 서구 문명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본질 그 자체다. 그리고 패닉은 갈수록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바로 패닉 때문에 소외될까 두려워 근로자가 저임금의 노동도 감내한다.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모방과 전체 합의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소비자는 유행하는 물건을 사고자 달려드는 것이다. 또 ‘좋은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 예금주는 자신에게 추천하는 금융상품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패닉)

 

30.

잘못된 예측의 위험 부담 없이 미래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두 단어의 합성어. (포스트모더니즘)

 

31.

영원히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 (현대성)

 

32.

범죄에 대한 형벌체계는 아마도 바뀌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금융 범죄와 부패사건에 대해서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고 극빈자가 일으킨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조정할 것이다. 세기말에 전세계적으로 사형이 철폐된다면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문명 발전의 증거가 될 것이다. (형벌)

 

33.

경고성 내용에는 객관적 수치 데이터가 제시되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낙관주의적인 글은 더 주관적인데?

- 비관주의에는 단정이, 낙관주의에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공상과학을 최대한 멋지게 이끌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면서 하나의 악몽이 될 수 있는 시나리오도 배제하지 않는다. 각종 수치를 보고 있자면 그 연속선상의 미래는 끔찍한 것이다. 인류의 자살밖에 남는 것이 없다. 공기는 숨 쉴 수조차 없게 될 것이고 매년 수백만 명이 굶어죽을 것이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대응을 위한 조치가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상상력과 정치가 나서야 한다.

 

34.

미래에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정치가 정치인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머무른다면 미래의 정치는 희망이 없다.…(중략)…미래 정치의 위대함이란 새로운 꿈을 만든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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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와의 만남에서 뜻한 바를 얻지 못한 길가메시는 우여곡절 끝에 불로초를 얻지만 신들은 그것마저 앗아가 버린다. 참으로 덧없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고통스러운 세상, 쓸쓸한 인생. 유행가 가사 같은 정조는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인류 곁에 있었다.
후대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는 이렇게 말한다.




길가메시여, 그대가 찾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안겨주고 영생의 삶을 거두었기 때문이오. 그대가 살아 있는 시간을 즐겁고 충만하게 보내오. 그대의 손을 잡는 어린아이를 사랑하오. 그대의 아내를 품에 안고 즐겁게 해주오. 기껏해야 이런 것들만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인간은 이렇게 읊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탐냈다. 만족되지 않는 욕구의 좌절. 사랑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2.
야훼는 잔인하고 가차 없다. 자식을 죽여서 자신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고대의 인신제사 풍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점차 동물로 대체되어갔지만 이 풍습은 전세계에 걸쳐 있었다. 야훼는 히브리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한다. 이 약속은 히브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사막과 같은 황량한 땅에서 덧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젖과 꿀’이라는 알량해 보이는 약속 하나에 모든 것을 내버리고 야훼만을 숭배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훼는 이것을 거저 주지 않는다. 그것을 주겠다고 해놓고는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성읍의 주민을 칼로 쳐죽일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를 따르기만 한다면 외부 집단을 폭력적으로 살상해도 괜찮다는 정당화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비롭게 보이는 약속 뒤에 숨어있는 피에 굶주린 야훼의 잔인함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야훼는 마술과 형상을 혐오하는 신이다. 야훼가 모세에게 돌에 쓴 증거판 두 개를 줌으로써 모세의 정당화 작업에 착수했을 때, 야훼의 백성들은 기다리다 지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러자 야훼는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한다. 이렇게 진노하는 신이 사랑의 신일 수는 없다. 어쩌면 야훼는 불가능한 것을 히브리 민족에게 요구한 건 아닐까? 인류는 머나먼 옛날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에 뭔가를 그려 넣을 때부터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구석기 시대부터 내려온 이미지 만들기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모세 5경의 야훼는 인간이 공포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에게는 공포가 내재화되어,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전도된 심리 상태에 처해 있다.




3.
인간이 폭력적인 것은 폭력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로마의 건국신화에는 로마적 세계의 근본 성격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로마의 건국자는 군신의 아들이다. 그는 그 태생에서부터 이미 전쟁이 몸에 배 있었으며, 그가 도시를 건설한 뒤에 한 일은 여인을 강탈한 것이다. 이는 트로이와 미케네 제국의 영웅들의 행위가 그대로 전수되었음을 의미한다. 로마의 전설에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겠다는 따위의 가치론적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군신이 등장하기는 하나, 전설의 핵심은 로물루스라는 인간과 레무스라는 인간 사이의 모두스에 있다. 신의 법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법을 따를 것이냐, 인간의 법을 준수할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인간 사이에 모두스를 정하고-이것이 이른바 ‘사회계약’이다-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형제라 해도 죽이는 것이다. 인간의 법을 지키지 않은 자라면 형제라 해도 죽인다는 것, 신의 법을 따른다면 형제는 죽일 수 없는데도 인간의 법에 따라 죽인다는 것, 이것이 로마적 실용성의 사회적 단면인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 로마를 보는 우리는 안티고네와 그레온의, 옳음과 옳음의 대립과 같은 상황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5.
역설적이게도 또는 방정맞게도 철학은 어렵고 힘든 시대에만 발언한다. 정말 느닷없다 싶게 나타나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서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사람들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 세상에 정말 쓸데없는 학문이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철학이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이다.
…(중략)…
이러한 지식인에게 고난은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닥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와중에서 부딪히는 것이었다. 행복한 시대의 인간들은 고생도 이런 식으로 한다. 그들에게 닥쳐오는 절대 절명의 상황이란 것의 근본이 애초부터 다른 것이다.




6.
로마인들은 행복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지켜내기만 하면 자신의 불멸성을 보장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게 아닌데’라는 의심은 헌신의 감소를 낳고, 헌신의 감소는 또다시 체제의 허약함으로 귀결되고, 그러다가 로마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7.
그의 잣대는 이것-현실에서 작동하는 냉혹한 이성-뿐이었다. 이것에 근거하면 선의는 무의미한 감정낭비일 뿐이며, 도덕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군주론>은 바로 이러한 원리 위에서 쓰여진 현실 정치 지침서인 것이다.
…(중략)…
몇몇 도덕주의자들은 이 텍스트를 사악한 것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혼란한 현실은 사악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당면해서 극복해야 할 현실일 뿐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다. 차라리 컨텍스트가 철저히 반영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직한 지식인이며, 마키아벨리가 걸어간 길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8.
그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며, 야비하고 잔인하며, 짧다. 인간은 본성상 탐욕적이고,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삶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한 개인의 힘은 다른 사람의 힘의 결과와 대립되고 충돌된다. 힘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한 개인의 능력의 초과분이다. 그리고 똑같은 힘은 대립되고 서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립은 경쟁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연 상태에서의 개인의 힘과 경쟁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그런데 이를 곰곰이 살펴보면 이는 자연 상태의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 해야 타당하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경쟁 상태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9.
영국에서 세워진 이러한 이론체계는 자본주의체제의 발전과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세계는 홉스가 말한 전쟁 상태가 되었고, 세계 어디서나 무제한의 탐욕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태도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실의 탐욕의 논리가 그대로 도덕적 가치가 되는 오늘날의 냉혹한 세계는 제법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10.
스미스의 출발점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은 종래의 전통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그것은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차원의 도덕적 실천까지 고려하는 인간의 종합적인 성품이다. 그런데 스미스는 그러한 가치 기준을 점잖게 없애버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이익을 따질 줄만 알면 ‘인간’인 것이다.
…(중략)…
여기서 개인의 이익 추구와 보편적인 사회의 이익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작동하여 사회의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지 어쩌는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예로부터 전해지던 ‘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스미스의 이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과 억지가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스미스라고 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려는 사람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더러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들이 스미스를 근거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는 ‘국부’가 아닌 개인의 ‘치부’를 목적으로 삼은 행위를 정당화할 때에도 스미스가 활용된다. 이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스미스 자신에게는 언짢은 일이겠으나, 그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다.




11.
다윈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우선 세계 안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을 수 있음을 드러내 보였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화해왔음을 천명하였다. 자연계와 사회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우뚝 선 존재가 아니라,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목적이 진보라 해도 과정은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원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인간 본성과 자연환경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 설명된다. 이로써 무한 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의 자본주의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더 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가 자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맨몸으로 살갗을 찢어가며 쓰라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는 어떠한 처방도 한낱 도덕주의적 대증요법밖에 되지 못한다.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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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년 지나고 나면 당신들도 왕년에 촛불집회 나가서 컨테이너 위에 올라가 깃발 흔들었던 걸 신입사원들만 오면 이야기하는 박과장, 그때 전경들하고 몸싸움한 것을 술만 취하면 이야기하는 김부장, 뉴타운 분양 간절히 기다리는 순이 엄마, 회사에서 퇴출된 뒤 엄마에게 도움 받아 문을 연 동네 치킨집 김씨, PC를 붙들고 '비물질노동'에 정진하고 있건만 남들에게는 십 년이 지나도록 변변한 직업 없이 빈둥거리는 것으로 오해 받고 있는 고모댁 둘째 아들 등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시면 되니까요.



2.
자율주의자들이나 미래의 맑스주의 운운하는 이진경이나 지금 현실 자체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자기들이야말로 이제 새로운 사상을 시작했다고 '자뻑'하는 내용들뿐인데 그게 무슨 진보인가? 이들이 거론하는 상황주의에서 과연 배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두 번째로, 실제로 자신이 그 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니 로턴은, 펑크를 평론가들이 격찬하듯 젊은 세대의 혁명적 음악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재앙'이었다고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펑크 음악 붐 이후의 실제 역사를 보자. 77년 펑크가 나오고 78년에는 SHAM 69 등의 좌파밴드들까지도 대중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지만, 79년 선거의 결과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인 대처가 수상으로 당선되었다. 대처 수상은 당선돠자마자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말이 제일 처음 나온 영국의 복지정책을 대폭 폐지하고 경제성장 정책에 모든 것을 맞추었다. 거기에 반박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라는 답변 아닌 답변으로 무시했다. 어떠한 개인도 사회가 책임질 필요가 없고 개인은 개인이 알아서 잘 살아야 한다는 소리였다(이명박을 찍은 사람들 뭔가 가슴이 뭉클해져오는 것 없나?). "여왕 머리에 수소폭탄을......당신을 위한 미래 따위는 없어(God save the Queen)." "나는 일만 하고 살고 싶지는 않아......무정부주의자가 되고 싶어(Anarchy in the UK)."라는 섹스 피스톨즈의 노래를 들으며 클럽에서 미친 듯이 뛰던 사람들이 체제유지에 가장 충실한 정치인을 수상으로 뽑아준 것이다. 펑크 음악은 세상을 바꾸지 않았다.
이런 과거를 돌아보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해서 결국 무구한 인민의 피만 낭자했던 LA 폭동을 혁명적이라고 찬양하는 네그리의 무정부주의를 추종하는 조정환의 상황주의 찬양은 웃기지도 않는다. 온 영국의 젊은이들이 무정부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자율'적으로 노래했는데, 그들이 2년 뒤에 대처를 선택했다는 것을 조정환은 알고나 있을까? 과연 생각이라도 한번 해보았을까? 자율? '후까시' 잡기에는 좋을지는 몰라도 아무 내용 없는 소리일 뿐이다.



3.
현재 많은 이들이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킨 노무현 정권 때부터 본격화된 일이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서 노무현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는 것은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천박한 주장일 뿐이다. 어떻게 이명박 정부 100일 만에 이 모든 상황이 다 생겨났겠는가?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밟아온 '신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 있고 앞으로 더욱 암담해질 미래의 '신자유주의'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지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 같은 '신자유주의자'일 뿐이다.
노무현 정권은 아름다운 '립서비스'를 남발했지만 이명박 정권은 너무나 노골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노무현에 대한 환상이 지속되는 한 노무현 정권보다 나은 정권이 들어서기는 힘들 것이다.



4.
이와 같이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이나 컨테이너 박스를 통해서 보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건만 오늘도 노빠들은 "노무현 당신 때문에 행복했습니다"를 외치고 있다. 그 소리를 같이하고 있는 88만원 세대들의 행복은 무엇인지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5.
88만원 세대를 낳는 기본적인 시스템인 비정규직 입법화를 감행했던 노무현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고향에 내려가 동네 슈퍼에서 담배 피고 있는 것을 찍은 사진을 보고 '노간지', '노간지'라고 딸랑거리는 소리들을 내는 88만원 세대들이 포진해 있는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을 밀어주는 88만원 세대들이 있으니 오만하게 현재의 정국에다가 훈수까지 두지 않는가. 도대체 '노간지', '노간지' 해대면서 미니홈피에다가 그 사진들을 퍼오는 88만원 세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비정규직 입법화를 감행했던 자가 노무현이었는데!!
평생 88만원이나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미래가 앞에 놓여 있는데도 자신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집단 지성'이니 '네트워크'니 '활력'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노동자운동, 민중운동'에서의 '민중'과 '노동자'는 낡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88만원 세대, '노간지'를 외쳐대기나 하고 서태지 노래의 한 구절처럼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다고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88만원 세대들이 있는 한국의 상황은 섹스 피스톨즈가 'No future for you'라고 영국의 상황을 노래했을 때보다 더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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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이 ‘21세기의 문화’는 이전에 한국인들이 알던 문화와는 크게 달랐다. 과거의 문화가 사람들이 이미 익숙해진 것이거나 저절로 익숙해지는 것이었다면, 21세기의 문화는 정량화하고 규격화하여 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리는 것, 낯설어도 일단 사서 써보고 억지로라도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중략)…

자기 삶을 바꿀 것인지 말 것인지, 바꾼다면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망설이고 고민하는 사람들 앞에, 기업들은 아름답게 포장된 문화라는 신상품을 내놓고 모든 고민거리를 ‘지갑을 여는 문제’로 단순화해주었다.

 

2.

그런 관점에서는 ‘살아 숨쉬는’ 역사는 불편할 따름이다. 죽어 있는 역사, 지금은 더 이상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역사,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들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역사라야 아무렇게나 만지고 주물러 상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3.

공원의 담장이나 도시의 성벽이나 그 본질적 기능은 같다. 구분선의 기능이 본질이며 방어벽의 기능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서울의 성벽만 하더라도 외침 시는 물론이요 내란 때조차 단 한 차례도 방어벽 구실을 한 적이 없다. 과거 보러 온 시골 유생이나 채소 팔러 온 인근 농민들만 공연히 주눅 들게 했을 뿐.

 

4.

지방의 소읍(小邑)을 지날 때면, 가끔 순수한 축하의 뜻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현수막을 보곤 한다. “경축, ○○○ 서울대학교 합격” 그러나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축하를 받으며 서울로 떠난 그 학생이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을 위해’, ‘고향에서’ 살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때 따뜻한 축하를 보내주었던 이들이 나중에 뒤에서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5.

이들 사이에는 결코 가로지를 수 없는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은 이웃이었다. 불이 나도, 염병이 돌아도, 도둑이 들어도 같이 대처해야 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를 구성해야 했고, 그 안에서 일상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골목 끝 고루거각에 사는 부자 나리가 같은 골목 안에서 굶주리는 이웃에 자선을 베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연대의식이었다.

 

6.

1980년대 말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은 ‘섞여 살기’보다는 ‘따로 살기’를 원하는 주택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했다. 자신의 자녀가 ‘영구’(영구 임대주택 거주 학생을 일컫는 슬픈 속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을 탓할 수야 없지만,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 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7.

동물을 그 자체의 종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분류하는 방식이 마련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 개와 늑대, 호랑이와 고양이는 근대적 시선에서나 한 종류일 뿐이지, 전근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근대 이전에는 이 경우에도 ‘인간적 척도’가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서양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를 함께 엮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과 소, 개와 돼지를 각각 함께 엮었다.

 

8.

거지는 빈곤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격차 확대의 산물이다.

 

9.

집의 규모에도, 의복과 관대(冠帶)에도, 하다못해 밥상에 올리는 반찬의 가짓수에도 신분별 제한이 있었지만, 술이나 떡은 능력-오늘날 이 단어는 돈이나 재산과 완전히 동의어이다-만 있으면 아무나 먹을 수 있었다. 술과 떡의 원료 물자인 쌀이 특권적 지위를 잃고 돈과 함께 등가 교환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쌀‧술‧떡이 갖는 신성성도 변해갔다. 쌀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라 비싸기 때문에 귀한 것이 되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도시 자체가 갖는 신성성도 변화했다. 서울 사람들에게 왕권의 신성함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돈도 왕에 비견되는 신격을 얻었다.

 

10.

지금도 매번 선거 때면 ‘지역감정’에 따른 투표 행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지역감정’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이 감정이 ‘망국적’이라는 데에는 서슴없이 동의한다. 심지어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어느 동네는 어느 지역 출신자가 많아 어느 당 소속 인물이 당선되고 다른 어느 동네는 또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많아 반대당 소속 인물이 당선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가들, 언론인들, 학자들이 저마다 지역감정 해소를 주창해왔지만, 그 대안이라는 것이 큰 틀에서는 영조나 정조가 써봤던 방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당(黨)이 아니라 ‘땅’이다. 이 땅과 저 땅 사이에 차별이 없어진 뒤에라야, 사람들은 이 당과 저 당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될 것이다.

 

11.

게다가 ‘아는 게 병’이라고 연석(宴席) 뒤편에 키치적 문구를 담고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면 때로는 짜증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언젠가 “만수무강하옵시고 천수를 누리소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현수막을 내건 잔칫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이 글귀에서 축원의 뜻이 아니라 경박한 장삿속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주인공의 품위와 소양을 보았다.

…(중략)…

더군다나 앞에서는 ‘만년 동안 건강하게 살라’고 해놓고는 곧바로 하늘이 내려준 수명(=천수)만 누리라는 야박함에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12.

어린아이들이 이 복잡한 존비법을 배우는 데에는 아무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따로 배움을 위한 ‘유예기간’을 주었는데, 그동안에 사용하는 말이 어미를 생략하게 어간만 쓰는 ‘반半말’이었다. 즉 반말은 ‘어린아이의 말’이었다.

…(중략)…

반말이 평어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쓰기 쉽기 때문이라기보다 아무래도 이 같은 사회현상 탓일 게다. 신분제도가 무너진 이상 말살이의 존비법도 당연히 무너져야 마땅하지만, 평어나 상대어가 사라지고 존댓말과 반말만 남은 현상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13.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성별‧연령별 ‘격리’의 관념은 점차 약화되었고, 무차별적인 ‘대중’(이 이상한 집단을 만드는 데 교통수단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드물 것이다)이 가시적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차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차 승객들이 시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단위시간당 정보량은 크게 늘어났다.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라고 배짱을 튕기던 가로변 상점들이 하나 둘 간판을 내걸어야 했고, 전차에도 광고 문구가 붙었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14.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

15.

도시에서는 더 심하다. 오늘날 서울 사람들은 100m전방의 사물을 응시하는 일조차 드물다. 거리에 나가면 불과 10~20m 앞에 육중한 건물이 막아서 있고, 길을 걸을라치면 2~3m 앞의 간판들이 시선을 가린다. 복잡한 도심에서는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한다. 사무실이든 방 안이든 눈과 벽 사이의 거리는 길어야 3~4m이지만 일상의 시선은 그 벽에까지도 도달하지 못한다. 대개는 50c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모니터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산다. 가까운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곧 도시 사람들이다.

 

16.

케빈 린치(Kevin Lynch)는 이를 길(path)‧ 중심(node)‧ 구역(district)‧ 접경(edge)‧ 랜드마크(landmark)의 다섯 요소로 정의함으로써 현대 도시계획학의 대가가 되었거니와 이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 다섯 요소는 도시에 사는 어린 학생들이 자기 집 약도를 그릴 때조차 거의 빼먹지 않는 요소들이다. 또 한 가지, 이 공간요소들은 모두가 인위적 요소들이다. 간혹 자연적 경관요소가 ‘접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조차 ‘순수하게’ 자연적이지는 않다. 반복하거니와 농촌이 자연 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임에 반해 도시는 인공 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이다.

 

17.

윤석중이 1940년에 발표한 동시 <넉 점 반>의 앞 구절은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였다. 이 동시는 넉 점 반이라는 시각을 알아낸 아이가 이곳저것을 돌아다니며 한참 놀다가 집에 들어가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라고 때늦은 보고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무렵 여염집의 시간관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8.

해방 직후 <학교종>이 음악 교과서 제일 앞 장에 수록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지만, 아울러 이로써 아이들은 ‘시간 지키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근대적 사고와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은 즐겁고 경쾌하게 <학교종>을 부르고 학교종 소리에 맞춰 등교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생 동안 시간의 지배를 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중략)…

조선시대 아이들은 ‘동서남북’을 구분하는 것이 먼저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시간을 알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법을 먼저 체득한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가 배가 고프건 말건 시간에 맞추어 분유를 주고, 졸리건 말건 시간에 맞추어 재우며 또 시간에 맞추어 깨우려고 애쓴다. 일어나는 시간, 이 닦는 시간, 화장실에 가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어린이집에 가는 시간,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다 정해져 있으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은 시간별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19.

시간의 표준은 정해져 있었으나 그를 측정하고 표시할 기계가 없었으니 이후 수십 년간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한국인의 자괴거리가 된 ‘코리언 타임’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코리언 타임’이라는 것은 시간대의 변화와 시계 장치의 보급 사이에 넓은 간격이 생김으로써 시간을 정확히 지킬 방법을 갖지 못했던 비서구 세계 사람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조롱의 한 갈래일 뿐이다.

 

20.

지금 나는 손목에도, 주머니 속에도, 책상 위에도, 거실 벽에도, 침대 옆에도 시계를 차고 넣고 두고 걸고 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알지 못하면 당황하게 되어버린 탓인데, 이런 막연한 불안 상태는 현대 도시인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다. 또 내가 가진 시계의 일부는 특정 시점에 종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다. 물론 그 종소리는 에밀레종이 내는 것처럼 신성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저 경박하고 차마 듣기 어려운 기계음을 낼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여전히 내 삶에 관한 전권을 쥔 신의 목소리이다.

 

21.

죄수와 환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일상적인 ‘타인의 감시’아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고, 그들 자신에 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작성‧정리‧보관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압에 의해서든 자발적으로든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빠짐없이 ‘관찰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사생활’이 없다. ‘관찰자’들은 ‘수용자’(수감자든 입원환자든)들에게 그날 아침 혹은 전날 저녁에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운동은 얼마나 했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 가정환경은 어떤지, 부모나 가까운 친척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혹은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 심지어 내밀한 부부관계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사회관계에서라면 도저히 물을 수 없는 것들을 캐묻고 수용자들은 스스럼없이 그에 대답한다. ‘질문과 대답, 관찰과 보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기록되고 그 ‘기록’은 다시 이들 시설에 수용해야 할 ‘일군의 사람들’을 식별해내는 계량적 지표로 사용된다. 죄수들은 강정도‧폭행‧사기‧성범죄‧방화 등 범죄 유형별로 분류되고 도 그 죄질에 따라 일정한 형량을 선고받는다. 환자들 역시 이환(罹患)된 질병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입원 치료 기간과 치료 방법이 정해진다.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릴 경우 ‘사형선고’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교정이 불가능한 범죄자와 불치병 환자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직관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22.

그러나 병원은 그 안에 수용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 아니다. 병원은 감옥과 더불어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친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한’ 처신법을 배우고 ‘병원에 가지 않기 위해’ 개인위생과 신체 규율을 배운다.

 

23.

상식적으로는 도시(또는 서울)는 없는 게 없이 풍족한 공간이고 농촌(또는 시골)은 여러 가지가 부족한 빈곤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물질의 총량에 대해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곡 필요한 물질에 관한 한, 도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결핍의 공간’이다. 도시에는 언제나 맑은 물, 신선한 먹을거리, 깨끗한 공기, 따뜻한 햇볕, 넓은 뜨락 등이 부족했고, 산업혁명 이후로는 이 부족이 극단화했다.

 

24.

산동네가 고단한 삶에 찌들어 세상을 온통 불평‧불만에 찬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던 데 반해, 달동네는 이름 한 자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동네였음에도, 이웃 간에 정이 남아있고 서로 이해하며 돋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동네였다. 아마도 산동네를 달동네로 바꾼 절묘한 레토릭 뒤에는 영상물에 서울의 가난한 풍광 자체를 담기 어려웠던 시대 상황이 바위산처럼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25.

땅속에서 서울 사람들을 위해 ‘초정리 광천수’를 마구 퍼 올린 탓에 지표수를 떠받치는 지하수가 고갈되어버린 것이다. 서울이 지방으로부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지만, 이제는 땅속에 숨어 흐르는 물까지 빨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불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물장수’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트럭이 물지게를, 플라스틱통이 양철통을 대체했지만, 가정집으로 사무실로 물을 배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26.

한편 방은 매우 적어서 이 글의 주제인 복덕방 말고는 금은방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때의 방은 자기 물건이 아닌 남의 물건을 대신 사고팔아주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덕방은 주인 영감 것이 아닌 남의 ‘복’과 ‘덕’-집이 아니다-을 사고팔 수 있도록 알선해주는 곳이다.

 

27.

그러나 그 낭비야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사람들은 이런 시설이 늘어날수록 도시가 발전한다고 믿고, 가끔씩 이런 시설을 찾을 권리를 잃기 싫어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

 

28.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돈을 내고 정해진 장소에 앉아 정해진 시간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보내는 훈련을 ‘자발적’으로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극장은 학교나 병영, 공장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학습장’이었지만, 다른 공적 시설들보다 훨씬 소프트한-임석경관이 배치되어 있던 시대에 한해서는 ‘훨씬’이라는 부사를 빼야 하겠지만-학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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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말의 위세가 큰 것은 그러니까 언어 바깥 사정, 구체적으로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다. 한국어 방언 가운데 영남 방언이 비교적 패기 있게 서울말에 맞서고 있는 사정 역시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2.

뛰어난 연시戀詩가 대체로 이별의 시이듯, 뛰어난 혁명시도 흔히 좌절한 혁명의 시다. 혁명의 좌절은 그 주체의 불행이겠으나, 시의 잠재적 행복이다.

 

3.

그러니까,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4.

오늘날 언론의 힘은 너무나 커져서, 이젠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거론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5.

시청률 경쟁이 미디어의 논리라면, 미디어에 대한 경쟁이 정치의 논리가 돼버린 셈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는 전통적 편견은 이제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말을 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토론하는 능력은 한 사람의 총체적 정신 능력의 큰 부분을 보여주므로,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자를 포함한 대중 앞에서의 토론이 근본적으로 ‘연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토론자들은 토론 상대자에게 얘기한다기보다 시청자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6.

다시 말해 ‘국어’는 ‘한국 국민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꼭 갈라놓아야 할까?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를 지금처럼 꼭 ‘국어’라 불러야 할까?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냈듯, 나는 ‘국어’보다는 ‘한국어’라는 말을 선호한다. 딱히 국가주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라는 말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주의나 주관주의는 정신적 미숙의 표지다. ‘국문학’이나 ‘국사’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외국인 한국어학자, 외국인 한국문학자, 외국인 한국사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어학자, 한국인 한국문학자, 한국인 한국사학자도 보고 싶다.

 

7.

가족에게 건네는 헌사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시인 황지우가 세 번째 시집 <나는 너다>(1987)에 붙인 문장이다. “나를 길러주신 나의 장형長兄 우성宇晟 스님께, 세상의 부채負債를 지고 지금도 땅밑을 기는 나의 아우 광우에게,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 바칩니다.”

이 헌사에 담긴 정보는 시인의 형이 승려고 시인의 동생이 혁명가라는 사실이다.

…(중략)…

시집 후기의 “선사禪師들은 검객을 닮았다. 내 골통을 반半으로 가르는 가장 빠른 생각은 메모다. 메모랜덤: 기억을 위한 부적符籍!”이라는 문장은 이 아우라에 더욱 두터운 신비의 켜를 보탰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 문장에 이어, 시집 <나는 너다>에 묶인 작품들이 “두 번째 시집을 묶을 때 함께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메모 같은 시들”이라며 사양지심을 보였으나, 이 사양의 몸가짐은 그보다 앞서 발설된 선사와 검객의 유비에서 이미 효력이 반감될 운명이었다. 선사(승려)는 검객(혁명가)을 닮았다! 그리고 선사와 검객 사이에 끼인 우리 시인은 선사로서, 검객으로서 (궁핍한 시대의) 기억을 위한 부적을, 메모랜덤을 날린다!

 

8.

문학평론가 김현(1990년 몰)이 서울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흘린 말은 ‘녹즙’이었다고 한다. 김현의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은 고인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 일화를 전하며, “그것(녹즙)이 선생이 상상한 가장 순결한 음식, 생명의 엑기스였을까?”라고 덧붙이고 있다. 김현의 이 녹즙은, 그보다 반세기 앞서 소설가 이상(1937년 몰)이 도쿄대 병원에서 발설했다는 ‘멜론’(이 아니라면 ‘레몬?)을 연상시킨다.

1970년대를 열어제친 전태일(1970년 몰)의 분신 이후 적잖은 공적 자살자들은 사회를 향한 요구를 유언으로 남겼다. 전태일은 제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이 다하기 직전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이 마지막 말은 그가 몸을 사르며 외쳤던 정치 구호를 육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유언이다.

 

9.

넓은 의미의 정치광고, 곧 의견광고의 역사에서 누락시킬 수 없는 것이 1975년 첫 사분기에 <동아일보> 지면을 메웠던 격려광고일 테다.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에 비판적 논조를 보였던 <동아일보>에선 1974년 12월 중순부터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여기 정권의 손이 작용했다고 판단한 이 신문 독자들이 이듬해 신년호부터 유료 격려광고를 내 자유언론 운동을 지지하는 유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익명으로 나간 첫 격려광고를 낸 이가 당시의 ‘재야인사’ 김대중씨였음이 올해 들어서야 밝혀졌거니와, 이 광고 이후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국민을 우롱할 수가!” “배운 대로 실행 못해 부끄럽다” “나도 이 작은 마음을” “동아여 암흑에 한 줄기 빛을” “동아 탄압 발상發想한 자여! 세세손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같은 카피의 광고들이 익명이 반半익명 또는 단체의 이름으로 쉼 없이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시민들의 격려 대상이었던 비판적 기자들을 그 해 3월 무더기로 쫓아냄으로써 정권에 무릎을 꿇었고, 이내 <동아일보> 광고 난은 ‘정상화’됐다.

 

10.

그는 또 소설 습작기에 <청춘> <황금> <희생> 3부 ‘거작’ 장편소설을 구상했으나 끝내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전말을 그린 <문주文酒의 벗들>이란 글의 ‘3부작 장편’ 대목은 전형적 ‘희문’이다. 소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궁리하느라 동서 고전의 첫줄을 살피던 무애는 마침내 밀턴의 <실낙원>이 전차사로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다.(“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at fruit/ Or that forbidden tree…"). 그래서 이를 좇아, 서양말 전치사에 해당하는 우리말 조사 ‘가, 를, 의, 에, 와, 는, 아…’ 따위를 늘어놓고 심량深量하다가, 이내 소설 쓰기를 단념했다는 얘기다.

 

11.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12.

홍승면은 <직업으로서의 신문기자>라는 글에서, 국민과 신문기자의 관계를 사령관과 참모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다. “참모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고 사태 전망을 적절하게 판단해야 하고 현명한 행동을 건의해야 한다. 그것은 사령관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이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13.

경어체계는 언어예절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이다. 예절은 한 공동체의 파열을 막는 거푸집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자질구레할 땐, 또 너무 경직되게 운용될 땐 공동체 구성원의 생기와 친밀감을 옥죄는 사슬이 될 수도 있다. 경어체계가 형식화하고 있는 예절은 거푸집보다는 사슬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 예절이, 특히 한국어 경어체계에서 보듯,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이고, 상호적이라기보다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어체계는 아주 깊은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다. 한국어 경어체계의 흔들림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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