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법 앞에'라는 문구다. 모든 국민은 무조건 평등한 게 아니라 법 앞에 평등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적 · 정치적 평등권을 가진다. 대통령이나 노숙자나 남의 물건을 훔치면 똑같이 절도죄가 적용된다는 게 법적 평등이고, 대통령도 노숙자도 선거에서 똑같이 1표만 행사한다는 게 정치적 평등이다. 그러나 법과 정치의 범위를 벗어나면 평등을 보장해주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




2.
…(중략)…그리스도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세계관이다.



3.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지나치게 분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노동의 본래적인 총체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하나의 부품처럼 주어진 단순 작업을 반복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투여한 노동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노동 생산물에 관해서도 전혀 소유권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현대 사회의 커다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노동 소외를 낳는다.



4.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므로 세계의 원인이며, 동시에 세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적이기도 하다. 결국 신은 모든 걸 설명하는 듯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모든 것의 원인이자 목적인 듯하지만 아무것의 원인도 목적도 아니다.



5.
사관과 역사의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사관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없앨 수도 없지만 역사의 평가는 대체로 특정한 시대의 관점이 반영되므로 오히려 역사를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걸핏하면 되살아나 민족 감정을 건드리곤 하는 한일 고대사의 해묵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고대에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한반도와 일본의 교역을 중재하던 무역기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대적 관점에서 무리하게 평가하려 하면 현재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재되게 마련이다. 그 결과 고대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 기지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강변하는 우스꽝스러운 대립이 생겨난다.

과거에 무인도였던 독도가 지금 누구 땅이냐는 문제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것도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근대적 개념의 영토국가가 성립하기 이전 무인도였던 곳에 대해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6.
관리官吏는 국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다만 정부를 관리管理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의 개념이다.



7.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은 광속이 불변이라는 간단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라고 믿었고 수학을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실험’으로 상대성의 개념을 설명한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있다고 하자. 이 열차의 객실 바닥에 전구를 놓고 그 바로 위 천장에는 거울을 붙여놓는다. 전구를 켜면 그 빛은 천장까지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거울에 반사되어 바닥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빛이 움직인 거리는 바닥에서 천장을 왕복한 거리다. 적어도 열차 안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열차 밖에서 보면 다르다. 열차가 달리고 있기 때문에 전구의 빛은 수직이 아니라 살짝 삐딱하게 올라갔다가 삐딱하게 내려온다. 이 경우에는 빛이 이동한 거리가 열차 안에서 측정할 때보다 조금이라도 길어진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빛이 이동한 거리가 서로 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속도는 특정한 시간 동안 물체가 이동한 거리로 계산되며, 빛의 속도는 불변이다. 또한 동일한 사건이므로 빛이 이동한 거리는 서로 같다. 그렇다면 이 사고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시간이 달라야 한다.



8.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의사소통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적 영역은 경제제도에 의해 침해당하고 공적 영역은 행정제도에 의해 침해당한다”(<소통행위 이론>). 사적 의사소통은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 공적 의사소통은 관료제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그 결과 생활세계가 식민지화된다.



9.
알튀세르는 개인적 이데올로기보다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계급관계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자신을 노동자로서 의식하고 그에 따르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일종의 ‘의식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수단이 바로 미디어와 학교다.



10.
번역이 원래 그렇지만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각 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서의 원문이 원래의 뜻을 유지하기란 어렵다(그리스도가 실제로 썼던 언어는 아람어로 추정되므로 히브리어도 ‘원본’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인명이나 지명은 번역자가 알아서 적당히 읽어주어야 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심지어 서기들이 문장을 필사하다가 순전히 실수로 내용이 달라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난해한 용어에 임의로 주석을 단 것이 실수로 성서의 본문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다.

오늘날처럼 학자들의 소통이 자유롭지 못했으니 각종 오류를 정밀하게 찾아내기도 어려웠을 테고, 인쇄술이 없었으니 사본이 원본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보장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오류는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은 옛 문헌은 거의 없다. 다만 문제는 오류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인간적인’ 과정을 통해 작성된 문헌이 마치 신의 말씀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전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절대화되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11.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봉건적 신분질서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부도덕한 체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중략)…

누구나 나면서부터 신분과 사회적 역할이 정해진 과거 사회에는 오히려 소외가 없었다. 소외는 근대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질서정연하고 명백한 사회 체제 안에서 정해진 위치를 가졌던 중세의 봉건 체제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개인을 전적으로 자기의 발로 서도록 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한 개인을 다른 개인들로부터 고립시키고 분리시켰다”(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12.
따라서 인류 사회가 진보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려면 에로스만 조장해서는 안 되고 타나토스를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 오히려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에로스보다 타나토스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에로스가 좌절될 경우에는 번영이 지체될 뿐이지만 타나토스가 활개를 친다면 사회 전체에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개인의 무의식에 적용되는 에로스/타나토스의 개념을 곧바로 사회적 차원에 접목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듯이 인간 개인에게 타나토스의 본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집단적 충동으로 전화되려면 단순히 본능의 메커니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전쟁의 비극을 소수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몰아붙여 결과적으로 더 근본적인 원인을 은폐하고 있다.



13.
외국인이 본 한국의 첫 인상은 물론 중요하지만 굳이 칭찬을 유도해서 만족하려는 심리는 대체 뭘까? 미국 대학생들이 ‘Zen' 또는 ‘禪’이라고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든가, 비틀스의 한 멤버가 인도의 사상에 심취했다든가, 프랑스의 유명한 도예가가 고려청자에 감탄사를 연발했다든가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뭘까? 서양인들도 동양의 깊은 정신과 예술 세계를 아는구나 하고 만족을 얻을까?

…(중략)…

미국의 대학생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 프랑스의 도예가는 실상 동양을 잘 모른다. 동양에 사는 우리도 동양을 잘 아는 건 아니다.

…(중략)…

그러나 동양에 대한 지적 관심, 즉 오리엔탈리즘은 결코 순수한 학문적 목적을 지닌 것도, 단순한 유행도 아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소재로 하는 유럽의 공상 만화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위한 하나의 체계로 창조된 것이다. 그 창조를 위하여 서양은 수세대 동안 엄청난 물질적 투자를 했다. 이러한 투자 덕분에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관한 지식 체계로 자리 잡았으며, 서양인의 의식 속에 동양을 여과하려 주입하기 위한 필터가 되었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상과 문화 전반적인 서술들은 크게 증대했다. 그 투자는 대단히 생산성이 높은 투자였다”(<오리엔탈리즘>). 오리엔탈리즘은 학문적 관심도, 지적 호기심도 아닌 ‘투자’였다는 이야기다.



14.
인간의 의식은 늘 욕망으로서 존재한다. 목이 마를 때는 갈증으로서, 연인이 그리울 때는 그리움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의식의 기도는 결국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숙명이다.



15.
유물론은 흔히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부도덕한 사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유물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정신적 측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앞세운 참된 의도는 사회의 발전 단계에도 자연과학적 법칙성이 관철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데 있었다.



16.
우선 이데올로기를 이론 체계로 보는 입장이 있다. 가장 가까운 우리말로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한 개별 이론보다는 철학자나 정치가, 경제학자 개인의 포괄적 이론 체계를 가리켜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애덤 스미스의 분업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지만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관한 그의 경제 사상 전반은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가치중립적인 이론 체계에 비해 약간 가치가 개입된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흔히 ‘이념’이라고 번역한다. 대표적인 예는 정치 이데올로기다. 이것도 이론 체계처럼 복합적인 이념의 덩어리를 가리키며, 대중을 정치적 행동으로 이끌고자 할 때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해방 직후 우리 사회를 얼룩지게 했던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그런 경우다.

그보다 부정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지식사회학에서는 특정한 계급과 계층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배후에 숨기고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내세우는 이념이나 관념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사실상 지배하는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경제성장 정책을 마치 사회의 각계각층에 골로루 이익이 돌아가는 것처럼 선전할 때 그 이데올로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허위의식으로 기능한다.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가 별도의 이데올로기로 규정된다는 아이러니는 이데올로기가 포괄하는 의미망이 얼마나 넓은지 말해준다.

더 포괄적인 용도로 , 이데올로기를 추상적인 담론 체계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리오타르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거대 담론을 비판하는데,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리오타르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는 과거와 같은 통합적인 사회 체계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의 각 부분이 단일한 목적 아래 결집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게 전혀 불가능하다. 부분은 이제 전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독자적인 존재와 운동의 방식을 가진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거대 담론으로 세계의 기원과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은 파산했다고 본다.

심지어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적 이념-예컨대 마르크스주의-조차 거대 담론의 일반적인 결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역사적으로 실패했으며, 탈현대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거대 담론은 항상 ‘통합’이라는 목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그릇된 목적론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마르크스주의란 낡은 계몽주의의 기치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환상이라고 단정한다. 계몽, 자유, 해방 같은 근대의 거창한 이념들은 중세의 신을 대체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알튀세르처럼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이 아니며 심지어 ‘의식’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다. 노란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듯이 이데올로기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늘 쓰고 있어야 하고 쓸 수밖에 없는 색안경과 같다.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주체이도록 만들어준다.



17.
그렇다면 자본주의도 인터넷처럼 일종의 매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담기 위한 공간이듯이 자본주의도 구체적인 경제제도라기보다는 다른 실체적 경제제도를 구현하기 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마치 고정불변의 제도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인터넷이 매체의 범위를 넘어 허구적인 권력을 실체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가 아닐까?



18.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자연스럽다.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를 거의 본능처럼 여긴다. 사류재산은? 부모 형제 사이에도 내 것 네 것이 있으므로 자연스럽다. 이윤추구는?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장 기능은? 물건을 모두 다 직접 만들 수는 없으니까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는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같은 현상을 두고 정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이 사유화된다면 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이익만을 탐한다면 인간 사회가 아니라 야생의 정글이나 다름없다. 모든 물건이 시장에서만 거래된다면 누구나 힘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는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인위적인 제도가 된다.

자본주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면을 가진다. 사유재산의 관념은 보편성이 가장 강하고, 시장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측면이며, 이윤 추구는 그 중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사유재산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이윤추구와 시장은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속한다.



19.
이성의 시대에 인간의 의식은 인식의 확고한 출발점이었고 단단한 실체처럼 여겨졌으나 실은 텅 빈 그릇처럼 껍데기일 따름이었다. 자체의 존재 근거를 가지지 못한 의식은 끊임없이 바깥을 지향하면서 외부에서 근거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며(무엇을 선택할지는 자유지만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다), 무無와 같이 공허한 존재방식 때문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인간이 선택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이기에 자유는 곧 비극이다.



20.
그러나 토플러는 ‘물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쓰는데,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연속성을 뜻한다. 물결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 그렇듯이 지금의 변화는 과거에 있었던 변화(제2물결)의 연속선상에 있다. 즉 제3의 물결은 제2의 물결을 대체하는 동시에 그것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중략)…

물결의 둘째 의미는 총체성이다. 제3의 물결이 가져온 변화는 사회의 특정한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전면적으로 파고든다. 한 예로 토플러는 기업에서 출퇴근 제도가 흔들리면서 직원 개인이 자신의 근무 시간을 정한다든가 아예 집에서 일하는 근무 방식으로 바뀌고 있음을 말한다(요즘 흔히 말하는 재택근무나 '소호Small Office Home Office'방식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토플러다). 생활환경이 바뀌면 당연히 가족제도도 바뀐다. 제2의 물결이 가져온 핵가족화는 산업화 시대가 끝나갈 즈음부터 심하게 흔들린다. 이혼 가정이 늘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많아진다.



21.
이러한 종말론으로 신도들에게 잔뜩 겁을 주는 의도는 명백하다.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이 지은 죄를 대속하고 죽었으므로 교리상으로 인간은 그때부터 무죄가 된다. 죄가 없으면 두려움을 모르고 두려움을 모르면 신을 섬기지 않는다.



22.
냉전 이데올로기가 생겨나면서 분단을 맞았던 한반도가 아제 그 이데올로기가 수명을 다했는데도 아직 분단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지금 북한은 세계적으로 가장 폐쇄적이고 철저한 공산주의 이념의 수호자가 되어 있고, 남한은 상대적으로 가장 철저한 반공 이념의 수호자가 되어 있다. 세계를 갈라놓았던 이념의 구분이 약해졌는데도 한반도는 여전히 좌익/우익이 대립하는 특수한 지역이다.



23.
정신의 특정한 상태가 신체의 질병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신체에 원인을 둔 정신의 질환도 있다. 전자의 예가 스트레스라면 후자의 예는 트라우마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신체와 정신이 확연히 분리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다.



24.
문화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본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외적인 강제력이 가해지면 획일화되기 쉽다.



25.
그러므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세력의 헤게모니에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대중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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