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와의 만남에서 뜻한 바를 얻지 못한 길가메시는 우여곡절 끝에 불로초를 얻지만 신들은 그것마저 앗아가 버린다. 참으로 덧없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고통스러운 세상, 쓸쓸한 인생. 유행가 가사 같은 정조는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인류 곁에 있었다.
후대에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는 이렇게 말한다.




길가메시여, 그대가 찾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안겨주고 영생의 삶을 거두었기 때문이오. 그대가 살아 있는 시간을 즐겁고 충만하게 보내오. 그대의 손을 잡는 어린아이를 사랑하오. 그대의 아내를 품에 안고 즐겁게 해주오. 기껏해야 이런 것들만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인간은 이렇게 읊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탐냈다. 만족되지 않는 욕구의 좌절. 사랑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2.
야훼는 잔인하고 가차 없다. 자식을 죽여서 자신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는 고대의 인신제사 풍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점차 동물로 대체되어갔지만 이 풍습은 전세계에 걸쳐 있었다. 야훼는 히브리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한다. 이 약속은 히브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사막과 같은 황량한 땅에서 덧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젖과 꿀’이라는 알량해 보이는 약속 하나에 모든 것을 내버리고 야훼만을 숭배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훼는 이것을 거저 주지 않는다. 그것을 주겠다고 해놓고는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성읍의 주민을 칼로 쳐죽일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를 따르기만 한다면 외부 집단을 폭력적으로 살상해도 괜찮다는 정당화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비롭게 보이는 약속 뒤에 숨어있는 피에 굶주린 야훼의 잔인함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야훼는 마술과 형상을 혐오하는 신이다. 야훼가 모세에게 돌에 쓴 증거판 두 개를 줌으로써 모세의 정당화 작업에 착수했을 때, 야훼의 백성들은 기다리다 지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러자 야훼는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한다. 이렇게 진노하는 신이 사랑의 신일 수는 없다. 어쩌면 야훼는 불가능한 것을 히브리 민족에게 요구한 건 아닐까? 인류는 머나먼 옛날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에 뭔가를 그려 넣을 때부터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구석기 시대부터 내려온 이미지 만들기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 모세 5경의 야훼는 인간이 공포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에게는 공포가 내재화되어,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전도된 심리 상태에 처해 있다.




3.
인간이 폭력적인 것은 폭력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로마의 건국신화에는 로마적 세계의 근본 성격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로마의 건국자는 군신의 아들이다. 그는 그 태생에서부터 이미 전쟁이 몸에 배 있었으며, 그가 도시를 건설한 뒤에 한 일은 여인을 강탈한 것이다. 이는 트로이와 미케네 제국의 영웅들의 행위가 그대로 전수되었음을 의미한다. 로마의 전설에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겠다는 따위의 가치론적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군신이 등장하기는 하나, 전설의 핵심은 로물루스라는 인간과 레무스라는 인간 사이의 모두스에 있다. 신의 법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법을 따를 것이냐, 인간의 법을 준수할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인간 사이에 모두스를 정하고-이것이 이른바 ‘사회계약’이다-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형제라 해도 죽이는 것이다. 인간의 법을 지키지 않은 자라면 형제라 해도 죽인다는 것, 신의 법을 따른다면 형제는 죽일 수 없는데도 인간의 법에 따라 죽인다는 것, 이것이 로마적 실용성의 사회적 단면인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 로마를 보는 우리는 안티고네와 그레온의, 옳음과 옳음의 대립과 같은 상황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5.
역설적이게도 또는 방정맞게도 철학은 어렵고 힘든 시대에만 발언한다. 정말 느닷없다 싶게 나타나 엉뚱한 소리를 해대면서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사람들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 세상에 정말 쓸데없는 학문이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철학이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이다.
…(중략)…
이러한 지식인에게 고난은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닥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와중에서 부딪히는 것이었다. 행복한 시대의 인간들은 고생도 이런 식으로 한다. 그들에게 닥쳐오는 절대 절명의 상황이란 것의 근본이 애초부터 다른 것이다.




6.
로마인들은 행복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지켜내기만 하면 자신의 불멸성을 보장해주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게 아닌데’라는 의심은 헌신의 감소를 낳고, 헌신의 감소는 또다시 체제의 허약함으로 귀결되고, 그러다가 로마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7.
그의 잣대는 이것-현실에서 작동하는 냉혹한 이성-뿐이었다. 이것에 근거하면 선의는 무의미한 감정낭비일 뿐이며, 도덕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군주론>은 바로 이러한 원리 위에서 쓰여진 현실 정치 지침서인 것이다.
…(중략)…
몇몇 도덕주의자들은 이 텍스트를 사악한 것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혼란한 현실은 사악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당면해서 극복해야 할 현실일 뿐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다. 차라리 컨텍스트가 철저히 반영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직한 지식인이며, 마키아벨리가 걸어간 길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8.
그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며, 야비하고 잔인하며, 짧다. 인간은 본성상 탐욕적이고,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삶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한 개인의 힘은 다른 사람의 힘의 결과와 대립되고 충돌된다. 힘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한 개인의 능력의 초과분이다. 그리고 똑같은 힘은 대립되고 서로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립은 경쟁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연 상태에서의 개인의 힘과 경쟁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그런데 이를 곰곰이 살펴보면 이는 자연 상태의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 해야 타당하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경쟁 상태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9.
영국에서 세워진 이러한 이론체계는 자본주의체제의 발전과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세계는 홉스가 말한 전쟁 상태가 되었고, 세계 어디서나 무제한의 탐욕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태도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실의 탐욕의 논리가 그대로 도덕적 가치가 되는 오늘날의 냉혹한 세계는 제법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10.
스미스의 출발점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은 종래의 전통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그것은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차원의 도덕적 실천까지 고려하는 인간의 종합적인 성품이다. 그런데 스미스는 그러한 가치 기준을 점잖게 없애버린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이익을 따질 줄만 알면 ‘인간’인 것이다.
…(중략)…
여기서 개인의 이익 추구와 보편적인 사회의 이익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작동하여 사회의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지 어쩌는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예로부터 전해지던 ‘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스미스의 이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과 억지가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스미스라고 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려는 사람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더러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들이 스미스를 근거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는 ‘국부’가 아닌 개인의 ‘치부’를 목적으로 삼은 행위를 정당화할 때에도 스미스가 활용된다. 이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스미스 자신에게는 언짢은 일이겠으나, 그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며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겠다.




11.
다윈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우선 세계 안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을 수 있음을 드러내 보였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화해왔음을 천명하였다. 자연계와 사회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우뚝 선 존재가 아니라,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목적이 진보라 해도 과정은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원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끼리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인간 본성과 자연환경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 설명된다. 이로써 무한 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의 자본주의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더 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가 자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맨몸으로 살갗을 찢어가며 쓰라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는 어떠한 처방도 한낱 도덕주의적 대증요법밖에 되지 못한다.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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