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조, 당신은 자살하거나 종교를 통해 구원받아야 했소. 당신의 수기는 백발이 성성한 27살 이후로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아서 정말로 자살했거나 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르겠군. 아니, 어쩌면 당신은 자살하지도 않고, 종교도 없이 계속 그렇게 살면서, 당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 살면 인간으로서 실격이다.’라든가 ‘저렇게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도록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지.

 

당신이 수기의 앞부분에 쓴 여자에 대한 불가해함에 대해서는 나도 200퍼센트 동의하는 바요. 같은 인류인 듯 하면서도 남자와는 전혀 다른 생물,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들은 ‘외계인’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소. 당신은 아마 여자에게 데었겠지. 그래서 ‘여자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거고. 당신은 잠깐 뇌병원에서(출판사 별로 당신의 수기를 번역하는 데 조금씩 차이가 있소. 민음사에서는 희극 단어와 비극 단어 놀이를 ‘희’나 ‘비’라고 번역한 데 반해, 웅진씽크빅이라는 출판사에서는 ‘코미’, ‘트래’라고 번역했지. ‘뇌병원’은 어느 쪽 같소? 웅진씽크빅이오. 민음사에서는 ‘정신병원’이라고 번역했지. 난 왠지 웅진 쪽 번역이 좀 더 맛이 있다고 생각되는군.) 당신의 소원을 이루었지. 그곳은 온통 남자들뿐이었으니. 하지만 수기의 마지막에 가서 당신은 또 다시 여자와 살고 있더군. 아마도 여자일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인간으로서 이미 실격된, 그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당신의 운명인가 보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소. 인간을 구제할 수는 있어도 구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온갖 음악, 영화와 소설에서 구원의 대상뿐만 아니라 구원의 주체까지도 인간으로 그려지지. 그것도 여자로 말이오. 한때는 널 구원이라 생각했다는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라는 노래의 가사에서부터 카프카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여자를 구원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모티브일거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소.(내가 이렇게 강조하는 까닭은 당신처럼 될까봐 두려워서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오. 솔직히 말하면 심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싶소.) 만약 인간의 영역에 구원이 있다면 당신의 27살의 모습과 같은, 결국은 여성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구원이랄까.

 

당신의 수기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소. 푹푹 찌는 한 여름의 땡볕에서 당신의 수기를 읽고 있자니 <이방인>의 뫼르소도 생각났고…. 남을 의심할 줄 몰랐던 당신의 요시코가 더럽혀졌듯 당신은 마담의 말처럼 ‘좋은 사람’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실격됐소. 인간 세상이란 그렇다오. 당신 같은 좋은 사람은 살 곳이 못되지. 절대 선은 이 더러운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이오. 당신이 절대 선인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외다. 무엇하나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 없이 ‘싫은 것을 마다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있는 말이 어울릴 듯하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런 당신이 유일하게 자신의 뜻으로 한 행동이 자살이었지.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쪽으로 흘러가기가 얼마나 쉬운 지 이제 당신도 알겠지.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원하지 않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시간은 ‘순간’이오. 매 순간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오. 누구하나 상처받는 사람 없이(사실은 모두가 모두에게 상처받으면서) 밝고 명랑하게 서로를 속이는, 인간이 인간을 밀어젖혀도 죄가 되지 않는 인간세상에서 살기 위해 말이오. 노래 말마따나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일 수도 있듯, 너무 많은 이타심이 오히려 극도의 이기심일 수도 있는 거요. 바로 당신의 경우처럼 말이지.

 

마담의 말처럼 당신의 아버지가 나쁜 것일지도 모르지.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내게 카프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소.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은 많아. 당신이 그렇게 된 까닭은 어느 누구에게도 있지 않소. 바로 당신에게 있지. 인간이 만약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이오. 행복조차도 두려워한 겁쟁이 요조. 당신이 한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말은 니체가 병원에 가기 전 말을 붙잡고 했을 법한 바로 이 말이오. “아아, 인간은 서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비에스에서 6개월 동안 강의한 <동물의 세계>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대학수준의 강의를 방송에서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또 그것을 다시 책으로 내다보니 그런건지 '~했다.'와 같은 대학교재를 비롯한 책에서 많이 쓰는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하더군요', '~했지요'와 같은 문체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같은 대화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책 <대담>(도정일,최재천 공저)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 뭔가 흐름을 뚝뚝 끊는 것이 들어왔다. 비문(非文)이 왜 이렇게 많을까? 어쩌면 이런 느낌은, 이 텍스트를 짧은 시간에 굵게 읽는, 눈을 통해 읽는 것이 아니라, 6개월 동안 매주 1회씩, 정말 그의 목소리를 통해 귀로 들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과 글의 차이에 대해, 대상을 소화하는 시간에 대해 잠깐 딴 생각을 해본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책은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최재천은 이 책을 대학교재로 사용해도 될 거라고 서문에서 쓰고 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리 훌륭한 교재는 아닌 것 같다. 풍부한 사진 자료 등 책에 들인 공은 느껴지지만 오히려 사례가 너무 풍부하다는 것이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을 '단순한 사례의 나열' 정도로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사례는 각각 모두 흥미로웠지만, 이쁜 부분만을 모아놓는다고 미인이 되지 않듯, 맛있는 것을 섞는다고 맛을 보장할 수 없듯 각각의 사례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말이다.

 

같은 내용을 말로, 글로 접할 때의 차이나, 책으로서의 편집에 대한 것은 이 정도에서 멈추기로 하고 내용에 대해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다 읽고 이 수많은 사례와 실험, 연구들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물, 식물의 공존을 위해서일 것이다. 보호하고(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들을 사랑해야 하고 (최재천이 늘 말하듯이)알면 사랑하게 되므로 이들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삐딱한 나는 아무래도 동물들이 불쌍하다. 실험실 실험 대상 동물은 물론이고 자연상태의 연구 대상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동물행동학도 결국은 인간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이고(동물행동학 자체가 사람이 만든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공존'이니 하는 것들은 명목상 붙인 명분이자 이상이 아닐까? 어떤 학문이 응용분야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 학문이 그만큼 가치있는 학문이라는 의미겠지만 그 가치는 역시 인간의 기준에서 본 가치겠지. 동물 행동학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의 동물 행동학은 굉장히 실용적인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실용적인 학문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것 같다. '공존'을 위해서 정말 그렇게나 많은 실험과 연구들이 필요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인간만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인간만의 특징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보통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어떤 특정한 답 하나를 유도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 특징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를 깔아놓는다는 점이다. 인간의 특징이 어떻게 하나만 될 수 있겠는가. 그 특징 하나가 다른 모든 동물들과 인간을 결정적으로 구별해주지는 않는다. 다른 동물들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몇 가지 특징이 조합되어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식 역시 상대적인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심지어 머리를 쓰는 간단한 테스트에서 인간과 침팬지를 대결시켰는데 챔팬지가 훨씬 잘했다. 인간과 동물은 그저 다를 뿐이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항상 되묻고 있다.)

 

다른 책들이 많이 생각났던 책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잭 런던의 <야성이 부르는 소리>를 비롯한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들과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봐서 실망했던 베르베르의 <개미>, 별로 유명한 책은 아닌 듯하지만 뜻밖의 보물같은 책이었던 마크 트웨인의 <동물과의 대화로 본 세상 다시보기>, 도정일, 최재천의 <대담> 등이 생각났다.

 

수많은 사례 중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다른 곤충들도 함께 사는 개미 사회와 흰개미의 체액만 빨아먹고 시체를 흰개미집 입구에서 흔들어 더 많은 흰개미를 잡아먹는다는 자객벌레, 자기 딸을 물어죽이는 여왕벌, 그리고 자식들에게 싱싱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먹이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마비만 시켜 그 위에 알을 낳는 기생말벌 등이었고, '흥미있었던' 사례는 개미와 벌들에게서 발견되는 '여왕물질', 다른 개체들로 하여금 판단의 착오는 물론 생리적인 변화(불임)까지 만들어내는 물질과 암컷이 나무구멍 속에 들어가 알을 낳으면 수컷이 진흙으로 구멍을 막고 먹이를 날라다주는 코뿔새와 가사분담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다는 갈매기 등이었다.

 

가장 무거운 이야기이자 나의 문제의식. 자연스러운 것은 다 좋은가? 아직까지 내 생각은 이렇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 이야기 역시 맥락을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다 좋다면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듯 관용보다는 불관용 쪽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이 숭배해 마지 않는 다윈 역시 그렇다. 아래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우익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이것이 첫 번째 다위니즘이다. 이 다위니즘에 따르면 다윈은 평등의 적이고 모든 진보주의의 적이다. 만약에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에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위니즘이 있다. ..(중략).. 토르에 따르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론이나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사회생물학은 '진짜' 다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토르는 진정한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중략).. 이 지점에서 토르는 <종의 기원>의 인기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다윈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를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이 책에서 다윈은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창시자이지만, 그 선택의 법칙이, 특히 그 도태의 측면에서, 문명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끝으로, 학문간 통섭은 가능할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상 위의 생물들이 그러하듯 학문도 서로 모두 얽혀있다. 전문화라는 흐름 때문에 서로 다른 분야에서 하는 소리는 전부 해석이 필요한 시대. 학문간 경계 허물기는 재미있을 뿐더러 필요하고 학문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위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자기가 하는 공부에 자부심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이런 자부심은 자칫 오만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간 경계를 허문다는 말은 경계를 허물고 함께 무언가를 하지만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생물학, 물리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물리학, 인문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인문학이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학문간 벽을 허무는 일은 이제 막 걸음마를 땠다. 말하기보단 '듣기'가 중요하겠다. 세상에 절대적인 학문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사회생물학의 득세는 다소 위험해보인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최재천 선생님의 답장
    from 소요당(逍遙堂) 2009-09-07 15:13 
    이승환님   보내주신 독후감 감사합니다. 제 책을 이처럼 꼼꽁하게 읽고 여러 모로 생각해 보신 분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럼 하신 말씀 몇 가지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지적하신 사항들 잘 새겨두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학에서 동물행동학을 강의할 때 거의 완벽하게 이 구도를 따르고 있고 학생들은 오히려 예가 많은 걸 대체로 좋아합니다. 물론 수업 시간에는 예만 늘어 놓는 게 아니라 실험 결과들에
 
 
프레이야 2007-08-1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인님, 반갑습니다. 좋아하는 최재천교수의 책이군요.
리뷰 잘 읽고 추천합니다.^^

sensationalbuff 2007-08-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도 반갑습니다 :)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을 추천까지 해주시다니요 헐헐..
 

1.

뻐꾸기는 잘 아시다시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습니다. 이런 행동을 '탁란'이라고 하며, 대체로 알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둥지에 낳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지요. 뻐꾸기 알은 의붓어미의 알보다 먼저 깨어나는데, 깨어나서는 본능적으로 의붓어미의 알들을 등에 업어 둥지 밖으로 밀어냅니다. 또 알들을 다 내몰지 못하고 둥지에서 함께 자란다 하더라도 다른 새끼들보다 목을 더 길게 뽑고 입을 크게 벌려 제일 큰소리로 울어댑니다. 그런 식으로 먹이를 독차지해 다른 새끼들을 제치고 결국 자신만 살아남지요.

 

2.

아직은 대부분의 동물이 다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아마 두뇌가 꽤 발달한 동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생각한다'는 기준을 인간에 맞추다 보니 다른 동물들이 사고를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지, 그들 나름의 사고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략)..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쪽이 주도권을 쥐어야만 교육이 됩니다. 이 세상에 나와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게끔 만들어가는 것이 교육이기에 대부분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무 아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미 새가 새끼 새가 싫어한다고 나는 법을 가르치는 걸 포기하나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3.

딱정벌레는 성충이 되었을 때에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행동을 합니다. 일개미는 집 밖에서 반날개의 애벌레를 발견하면 자기 집으로 물고 갑니다. 마치 '너 왜 여기 나와 있니?' 하며 걱정하는 듯이 말입니다. 딱정벌레 애벌레는 개미 애벌레가 아양 떠는 모습을 그대로 흉내냅니다...(중략)..일개미는 딱정벌레 애벌레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자기들의 '아가방'에 집어넣습니다. 아기들을 기르는 방에 넣어놓으면 이 애벌레는 개미들의 아기를 먹고 삽니다...(중략)..개미는 왜 이렇게 손해만 보며 살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너무 야박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미 사회는 어느 정도 손해를 봐도 괜찮을 만큼의 여유를 갖춘 사회라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개미집을 파보면 딱정벌레 애벌레, 귀뚜라미 등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와 삽니다. 개미는 그만큼 성공한 동물입니다. 개미집에 들어와 사는 곤충들의 목록만으로도 두꺼운 책 한 권이 될 정도입니다.

 

4.

이들 중에 특별히 기막힌 노린재가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자객벌레라고 부르는 노린재인데 종종 흰개미를 잡아먹고 삽니다. 이놈은 흰개미 굴에서 나온 흙덩이들을 먼저 온몸에 붙입니다. 흰개미 굴에서 나온 것이니 냄새도 비슷하지요. 이렇게 흙덩이 같은 모습으로 걸어가다가 들킬 것 같으면 납작하게 엎드리고 또 걸어가는 식으로 흰개미 굴 입구까지 접근한 다음, 지나가는 흰개미 한 마리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몽땅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흰개미 몸에 구멍을 내서 체액만 빨아먹고 시체를 입에 물고 굴 앞에 가서 흔듭니다. 그럼 그 시체 냄새가 굴 안에 진동하게 되고, 동료가 죽은 것을 안 흰개미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그럼 그때 더 많이 잡아서 먹는 거죠.

 

5.

1970년대 말 미국의 어느 여류 생태학자가 생물학자들의 연구 주제들에 대한 통계를 내보았습니다. 재미있게도 남성 생물학자들은 거의 절대 다수가 동물이나 식물의 경쟁 관계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있었고, 서로 돕는 관계 즉 공생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정말 흥미롭게도 공생 연구의 거의 대부분은 여성 생물학자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6.

곤충이나 우리 인간의 몸은 사실 튜브 형태의 몸입니다. 안팎이 서로 연결되어 있죠. 식도에서 위, 작은 창자에서 항문을 통해 몸 밖으로 나가는 장 속은 사실 몸 바깥입니다. 몸 안이 아니죠.

 

7.

우리 풍습에 결혼한 사람들한테 금실이 좋으라고 선물하는 원앙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새가 아닙니다. 원앙 수컷은 아내랑 함께 다니다가 다른 암컷을 보면 그냥 아무 때나 아내가 보는 앞에서 겁탈합니다. 원앙 사회에서는 수컷이 자기 아내는 지키면서 남의 아내는 겁탈을 하려고 합니다.

 

8.

마지막으로 자식을 보호하기는 하되 너무나 끔찍한 부모를 하나 소개합니다. 기생말벌은 굴을 만들고 곤충이나 거미를 잡아서 그 안에 넣은 다음 그 몸에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먹이가 될 곤충이나 거미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독침을 쏴서 신경만 마비시킵니다. 그러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몸을 못 움직이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말벌 새끼들은 살아 있는 싱싱한 생고기를 먹고 자라게 됩니다. 자식한테 아주 신선한 고기를 먹이기 위해서 남을 생매장시켜 놓은 것입니다. 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9.

이렇게 해서 충분한 숫자의 일개미들을 키워내면, 어느 날 일개미들이 현관문을 뚫고 바깥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들은 제일 먼저 식물이 분비해주는 음식물인 뮬러체들을 끌어들입니다. 불과 2~3일이면 나무에 있는 거의 모든 뮬러체들을 수거합니다. 그러니 2~3일만 늦게 굴 문을 뚫고 나오는 군락도 굶어 죽는 겁니다. 남의 집보다 하루라도 먼저 나가서 음식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게 바로 이들의 경쟁 목표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 말고 당장 먹을 것보다 더 많은 식량을 비축하는 동물이 바로 개미와 벌입니다. 이렇게 쌓아놓으니 늦게 나온 다른 집은 먹을 게 없어서 다 죽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나무 전체를 장악하게 되죠.

그런데 이때부터 여왕들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일개미들이 먹을 걸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오아개미들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몸을 녹여 함께 자식을 기르던 그 사랑스런 동료가 이제는 음식을 축내는 미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여왕이 한 마리 남을 때까지 서로 물고 뜨는 혈투를 벌입니다. 이렇게 정치 싸움을 벌일 때 나무 아래를 보면 개미 머리들이 뚝뚝 떨어져 있습니다. 죽은 여왕의 시체를 일개미들이 내다버린 것인데, 다른 부분은 먹을 수 있지만 머리는 먹을 수가 없어서 머리만 밑에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10.

예를 들어 아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이 항생제를 주면서 "몸이 나아지는 것 같더라도 끝까지 드십시오"하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사흘쯤 지나 아이 상태가 좋아지면 그만 먹여도 되겠지 하고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몸 안에 들어온 병원균과 싸움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잡아야 하는데 어설프게 두들기도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균들을 키워왔습니다. 우리 몸에 들어온 균 중에서 약한 놈들은 대충 죽였는데 독한 놈들은 못 죽인 상태로 약먹기를 멈춘 것이죠...(중략)..그러니 나중에 다시 병원에 가면 예전에 먹던 약으로는 듣지 않아 더 독한 약을 받아와야 합니다.

 

11.

먹은 것 대부분이 체온 유지를 위해 소모됩니다. 히터와 에어컨을 몸 안에 넣고 돌리며 사는 셈이지요. 변온동물은 양지와 그늘로 움직여 다니면서 조절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유지비는 굉장히 적게 듭니다. 뱀은 한 달에 웬만한 크기의 먹이동물을 한 마리 정도만 잡아먹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한 마리 먹고 앉아 있다가 따뜻한 데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한 달쯤 지나면 먹을 때 됐네 하고 또 한 마리 잡아먹습니다. 우리처럼 하루 세 끼 열심히 먹을 필요가 없죠. 이런 변온동물인 도마뱀도 병원균이 들어오면 햇볕이 있는 곳에 나가 오래 앉아서 몸의 온도를 올린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평소 이상으로 올려서 균들을 태워버리는 것이죠. 

 

12.

자연선택은 우리가 아름답게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자연선택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좀더 많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기는 것입니다. 자연선택의 관심은 오직 번식입니다.

 

13.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우리 인간의 독특함에 매달리고 있습니다...(중략)..이 지구가 우리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존재했던 건 절대 아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한 연구

 


모든 천재들과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기리는 진정한 방법은 대상을 숭배하고 기념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그건 대상을 박제화하는 것이다.) 대상을 끊임없이 오늘에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말이다. 

20세기에 단 한명의 소설가를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문학에 있어서 ‘천재’가 있다면(엄밀한 의미에서의 '천재‘는 수학과 음악에서밖에 나올 수 없다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보르헤스를 뽑겠다. 19세기를 살았던 21세기 철학자 니체가 오늘날에도 살아있듯, 20세기를 살았던 21세기 문학가 보르헤스도 오늘날 여러 모습으로 살아있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나는 그를 패러디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제목도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땄다. 내 계획은 이랬다. 먼저 주석을 달아 또 다른 보르헤스를 만들어 낸다. 성이 다른 보르헤스를 중세에 살았던 가상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의 책 <픽션들>은 표절이나 패러디, 조금의 각색도 없는 번역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 모두 불태워졌다고 전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보르헤스가(혹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쓰는 어떤 작가가) 어디선가 이 책을 구해서 그것을 그대로 베껴내게 되고 그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기수로 칭송받게 된다. 이어 내가 쓰지도 않은 가상의 책, 혹은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 혹은 가상의 작가가 쓴 진짜 책 제목을 언급하며 이것이 모두 두 번째 <픽션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하며 글을 끝낸다. 

하지만, 내가 이 천재의 작품을 오늘에 살아 있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재주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의 작품은 오늘에 살아 있기 때문에,(사실 가장 큰 원인은 능력부족이자 그렇게 해봤자 더 이상 참신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동기부족이다.) 나 한명 정도는 그의 작품을 숭배하고 기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뭇 진지하게 <픽션들>, 그러니까 이 ‘구라의 향연’들을 대하기로 했다. 

 

이 책을 구라의 향연, 구라의 기술(skill)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부당한 지도 모른다. 책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 이것은 모두 <픽션들>이기 때문이다. 픽션은 구라다. 있지도 않은 책을 있다고 하거나, 가상의 작품에서 자신의 실제 단편의 영감을 받았다든가,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 낸다거나, 실존하는 작가의 가상의 책을 이야기한다거나 하는 기술들은 오늘날의 소설의 작법에 있어서 이제는 그리 신선하지도 못한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이 거짓말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섞고, 때로는 자기 자신도 이 거짓말에 동참시키기도 하는 모습은 보르헤스를 범상치 않은 인물로 만들어준다. 그는 기존의 소설작법을 벗어났다.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그가 자주 사용하고 좋아하는 개념들은 무한, 반복, 미로, 역설과 같은 것들이다. 책을 읽다가 내가 떠올린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4차원)’-<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헤겔의 역사철학’-<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보들리야르의 시물라크르'-<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니체의 영겁회귀’-<바벨의 도서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튜링테스트’-<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벤야민의 아우라’-<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제논의 역설’-<죽음과 나침판> 

<틀뢴…>에 나오는 ‘미래는 기다림이고 과거는 기억’이라든가, ‘모든 작품, 지식의 주체는 한 사람’이라든가, ‘신이 아닌 인간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든가 하는 개념들도 인상적이었다. 가상이 현실을 전복해버리는 것도 환상적이었다.

 

<알모따심…>은 순례의 대상이 순례자, 즉 찾으려는 대상이 찾는 자라는 생각도 흥미로웠고 허구적 텍스트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 대한 평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 자체가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여자친구를 통해서 듣고 놀랐다.

<삐에르 메나르…>는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세르반테스가 쓴 작품과 글자하나 다르지 않은 ‘돈키호테’를 쓰고 새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오늘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김만중의 <구운몽>을 글자 그대로 베낀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을 새로운 작품, 더 나아가서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작품에서 ‘튜링 테스트’를 생각한 것은 기본적으로 착상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질문자가 컴퓨터와 인간에게 동시에 질문을 던져 답을 받았을 때 어느 것이 기계의 것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컴퓨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튜링 테스트다. 삐에르 메나르 혹은 구운몽을 베끼는 누군가를 컴퓨터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생각은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까지도 연결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질서에 우연을 개입시키는 이야기이다. 우리 삶의 혼돈과 무질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회사’에 책임이 있을 지도 모른다.

<바벨의 도서관>에 나오는 ‘영원과 불사’의 개념도 흥미로웠다.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개념이고 불사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개념이다. 전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그리스 신들에 해당된다.

<끝없이…>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개념과 상대성, 여기에 니체의 영겁회귀 개념이 더해진 듯 느껴진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역자 후기에서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 사건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언급하는 소설’에 대해 인터넷에서의 하이퍼 텍스트를 언급하고 있다. 어쩌면 ‘맥락’에 대한 강조는 구시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천재…>는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잠들기 싫은 순간들’ 때문에 푸네스를 다소 부러워했던 소설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하면서 어떤 차이점이나 공통점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 하지만 여자친구는 꽤나 다르게 읽었고 결말을 들어가며 푸네스처럼 모든 것에 의미부여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스스로 피곤해하는 이유도 아주 사소한 것에 의미를 두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 역시 기억 속의 재료들을 취사선택해서 소설을 써야하는 문제에 대한 소설이라고 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푸네스는 분명 지향해서는 안 되는 존재일테지만 보르헤스의 시선은 따스하다.

<배신자와 영웅…>은 반란군의 지도자인 영웅이 사실은 배신자였고, 이 사실을 반란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역사의 암살 장면을 차용해 마치 연극처럼 꾸민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파헤친 화자 역시 이 연극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화자는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힌트, 이를테면 ‘미끼’를 문 것이다.

<죽음과 나침판>은 내 생각에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직선으로 된 미로’는 제논의 역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설’을 ‘미로’로 변형시킨 그의 재능에 정말 탄복했다.

<유다에 관한…>은 유다의 배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실적 의미에서 기독교의 업적이나 과실에 대한 것보다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 큰 나에게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유다는 예수를 반영하고 예수가 스스로를 낮췄듯 유다도 스스로를 낮춰 밀고자, 배신자가 되었다는 해석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찬탈할 수 없다는 겸손에서 비롯된 행동, 즉 선인이 되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는 해석 등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여기 언급하지 않은 소설들 중에 인상적이지 않은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역시 책은 혼자 읽고 끝내서는 안 된다.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현재란 규정될 수가 없는 거고, 미래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마치 현재적 기다림과 같고, 과거란 현실적 실체가 없는 현재적 기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작업은 사기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어떤 타협도 맺지 않아야 한다>는. 버클리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도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그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했다.




3.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현실 또한 질서정연하다고 반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리라. 아마 현실 또한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질서정연하다는 것은 여태까지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신적인 법-나는 비인간적법이라고 번역한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이다.




-1,2,3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중에서..




4.

또 다른 텍스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화가에, 햄릿을 까나비에르 거리에, 또는 돈키호테를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 가져다 놓고 있는 그런 기생충 같은 작품들 중의 하나였다. 뛰어난 품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메나르는 그러한 헛되고 소란스러운 행태를 혐오했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것들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따른 천박한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보다 나쁜 것으로) 모든 시대가 동일하다거나, 또는 모든 시대가 서로 다르다는 그런 초보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5.

그 어떤 지적인 활동도 종국에 가서는 쓸모없게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는 시초의 세계에 대해 그럴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철학사 속에서 단순히 한 장-만일 한 단락이나 명사로 되어버리지 않는다면-으로 남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에 따른 쇠락현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그것은 애국주의적 취향, 문법적으로 오만함, 호화로운 장정으로 꾸민 각종 난잡한 판본들이 난무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뿐이다.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




-4,5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중에서..




6.

나는 인류가 점차로 보다 대담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세상에는 전사들과 도적들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싶다. <대담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그것을 완수했다고 생각해야 하고, 마치 과거처럼 절대로 바꿔놓을 수 없는 미래를 자신에게 강요해야 한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중에서..




7.

그는 청회빛 말이 자신을 내동댕이쳤던, 그 비가 뿌리던 날의 오후 이전에는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종의 소경, 귀머거리, 얼간이, 건망증 환자.




8.

그는 다형적이고 순간적이고 그리고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세계에 대한 고독하고 명증한 관찰자였다. 바빌로니아, 런던, 그리고 뉴욕은 자신들이 가진 잔혹한 현란함을 가지고 인류의 상상력을 압도해 왔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그곳들의 건물이나,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는 큰길에서는 아무도 남아메리카의 황량한 한 변두리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행한 이레네오 위로 수렴되는 것과 같은 전혀 지칠 줄 모르는 어떤 현실의 열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여 버리는 것과 같다.

...(중략)...

또한 그는 자신이 늘 물살에 흔들리고 휩쓸려가는 강바닥에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라틴어를 습득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7,8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에서..




9.

그가 입을 열었다. 뢴로트는 그의 목소리에서 지친 승리의 감정, 우주의 크기만 한 증오심, 그 증오보다 결코 작지 않은 슬픔을 읽었다.




-‘죽음과 나침반’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