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루소의 허접한 역사철학에서 끄집어내야 하는 것.

아마 혼자서는 절대 읽지 않았을 책. 여자친구의 경우와는 다르게 내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책 제목이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그 기원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았다.(하지만 확실히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말 나이스한 제목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불평등에 관한 나름의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불평등에 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세상은 원래 평등하거나 공평하지 않다. 그랬던 적도 없고.’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불공평이나 불평등에 관한 푸념들, “아,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지?” 그건 세상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

-반대로 “세상 참 공평해”라고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는 경우(주로 남의 불행에 고소해하거나 자신의 행운에 뿌듯해 하는 경우가 많다.)도 많다는 걸 떠올려보면 불평등에 관한 인간의 생각들이란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다 자기 경우에 맞춰서 그때그때 적절하게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사용되고 정의되는 것이 아닐까. 예로부터 사슴 가죽에 가로왈(녹피에 가로왈)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이 이야기는 이쯤으로 끝.

 

루소의 역사철학은 맑스의 유물사관이나 헤겔의 관념사관처럼 많이 논의되지 않는다.(루소의 역사에 대한 생각에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 내용을 고려할 때 과분한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듯싶으나 나는 철학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루소의 그것도 철학이라고 해주고 싶다.) 루소 자신도 가설의 역사라고 하고 있을 뿐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 적용하고 있지 않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사유재산제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역사를 가져다 붙인 느낌이 들 정도인데 개인적으로는 그 기원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논문이라고 하기에는 과학적이지 못하고 인간이 가진 그 무엇에 호소하기에는 약하다. 호소력이 부족한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의 이상을 ‘과거’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뒤에 붙은 역자의 ‘해제’ 마지막 부분에도 소개되어 있듯 루소 자신도 이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비교적 젊은 시절의 작품인 이 책을 쓸 당시에는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루쉰이 그랬다. ‘물론 현재에 불만일 수 있다. 하지만 뒤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앞에도 길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이상향으로 상정하고 있는 이 책은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옛날이 좋았지’하고 말아버린다.

루소에게는 자연상태의 인간이 이상적이다. 그런데, 자연상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을 따르고자 해도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자연상태라는 개념도, 자연법이라는 개념도 애매모호하다. ‘자연’이 무엇인가? 루소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 자연상태를 가정했는데 둘의 결론은 전혀 달랐다. 홉스는 인간을 본래 악하다고 봤고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악의 개념조차 없다고 했다. 나는 어느 쪽 말이 더 타당한지 따지는 것처럼 소모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연상태의 인간’이란 각자의 추론에 따라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 왜 자연상태를 가정해야 하는지부터 잘 모르겠다. 루소의 ‘자연상태’란 강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상태다. 루소의 자연상태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온 지구의 환경이 사람이 살기에 좋아야 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난 땅에서 배부르고 평화롭게 잘 살아야 한다. 민족이동의 개념은 당연히 없다.


또 루소는 인간의 본성을 ‘자기애와 연민’으로 보고 있는데, 이 둘이 균형을 이뤄서 자연상태의 인간은 서로서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서 루소는 ‘동물은 이 인간의 본성에서 제외된다.’고 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전혀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또, 인간에게 동족이 다치거나 죽는 것에 대한 혐오감(연민의 근원)만 있을까? 그렇다면 그가 자연상태를 찬양하며 예로 들고 있는 상황, 누군가 나를 쫓아낸다든가, 괴롭힌다든가, 노예로 삼으려 한다든가 하는 상황들은 왜 일어나는가? 루소는 그런 상황들에 대해서도 도망가든가 나를 노예로 삼으려하는 자를 죽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후대의 학생들이 얼마나 편했을까? 그런 상황들이 극단적으로 일어나거나 누적되어 전쟁이나 살육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또 그는 불평등을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과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으로 나누고 전자에 대해서는 기원을 알 수 없다고 하고 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약속과 동의에 의해 생긴다고 하면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불평등이 정말 이렇게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일까? 타고난 불평등이 다른 불평등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없을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낙관적 판단과 이 두 불평등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 한쪽의 기원만 찾고 있는 태도가 아쉽다. 그밖에도 무질서는 법과 함께 생겼다거나 언어와 사회는 섬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루소의 이 책이 그렇게 형편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루소의 생각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것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루소의 인간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소와 볼테르의 대립에 얽혀 있었다는 계급의식이다.

사회화와 문명화는 인간의 노예화와 겁 많은 인간을 낳았다거나, 인간은 촉각과 미각보다는 시각과 청각이 더 발달했다는 지적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통찰은 인간사회를 타락시킨 근원으로 금과 은 대신에 철과 밀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 밖에도 법과 소유권의 설정에서 행정권력의 제도화로 넘어오는 단계에서 부자와 빈자가, 제도화된 행정권력이 합법적권력이 되는 단계에서 강자와 약자가, 합법적 권력이 독단적 권력(전제군주제)이 되는 단계에서 주인과 노예가 생겨났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다시 생각해볼만 하다. 루소는 전제군주제에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선과악의 개념이 없어진다고 했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다는 것이다. 출발지인 자연상태는 순수한 자연인 반면 도착지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다.(따라서 루소에 따르면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루소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이미지는 ‘계몽된 귀족’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전혀 귀족이 아니었다. 그는 진짜 민중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곧 민중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다. 주석에서 발견한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마침 있어서 찾아본 루소에 대한 부분은 루소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유재산에 불평등의 기원을 두고 역성혁명을 피력한 루소의 사상을 접하면서 맑스의 유물사관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연약하고 겁많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주인인 자연상태의 인간에 대한 찬양에서는 니체의 초인이 떠올랐다.

책과 독서에 대한 수많은 말들 중에 나는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식상한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과식이나 폭식, 편식은 좋지 않다. 우리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던가? ‘식도락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는 말에 나는 공감할 수는 없지만 동의할 수는 있다. 또 음식은 같이 먹어야 맛있는 법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의 편식을 막아주고 함께 먹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 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