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오늘날 로렌츠 같은 동물행동학자들은 삶에서 공격성은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것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삶은 아마 불가능했으리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공격성은 동물들이 적절한 간격(공간)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지나친 번식을 방지해 주변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끈다. 수가 늘어나 지나치게 밀집되면 상호작용이 강화되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도 점점 커진다.
2.
영토권의 연구는 이미 동물의 생활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활에 대한 기본개념을 많이 바꾸어 놓고 있다. “새처럼 자유롭다.”는 표현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요약한 말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자신은 사회에 감금되어 있지만 동물들은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토권 연구를 통하여 오히려 그 역이 진실에 가까우며 동물들은 자신의 영토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프로이트에게 동물과 공간과의 관계에 관해 오늘날 밝혀진 지식이 있었더라면, 과연 그가 인간의 진보를 문화적으로 부과된 금기에 의해 억압된 에너지의 승화 덕으로 보았을지 의심스럽다.
3.
진화상의 이 두 가지 압박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유형으로 발달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는 종들간의 경쟁은 같은 동물 중에서 어떤 종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 전체가 걸려 있다. 반면 한 종 내부의 경쟁은 종자를 세련시키고 그 종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종 내부의 경쟁은 생명체의 초기 형태를 고양시키는 데 기여한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현재의 가설들은 두 가지 압박의 영향을 모두 설명해준다. 원래 지상에 거주하던 동물인 인간의 조상들은 종내 경쟁과 환경의 변화에 밀려 지상을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수상(樹上) 생활은 예리한 시각을 요구한 반면 지상 생물에게 필수적인 후각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켰다. 그리하여 인간의 후각은 발달을 멈추고 시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한 중요한 매개체인 후각을 상실한 결과 인간관계에 하나의 변화가 생겼는데 그 때문에 인간은 과밀을 감내하는 능력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이 쥐 같은 코를 가졌더라면 주변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빠짐없이 영원히 얽매이게 되었을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뇌 속의 후각 센터는 시각 센터보다 더 오래되고 원시적이기 때문이다.
4.
후각기관을 사용하는 데에는 미국인들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미국의 공공장소는 탈취제를 과도하게 사용하며 냄새를 억제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냄새가 획일화되고 순화된 곳이다. 이러한 순화로 말미암아 공간의 구별이 없어져 우리 생활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박탈되었다. 또한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훨씬 깊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순화가 기억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5.
실내 공간의 사용에서도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나 방 한가운데서 하기 때문에 방 가장자리는 비워두는 반면 유럽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여 가장자리를 채우는 경향이 있다.
6.
프로이트와 그의 후학들이 관찰했던 바대로 우리 자신의 문화는 통제될 수 있는 것은 강조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7.
나는 사막에서 화살촉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게 냉장고는 이내 길을 잃고 마는 정글과 같다. 그러나 내 아내는 내가 보는 앞에서 숨어 있는 치즈나 먹다 남은 고기를 헤매지 않고 집어낸다.
8.
언어는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는 익숙해 있지만, 그림은 우선 시각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는 즉시 그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고 기대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모욕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9.
적합한 공간사용에 대한 인간의 느낌은 뿌리 깊은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궁극적으로 생존 및 건전한 정신과 직결된다. 공간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정신이상이 되는 것이다. 긴급 상황에서는 반사적인 행동과 생각이 요구되는 행동의 차이가 생사를 판가름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붐비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운전자나 포식자를 피해 다니는 토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멈퍼드의 관찰에 의하면, ‘이방인들에게도 그 도시에 오래 거주한 사람 같은 친근감을 주는’ 이유는 미국 도시의 획일적인 격자 패턴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에 길이 든 미국인들이 다른 패턴을 대하면 흔히들 어쩔 줄 모르며 단순한 도시계획을 따르지 않는 유럽의 수도들도 편치가 않다.
10.
물건들을 어디에 어떻게 정돈하고 보관하느냐 하는 것은 대문화 집단의 표상임은 물론 개개인을 독특하게 만드는 문화의 세세한 변화상까지 드러내는 미시문화적 양식의 기능이다. 목소리의 억양과 음질의 차이가 사람의 음성을 구별해주듯이 물건을 다루는 방식에도 저마다 특징적인 패턴이 있다.
11.
나의 한 세미나에 참석했던 한 영국 학생은 이런 드러나지 않은 패턴들이 충돌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인과의 관계에서 아주 명백하게 긴장을 느끼고 있었는데,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고,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도대체 처신 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의 불평을 분석해보니, 짜증을 유발하는 주된 원인은, 미국인은 이따금 다른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경우의 미묘한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내가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면서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내 룸메이트가 말을 걸어오죠. 그러고는 바로 ‘무슨 일 있어?’하고 물으며 화가 났는지 궁금해하죠. 그러면 나는 정말 화가 나서 싫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
…(중략)…
미국인은 혼자 있고 싶으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말하자면 건축 구조에 의존하여 자신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미국인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과 말하기를 거부하고 ‘침묵을 행사’하는 것은 거부감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태도이며 굉장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확실한 표시이다.
반면 어릴 때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하고 자란 영국인들은 타인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공간을 이용하는 습관을 키우지 못했다. 사실 영국인들은 일련의 벽을 내면화시켰는데 그 벽을 세우는 경우 다른 사람들은 그 점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12.
미국의 중류계층 시민 대부분에게 사적인 공간 및 도시에서 교외로의 탈출구를 마련해준 다음, 우리는 매우 공공적 장치인 전화로 그들 가정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침투해 들어갔다. 누구든지 아무 때라도 우리와 닿을 수 있다.
13.
일본에서 일하는 젊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받은 훈련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아 크게 고생했다. 그들이 교리를 전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삼단논법이 일본에서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생활 패턴과 충돌한 것이다. 자신이 받은 훈련에 충실해서 실패할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벗어나 성공할 것이냐가 그들의 딜레마였다. 내가 1957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가장 성공적인 예수회 선교사는 그룹의 규범을 어기고 일본의 관습과 동반한 자였다. 그는 잠시 삼단논법적 논리를 도입했다가 방법을 바꾸어 요점을 빙 둘러서 가톨릭 신자가 되면 얼마나 멋진 느낌(일본인에게는 중요한)을 갖게 되는지 천천히 설득한 것이다.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그의 가톨릭 동료 선교사들은 그가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 사례를 따라 자신의 규범을 저버리지는 못할 만큼 그들 자신의 문화에 강력히 구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14.
워싱턴 D.C.의 한 호텔 로비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눈에 잘 띄면서도 호젓이 있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통로를 벗어나 1인용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대부분 한 가지 규칙을 따르는데 그것은 거의 생각할 여지조차 없기 때문에 더더욱 확고한 규칙으로서, 말하자면 한 사람이 공공장소에 멈춰 서거나 자리를 잡으면 그 순간 그 주위에는 침범할 수 없는 작은 프라이버시 영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영역의 넓이는 혼잡의 정도나 나이, 성별, 그리고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하는 점과 더불어 전반적인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이 영역에 들어와서 머무는 사람은 예외 없이 침범행위에 해당한다. 사실 특별한 목적이 있더라도 이 영역을 침범하는 낯선 사람은 “실례지만…괜찮습니까?”하고 말을 꺼냄으로써 자신이 침범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내가 텅 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낯선 사람이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몸이 바로 닿을 정도뿐만 아니라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바싹 다가서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육중한 몸체가 내 왼쪽 시야를 가렸다. 로비가 사람들로 붐비기라도 했다면 나도 그의 행동을 이해했겠지만, 텅 빈 로비에서 내 앞에 선 그의 존재는 내 비위를 심히 거슬리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침범이 성가셔서 언짢음을 표시하려는 의도로 내 몸을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행동에 고무되기나 한 듯이 더욱더 다가서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성가심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도 불구하고 내 자리를 포기하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제기랄, 왜 내가 움직여야 해? 내가 여기 먼저 왔으니까 이 친구가 아무리 막무가내라 해도 나를 몰아내게 두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곧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착해서 나를 괴롭히던 사람과 바로 합류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나 몸짓으로 나타나는 태도를 보고 아랍인들임을 알고 나자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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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 사건을 아랍인 동료에게 설명하면서 두 가지 대조적인 패턴이 드러났다. ‘공공’ 장소에서의 프라이버시 영역에 대한 나 자신의 개념과 감정 그 자체가 당장 내 아랍인 친구에게는 이상하고 어리둥절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는 “어쨌든 거긴 공공장소잖아, 안 그래?”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따져나가다 보니 나는 아랍식 사고방식으로는 내가 어떤 지점을 점유했다고 해도 무슨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요컨대 내 자리도 내 몸도 불가침의 존재는 아니었다! 공공장소는 그냥 공공장소인 것이다.
…(중략)…
예컨대 A가 거리 모퉁이에 서 있는데 B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B는 A를 불편하게 해서 옮겨가게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5.
이제 독자들도 다 알았겠지만 아랍인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다른 수준으로 서로 개입되어 있다. 공공장소에서의 프라이버시란 그들에게 낯선 것으로, 예컨대 시장에서의 상거래도 단지 사고 파는 사람들간의 일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는 일이다.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견할 수 있다.
16.
사회학자인 글레이저와 모이니한은 <용광로를 넘어서>라는 흥미진진한 그들의 저서에서 실상 미국의 도시에는 용광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의 연구는 뉴욕 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그 결론은 다른 많은 도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 도시의 주요 소수민족집단은 수세대에 걸쳐 각기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미국의 주택사업이나 도시계획은 이들 민족의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17.
싱크가 발생하는 대로 내버려두면서도 도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책이 있다면, 싱크의 악영향을 상쇄할 만큼 특색 있는 디자인을 도입하되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 지역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는 그 해결책이 아주 단순해서 우리가 도시 재개발이나 교외 확산 정책에서 보게 되는 양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쥐의 밀도를 높이면서도 건강한 종으로 유지시키려면 서로 볼 수 없도록 상자에 넣어 우리를 깨끗이 해주고 충분한 먹이를 주면 된다. 상자는 얼마든지 여러 층으로 쌓아도 되지만, 불행히도 우리 안의 동물들은 초특급 정돈 시스템에 대한 값비싼 대가로 우둔해진다!
18.
겹겹이 세워진 고층 아파트는 보기에는 슬럼가보다 덜 흉하지만 생활하기에는 더 힘들다. 흑인들은 특히 고층 주택에 대한 비난을 토로해왔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백인의 지배와 종족 관계의 실패상을 볼 뿐이다. 흑인들은 이제 백인이 어떻게 흑인 위에 흑인을 높이 겹쳐 쌓는가를 보라고 농담조로 말한다.
19.
소수민족집단을 차치하고도 오늘날 미국 도시들은 실제 모든 면에서 사회적으로 분산적이고 사람들을 격리시켜 서로 소외되도록 만든다. 최근 ‘이웃’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이 맞아 죽기까지 했는데도 전화기조차 드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건은 이러한 소외적 경향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나타내는 충격적인 사례이다.
20.
차는 사람들이 만날만한 공간마저 차지해버리고 공원, 보도 등 모든 곳을 점유한다. 이 증후군으로 인한 또 한 가지 고려할만한 결과는, 사람들이 더 이상 걷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걷고 싶은 사람들도 걸을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무기력해지는데다 서로 격리된다. 사람들이 걸어다닐 때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서로를 알게 되지만 자동차 안에서는 그 반대이다.
21.
속도가 높아짐에 따라 감각의 참여도가 떨어지고 정말로 감각이 박탈된 느낌까지 경험하게 된다. 현대식 미국차를 타면 공간의 운동감각도 없어지는데 운동감각적 공간과 시각적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서 상호보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부가 부드러운 스프링, 쿠션, 타이어, 파워 핸들과 단조로울 정도로 매끈한 도로포장 때문에 지표면에 대한 감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어떤 자동차 회사는 도로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차에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이 가득 찬 모습을 광고로 내걸기까지 했다!
22.
넷째, 쓸모 있고 보기 좋은 옛 건축물들과 동네를 도시 재개발이라는 ‘폭탄’으로부터 지키는 일. 새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오래 된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 도시에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많기도 하고 때로는 몇 채 도는 몇 단지의 집에 불과하기도 한데, 그러한 건축물들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부여하고 우리의 도시풍경을 다양하게 만든다.
23.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등생물은 순화과정을 통해 안전하다거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 비집고 몰려들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서로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두려움이 도주반응을 소생시켜 공간의 필요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두려움에 밀집상태가 가세되면 공포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