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취향 - 문예중앙산문선
강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는 것>

토할 것 같았다. 새빨간 표지에 새파란 띠지. ‘드물게 재미있고 유쾌한 문화잡설’이라는 표지의 부제와 ‘한국일보 화제의 연재물’이라는 띠지의 글은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는 모두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표지의 부제를 ‘드물게 재미없고 불쾌한’이라고 뒤집을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다거나 유쾌해서 웃은 적이 없다는 것뿐이다. 한국일보 연재물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알겠지만 ‘화제의’라는 수사에 ‘인기 있는’이라는 이성적으로 따지면 전혀 상관없는 의미를 무의식중에 갖다 붙인 나는 애먼 새파란 띠지를 노려본다.


350쪽 정도의 분량에 연재물이라고 하니 금방금방 읽히겠지 했던 내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신문의 연재물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나 단편소설집의 경우 읽다보면 어느새 절반 이상 읽은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모두 43개의 글이 실려 있는 그닥 두껍다고 할 수 없는 이 빨간 책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토할 것 같았다. 누구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짧은 소설들의 밀도 때문에 한 번에 읽기가 힘들었다고도 하지만 그 기본이 되는 ‘이야기’가 주는 흥분 때문에 나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이 책에는 책을 손에 붙잡고 완독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없다. 물론 그것은 일주일에 한번 읽어야 소화가 될까 말까한 글들을 다 모아놓은 탓이 크다.



거기다가 제목이 말해주듯 이것들은 ‘나쁜’ 취향이다. 작가는 이 ‘나쁜’이 ‘좋다, 올바르다’의 반대말이 아니라 ‘제 멋대로의’, ‘독단적인’의 의미와 더 잘 어울린다고 쓰고 있다. 나쁜 취향은 결코 친절하지도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다. 평범한 일반인(그러니까 일간지의 독자층이라고 하자.) 중에 여기 소개된 43개의 취향(실제로는 그 이상이다.) 중에서 절반 이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이건 이 책이 의도하는 바이니 존중해줘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여기에 소화불량의 원인을 또 하나 보태자면 이 글을 쓴 사람은 시인이다.(나는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한 번도 강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민망한데다가 고역이기까지 하다. 시인이 선택한 어휘라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 현학적이고 화려한 수사란. 본인은 무겁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글쎄다. 마크 해던의 소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 생각났다. 그 소설에는 자폐아 크리스토퍼가 어떤 문학 작품의 ‘화려한’ 문장을 보면서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통쾌했다. 진보 논쟁이 한창일 때 노무현 대통령이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진보학자들의 말에 대해 ‘아무리 읽어봐도 어려워서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도 일종의 통쾌함이 있었는데 그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정말 ‘악에 받쳐서’ (어지간해서는 다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끝까지 다 읽었고 묘한 후련함과 승리감까지 느끼면서 새벽 3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나에게 굉장한 인상을 남겼다. ‘토할 것 같았다’거나 ‘소화불량’, ‘친절하지도 대중적이지도 않다’ 등의 표현으로 전체적으로 부정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 자체가 ‘문화’의 저변을 넓히는 시도라는 점에서 존중했다. ‘나쁜 취향’이라는 책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비주류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이란 결국 ‘나쁜 취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책은 나에게 창작욕을 일으켰다.(물론 ‘-욕’이 들어가는 것들이 그렇듯 잠깐이었지만.) 대중적인 코드를 맞출 필요도 없으며 대상에 대해 A부터 Z까지 꿰고 있는 전문성은커녕 A만 알고 있어도 연재를 하고 이렇게 책을 낸다면 출판의 자유는 한층 넓어질 것이다. 아마 당신도 같은 제목으로 30개쯤 혹은 그 이상 되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써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분명 좋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장정일쯤 되니까 이런 잡설도 책으로 내주는 구나’하고 생각하며 읽었던 [생각]의 첫 장 ‘아무 뜻도 없어요.’가 생각났다. 물론 연재물인 만큼 그보다는 훨씬 균일한 글이었다. 독자가 모르는 것을 말하고 있는 이 책의 운명은 다루고 있는 내용들처럼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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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선 이를 좋아하기란 쉽다. 잘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어렵지.

 

2.

왠지 난 맹인들 앞에선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3.

살면서 가끔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고 차라리 폭탄처럼 터져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4.

어떤 반응이든지, '난 관심없어'라든가 '나랑 상관없어'하는 태도보다는 훨씬 낫다.

 

5.

한순간은 엄격하고 또렷하며 고집 세 보이지만, 다음 순간 수줍고 부드러우며 연약한 얼굴이 된다.

 

6.

"...(중략)...죄 그 자체가 곧 형벌이지. 내 말 알아듣겠나?"

 

7.

문제는 어떤 일이든 하루하루 되풀이 하다보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한 일을 고백할 때다.

 

8.

내 안 깊은 곳 어딘가에 내가 세상 모든 것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있다. 그 모든 것이란 단지 나무나 풀, 동물뿐 아니라 빌딩과 계단, 바위와 도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말한다. 그곳은 죽음처럼 조용하고 그 누구와도 나눠보지 못한, 아마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장소일 것이다.

 

9.

"최소한 내 관점으로 봐서는 두 사람이 삶을 깊게 탐구하려는 진실한 열망을 갖지 앟는 한 결혼 생활이 잘 풀려가는 것 같더라." 어머니가 무릎 위의 가방을 불안하게 움켜쥐고서 말했다. "외향에 진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결혼이 가장 성공적으로 보였어. 너는 그런 타입이 아니라서 걱정이 되는구나.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난 잘 모르겠다."

 

10.

진심으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단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11.

웬일인지 난 뭔가가 고장났을 때가 좋다. 바퀴가 펑크난다거나, 기차가 멈춰서서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기상 조건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되는 데에는 뭔가가 있다. 지구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그럴 땐 호기심 많고 혼란스럽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아이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그 짧은 동안은 책임질 일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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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차원 - 공간의 인류학,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4 이상의 도서관 50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도시여!>

인류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으로는 두 번째 읽게 된 책이다. 첫 번째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였는데 확실히 읽어볼만한 책이었지만 다소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고 도무지 독후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은 이렇게 독후감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모양이다. 부제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공간의 인류학’

이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노트필기를 해야 했다. ‘프록세믹스’나 ‘싱크’, ‘모노크로닉’과 ‘폴리크로닉’과 같은 낯선 용어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준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프록세믹스’란 인간이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이 책을 한 단어로 줄이라면 아마도 ‘프록세믹스’가 될 것이다. ‘싱크’는 우리가 사용하는 싱크대에서의 그 싱크다. 즉 오물이나 폐기물을 받는 그릇이다. 하지만 홀은 이 말을 ‘행동의 왜곡’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한다. 행동에 있어서 싱크가 나타난다는 것은 집단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병리적 행태가 악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싱크는 주로 과밀에 의해 나타난다. ‘모노크로닉’과 ‘폴리크로닉’은 시간을 다루는 행태를 기준으로 나눈 것인데 모노크로닉하다는 것은 시간을 분절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더 편하고 능률도 좋은 사람들은 모노크로닉한 사람들이다. 반면 폴리크로닉하다는 것은 쉽게 말해 멀티플레이어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별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다. 낯선 용어는 이 밖에도 더 많지만 이 정도로 하고 다음으로 수많은 분류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홀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거리에 따라 나눈다. ‘원격수용체’는 눈과 귀, 코처럼 멀리 있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기관들이다. ‘근접수용체’는 피부나 점막, 근육과 같이 접촉에 의해 감각을 인지할 수 있는 기관들이다. 거리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도 세세한 분류를 한다. 같은 종끼리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의 거리는 생명체를 애워싸는 보이지 않는 거품과 같은 ‘개인적 거리’와 집단을 결속시키는 보이지 않는 끈과 같은 ‘사회적 거리’로 나눈다. 다른 종끼리의 거리는 도주하기 시작하는 거리인 ‘도주거리’, 공격거리와 도주거리가 구분되는 빙둘러진 협소한 지대인 ‘치명적 거리’로 나눈다. 감각과 공간의 관계에 따라 열공간, 촉각공간, 시각공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개인과 집단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따라 영토성을 갖는 ‘고정형태의 공간’, 사람들을 모이게도 할 수 있고(사회구심적 공간-카페 테이블) 떨어뜨리게도 할 수 있는(사회원심적 공간-기차역 대합실) ‘반고정형태의 공간’, 외부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거리를 밀접한 거리-개인적 거리-사회적 거리-공적인 거리로 나눈 ‘비공식적 공간’이 있다.

재밌었던 부분은 책 초반의 동물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부분과 후반의 나라별 차이, 도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중간에 감각기관에 대한 설명은 다소 지루할 면이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공간을 인식하는 나라별 차이였는데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아랍권 사람들을 비교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인들은 미국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혼자 있고 싶다든지 해서가 아니라, 단지 문을 열어두는 것이 무질서하고 어수선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문을 닫는’ 경향이 있다. 독일인과 미국인이 ‘닫힌 문’에 의해 상징적으로 구별된다면 영국인과 미국인은 ‘침묵’이 나타내는 바가 다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미국인에게 침묵은 거부감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태도이며 굉장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찍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는 미국인들과는 달리 공간을 공유하는 문화에서 자라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벽을 내면화시킨 것, 즉 침묵을 사용한다. 프랑스인들은 감각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옥외활동을 즐긴다. 일본인들은 방의 중심부에 물건을 비치하고 중심부가 빈 미국의 방을 황량하게 본다. 아랍인들의 말에는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말이 없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좋아한다. 아랍인들이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사용한다. 이 책에는 이런 문화적 차이가 어떤 오해들을 빗어내며 그들의 삶에서는 어떤 양식으로 나타나는 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침범이란 공간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아랍인들의 기준으로는 이방인과 적은 동의어는 아니지만 아주 밀접한 단어다.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는 말은 아랍인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이다. 가까운 사람(혈족, 동향인, 부족민 등)이면 공간 안으로 들어와도 침범이 아니다.(이 사실은 당연한 것 같지만 당장 자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침범이란 경계선의 문제가 아니라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떨까 궁금해졌다. 다 섞여있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전통적인 한국 사람들의 공간 활용이나 인식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는 턱도 없이 부족해서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홀은 문화가 공간지각을 결정한다고 하며 상호 이해와 도시계획의 중요성(정말 다양한 학문이 상호 협력해야 효과를 낼 수 있는)을 역설한다. 또 한 가지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밀집에 의한 스트레스에는 암만 좋은 것을 먹어봐야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밀집에 의한 스트레스인 만큼 그 원인, 즉 밀집을 제거해야지 당장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좋은 것 찾아 먹어봐야 별 효과가 없다.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몸에 좋다는 건 뭐든 찾아 먹지만 어쩐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 사람들이 빠져나간 명절이나 피서철의 서울에 있어보거나, 지방의 소도시에만 가 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한산함이 주는 여유.

더불어 도무지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울의 난개발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 많아서일까? 경제에 있어서나 문화에 있어서나 한국인들은 과거와는 단절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다 때려 부수고 난 다음에 재개발이니 복원이니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KBS 1라디오의 ‘열린토론’에서 한 패널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세계의 근대화된 도시 중에서 아마 서울이 도시미관상 최악의 도시일 것” 굳이 다른 나라를 가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소리며, 굳이 다른 나라를 가보지 않고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리다.

 

도시는 정말 흥미로운 소재다. 공부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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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오늘날 로렌츠 같은 동물행동학자들은 삶에서 공격성은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것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삶은 아마 불가능했으리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공격성은 동물들이 적절한 간격(공간)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지나친 번식을 방지해 주변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끈다. 수가 늘어나 지나치게 밀집되면 상호작용이 강화되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도 점점 커진다.




2.

영토권의 연구는 이미 동물의 생활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활에 대한 기본개념을 많이 바꾸어 놓고 있다. “새처럼 자유롭다.”는 표현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요약한 말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자신은 사회에 감금되어 있지만 동물들은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토권 연구를 통하여 오히려 그 역이 진실에 가까우며 동물들은 자신의 영토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프로이트에게 동물과 공간과의 관계에 관해 오늘날 밝혀진 지식이 있었더라면, 과연 그가 인간의 진보를 문화적으로 부과된 금기에 의해 억압된 에너지의 승화 덕으로 보았을지 의심스럽다.




3.

진화상의 이 두 가지 압박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유형으로 발달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는 종들간의 경쟁은 같은 동물 중에서 어떤 종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 전체가 걸려 있다. 반면 한 종 내부의 경쟁은 종자를 세련시키고 그 종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종 내부의 경쟁은 생명체의 초기 형태를 고양시키는 데 기여한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현재의 가설들은 두 가지 압박의 영향을 모두 설명해준다. 원래 지상에 거주하던 동물인 인간의 조상들은 종내 경쟁과 환경의 변화에 밀려 지상을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수상(樹上) 생활은 예리한 시각을 요구한 반면 지상 생물에게 필수적인 후각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켰다. 그리하여 인간의 후각은 발달을 멈추고 시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한 중요한 매개체인 후각을 상실한 결과 인간관계에 하나의 변화가 생겼는데 그 때문에 인간은 과밀을 감내하는 능력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이 쥐 같은 코를 가졌더라면 주변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빠짐없이 영원히 얽매이게 되었을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뇌 속의 후각 센터는 시각 센터보다 더 오래되고 원시적이기 때문이다.




4.

후각기관을 사용하는 데에는 미국인들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미국의 공공장소는 탈취제를 과도하게 사용하며 냄새를 억제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냄새가 획일화되고 순화된 곳이다. 이러한 순화로 말미암아 공간의 구별이 없어져 우리 생활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박탈되었다. 또한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훨씬 깊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순화가 기억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5.

실내 공간의 사용에서도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나 방 한가운데서 하기 때문에 방 가장자리는 비워두는 반면 유럽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여 가장자리를 채우는 경향이 있다.




6.

프로이트와 그의 후학들이 관찰했던 바대로 우리 자신의 문화는 통제될 수 있는 것은 강조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7.

나는 사막에서 화살촉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게 냉장고는 이내 길을 잃고 마는 정글과 같다. 그러나 내 아내는 내가 보는 앞에서 숨어 있는 치즈나 먹다 남은 고기를 헤매지 않고 집어낸다.




8.

언어는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는 익숙해 있지만, 그림은 우선 시각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는 즉시 그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고 기대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모욕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9.

적합한 공간사용에 대한 인간의 느낌은 뿌리 깊은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궁극적으로 생존 및 건전한 정신과 직결된다. 공간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정신이상이 되는 것이다. 긴급 상황에서는 반사적인 행동과 생각이 요구되는 행동의 차이가 생사를 판가름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붐비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운전자나 포식자를 피해 다니는 토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멈퍼드의 관찰에 의하면, ‘이방인들에게도 그 도시에 오래 거주한 사람 같은 친근감을 주는’ 이유는 미국 도시의 획일적인 격자 패턴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에 길이 든 미국인들이 다른 패턴을 대하면 흔히들 어쩔 줄 모르며 단순한 도시계획을 따르지 않는 유럽의 수도들도 편치가 않다.




10.

물건들을 어디에 어떻게 정돈하고 보관하느냐 하는 것은 대문화 집단의 표상임은 물론 개개인을 독특하게 만드는 문화의 세세한 변화상까지 드러내는 미시문화적 양식의 기능이다. 목소리의 억양과 음질의 차이가 사람의 음성을 구별해주듯이 물건을 다루는 방식에도 저마다 특징적인 패턴이 있다.




11.

나의 한 세미나에 참석했던 한 영국 학생은 이런 드러나지 않은 패턴들이 충돌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인과의 관계에서 아주 명백하게 긴장을 느끼고 있었는데,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고,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도대체 처신 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의 불평을 분석해보니, 짜증을 유발하는 주된 원인은, 미국인은 이따금 다른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경우의 미묘한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내가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면서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내 룸메이트가 말을 걸어오죠. 그러고는 바로 ‘무슨 일 있어?’하고 물으며 화가 났는지 궁금해하죠. 그러면 나는 정말 화가 나서 싫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

…(중략)…

미국인은 혼자 있고 싶으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말하자면 건축 구조에 의존하여 자신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미국인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과 말하기를 거부하고 ‘침묵을 행사’하는 것은 거부감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태도이며 굉장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확실한 표시이다.

반면 어릴 때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하고 자란 영국인들은 타인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공간을 이용하는 습관을 키우지 못했다. 사실 영국인들은 일련의 벽을 내면화시켰는데 그 벽을 세우는 경우 다른 사람들은 그 점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12.

미국의 중류계층 시민 대부분에게 사적인 공간 및 도시에서 교외로의 탈출구를 마련해준 다음, 우리는 매우 공공적 장치인 전화로 그들 가정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침투해 들어갔다. 누구든지 아무 때라도 우리와 닿을 수 있다.




13.

일본에서 일하는 젊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받은 훈련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아 크게 고생했다. 그들이 교리를 전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삼단논법이 일본에서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생활 패턴과 충돌한 것이다. 자신이 받은 훈련에 충실해서 실패할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벗어나 성공할 것이냐가 그들의 딜레마였다. 내가 1957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가장 성공적인 예수회 선교사는 그룹의 규범을 어기고 일본의 관습과 동반한 자였다. 그는 잠시 삼단논법적 논리를 도입했다가 방법을 바꾸어 요점을 빙 둘러서 가톨릭 신자가 되면 얼마나 멋진 느낌(일본인에게는 중요한)을 갖게 되는지 천천히 설득한 것이다.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그의 가톨릭 동료 선교사들은 그가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 사례를 따라 자신의 규범을 저버리지는 못할 만큼 그들 자신의 문화에 강력히 구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14.

워싱턴 D.C.의 한 호텔 로비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눈에 잘 띄면서도 호젓이 있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통로를 벗어나 1인용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대부분 한 가지 규칙을 따르는데 그것은 거의 생각할 여지조차 없기 때문에 더더욱 확고한 규칙으로서, 말하자면 한 사람이 공공장소에 멈춰 서거나 자리를 잡으면 그 순간 그 주위에는 침범할 수 없는 작은 프라이버시 영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영역의 넓이는 혼잡의 정도나 나이, 성별, 그리고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하는 점과 더불어 전반적인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이 영역에 들어와서 머무는 사람은 예외 없이 침범행위에 해당한다. 사실 특별한 목적이 있더라도 이 영역을 침범하는 낯선 사람은 “실례지만…괜찮습니까?”하고 말을 꺼냄으로써 자신이 침범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내가 텅 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낯선 사람이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몸이 바로 닿을 정도뿐만 아니라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바싹 다가서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육중한 몸체가 내 왼쪽 시야를 가렸다. 로비가 사람들로 붐비기라도 했다면 나도 그의 행동을 이해했겠지만, 텅 빈 로비에서 내 앞에 선 그의 존재는 내 비위를 심히 거슬리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침범이 성가셔서 언짢음을 표시하려는 의도로 내 몸을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행동에 고무되기나 한 듯이 더욱더 다가서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성가심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도 불구하고 내 자리를 포기하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제기랄, 왜 내가 움직여야 해? 내가 여기 먼저 왔으니까 이 친구가 아무리 막무가내라 해도 나를 몰아내게 두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곧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착해서 나를 괴롭히던 사람과 바로 합류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나 몸짓으로 나타나는 태도를 보고 아랍인들임을 알고 나자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략)…

나중에 이 사건을 아랍인 동료에게 설명하면서 두 가지 대조적인 패턴이 드러났다. ‘공공’ 장소에서의 프라이버시 영역에 대한 나 자신의 개념과 감정 그 자체가 당장 내 아랍인 친구에게는 이상하고 어리둥절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는 “어쨌든 거긴 공공장소잖아, 안 그래?”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따져나가다 보니 나는 아랍식 사고방식으로는 내가 어떤 지점을 점유했다고 해도 무슨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요컨대 내 자리도 내 몸도 불가침의 존재는 아니었다! 공공장소는 그냥 공공장소인 것이다.

…(중략)…

예컨대 A가 거리 모퉁이에 서 있는데 B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B는 A를 불편하게 해서 옮겨가게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5.

이제 독자들도 다 알았겠지만 아랍인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다른 수준으로 서로 개입되어 있다. 공공장소에서의 프라이버시란 그들에게 낯선 것으로, 예컨대 시장에서의 상거래도 단지 사고 파는 사람들간의 일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는 일이다.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견할 수 있다.




16.

사회학자인 글레이저와 모이니한은 <용광로를 넘어서>라는 흥미진진한 그들의 저서에서 실상 미국의 도시에는 용광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의 연구는 뉴욕 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그 결론은 다른 많은 도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 도시의 주요 소수민족집단은 수세대에 걸쳐 각기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미국의 주택사업이나 도시계획은 이들 민족의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17.

싱크가 발생하는 대로 내버려두면서도 도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책이 있다면, 싱크의 악영향을 상쇄할 만큼 특색 있는 디자인을 도입하되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 지역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는 그 해결책이 아주 단순해서 우리가 도시 재개발이나 교외 확산 정책에서 보게 되는 양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쥐의 밀도를 높이면서도 건강한 종으로 유지시키려면 서로 볼 수 없도록 상자에 넣어 우리를 깨끗이 해주고 충분한 먹이를 주면 된다. 상자는 얼마든지 여러 층으로 쌓아도 되지만, 불행히도 우리 안의 동물들은 초특급 정돈 시스템에 대한 값비싼 대가로 우둔해진다!




18.

겹겹이 세워진 고층 아파트는 보기에는 슬럼가보다 덜 흉하지만 생활하기에는 더 힘들다. 흑인들은 특히 고층 주택에 대한 비난을 토로해왔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백인의 지배와 종족 관계의 실패상을 볼 뿐이다. 흑인들은 이제 백인이 어떻게 흑인 위에 흑인을 높이 겹쳐 쌓는가를 보라고 농담조로 말한다.




19.

소수민족집단을 차치하고도 오늘날 미국 도시들은 실제 모든 면에서 사회적으로 분산적이고 사람들을 격리시켜 서로 소외되도록 만든다. 최근 ‘이웃’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이 맞아 죽기까지 했는데도 전화기조차 드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건은 이러한 소외적 경향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나타내는 충격적인 사례이다.




20.

차는 사람들이 만날만한 공간마저 차지해버리고 공원, 보도 등 모든 곳을 점유한다. 이 증후군으로 인한 또 한 가지 고려할만한 결과는, 사람들이 더 이상 걷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걷고 싶은 사람들도 걸을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무기력해지는데다 서로 격리된다. 사람들이 걸어다닐 때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서로를 알게 되지만 자동차 안에서는 그 반대이다.




21.

속도가 높아짐에 따라 감각의 참여도가 떨어지고 정말로 감각이 박탈된 느낌까지 경험하게 된다. 현대식 미국차를 타면 공간의 운동감각도 없어지는데 운동감각적 공간과 시각적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서 상호보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부가 부드러운 스프링, 쿠션, 타이어, 파워 핸들과 단조로울 정도로 매끈한 도로포장 때문에 지표면에 대한 감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어떤 자동차 회사는 도로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차에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이 가득 찬 모습을 광고로 내걸기까지 했다!




22.

넷째, 쓸모 있고 보기 좋은 옛 건축물들과 동네를 도시 재개발이라는 ‘폭탄’으로부터 지키는 일. 새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오래 된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 도시에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많기도 하고 때로는 몇 채 도는 몇 단지의 집에 불과하기도 한데, 그러한 건축물들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부여하고 우리의 도시풍경을 다양하게 만든다.




23.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등생물은 순화과정을 통해 안전하다거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 비집고 몰려들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서로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두려움이 도주반응을 소생시켜 공간의 필요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두려움에 밀집상태가 가세되면 공포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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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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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개념이야>




문제는 개념의 혼란이다. 한국의 경제문제에 대한 대담집인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개념에 대한 환상과 혼란은 그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경제문제 또한 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 역시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교육문제로 귀결되는 건가? 내가 장하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한겨레21>에 실린 유현산 기자의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장 교수가 직접 쓴 글은 아니었지만 그 주장의 신선함은 간접적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고 아마도 ‘사다리 걷어차기’나 ‘나쁜 사마리아인’같은 유명한 책들도 읽게 될 것 같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1부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고 2부는 후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1부는 과거, 2부는 미래인 셈이다. 과거와 미래가 오늘에 이어져 있듯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현재를 생각하게 된다. 워낙 경제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고 있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옮겨 적은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서도 각각의 장별로 박정희 개발독재, 재벌, 주주자본주의, 노동, 국가의 역할 등등 많은 주제들을 다루는데다가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대담의 사회 역할을 맡은 이종태 기자가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있어 형식적으로는 보기 좋게 주제별로 묶인 셈이지만 읽다보면 이 모든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적으로 바람이 불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금융자본을 위한 이념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핵심 가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저투자, 저성장, 고용불안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또 지금 한국의 자본주의는 수많은 경제 주체 중에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주주자본주의다. 이는 경제민주화에는 어느 정도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기업들이 위험 부담이 있는 투자를 꺼리게 되면서 장기적인 계획이 불가능하게 되고 대외의존도가 심화되는 특징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 바람이 부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개념은 예전에 촘스키가 이렇게 정의한 것이 생각난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란 당신이 자고 일어났는데 당신의 일자리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유연성’이라는 말에 붙어있는 긍정적 뉘앙스로 고용불안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덮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부정적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노동시장 유연성에도 수량적 유연성과 기능적 유연성이 있으며 기능적 유연성은 해고하기보다는 재교육해서 다른 일을 하게 하는 개념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멀티플레이어’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기능적 유연성은 이 책에서 ‘노동자 재교육’이라는 복지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기능적 유연성이 그렇게 한 가지 일을 하다가 기계화가 되거나 문제가 생기면 재교육을 시켜 다른 직무를 맡게 하고 하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역시 고용이 불안해지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도, 이들의 주장처럼 한국에서는 노동시장 유연성이 수량적 유연성의 개념으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밖에 노동자를 해고하면 인건비가 삭감되므로 주가가 상승한다는 사실은 경제에 무지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정희는 분명히 비민주적이었지만 동시에 비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시장을 왜곡시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우리는 박정희 시절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과관계를 잘못 짚는 실수를 하였다는(박정희가 시장주의와 거리를 두었고 그는 비민주적이었으므로 시장주의를 따르는 것이 민주적인 것인 줄 아는 착각과 고집) 주장 역시 조금만 알면 굉장히 상식적인 주장인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만큼 나 역시 그런 개념의 혼란에 빠져있다는 증거이리라. 또 한국은 아직 국가가 할 일이 무척 많은 나라인데도 ‘관치’라는 말은 욕이 되어버렸고, 시장은 ‘윤리’나 중세의 종교 역할을 할 정도로 절대시되어 버린 상황, 쉽게 대표 보수 언론 조선일보만 봐도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장실패’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처럼 굴고 있다. 우파나 좌파나 시장을 하나의 윤리처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한다. 국가가 국민에 대한 신인도보다 대외 신인도를 더 중요시한다는 비판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나는 ‘장하준과 정승일 두 사람이 서로 논쟁을 하며 한국경제를 이야기하겠구나.’하고 생각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 두 사람은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의견 일치를 보인다. 세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한국경제를 논한다는 면에서 분명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지만, 정작 이들이 비판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빠져있어 살짝 아쉬웠다. 경제문제는 사형제 찬성과 반대, 무신론자와 기독교신자의 논쟁처럼 합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충분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문제고 또 지금까지 인류는 그렇게 해왔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성․반대론자들은 어째서 끼리끼리 모이고, 두꺼운 책(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지구는 평평하다, 세계화의 덫 등등)으로 각자의 이야기만 하고 있을까? 나는 ‘격정대화’라는 표지의 글귀에서 ‘드디어 붙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책은 그런 대결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부분에서 말한 노․사․정의 ‘사회적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정승일 교수가 한 다음의 말을 읽으면 그 누군들 우울해지지 않겠는가.

<지금 시장논리가 우리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모든 경제 주체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에 따라 한국 사회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본은 주주에 대한 책임만 이야기하면서 공공성 따윈 제쳐둔 지 오래고, 정부도 말로만 공공성을 떠들지 실제로는 글로벌 시장에 대한 책임만 지려고 하는 식이죠. 더욱이 노동자들도 말로는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규직 간은 물론이고,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연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제는 개념의 혼란이다. 이 책 곳곳에 드러나고 ‘이 책을 마치며’에서 정승일 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듯, 태생적으로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시장의 자유, 사유재산 옹호)를 우리는 ‘민주주의=자유 민주주의’로 알고 그 어색한 동거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다. 또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인 줄 안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논하기조차 부족한, 뭔가 ‘기본’이 안 되어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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