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차원 - 공간의 인류학,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4 이상의 도서관 50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도시여!>

인류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으로는 두 번째 읽게 된 책이다. 첫 번째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였는데 확실히 읽어볼만한 책이었지만 다소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고 도무지 독후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은 이렇게 독후감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모양이다. 부제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공간의 인류학’

이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노트필기를 해야 했다. ‘프록세믹스’나 ‘싱크’, ‘모노크로닉’과 ‘폴리크로닉’과 같은 낯선 용어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준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프록세믹스’란 인간이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이 책을 한 단어로 줄이라면 아마도 ‘프록세믹스’가 될 것이다. ‘싱크’는 우리가 사용하는 싱크대에서의 그 싱크다. 즉 오물이나 폐기물을 받는 그릇이다. 하지만 홀은 이 말을 ‘행동의 왜곡’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한다. 행동에 있어서 싱크가 나타난다는 것은 집단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병리적 행태가 악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싱크는 주로 과밀에 의해 나타난다. ‘모노크로닉’과 ‘폴리크로닉’은 시간을 다루는 행태를 기준으로 나눈 것인데 모노크로닉하다는 것은 시간을 분절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더 편하고 능률도 좋은 사람들은 모노크로닉한 사람들이다. 반면 폴리크로닉하다는 것은 쉽게 말해 멀티플레이어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별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다. 낯선 용어는 이 밖에도 더 많지만 이 정도로 하고 다음으로 수많은 분류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홀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거리에 따라 나눈다. ‘원격수용체’는 눈과 귀, 코처럼 멀리 있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기관들이다. ‘근접수용체’는 피부나 점막, 근육과 같이 접촉에 의해 감각을 인지할 수 있는 기관들이다. 거리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도 세세한 분류를 한다. 같은 종끼리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의 거리는 생명체를 애워싸는 보이지 않는 거품과 같은 ‘개인적 거리’와 집단을 결속시키는 보이지 않는 끈과 같은 ‘사회적 거리’로 나눈다. 다른 종끼리의 거리는 도주하기 시작하는 거리인 ‘도주거리’, 공격거리와 도주거리가 구분되는 빙둘러진 협소한 지대인 ‘치명적 거리’로 나눈다. 감각과 공간의 관계에 따라 열공간, 촉각공간, 시각공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개인과 집단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따라 영토성을 갖는 ‘고정형태의 공간’, 사람들을 모이게도 할 수 있고(사회구심적 공간-카페 테이블) 떨어뜨리게도 할 수 있는(사회원심적 공간-기차역 대합실) ‘반고정형태의 공간’, 외부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거리를 밀접한 거리-개인적 거리-사회적 거리-공적인 거리로 나눈 ‘비공식적 공간’이 있다.

재밌었던 부분은 책 초반의 동물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부분과 후반의 나라별 차이, 도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중간에 감각기관에 대한 설명은 다소 지루할 면이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공간을 인식하는 나라별 차이였는데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아랍권 사람들을 비교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인들은 미국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혼자 있고 싶다든지 해서가 아니라, 단지 문을 열어두는 것이 무질서하고 어수선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문을 닫는’ 경향이 있다. 독일인과 미국인이 ‘닫힌 문’에 의해 상징적으로 구별된다면 영국인과 미국인은 ‘침묵’이 나타내는 바가 다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미국인에게 침묵은 거부감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태도이며 굉장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찍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는 미국인들과는 달리 공간을 공유하는 문화에서 자라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벽을 내면화시킨 것, 즉 침묵을 사용한다. 프랑스인들은 감각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옥외활동을 즐긴다. 일본인들은 방의 중심부에 물건을 비치하고 중심부가 빈 미국의 방을 황량하게 본다. 아랍인들의 말에는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말이 없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좋아한다. 아랍인들이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사용한다. 이 책에는 이런 문화적 차이가 어떤 오해들을 빗어내며 그들의 삶에서는 어떤 양식으로 나타나는 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침범이란 공간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아랍인들의 기준으로는 이방인과 적은 동의어는 아니지만 아주 밀접한 단어다.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는 말은 아랍인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이다. 가까운 사람(혈족, 동향인, 부족민 등)이면 공간 안으로 들어와도 침범이 아니다.(이 사실은 당연한 것 같지만 당장 자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침범이란 경계선의 문제가 아니라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떨까 궁금해졌다. 다 섞여있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전통적인 한국 사람들의 공간 활용이나 인식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는 턱도 없이 부족해서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홀은 문화가 공간지각을 결정한다고 하며 상호 이해와 도시계획의 중요성(정말 다양한 학문이 상호 협력해야 효과를 낼 수 있는)을 역설한다. 또 한 가지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밀집에 의한 스트레스에는 암만 좋은 것을 먹어봐야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밀집에 의한 스트레스인 만큼 그 원인, 즉 밀집을 제거해야지 당장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좋은 것 찾아 먹어봐야 별 효과가 없다.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몸에 좋다는 건 뭐든 찾아 먹지만 어쩐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 사람들이 빠져나간 명절이나 피서철의 서울에 있어보거나, 지방의 소도시에만 가 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한산함이 주는 여유.

더불어 도무지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울의 난개발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 많아서일까? 경제에 있어서나 문화에 있어서나 한국인들은 과거와는 단절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다 때려 부수고 난 다음에 재개발이니 복원이니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KBS 1라디오의 ‘열린토론’에서 한 패널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세계의 근대화된 도시 중에서 아마 서울이 도시미관상 최악의 도시일 것” 굳이 다른 나라를 가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소리며, 굳이 다른 나라를 가보지 않고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리다.

 

도시는 정말 흥미로운 소재다. 공부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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