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위에 대한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는 후세에 더욱 정교해져서 동아시아 전역에 확대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한양의 서쪽에는 감옥과 처형장 등 형벌 및 죽음과 관련된 기관을 배치하였다. 가령 한양의 서쪽에 있던 ‘고태골’이라는 곳은 처형장이었다. 그래서 “고태골로 간다”라는 말은 죽음을 의미하였고, 줄여서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라는 등의 속어가 이 지역으로부터 유래했다.







2.

이때 주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잔혹한 폭군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주는 인질로 도성에 와 있던 주문왕의 아들 백읍고를 끓는 물에 넣어 삶아 죽인 뒤 그 고기로 장조림을 만들어 주문왕에게 보냈다. 주문왕이 정녕 성인이라면 그것이 자식의 살인 것을 알고 안 먹을 것이니 죽여버리고, 만일 모른 채 먹는다면 평범한 인간이니까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주문왕에게 자식의 고기를 먹임으로써 그의 성인됨이 거짓임을 폭로하는 술책이기도 했다. 아들의 고기를 먹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고 먹는다면 그 명성에 먹칠을 하게 만드는 교묘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중략)…

마침내 주문왕이 고기를 먹자, 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제 아들을 잡아먹는 성인도 있다더냐. 도대체 어떤 놈이 희창을 성인이라고 했더란 말이냐, 하하.”

주는 통쾌해하며 주문왕의 명성을 무너뜨린 데 만족해서 그를 풀어주었다. 성인으로서의 정당성을 잃은 주문왕은 더 이상 결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실 주문왕은 고기가 자식의 살인 것을 알면서도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먹은 것이었다. 이러한 주문왕의 행동은 훗날 오히려 그의 비범함과 명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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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윤리란 궁극적으로는 희극적인 게 아닐까, 그런 깨달음만 얻었다. 결코 진지하게 표현되어질 수 없는, 쓴웃음 한 번 웃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코미디 - 그것이 모든 비윤리적인 사태의 형상인 것 같다는 게 <강변부인>을 쓰면서 새롭게 터득한 명제라고나 할까.




2.

1970년대란 나에게는 박정희 대 김지하의 전쟁 기간으로 정리되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내 생각으로는 모두 그 두 진영의 어느 한쪽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그 두 진영에 동시에 속해 있었다. 1970년대는 참으로 처절한 갈등의 시대였고 그래서 위대한 시대였다.




-‘작가의 말’ 중에서




1.

‘자기 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성곽에서 대기는 연초록빛에 함뿍 물들어 아른대고 그 사이로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을 불러일으켜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 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 지하실에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새없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생명연습’ 중에서







1.

“빨갱이 시체 구경도 한 이태 만에 하는군.”

어느 영감이 그렇게 말하며 침을 탁 뱉더니 돌아서서 갔다. 몇 사람이 그 뒤를 이어 역시 땅에 침을 뱉고 가버렸다. 나도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땅바닥에 침을 뱉고 살그머니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내가 몸을 돌렸을 때 두어 발짝 저편에 벽돌이 쌓여 있는 더미의 강렬한 색깔이 나의 눈을 찔렀다. 엉뚱하게도 나는 거기에서야 비로소 무시무시한 의지를 보는 듯싶었다. 적갈색과 자주색이 엉켜서 꺼끌꺼끌한 촉감의 피부를 가진 괴물이, 밤중에 한 남자가 몸을 비틀며 또는 고통을 목구멍으로 토하며 죽어가는 것을 바로 곁에서 묵묵히 팔짱을 끼고 보고 있다가 그 남자가 드디어 추잡한 시체가 되고 그리고 아침이 와서 시체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나는 모든 걸 다 보았지, 하며 구경꾼들 뒤에서 만족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2.

한숨이 나오도록 유쾌했다.




3.

아아, 모든 것이 항상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 할 때,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훨씬 앞서 맛보는 섭섭함. 하기야 그것이 ‘자라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乾)’ 중에서







1.

황혼과 해풍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누구나 고독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중에서







1.

누구나 멋있는 옷을 입으면 꼿꼿이 걸어가게 되는 법이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유니폼만 믿고 으스댄다.




2.

정직해보고 싶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세상이다, 라는 생각도 퍽 흔한 생각이지만,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3.

그래서 나는, 너처럼 돈 자랑하는 놈들 보기 싫으니까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공화국이나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쏘아댄다. 그러면 그 녀석은, 야옹, 하고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고 나서 너처럼 가난한 게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듯이 까부는 놈 보기 싫으니까 무지무지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응수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되어서는 안 되리라. 팽창되어버린 감정의 의사는 살인적이다.




4.

망할 놈의 영화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압박하고 있다. 배우들 중에 자기가 닮은 배우가 있으면 자기도 미인이라고 생각해버린다. 아무리 못생긴 경우에도 말이다. 배우들 중에 자기가 닮은 배우가 없으면 자기는 미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린다. 그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이쁠 경우에도 말이다. 그러다가 마침 자기와 닮은 배우가 하나 스크린에 나타나면 그제야, 아 나도 미인이라고 기뻐한다. 사람들을 영화의 압박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도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중에서







1.

돈이 감촉을 갖고 있다는 건 기가 막힐 일이다. 호주머니 속에 별의별 게 다 들어 있는 경우에도 손은 콧종이와 오랫동안 넣고 다니어서 해진 종잇조각과 돈을 잘 구별해낸다. 그건 손의 신경이 예민해서가 아니라 분명히 돈에 감촉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 손을 만져본다. 그러면 손은 부끄러운 듯이 홍당무가 되면서 가늘게 떤다. 돈이 슬그머니 손을 집적거려본다. 손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우선 옷깃을 여미고 도사려 보인다. 싫으면 관둬라, 돈이 배짱을 내민다. 손이 주춤거린다. 그러다가 발작적으로 부들부들 떨며 돈을 부둥켜안아버린다. 돈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슬슬 쓰다듬어준다. 그러다가 앗차, 하는 사이에 돈은 사라지고 손은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쥐고 쩔쩔매고 있다.




-‘싸게 사들이기’ 중에서







1.

그는 다 그려진 아톰X군의 얼굴을 다시 손가락 끝에 술을 찍어서, 지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톰X군. 어떻게 군의 힘으로 적진을 뚫고 나오기 부탁한다. 이제 난……힘이 없단 말야. 나와 헤어지더라도… 여보게, 우주의 광대하고,” 그러면서 그는 양쪽 팔을 넓게 벌렸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 있게.”




2.

그는 두 팔로 아내의 상반신을 껴안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도 아내를 때리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무서워져서 그는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있는 자기의 팔에 힘을 주었다.




-‘차나 한잔’ 중에서







1.

속엔 들놀이 초대장을 넣고 겉에 사원들의 이름을 각각 쓴 하얀 사각봉투를 봉투에 적힌 이름에 따라서 나누어주며 사무실의 책상들 사이를 요리조리 꿰어다닌 것은 야간 여자상업중학교를 다니는 단발머리를 한 사환 계집애였는데 그애는 무슨 착각에서인지 시장개척과의 말단 자리를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불안스럽게 차지하고 앉아있는 맹상진군에게만은 그 사각봉투를 주지 않았다.

…(중략)…

잠시 후에 그 애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빈손.

그 빈손이 사무실의 구석지에 있는 캐비닛 쪽으로 한들거리며 가더니 캐비닛 곁의 둥근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한 말들이 주전자를 부둥켜안고 컵에 물을 따르었다. 그리고 꼴깍 마셨다.

…(중략)…

맹군은 혹시나 자기가 잘못 안 게 아닌가 하고 자기의 책상 위를 찬찬히 살펴봤다. 하얀 사각봉투는 없었다. 그애가 잘못 던진 건 아닌가. 그래서 자기의 책상과 곁에 앉아 있는 이군의 책상 틈바귀를 살펴봤다. 없었다. 일어서서 의자를 집어들어 비켜 놓고 의자 밑을 살펴봤다. 없었다. 심지어 책상 밑, 거의 하루 종일 가련한 자기의 다리가 햇빛 한 움큼도 쐬어보지 못하고 처박혀 있는 곳의 바로 곁에 놓여 있는 대나무로 엮은 쓰레기 바구니 속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없었다. 책상서랍을 모두 열어보았고 양복의 호주머니도 다 뒤져보았다. 그러나 쓰봉의 허리끈 밑에 도장을 넣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은 호주머니가 있다는 것만 새삼스럽게 발견했을 뿐, 그 저주할 사각봉투는 아무 데도 없었다.




2.

그렇지만 사람이란 더구나 여자들이란 자주 오해를 하는 동물이다. 동물 중에서도 가장 흔히 가장 나쁜 오해를 하는 동물이다.

…(중략)…

그렇지, 언젠가 경리과에 가서 가불을 청하고 있을 때, 에잇 그놈의 가불이란 제 돈에서 받아먹으면서도 고개를 고개대로 숙여야 하는 치사한 것이다.




-‘들놀이’ 중에서







1.

염라대왕과 만나서 싸울 수 있는 것이, 우리 할머니라면 가능했다.




-‘염소는 힘이 세다’ 중에서







1.

무대에서는 텔레비전에서 본 가수들이 무식의 악취를 풍기며 슬픈 노래도 백치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부르고 있고, 개그맨들은 어젯밤과 똑같은 대사를 똑같은 표정으로 씨부렁거리고 있다. 운동 부족과 영양 과다로 비만증에 걸려 있는 사내들은 넥타이 매듭과 허리띠를 헐겁게 풀어놓고 헐떡이며 맥주를 들이켜고 나서 한 손으로는 옆에 붙어앉아 있는 호스티스의 허리를, 한 손으로는 자기의 튀어나온 배를 슬슬 어루만지고 있다.




2.

남녀관계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야. 남자끼리의 관계만 사상적 관계지. 부자와 가난뱅이도 같은 취미로써 친구로 지내거든. 말 잘 했다. 내가 증오하는 것은 너희 남자들 그 경제구조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상구조.




3.

물론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그 이전의 나를……그리하여 나는 무(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나는 안다. 어느 때가 돼야만 이건 나라고 할 수 잇을 것인가! 그건 꿈속의 꿈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전의 나로부터 멀어져감으로써 아내 쪽으로 가까워지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떠내려가도 가까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

육지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자는 잠시 얕은 바다에 뛰어들면 되지만, 되돌아가고 싶은 육지도 없이 바다의 부력에만 존재를 맡기고 떠내려가는 자가 변화를 시도하려면 물 속 깊이 빠져버리는 수밖에 없다.




5.

가는 동안 나는 팔짱을 껴주지 않는 여자를 바싹 곁에서 느껴야 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이따금 그 여자의 팔과 부딪치곤 하는 내 왼팔이 어깨에서 손끝까지 마비된 듯 무거웠다.




-‘서울의 달빛 0章’ 중에서







1.

“그러니까 잘못된 거리니까. 자식 교육을 부모들의 돈벌이 경쟁에다가 맡겨버리면 그 경쟁에서 남아날 부모가 몇이나 되겠어.…(중략)…”

…(중략)…

“그래요, 전 바보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 얘기 그만둬요. 어쨌든 당신하구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있는 순간은 즐거워요.”

당신하구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있는 순간은 즐거워요. 살림살이에 관한 이야기밖에 하지 못하는 아내의 입에서 뜻밖에도 연애중인 처녀의 입에서나 들을 것 같은 말을 듣고 보니 정한은 슬그머니 슬퍼졌다.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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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은 왜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지 항상 물어보는 아이들의 질문을 언급하며, 예술문화 비평가인 존 버거는 그런 불만을 단 하나의 의문으로 요약했다. “왜 이 동물들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못한가?” 버거의 답변은 그가 19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동물 주변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중심에서 동물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공공 동물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은 일상생활에서 동물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동물을 만나고 관찰하고 구경하러 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런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곳이다.”




2.

바라건대 분명히 밝혀졌으면 하는 점은, 모아 놓은 동물들이 우리의 시선에 보답해 주기를 얼마나 많이 바라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시선을 피할 때 얼마나 많이 실망하느냐와 상관없이, 동물공원을 든든히 받쳐주는 뼈대가 무너져 내리는 시점은 정확하게 그들이 우리와 ‘마주 볼’ 때라는 사실이다. 결국 동물이 우리와 마주보며 우리와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듯할 때보다 동물공원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중략)…

이 강요된 ‘침묵’이 아마 현대 동물원을 규정짓는 특징일 것이다. 만일 동물 한두 마리가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가령 여태까지 잠잠하던 고릴라나 언제나 사랑스럽던 침팬지가 사육사를 맹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대중 앞에서 자신은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항상 그러한 존재는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면, 그 동물은 신속하게 다시 침묵하도록 제재를 받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렇게 되는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혼자서 혹은 아이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가서 야생동물을 구경한다. 그리고 이런 동물원은 다른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보인다.




3.

나머지 새끼 세 마리도 곧 잡혔다. 그 중 하나는 자기 코를 앞다리 사이로 밀어 넣더니 뒷다리에다 묶어서 ‘몹시 힘들게 숨을 쉬면서 땅바닥에 커다란 자루처럼 누워 있더니’ 질식해 죽었다.




4.

분명한 사실은, 해외로 진출한 유럽인들의 활동을 고발하려 한 쇼는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이다. 신빙성을 상당히 강조하면서, 엄격하게 통제된 쇼의 환경 속에서 진행된 전 세계 토착 종족들의 전시를 통해서, 독일과 기타 유럽 국가들의 주요 도시 다수 대중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소유물인 ‘원주민들’과의 직접적인 체험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들 쇼는 식민지에 들이는 노력이 자기네 땅을 점유당한 토착민들 입장에서나 그런 땅을 점령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나 모두 유리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중략)…

인류학자들과 해부학자들의 경우 쇼를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만 여겼다. 그래서 어떤 방식의 연구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5.

그렇다고 이것이 사람 쇼의 마지막 장면이 된 것은 아니다. 다른 모습을 띄고 있긴 하지만 이들 쇼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이들 쇼를 닮은 모습들이 토착 종족들에 대한 20세기 말의 다큐멘터리나 오늘날 미국 텔레비전의 낮 시간대 토크쇼에 나오는 ‘기괴한 쇼(freak show)’에서 보인다.




6.

빨간 피터가 말하는 요점은 인간들이 말하는 ‘자유’는(그가 든 예를 따르자면 공중그네 곡예사들이 공중을 떠다니는 동작) 원숭이 시절 그가 알던 자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단지 자유에 대한 매우 구속적인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 사회에서 진정한 자유는 있을 수 없고 ‘트인 느낌’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짧고 갑갑한 모방이나 연기가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7.

놀랍게도 빨리 하겐베크의 공원은 낙원에서 방주로 변했다. 야생상태에서는 사방으로 포위되었던 동물들이, 세상 동물들 최고의 친구이자 마지막 희망이 된 너그러운 노인의 손에서 도피처를 찾게 된 것이다.

…(중략)…

후에 거의 모든 동물원이 받아들인 방주의 비유는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동물원이 존재하는 데 상당한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8.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겐베크에 대해 듣다가 사람 쇼 이야기를 하면 깜짝 놀라고 마는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렇게 물어본다. “당신 이야기는 그가 실제로 사람을 동물 전시하듯 동물원에서 전시했다는 건가요?” 나는 대답하기를, 단연코 하겐베크가 사람을 동물처럼 전시하지는 않았다고, 그는 아주 분명히 사람을 사람으로 전시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미 주장했듯이 이들 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었다. 첫째, 관람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회사가 주장하는 대로, 전시된 사람들이 ‘진짜’ 그대로라는 확신을 가져야 했다. 둘째, 전시된 사람들이 자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열등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했다. 즉 ‘원주민들’은 그 자연스러움이나 아름다움 때문에 존중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문화적 업적 면에서 볼 때 유럽인들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9.

감금 상태의 고릴라는 다른 모든 이유보다 우울증과 외로움 때문에 죽는다는 당대의 일반적인 평가에 따라 이 장교는 고릴라에게 두 소년을 유럽까지 딸려보내 고릴라가 죽거나 팔릴 때까지 함께 살도록 한 것 같다. 이런 조치는 장교에게는 틀림없이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 일이었을 테고, 하겐베크에게도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며, 아마 두 아이들에게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이치와는 별도로 이 사진은 독일어로 된 제목 때문에 더욱 증폭되는 아주 불편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뜻을 풀이하면 ‘오른편에 예언자, 왼편에 예언자, 가운데의 속물’이다.

1774년 괴테가 인상학자 요한 라바터와 교육 개혁가인 요한 베르나르트 바제도 사이에 앉아서 하게 된 저녁 식사를 기념하며 쓴 짧고 해학적인 시에서 따온 이 제목은, 해학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사진에 경솔함만 더해주었다. 식사에 대한 이야기에 다르면, 라바터와 바제도가 자신들의 여러 놀라운 아이디어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동안 젊은 괴테는 조용히 앉아서 자기 음식을 먹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고 한다. 두 사상가들은 정신에 대한 문제로 여념이 없는 동안 감각론자는 더 임박한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그림에서 그토록 당혹스럽다는 점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 사진을 이 책을 마무리 짓는 데 도와준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준 바 있다. 그들의 반응은 상당히 다양했다. 어느 예술사가는 현대의 골고다, 즉 구세주 옆에 잇는 두 강도 이야기의 배경이 연상된다고 했고, 어느 빅토리아 시대 문학 전공자는 이 사진이 보는 사람을 포함하여 수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으며, 미국의 인종 문학 전문가는 인종 문제를 제기했고, 한 스튜디오 미술가는 이 사진이 세 인물의 상대적 가치, 즉 예언자와 이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 사진이 사로잡힌 존재를 보여주는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이 사진이 불쾌한 이유는 지쳐버린 듯한 침묵 속에서 상황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주인공들의 인상 때문이다.

이런 사진을 보다 보면 우리는 나름의 해석을 붙이는 상상을 하게 되는데, 하겐베크의 전시가 통제하려고 하던 바가 바로 그런 해석이었던 것이다.

…(중략)…

사실 ‘웅변을 관리하는 것’은 사로잡힌 동물의 운명을 보고 상상하는 관람객들의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하는 하겐베크 공원의 근본적인 수법이다. 하겐베크의 혁신적인 전시에서 너무나 공들여 창조해냈으며, 샌디에이고 야생동물공원과 디즈니의 동물왕국 같은 현대 동물원에서 너무도 잘 계승하고 있는 자유에 대한 환상은, 동물들에게서 드러나는 감정표현을 통제한다. 가령 우리 안에서 구부정하게 앉아있거나 팝콘과 핫도그와 솜사탕을 씹으며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동물 사진에서, 우리는 즉시 사로잡힘의 문제를 읽어낼 수 있다.

…(중략)…

이런 이상적인 환경은 동물 감금의 근본적인 성격을 가리고 있다. 사람 쇼에 전시된 사람들이 회사에서 구사한 전략에 저항했다면, 우리의 새 동물원 전시에서 동물들은 식물과 모형 나무 등에 둘러싸여 있어서 관람객들에게 의문을 제기할 만한 목소리를 내기에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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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펠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동물원에 가자>

 

2007년 10월 18일 목요일 한겨레 매거진 <Esc>에는 동물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표지 기사 제목은 ‘코식이가 쓰는 동물원대박과사전’이었고 한 장을 넘기면 ‘과천의 동물들은 이명박을 반대한다?’라는 다소 조잡하고 억지스러운 제목이 눈에 띈다. 그 기사에서 내 눈에 띈 이 책은 단박에 ‘읽을 책 목록’으로 들어왔다.




잔뜩 기대하고 읽어서인지 다소 실망이다. 깔끔하지 못한 번역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니겔 로스펠스라는 사람 자체가 글을 그다지 잘 쓰는 사람은 못되는 듯 하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인 목차에서부터 세부적인 소제목 하의 글에서까지 느낄 수 있는, 읽는 이를 뭔가 답답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무엇보다 하겐베크라는 한 인물과 그의 사업, 회사를 중심으로 책을 서술하고 있는데, 주제가 ‘동물’이 아닌 ‘동물원’인 이상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동물원이 아닌 하겐베크가 책의 주제라고까지 느꼈다면 오버일까. 물론 그가 현대의 ‘동물원의 탄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지만 말이다.




제목에서 분명히 이 책이 ‘역사서’라는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는데도 그 냄새를 못 맡은 내 탓이 크겠지만 나는 이 책이 좀 다른 성격의 책이면 좋겠다. 작가가 살짝 언급한 동물원에 간 인간과 동물의 시선이 마주치느냐 안 마주치느냐의 문제, 동물원이 자연스러워질수록 동물들의 감금 상태는 은폐된다는 사실 등 따로 연구 주제로 삼아도 될 정도로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카프카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작품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 책의 뒷표지에는 ‘빨간 피터’의 고백을 따라 동물원을 살펴본다고 되어 있지만 정작 빨간 피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숲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이 숲을 보호하고 가꾼다.’는 말조차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지 보여줄 뿐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동물원의 역사를 알고 나면, 동물원이 동물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이야기하고 또 일정부분 그것이 사실인 상황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느끼게 된다. 정말로, 본문에 나오는 존 버거의 말마따나 동물원은 ‘이제 인간과 동물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장소’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새끼를 잡기 위해 인간들이 어미를 죽이자 새끼 코끼리가 다리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어 뒷다리에 코를 감고 쓰러져서는 그대로 질식해 죽었다는 부분이다. 이건 자살이다.

사람 전시야 뭐 오늘날에도 그 형제들을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2002년에야 고국 남아공에 돌아온 사끼 바트만의 유해는 186년 동안이나 뇌와 생식기가 절단되어 병에 보관된 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엉덩이가 조금 더 튀어나와 있을 뿐이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엘리펀트맨’은 그리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한데 다른 동물까지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까. 브레히트의 ‘후손들에게’라는 시에 등장하는 구절이 생각난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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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유하자면, “리더십이 모든 것의 답이다”라는 식의 관점은 암흑시대에 물리세계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이해를 퇴보시킨 “신이 모든 것의 답이다”식 관점의 현대판이다.




2.

큰 사람들이 없는 큰 비전은 쓸모가 없다.




3.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우리는 교수 클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듭된 고문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스톡데일의 뻣뻣한 다리가 연신 절뚝거렸다. 100미터쯤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내가 물었다.

“견뎌 내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가 말했다.

“아, 그건 간단하지요. 낙관주의자들입니다.”

“낙관주의자요? 이해가 안 가는데요.”

나는 정말 어리둥절했다. 백 미터 전에 그가 한 말과 배치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4.

좋은 회사를 위대한 회사로 도약시킨 사람들은 두려움에 자극받지 않았다.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바보처럼 비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자기들이 못하는 사이에 남이 빅히트를 치는 것을 지켜보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경쟁자에게 한 방 얻어맞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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