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것이 말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2.
여기서 특히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죽어가는 두 살배기 사애나이의 침대 옆에서, 그 아이의 어린 누나와 어린 형을 자기 옆에 앉히고, 어떤 목소리로 읽어 줄 것인지, 어떤 식으로 페이지를 넘길 것인지까지 고려하면서 의사가 그림책을 읽어주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 시간과 공간 전체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의사가 ‘이 그림책을 한번 읽어 보세요’ 하고 책만 건네주고 가 버렸다면 중요한 것을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어린이들도 그 책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3.
이것은 인공적인 도시에서 살면서 이것저것 자료를 뒤지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작품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지극히 비일상적인 상황 속에 던져 놓았을 때 비로소 창조적인 표현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4.
현대를 흔히 IT혁명 시대라고 합니다.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자신이 관심이 없거나 재미없는 화면은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흘려보내 버리죠. 이처럼 숨가쁘게 돌아가는 정보화 시대 속에서, 진정 영혼을 울리는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는 매체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이 그림책일지 모릅니다.
 
5.
그렇다면 과학 책은 왜 만드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데, 과학 책도 마찬가지예요. 어린이가 그 책을 읽고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깜짝 놀라거나 감탄하거나 새로운 발견을 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그림책은 아무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현재 학교는 주입식 교육이 중심이고, 그런 교육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성인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간혹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 뭐랄까, 마음이 통하지 않는달까요? 표정도 없고 말씨도 너무 단조롭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대체 어떤 말들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6.
어린이는 이야기에 쓰여 있는 말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어른들은 설명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런 말이 하고 싶은거겠지 하고 이해해 주지만, 어린이들은 안 그래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이미지가 생기지 않으면 이야기 밖으로 나가 버리거든요. 릴리언 스미스가 <아동문학론>에서 “어린이의 마음은 객관적이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어린이는 객관적으로 읽어요. 예를 들어 어떤 책에서 이야기하는 문장이 쭉 이어지다가 갑자기 설명하는 문장으로 바뀌어 버리면, 그 순간 어린이의 긴장감은 붕괴되어 버리죠.
 
7.
그림을 감상할 때, 한동안 그 그림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보면 한 장의 그림 속에 표현된 드라마랄까,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갖가지 감정 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죠. 그림책의 경우에는 약간의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림의 힘이 훨씬 강한 형태로 표현되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의 마음속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8.
작디작은 임금님의 나라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른이고, 많은 지식과 경험과 사회적 의무를 갖고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 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몸집이 점점 작아지고, 갖가지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도 줄어들어, 인생 후반기가 되면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놀 수 있어요. 이를테면 풀밭에서 구름을 바라보며 상상에 잠기거나 체스 말이 되어 체스판 위에서 노는 거죠. 그러다 마침내 겨자씨처럼 조그마해져서, 어느 날 먼지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요. 옆에 있던 사람이 ‘어, 이 사람이 어디갔지?’하고 둘러보는 식이랄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인생을 끝맺는 거죠.
작디작은 임금님은 인간 세상을 이상하게 여겨요. 어릴 때는 판타지를 풍부히 갖고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공상의 세계에서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다가, 나이가 들면 왜 그런 것들을 버리냐고, 왜 점점 편협해지고, 의리나 인정에 얽매이고, 결국에는 비참한 죽음을 맞느냐고 말이에요. 임금님이 보기에 인간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9.
저는 아이들이 글을 일찍 깨우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요. 글이라는 것은 매우 한정된 것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한정된 말 속에 혼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죠. 반면에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글을 읽어 주는 사람과 공간을 함께 나누는 체험을 뜻해요
…(중략)…
2000년 10월 현재 통계에 따르면,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고등학생이 60%, 중학생은 57% 정도라고 해요. 즉 글은 읽을 줄 알지만 말의 세계에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10.
저도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편이지만, 이따금 손자와 같이 보다 보면 우울해져요. 매일 이런 것만 보고 있나 싶어서요. 툭하면 때리고 부수는 것들뿐이에요.
 
공포를 상품화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섭지 않죠.
 
진짜 공포는 이를테면 <잘자라, 프란시스>(러셀 호번 글, 가스 월리엄스 그림)처럼 나방이 창문에 탁탁 부딪힐 때 느끼는 공포나 괴물에 대한 공포, 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이마에 요시토모 씨의 <낡은 집의 숲>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접했을 때 느끼는 공포죠. 중요한 것은 현실 속의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그런 공포가 아니라, 어린이의 감정생활 또는 정서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공포예요.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파괴적인 행동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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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잡이들의 이야기 보르헤스 전집 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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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카토풍의 농밀한 현기증>




결국 나는 다시 보르헤스를 잡았다. 계기는 2박 3일간의 예비군 동원 훈련. <픽션들>의 매력에 열광하면서 <알렙>과 이 책<칼잡이들의 이야기>를 덥석 사버렸지만 그것이 언제인지조차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나는 이 책들에 선뜻 손을 대기 주저했다. 보르헤스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다 짧지만(보다 심원한 이유들이야 많겠지만 현실적인 이유로는 40세 이후 완전히 상실된 시력과 그로인한 퇴고의 편이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 속에 녹아들어있는 세계의 밀도가 너무나 높음을 이미 한 번 맛봐서 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계기와 유혹이 맞아떨어졌다.




민음사에서 나온 보르헤스 전집의 표지는 상당히 촌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 표지를 들여다보면 이상하게도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석의 무한함. 다만 5권 모두가 같은 그림에 제목만 달라진다는 것은 조금 유감이다. 같은 화풍으로 권마다 달리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 ‘작가’에는 미니소설들이 있고, 2부 ‘칼잡이들의 이야기’에는 그보다는 약간 더 긴 단편들이 있다. 1부에 있는 미니소설들은 내용의 심원함으로 보나 짧은 형식으로 보나 일본의 한 줄짜리 시 하이쿠에 비견할 수 있겠다. 물론 읽자마자 무릎을 치게 되는 하이쿠들보다야 복잡하다. 2부에 있는 소설들은 <픽션들>에 비해 그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느낌이 약간은 덜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다. 문장은 좀 더 단정적이고 작품은 리얼리즘에 근접해있다. <픽션들> 하나밖에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당연한 결과지만 1부와 2부 모두 ‘새로운’ 느낌이었다.   




특히 1부의 글들은 흉내 내고 싶을 지경이었는데 발톱에 대한 단상인 ‘발톱’이나 <픽션들>에 있는 ‘바벨의 도서관’이 떠오른 ‘궁전의 우화’는 정말 인상적이었다.(내게는 ‘궁전의 우화’가 짧은 만큼 조금 더 강렬했다.) 에셔의 그림‘그리는 손’이 떠오르는 ‘보르헤스와 나’는 또 어떠한가. 

2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작품은 ‘만남’과 ‘마가복음’이었다. 두 작품 모두 보르헤스로서는 의외라고 할 수 있는‘의외의 결말’을 제시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대중적이라 하겠다. 반전영화를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알렙>은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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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디작은 임금님 - 마술적 힘으로 가득한 한 편의 시 같은 동화
악셀 하케 지음, 미하엘 소바 그림, 조경수 옮김 / 미다스북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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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른 아이>




#1. 가와이 하야오, 마츠이 다다시, 야나기다 구니오가 공동으로 쓴 <그림책의 힘>이라는 책에 잠시 언급된 이 책에 대한 설명 몇 줄을 읽고, 내가 느낀 감정은 복잡한 것이었다. 뭔가를 도둑맞은 기분이었고(좀 심하게 표현하자면-거만하고 어처구니 없게도-선수를 빼앗긴 것에 분했다고나 할까),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으며,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무척이나 반가웠다. 보고 싶었다. 나의 상상이 그림으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2. 이 책을 사려고 알아본 결과 2005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미다스북스라는 출판사에서는 더 이상 찍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어느 서점에도 없었다. 아마존에서 구입할까 하였으나 번거롭고 돈이 많이 들 것 같았고, 결국 곧 한국에 돌아와 군대에 가는 친구에게 부탁하는 쪽지를 보냈으나 바로 그 다음날 우연히 들른 교보문고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의를 하였고 지방에 있으니 도착하면 연락드리겠다는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작디작은 임금님과 이렇게 만났다.




#3. 그림책의 힘을 말하는 책에 소개되어 있으니 나는 당연히 그림책이려니 생각했지만, 교보문고에서도 그 책은 ‘소설’코너에 문의하여 구할 수 있었고, 실제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 페이지에 삽화나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는 커다란 판형의 그림책은 아니었다.(그래서 잠깐 원래의 그림책이 있고 이건 성인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게 원래의 책이 맞다.) 130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에서 그림은 겨우 17컷밖에 없었고, 판형도 아주 작았으며, 게다가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을 표현한 그림도 없었다.




#4. 나의 상상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자그마하게 태어나서 점점 커졌다가 다시 조금 작아지고 죽게 되지만 반대라면 어떨까? 태어나자마자 커다란 몸집을 갖고 말도 하고 일도 하는 ‘어른’으로 태어나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몸이 작아지고 ‘아이’가 되어가는 상상.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는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그냥 그런 공상을 했었다. 왜 늙으면 도로 애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 상상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마크 트웨인 식이라면 고소나 추방을 당하거나 혹은 총살에 처해야겠지만) 다음에 인용하는 책 속의 대화가 조금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5. 이 책의 추천사에서 나는 또 삼천포로 빠져 혼자 좋아한다. 박이문 씨가 쓴 추천사에는 '양복 새끼 주머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물론 작디작은 임금님이 세상 구경을 위해 들어갔던 주인공의 '양복 상의에 달려 있는 작은 주머니'를 말하지만 그 단어만 떼어놓고 가만히 보고있으면 재밌는 생각이 든다. '양복'과 '새끼'를 붙여 생각하고 '주머니'를 따로 생각하는 것이다. 양복새끼는 '양복입은 새끼'를 말하고 주머니는 흔히 그렇듯 '개인의 경제사정'을 말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임금님네 나라에서는 어린 시절이 삶의 마지막에 온다는 거죠?

-생각 좀 해봐! 기뻐할 수 있는 뭔가를 내내 갖고 있는 거라고!


 

#6. 이 책이 간간이 자아내는 웃음의 성격은 독특하다. 작디작은 임금님은 어른이면서 아이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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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생각한다 -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
이상욱.홍성욱.장대익.이중원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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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8년도 넘었다. 이과와 문과를 나누기 위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난 둘 다 배우고 싶은데 왜 한 과로 내모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답답함을 느낀 지는 10년이 지났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있다. 강산은 변했는지 모르지만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이쪽’ 세계에서 살면서 ‘저쪽’ 세계에서 쓰는 말들을 못 알아듣게 된 것은.




최재천 교수를 필두로 한 많은 학자들이 통섭을 외치지만 실제로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들은 모두 ‘전문가’들이며 내가 생각하는 전문가란 기본적으로 ‘편향된 사고를 훈련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얼마나 학문들을 수평적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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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1 - 동양의 마음과 상상력 읽기, 중국편
정재서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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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이다. 아마 2권을 갖고 있었더라면 곧바로 2권을 펼쳤을 것이다. 동양신화를 공부한 학자의 시각을 충분히 담아내면서도 '옛이야기의 맛'을 놓치지 않고 있다.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시간 순으로 짜여있지 않다. 신화라는 시간을 초월한 주제를 연대를 의식해서 짜 맞춘다는 것은 저자의 말대로 '난센스'다. 대신에 그는 '쉽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책을 구성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책장을 넘기는 힘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화와 전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후반부에 다루고 있는, 이미 역사적으로 그 실체가 입증된 은나라나 강태공 등 '역사'와 가까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재밌게 읽으면서도 '이게 신화 책인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서양신화와 동양신화의 중대한 차이가 있다. 더불어 이런 의문은 우리의 사고 자체가 얼마나 서구화되었는지를 입증한다. 동양신화에는 신과 인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양의 신화처럼 신, 인간, 요정 이런 엄격한 종족(?)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동양의 상상력과 서양의 상상력을 비교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난센스지만 서양의 상상력에 길들여진 탓인지 동양의 상상력은 그 느낌이 자유분방하고 스케일은 더 크게 느껴진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접한 중국의 옛이야기가 주는 호방함과 거침없는 상상력에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내가 '재미있는 중국신화'가 잔뜩 있을 거라 기대하며 샀던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위앤커의 '중국신화전설' 1,2권이었다. 어찌나 책장이 안 넘어가던지, 그 답답함이란…. 




이 책을 읽고 가장 놀란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는데 이 책에는 분명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가득하다. (2권의 목차를 보니 2권이 내 구미에 더 맞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닌, 학문으로서의 동양신화도 접할 수 있다. 비판적 신화읽기라고 불러도 좋을 방법으로, 저자는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물음을 슬쩍 흘린다. 무겁지 않게.




저자의 비판적 신화읽기는 단지 서양신화에 익숙한 세태를 비판하는 차원이 아니라, 신화에 숨어있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그것도 그 의미를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선양'이라고 하는 왕위 계승 방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지금도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말로 자주 쓰는 '요순시대'의 주인공 요 임금과 순 임금. 태평성대였던 만큼 요에서 순으로 넘어가는 과정도 평화로워 보인다. '태평성대'라는데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비극적인 순 임금의 죽음을 두고 저자는 슬쩍 이런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무 생각 없이 서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며’를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동양신화 속으로 ‘확’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서문에서부터 이렇게 사람을 잡아당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쩐지 슬픈, 가슴이 뻥 뚫린 관흉국 사람들과 생각해볼수록 재미있는(동시에 그동안 왜 이런 생각은 못해봤는지 스스로도 의아한) 인어 아저씨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2권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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