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아들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일이 있습니다. ‘뚱보 질투’나 ‘뚱보 배신’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를 것입니다. 어른의 경우 ‘뚱보 ○○’는 더욱 사회화되어 법률이나 습관, 그리고 체면 같은 심리적인 구속이 되어 무겁게 짓누릅니다.




2.

자신의 관점에서만 상대방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멋대로 생각한 것이 보기 좋게 역습을 당합니다. 일상의 인간관계-부모와 자녀, 부부 등-에서도 흔히 있는 착각입니다.




3.

다시 말하면 요즘의 발달관은 젖먹이에서 유아기, 그리고 아동기, 청년기처럼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라는 식의 수직 상승으로 나타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능지수에서 보이는 어떤 발달상을 중심으로 발달이 빠르다, 아니면 늦다고 여깁니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발달은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겉으로 ‘측정할 수 있는 능력’만을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으며, 과거에도 있었고 또한 지금도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능력에는 거의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4.

모처럼 아이의 기분을 맞추고 싶어하는 유치원 선생님이나 엄마의 말도 때로는 어린이를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듯합니다. 어린이 쪽이 이상하게 엉거주춤하게 되어 난처해하는 모습이 엿보여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상상세계에 있는 어린이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합니다. 나는 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이와 마주할 때는 언제나 어린이가 뭔가 역할을 분배해줄 때까지 나무나 돌처럼 가만히 있습니다.




5.

어째서 어린이는 상상놀이를 하면서 메타표상이 가능한가? 이 행위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것 같다. 생각에 빠지는 게 아니라 가상과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현실세계에 있으면서 가상세계에 빠지며, 가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생물은 아이뿐이다. 더구나 자신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아이들끼리 그 세계를 공유할 수 있고 메타표상조차도 공유한다.




6.

저는 제4장과 제5장에서 상상놀이 그림책을 제시해 학생들에게 자기 안에서 발달을 읽는 것을 촉구한 결과 나타난 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안에서 발달을 읽는 것을 촉구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내용을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발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체험이 필요한지를 자각적으로 선택하는 능력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교과서에 있는 발달 과정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관에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발달하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수 없는 한, 적어도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풍부한 환경을 마련해서, 그곳에서 그들이 어떤 것을 필요한 환경으로 선택하는지 곰곰이 지켜보았으면 합니다.




7.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행동주의 흐름 속에서 나온 유아․아동심리학 연구는 대부분이 보편성과 객관성의 모델을 자연과학적인 인과관계에 말미암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어린이 마음을 보기 힘들다는 것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유아․아동심리학은 ‘평생발달 심리학’이 생겨나면서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서서히 보입니다. 피더맨(David Lee Featherman)은 심리학이 평생에 걸쳐 발달한다는 관점에서, 그 연구가 도무지 나아가지 못한 이유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를 중시한 발달심리학이 학문상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발달이란 개념이 이른바 생물학적인 모델에 의존한 나머지, 발달의 개념은 ‘①최종상태(곧 성숙)에 이른다는 점 ②발달적인 변화는 순차적이고 바뀌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③발달 패턴에는 개인차가 적고 보편적인 점’이라고 가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저는 이런 연구가 중요함을 인정하지만, 이처럼 생물학적 성장 모델로는 채울 수 없는 중요한 연구 주제가 결국 거의 손도 대지 못 하고 남아있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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