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지만 사람에 대한 불신은 무얼 좀 분명히 해두고 싶어할수록 더욱 깊어져가게 마련인 것.


2.
운동 시합이란 자주 개인의 사소한 대립이나 이해관계를 넘어 어떤 맹목적인 집단 의지 같은 것을 형성하는 데엔 큰 공헌을 하는 수가 있다. 거대하고 맹목적인 집단 의지 속에 잡다한 개인의 불평이나 의식의 편향 같은 건 일거에 깨끗이 해소되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끔 특정 집단의 작은 불평이나 이해 갈등을 해소시키고 그 집단에게 목적하는바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엉뚱한 스포츠 행사를 이용하는 수가 있다.


3.
하지만 주정수 시대에도 명분이나 동기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정수에게도 더할 수 없는 동기와 훌륭한 명분이 있었다. 문제는 오히려 그 명분의 지나친 완벽성, 명분이 너무도 훌륭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 명분엔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없었던 명분의 독점성이었다. 게다가 명분이라는 건 언제나 힘있는 자의 차지였다.


4.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5.
“자유라는 거 그거 말대로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없지. 제 가고 싶은 대로 맘대로 가고, 제 살고 싶은 대로 말대로 살고, 제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보다 우리 같은 문둥이들에게 더 소망스런 바람이 있을 수 있겠나. 하지만 원장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언제 한번 그 자유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있었나. 아옹다옹 언제나 싸움질만 되풀이되어왔지. 핍박과 원망과 의심의 버릇만을 길들여왔지.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또한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는 일이야. 자유라는 게 원래가 그런 것이었거든. 자유라는 거 누가 가만 앉아 있어도 우리 문둥이들한테 가져다 바쳐주는 게 아닌 터에, 어차피 그건 제 힘으로 빼앗아 가져야 하는 거 아니던가 이 말씀야. 빼앗아 가지려니 싸움질을 해야 하고, 싸움질을 하다 보니 그사이에 자연 의심과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마련이지.…(이하 생략)…”


6.
언젠가도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누구나 오늘의 자기 현실을 최종적이고 불가변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현실은 내일 다시 선택적으로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 내일의 선택이 열려 있지 않는 한 그 현실은 누구에게도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7.
운명을 같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의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8.
아무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 울타리보다도 더 높고 안전한 울타리는 없을 것입니다.


9.
저의 경험에 따른다면 어떤 형태의 울타리 속에 격리된 사회의 질서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 성원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그 사회를 지배하고 대표하는 몇몇 상층부의 의사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이며, 이 섬에 관한 한 모든 원장들의 시대가 그것을 똑똑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10.
내일의 꿈을 오늘 미리 가불해주고, 그 가상의 현실을 당장 오늘의 그것으로 착각하고 즐기게 하여 진짜 현실의 갈등을 잠재워버리는 말의 요술은 이 섬을 다스려온 사람들의 해묵은 수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 늘 힘겹고 짜증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극히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술의 하나였습니다.



-이상, 소설 본문 중에서




11.
그의 천국론은 이상욱과 황장로에 의해 섬세한 수정을 받는 것이다. 그 수정에 있어서, 황장로는 굴종의 의미를, 이상욱은 감시와 비판의 의미를, 각각 조백헌에게 알려준다. 피지배자의 화해적 굴종은 지배자가 “일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지 않을 것임을” “일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공훈이나 명예도 좇지 않을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우상도 만들지 않을 것임을” 선언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감시와 비판은 그것이 정말로 행해지고 있는가 않는가를 따지는 것이라는 것을, 조백헌은 이상욱과 황장로에게서 배운다. 그때 화해적 굴종은 사랑이 되고 감시와 비판은 자유가 된다.


12.
이상욱의 경련적인 자기 감시, 그 어느 것에도 완전히 편들지 못하는 중립주의(그것은 동양의 중용주의와 완전히 다른, 극단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키려는 중립주의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독선주의는 그 나름의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현상에 만족하여 무의식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각성자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현실 개조 의사가 감추고 있는 영웅주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여 모든 사람을 그곳으로 이끌어가려는 힘의 행사 속에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는 힘의 횡포를 감시하는 감시자의 기능이다. 그 기능이야말로 사실은 진보적 예술이 맡고 있는 기능 중의 하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현대 예술이 보여주어야 할 인간 중의 하나인 것이다.



-11, 12 김현의 해설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 중에서





13.
그렇다. 조백헌 원장의 소설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계 혹은 타인과 치열하게 만나는 과정을 경유하면서 스스로 그 신념의 허위를 깨닫고 교정하며 재구성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점에서 조원장은 흔히 소설 이론에서 말하는 ‘발전적 성격’의 인물에 속하거니와, 바로 그것이 주인공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만든다.


-정과리의 해설 ‘모범적 통치에서 상호 인정으로, 상호 인정에서 하나됨으로-‘조백헌’이라는 인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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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냐하면 우리는 웃기 전에 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깨달음이 생기고, 그 깨달음에서 온정과 관용을 겸비한 철학자의 큰 웃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2.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또다시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번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정말 영생을 얻게 될 것을 하느님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3.

말하자면 인간은 하늘과 땅,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숭고한 사상과 비천한 번뇌 사이에 놓여 있다. 이런 것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원래 인간성의 본질이다. 지식에도 갈증을 느끼고 물에도 갈증을 느낀다. 훌륭한 사상도 좋지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도 좋으며, 지언명구(至言名句)도 좋지만 미인도 버리기 어려운 것이 인간적이다.

 

4.

자연에 적응하는 능력에 대해 언급한다면, 자연계의 온갖 생물은 놀라우리만큼 완전한 것이다.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자연계에서 멸종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자연에 적응하라는 명령은 받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 자신, 즉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에 적응해야만 하는 것이다.

 

5.

세상 사람의 반은 자기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반은 남에게 자기 일을 시키기 위해서든, 남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든 그중 하나를 위해 살고 있다.

 

6.

그런데 인간에게는 불합리성도 있거니와 모순도 있고, 어리석은 짓도 하고 바보 같은 짓도 하며, 축제일에는 들떠서 돌아다니고, 편견과 옹고집과 건망증이 있다. 인간의 재미는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이다.

 

7.

그러므로 만일 전쟁놀이를 그만두고 싶다면, 각국 정부는 20세에서 45세까지의 국민을 징병제도식으로 선발하여 10년에 한 번쯤 유럽 여행을 시키고, 박람회나 그 밖에 다른 흥미 있는 것을 구경시켜 주어도 좋을 것이다.

영국 정부는 그 재군비(再軍備) 계획에 50억 파운드를 투입하고 있다. 50억 파운드라면 모든 영국인을 리비에라로 여행시키기에 충분한 금액이다. 그러나 전비(戰費)는 필요하지만 여행은 사치라는 반대론이 제기될 것이 뻔하다. 아무래도 나는 그 반대론에 찬성할 수가 없다. 오히려 여행은 필요하되 전쟁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닌가.

 

8.

결국 자기 사상을 소탈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사상의 주인공이며, 그러한 사람만이 사상에 예속되지 않는 것이다. 진실성이란 결국 노력의 표시일 뿐이다. 노력한다는 것은 완전히 숙달되어 있지 않은 증거이다.

…(중략)…

저술가가 어떤 개념에 시달리고 있을 때는, 틀림없이 그 개념 쪽도 저술가에게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9.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성격은, 마음에 온정이 있고 근심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용기 있는 성격이다.

 

10.

그러나 많은 현명한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성공, 즉 명예와 부귀에 대한 욕망이란 실패, 빈곤, 무명(無名)에 대한 공포를 완곡하게 표현한 명칭이며, 이같은 공포가 우리의 생활의 지배한다.

 

11.

그 결과 모든 종파에서 보듯이 이론으로 신앙을 정당화하면 할수록 편협에 빠지게 된다. 이리하여 종교는 가장 질이 나쁜 집착과 고루와 편파와 편협, 그리고 개인생활의 철저한 이기주의에까지 결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도 다른 종파에 대한 관대한 태도가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을 신과 인간의 사적 거래로 둔갑시킴으로써 인간의 이기주의를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을은 갑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회에 찬송가를 부르고, 신의 이름과 갑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 대신은 갑은 또 을을 축복해야만 한다. 단, 이때는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다른 어느 가족보다도 우선 자기 가족을 축복하는 것이다.

 

12.

생활의 사색보다도 소중한 것으로 여겨야만 철학의 영광이나 숨막히는 기분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으며, 동심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직관력의 신선함과 소박함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다. 어떤 철학자든 만일 진짜 철학자로서의 자격이 있다면,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고 절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중략)…

신이 부여한 완전이 종종 사람들로 인해 불완전하게 되는 것을 생각할 때, 철학자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안경을 쓰고, 식욕도 없고, 가끔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인생의 아름다운 맛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13.

그러나 백 퍼센트의 능률을 바라는 것은 거의 추잡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14.

중국 옷과 양복 속에 내포된 철학의 차이는, 양복이 인간의 자태를 나타내려는 것에 반하여 중국 옷은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중략)…

그런데 양복은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우리의 허리둘레가 32인치인지 38인치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인간이 왜 “내 허리 둘레는 32인치요” 하고 세상을 향해 공언해야만 하는가.

…(중략)…

다만 인간이 아직도 네 발 짐승의 단계에 있다면, 혁대도 다소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즉 말에 안장을 얹듯이 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두 발의 직립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혁대는 인간이 아직도 네 발 짐승이라는 가정하에 만들어져 있다. 해부해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배의 근육은 모든 무게를 등뼈로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두 발 직립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 비참한 결과로 인해 인간의 어머니들은 동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유산(流産)이라는 재앙을 짊어지게 되었고, 남자의 혁대는 중력으로 흘러내리는 경향을 갖게 된 것이다.

 

15.

공자는 사려없는 학식이 학식을 수반하지 않는 사려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공자는 “배우더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사물은 확실하지 않다. 생각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가 이런 훈계를 한 이유는, 공자는 당시의 많은 학자가 전자에 속해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 경구는 현대의 학교에도 아주 적절하다. 다 알다시피 현대의 교육과 학교제도는 대체로 지식을 장려하고 판단력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지식 주입주의를 최종 목적으로 생각하고, 학식만 많으면 교육받은 인간이 되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면 학교에서 사색이 배제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략)…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의 교육제도가 대량교육이며, 따라서 공장이나 다름없고, 공장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생명 엇는 기계적 시스템에 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교명(校名)을 지키고 제품을 표준화하기 위해 학교는 졸업증서를 발행하여 제품을 증명해야만 한다. 졸업증서와 함께 등급을 매겨야 할 필요가 있고, 필요성에서 점수가 생긴다. 점수를 매기려면 암송과 시험이 있어야만 한다. 교육 전체가 완전한 논리적 연쇄를 이루고 있어서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기계적인 시험의 결과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치명적인 것이다.

 

16.

대학이 전국경기에 출전하는 소수의 운동 선수나 축구 선수를 양성하는 것보다도, 잘하든 못하든 모든 학생이 테니스나 축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국가가 한 사람의 로댕을 낳는 것보다도, 모든 국민이 저마다 자기의 창작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극소수의 전문 예술가가 있는 것보다는 전국 학생에게 점토세공(粘土細工)을 가르치고, 모든 은행장과 경제 전문가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기발한 제안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즉 모든 분야의 아마추어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17.

유희적 정신이 상실되지 않을 때, 예술은 비로소 상품화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다.

 

18.

황산곡에 따르면, 독서의 목적으로 인정할 만한 것은 인간의 용모에 매력을 더하고 그 담화에 풍미를 주는 것밖에 없다.

 

19.

중국에서는 ‘각고면려(刻苦勉勵)’라 하여 학생을 격려한다. 옛날 이 각고면려를 한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밤에 독서를 하다가 졸리면 송곳으로 정강이를 찔렀다. 또 어떤 학자는 밤중에 책을 읽을 때 하녀를 옆에 세워두고는 졸면 깨우도록 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책을 펼치고 선철(先哲)이 자기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잠이 오면 지체 말고 침상에 들어가 자야 한다.

 

20.

마음의 평화란 여러분이 최악의 것을 받아들였을 때의 정신상태를 말한다.

 

21.

내 안에 있는 이교도가 긍지와 겸허함 때문에, 즉 기분상의 긍지와 이지적인 겸허함 때문에 기독교를 거절한 것이다.…(중략)…기분상의 긍지가 왜 하나의 동기가 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근엄하고 단정한 신사숙녀로서 행동하는 데는 인간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중략)…다음에 겸허함, 이지적인 겸허함이 기독교를 배격하게 한 더 큰 동기가 되었다는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다. 즉 우주에서 극히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한 태양계, 또 그 한 조각에 불과한 지구, 그리고 또 그보다 극미한 한 조각인 개개의 인간이 대조물주의 눈에 몹시 중요한 존재로 비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문학상의 지식으로 이미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뻔뻔스러움과 자만심, 그리고 오만함은 나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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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래리 주변을 한참 맴돌다 보면, 그가 대부분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도시 곳곳에 겹겹이 쌓인 층을 본다. 그는 공원과 거리를 보고, 지하철과 하수구 그리고 하수구 아래에 있는 그 옛날의 터널들에 주목한다. 그는 오늘날의 지도 위에 있는 도시를 바라보고, 언젠가의 지도 위에 '있었던' 도시를 바라본다. 도시의 과거, 과거의 밀주점과 고릿적의 터널, 옛 개천과 언덕의 어렴풋한 자취가 숨어 있는 도시를 보는 것이다.


2.
그는 문제의 원인이, 전염병 관리를 논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찾으며 우아하게만 나아가려 하는 것, 그것이 거의 유행처럼 된 데도 있다고 지적했다. 생쥐를 산 채로 잡을 수 없느냐고, 가끔은 쥐도 산 채로 잡을 수 없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종종 된다고 한다. "해마다 죽이지 않고 쥐를 덫으로 잡는 방법은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럼 제가 반문합니다. '흠, 좋습니다. 그러면 잡은 쥐들은 어디에 풀어놓는 게 좋겠습니까?'...(생략)..."


3.
시간이 흐르면서는 내가 아는 소탕전문가들과 도시 전체에 걸쳐있는 소규모 회사를 소유한 업주들에게서도 소식을 들었는데, 그중에는 9.11 참사 때문에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는 업자들도 있었다.
...(중략)...
그해 늦가을, 겨울로 들어가는 초입에 배리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주변의 소규모 사업장과 식당 같은 곳에서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일했다. 그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근처에 있는 어떤 큰 회사는 기사들을 24시간 상주시켜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나는 배리 벡이 계속 일한다는 데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신문들은 여전히 다국적 거대 복합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뉴욕에 머무를 것인가, 철수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배리 벡이 쥐와의 싸움을 끈질기게 벌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에 긍정적인 서광이 비친다는 느낌이었다.


4.
전쟁이 끝나고 731부대의 인간 생체실험이 세간에 알려졌다. 부대원들은 생체 해부실험까지 자행했다. 하지만 이시이가 전쟁범죄범으로 기소되는 일은 끝내 없었다. 그는 기소되기는커녕 자신의 기록을 미국정부에 기증하는 대가로 전범재판소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기록에는 1만 5,000점의 슬라이드 견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진은 500명의 인간을 대상으로 페스트와 탄저균이 포함된 생화학무기를 실험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의학자로서 경력을 마감했다.
소련은 이시이의 '작품'을 견본으로 해서 생화학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미국도 1950년대에 처음 생화학무기를 실험하기 시작하면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미국은 군사적 적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서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생화학무기가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험을 거듭했다. 탄저균이 많은 인구를 감염시켰을 때의 상황을 예상하려는 모의실험에서, 미국 정부는 병원균인 세라티아 마르세스센스(Serratia marcescens)와 바실루스 글로비기(Bacillus globigii)를 썼다. 탄저균과 비슷하지만, 해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균들이었다.
1950년 4월, 해군함정 두 대가 버지니아의 해안지방인 노포크와 햄튼, 뉴포트 뉴스에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살포했다. 주민들도, 국회도 그 일에 애해 알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있었다. 주민들은 병원균들이 만들어낸 구름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미국 내 최대 200곳에서 같은 실험이 이루어졌다. 군대는 뉴욕 지하철에다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풀기도 햇다. 1966년 여름,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철로에 있는 전구에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묻혀 놓았다. 그들은 철로와 철로 사이에 균을 떨어뜨려 놓기도 했는데, 그래야 전차들이 지나갈 때 일으키는 바람에 균이 골고루 날아가 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다른 군인들이 와서 지하철이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얼마나 멀리까지 퍼뜨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공기 표본을 채취해 옷가방에 담아갔다. 결과는 기밀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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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법 앞에'라는 문구다. 모든 국민은 무조건 평등한 게 아니라 법 앞에 평등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적 · 정치적 평등권을 가진다. 대통령이나 노숙자나 남의 물건을 훔치면 똑같이 절도죄가 적용된다는 게 법적 평등이고, 대통령도 노숙자도 선거에서 똑같이 1표만 행사한다는 게 정치적 평등이다. 그러나 법과 정치의 범위를 벗어나면 평등을 보장해주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




2.
…(중략)…그리스도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세계관이다.



3.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지나치게 분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노동의 본래적인 총체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하나의 부품처럼 주어진 단순 작업을 반복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투여한 노동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노동 생산물에 관해서도 전혀 소유권을 가지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현대 사회의 커다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노동 소외를 낳는다.



4.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므로 세계의 원인이며, 동시에 세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적이기도 하다. 결국 신은 모든 걸 설명하는 듯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모든 것의 원인이자 목적인 듯하지만 아무것의 원인도 목적도 아니다.



5.
사관과 역사의 평가는 구분해야 한다. 사관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없앨 수도 없지만 역사의 평가는 대체로 특정한 시대의 관점이 반영되므로 오히려 역사를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걸핏하면 되살아나 민족 감정을 건드리곤 하는 한일 고대사의 해묵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고대에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한반도와 일본의 교역을 중재하던 무역기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대적 관점에서 무리하게 평가하려 하면 현재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재되게 마련이다. 그 결과 고대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 기지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강변하는 우스꽝스러운 대립이 생겨난다.

과거에 무인도였던 독도가 지금 누구 땅이냐는 문제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것도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근대적 개념의 영토국가가 성립하기 이전 무인도였던 곳에 대해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6.
관리官吏는 국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다만 정부를 관리管理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의 개념이다.



7.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은 광속이 불변이라는 간단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라고 믿었고 수학을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실험’으로 상대성의 개념을 설명한다.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가 있다고 하자. 이 열차의 객실 바닥에 전구를 놓고 그 바로 위 천장에는 거울을 붙여놓는다. 전구를 켜면 그 빛은 천장까지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거울에 반사되어 바닥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빛이 움직인 거리는 바닥에서 천장을 왕복한 거리다. 적어도 열차 안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열차 밖에서 보면 다르다. 열차가 달리고 있기 때문에 전구의 빛은 수직이 아니라 살짝 삐딱하게 올라갔다가 삐딱하게 내려온다. 이 경우에는 빛이 이동한 거리가 열차 안에서 측정할 때보다 조금이라도 길어진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빛이 이동한 거리가 서로 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속도는 특정한 시간 동안 물체가 이동한 거리로 계산되며, 빛의 속도는 불변이다. 또한 동일한 사건이므로 빛이 이동한 거리는 서로 같다. 그렇다면 이 사고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시간이 달라야 한다.



8.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의사소통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적 영역은 경제제도에 의해 침해당하고 공적 영역은 행정제도에 의해 침해당한다”(<소통행위 이론>). 사적 의사소통은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 공적 의사소통은 관료제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그 결과 생활세계가 식민지화된다.



9.
알튀세르는 개인적 이데올로기보다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계급관계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자신을 노동자로서 의식하고 그에 따르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일종의 ‘의식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수단이 바로 미디어와 학교다.



10.
번역이 원래 그렇지만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각 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서의 원문이 원래의 뜻을 유지하기란 어렵다(그리스도가 실제로 썼던 언어는 아람어로 추정되므로 히브리어도 ‘원본’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인명이나 지명은 번역자가 알아서 적당히 읽어주어야 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심지어 서기들이 문장을 필사하다가 순전히 실수로 내용이 달라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난해한 용어에 임의로 주석을 단 것이 실수로 성서의 본문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다.

오늘날처럼 학자들의 소통이 자유롭지 못했으니 각종 오류를 정밀하게 찾아내기도 어려웠을 테고, 인쇄술이 없었으니 사본이 원본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보장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오류는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은 옛 문헌은 거의 없다. 다만 문제는 오류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인간적인’ 과정을 통해 작성된 문헌이 마치 신의 말씀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전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절대화되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11.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봉건적 신분질서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부도덕한 체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중략)…

누구나 나면서부터 신분과 사회적 역할이 정해진 과거 사회에는 오히려 소외가 없었다. 소외는 근대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질서정연하고 명백한 사회 체제 안에서 정해진 위치를 가졌던 중세의 봉건 체제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개인을 전적으로 자기의 발로 서도록 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한 개인을 다른 개인들로부터 고립시키고 분리시켰다”(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12.
따라서 인류 사회가 진보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려면 에로스만 조장해서는 안 되고 타나토스를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 오히려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에로스보다 타나토스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에로스가 좌절될 경우에는 번영이 지체될 뿐이지만 타나토스가 활개를 친다면 사회 전체에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개인의 무의식에 적용되는 에로스/타나토스의 개념을 곧바로 사회적 차원에 접목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듯이 인간 개인에게 타나토스의 본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집단적 충동으로 전화되려면 단순히 본능의 메커니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전쟁의 비극을 소수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몰아붙여 결과적으로 더 근본적인 원인을 은폐하고 있다.



13.
외국인이 본 한국의 첫 인상은 물론 중요하지만 굳이 칭찬을 유도해서 만족하려는 심리는 대체 뭘까? 미국 대학생들이 ‘Zen' 또는 ‘禪’이라고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든가, 비틀스의 한 멤버가 인도의 사상에 심취했다든가, 프랑스의 유명한 도예가가 고려청자에 감탄사를 연발했다든가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게 뭘까? 서양인들도 동양의 깊은 정신과 예술 세계를 아는구나 하고 만족을 얻을까?

…(중략)…

미국의 대학생들,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 프랑스의 도예가는 실상 동양을 잘 모른다. 동양에 사는 우리도 동양을 잘 아는 건 아니다.

…(중략)…

그러나 동양에 대한 지적 관심, 즉 오리엔탈리즘은 결코 순수한 학문적 목적을 지닌 것도, 단순한 유행도 아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소재로 하는 유럽의 공상 만화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위한 하나의 체계로 창조된 것이다. 그 창조를 위하여 서양은 수세대 동안 엄청난 물질적 투자를 했다. 이러한 투자 덕분에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관한 지식 체계로 자리 잡았으며, 서양인의 의식 속에 동양을 여과하려 주입하기 위한 필터가 되었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상과 문화 전반적인 서술들은 크게 증대했다. 그 투자는 대단히 생산성이 높은 투자였다”(<오리엔탈리즘>). 오리엔탈리즘은 학문적 관심도, 지적 호기심도 아닌 ‘투자’였다는 이야기다.



14.
인간의 의식은 늘 욕망으로서 존재한다. 목이 마를 때는 갈증으로서, 연인이 그리울 때는 그리움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의식의 기도는 결국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숙명이다.



15.
유물론은 흔히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부도덕한 사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유물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정신적 측면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앞세운 참된 의도는 사회의 발전 단계에도 자연과학적 법칙성이 관철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데 있었다.



16.
우선 이데올로기를 이론 체계로 보는 입장이 있다. 가장 가까운 우리말로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정한 개별 이론보다는 철학자나 정치가, 경제학자 개인의 포괄적 이론 체계를 가리켜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애덤 스미스의 분업 이론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지만 자유경쟁 자본주의에 관한 그의 경제 사상 전반은 이데올로기에 해당한다.

가치중립적인 이론 체계에 비해 약간 가치가 개입된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흔히 ‘이념’이라고 번역한다. 대표적인 예는 정치 이데올로기다. 이것도 이론 체계처럼 복합적인 이념의 덩어리를 가리키며, 대중을 정치적 행동으로 이끌고자 할 때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해방 직후 우리 사회를 얼룩지게 했던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그런 경우다.

그보다 부정적인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지식사회학에서는 특정한 계급과 계층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배후에 숨기고 마치 보편적인 것처럼 내세우는 이념이나 관념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사실상 지배하는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경제성장 정책을 마치 사회의 각계각층에 골로루 이익이 돌아가는 것처럼 선전할 때 그 이데올로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허위의식으로 기능한다.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가 별도의 이데올로기로 규정된다는 아이러니는 이데올로기가 포괄하는 의미망이 얼마나 넓은지 말해준다.

더 포괄적인 용도로 , 이데올로기를 추상적인 담론 체계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리오타르는 전통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거대 담론을 비판하는데,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리오타르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는 과거와 같은 통합적인 사회 체계가 아니다. 과거에는 사회의 각 부분이 단일한 목적 아래 결집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게 전혀 불가능하다. 부분은 이제 전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독자적인 존재와 운동의 방식을 가진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거대 담론으로 세계의 기원과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은 파산했다고 본다.

심지어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적 이념-예컨대 마르크스주의-조차 거대 담론의 일반적인 결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역사적으로 실패했으며, 탈현대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거대 담론은 항상 ‘통합’이라는 목적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그릇된 목적론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마르크스주의란 낡은 계몽주의의 기치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환상이라고 단정한다. 계몽, 자유, 해방 같은 근대의 거창한 이념들은 중세의 신을 대체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알튀세르처럼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이 아니며 심지어 ‘의식’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이다. 노란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듯이 이데올로기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늘 쓰고 있어야 하고 쓸 수밖에 없는 색안경과 같다.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주체이도록 만들어준다.



17.
그렇다면 자본주의도 인터넷처럼 일종의 매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담기 위한 공간이듯이 자본주의도 구체적인 경제제도라기보다는 다른 실체적 경제제도를 구현하기 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마치 고정불변의 제도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인터넷이 매체의 범위를 넘어 허구적인 권력을 실체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가 아닐까?



18.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자연스럽다.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자본주의를 거의 본능처럼 여긴다. 사류재산은? 부모 형제 사이에도 내 것 네 것이 있으므로 자연스럽다. 이윤추구는?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장 기능은? 물건을 모두 다 직접 만들 수는 없으니까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는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같은 현상을 두고 정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이 사유화된다면 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이익만을 탐한다면 인간 사회가 아니라 야생의 정글이나 다름없다. 모든 물건이 시장에서만 거래된다면 누구나 힘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는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인위적인 제도가 된다.

자본주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면을 가진다. 사유재산의 관념은 보편성이 가장 강하고, 시장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측면이며, 이윤 추구는 그 중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사유재산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이윤추구와 시장은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속한다.



19.
이성의 시대에 인간의 의식은 인식의 확고한 출발점이었고 단단한 실체처럼 여겨졌으나 실은 텅 빈 그릇처럼 껍데기일 따름이었다. 자체의 존재 근거를 가지지 못한 의식은 끊임없이 바깥을 지향하면서 외부에서 근거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며(무엇을 선택할지는 자유지만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다), 무無와 같이 공허한 존재방식 때문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인간이 선택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이기에 자유는 곧 비극이다.



20.
그러나 토플러는 ‘물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쓰는데,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연속성을 뜻한다. 물결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 그렇듯이 지금의 변화는 과거에 있었던 변화(제2물결)의 연속선상에 있다. 즉 제3의 물결은 제2의 물결을 대체하는 동시에 그것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중략)…

물결의 둘째 의미는 총체성이다. 제3의 물결이 가져온 변화는 사회의 특정한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전면적으로 파고든다. 한 예로 토플러는 기업에서 출퇴근 제도가 흔들리면서 직원 개인이 자신의 근무 시간을 정한다든가 아예 집에서 일하는 근무 방식으로 바뀌고 있음을 말한다(요즘 흔히 말하는 재택근무나 '소호Small Office Home Office'방식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토플러다). 생활환경이 바뀌면 당연히 가족제도도 바뀐다. 제2의 물결이 가져온 핵가족화는 산업화 시대가 끝나갈 즈음부터 심하게 흔들린다. 이혼 가정이 늘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많아진다.



21.
이러한 종말론으로 신도들에게 잔뜩 겁을 주는 의도는 명백하다.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이 지은 죄를 대속하고 죽었으므로 교리상으로 인간은 그때부터 무죄가 된다. 죄가 없으면 두려움을 모르고 두려움을 모르면 신을 섬기지 않는다.



22.
냉전 이데올로기가 생겨나면서 분단을 맞았던 한반도가 아제 그 이데올로기가 수명을 다했는데도 아직 분단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지금 북한은 세계적으로 가장 폐쇄적이고 철저한 공산주의 이념의 수호자가 되어 있고, 남한은 상대적으로 가장 철저한 반공 이념의 수호자가 되어 있다. 세계를 갈라놓았던 이념의 구분이 약해졌는데도 한반도는 여전히 좌익/우익이 대립하는 특수한 지역이다.



23.
정신의 특정한 상태가 신체의 질병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신체에 원인을 둔 정신의 질환도 있다. 전자의 예가 스트레스라면 후자의 예는 트라우마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신체와 정신이 확연히 분리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다.



24.
문화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본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외적인 강제력이 가해지면 획일화되기 쉽다.



25.
그러므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세력의 헤게모니에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대중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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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지나치면서, 그너라 고개는 끄덕이면서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구상한다
대화란 서로가 귀를 틀어막은 채 서로의 등뒤에 있는 벽에 대고 고함치는 행위임

...(중략)...
말이 안 통해서 술을 먹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기 싫고 술을 먹으면 집에 안 들어간다
말이 안 통해서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
말이 안 통해서 우리는 상처 없는 아픔과 절망 없는 고통을 하고 싶어한다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중에서




2.

食보다는 識을 끊어야겠도다
그렇다 事物의
어쩌면 空腹 같은 중심에 대해
이미 자빠진 회전축에 대해 미련을 갖는 것이야말로 病일 터!
...(중략)...
니네들은 못 해본 단식을 나는 해보았다는 허영
나도 내가 징그러워졌다.


-'송충이도 못된 사내' 중에서



 
3.

속아주는 것이야말로 믿음일 줄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녹야원 근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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