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래리 주변을 한참 맴돌다 보면, 그가 대부분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도시 곳곳에 겹겹이 쌓인 층을 본다. 그는 공원과 거리를 보고, 지하철과 하수구 그리고 하수구 아래에 있는 그 옛날의 터널들에 주목한다. 그는 오늘날의 지도 위에 있는 도시를 바라보고, 언젠가의 지도 위에 '있었던' 도시를 바라본다. 도시의 과거, 과거의 밀주점과 고릿적의 터널, 옛 개천과 언덕의 어렴풋한 자취가 숨어 있는 도시를 보는 것이다.


2.
그는 문제의 원인이, 전염병 관리를 논하면서 인간의 도리를 찾으며 우아하게만 나아가려 하는 것, 그것이 거의 유행처럼 된 데도 있다고 지적했다. 생쥐를 산 채로 잡을 수 없느냐고, 가끔은 쥐도 산 채로 잡을 수 없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종종 된다고 한다. "해마다 죽이지 않고 쥐를 덫으로 잡는 방법은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럼 제가 반문합니다. '흠, 좋습니다. 그러면 잡은 쥐들은 어디에 풀어놓는 게 좋겠습니까?'...(생략)..."


3.
시간이 흐르면서는 내가 아는 소탕전문가들과 도시 전체에 걸쳐있는 소규모 회사를 소유한 업주들에게서도 소식을 들었는데, 그중에는 9.11 참사 때문에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는 업자들도 있었다.
...(중략)...
그해 늦가을, 겨울로 들어가는 초입에 배리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주변의 소규모 사업장과 식당 같은 곳에서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일했다. 그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근처에 있는 어떤 큰 회사는 기사들을 24시간 상주시켜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나는 배리 벡이 계속 일한다는 데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신문들은 여전히 다국적 거대 복합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뉴욕에 머무를 것인가, 철수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배리 벡이 쥐와의 싸움을 끈질기게 벌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에 긍정적인 서광이 비친다는 느낌이었다.


4.
전쟁이 끝나고 731부대의 인간 생체실험이 세간에 알려졌다. 부대원들은 생체 해부실험까지 자행했다. 하지만 이시이가 전쟁범죄범으로 기소되는 일은 끝내 없었다. 그는 기소되기는커녕 자신의 기록을 미국정부에 기증하는 대가로 전범재판소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기록에는 1만 5,000점의 슬라이드 견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진은 500명의 인간을 대상으로 페스트와 탄저균이 포함된 생화학무기를 실험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의학자로서 경력을 마감했다.
소련은 이시이의 '작품'을 견본으로 해서 생화학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미국도 1950년대에 처음 생화학무기를 실험하기 시작하면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미국은 군사적 적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로서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생화학무기가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험을 거듭했다. 탄저균이 많은 인구를 감염시켰을 때의 상황을 예상하려는 모의실험에서, 미국 정부는 병원균인 세라티아 마르세스센스(Serratia marcescens)와 바실루스 글로비기(Bacillus globigii)를 썼다. 탄저균과 비슷하지만, 해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균들이었다.
1950년 4월, 해군함정 두 대가 버지니아의 해안지방인 노포크와 햄튼, 뉴포트 뉴스에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살포했다. 주민들도, 국회도 그 일에 애해 알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있었다. 주민들은 병원균들이 만들어낸 구름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미국 내 최대 200곳에서 같은 실험이 이루어졌다. 군대는 뉴욕 지하철에다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풀기도 햇다. 1966년 여름,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철로에 있는 전구에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묻혀 놓았다. 그들은 철로와 철로 사이에 균을 떨어뜨려 놓기도 했는데, 그래야 전차들이 지나갈 때 일으키는 바람에 균이 골고루 날아가 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다른 군인들이 와서 지하철이 바실루스 글로비기를 얼마나 멀리까지 퍼뜨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공기 표본을 채취해 옷가방에 담아갔다. 결과는 기밀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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