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나는 닫힌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행인의 이상한 걸음걸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같군요.
그 사람은 바깥에 폭풍이 불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폭풍때문에 행인이 땅에 발을 붙이기도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때 나는 그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2.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저술활동을 한 오스트리아의 논리학자 알렉시우스 마이농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했다. 마이농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황금 산을 지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에 황금 산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물리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견지에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일각수, 부활절 토끼, 동화 속 요정, 유령, 도깨비, 네스 호의 괴물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라든가 "네스 호의 괴물은 큰 송어에 지나지 않는다"라든가 하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그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러셀은 매우 꼼꼼하고 질서 정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마이농이 지어낸 세계의 그림은 러셀이 보기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하고 무질서한 것이었다.
3.
대부분의 말에는 단 하나의 용법이 아니라 다수의 용법이 있게 마련인데, 이 다수의 용법들이 반드시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이라는 말을 예로 들었다. 온갖 종류의 게임이 있다. 페이션스, 체스, 배드민턴,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 캐치볼 등등. 그 특성도 가지가지이다. 경쟁하는 게임, 협력하는 게임, 팀을 이루어 하는 게임, 개인이 하는 게임, 기술이 필요한 게임, 운에 달린 게임, 공을 이용한 게임, 카드를 이용한 게임, 그렇다면 이 모든 게임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답은 간단하다. "그런것은 없다" "게임"의 본질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단어들을 "가족 유사성" 개념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마치 가족과 같다. 가족 중 일부는 목선이 특징적이고, 일부는 꿰둟는 듯한 파란 눈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는 머리가 일찍 세고, 일부는 귀가 이상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가족 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단일한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을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이처럼 중첩되는 일련의 유사성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유사성들의 교차관계가 개념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념을 이런 점에서 실과도 같다. "실의 강도는 처음부터 끔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올이 중첩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가 그 저변에 깔린 논리적 구조를 잘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명제는 표면적으로 보아서는 그 논리적 구조를 잘 알 수 없다. 옷이 몸을 가리듯이 언어는 논리를 가린다. 헐렁한 점퍼는 진짜 몸매를 감출 것이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견해를 버리고 언어가 완벽하게 적동하는 질서에 따른다고 보았다. 언어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4.
언어는 규칙에 지배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공적인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실천과 "삶의 형식"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규칙은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허용되는 것과 허용될 수 없는 것을 정하는 기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의 언어, 즉 단 한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는 관념은 부조리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자기 내부에서 논박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찾으려 한 데카르트는 확실성이라는 성배의 탐색을 잘못된 방향에서 시작한 셈이다. "나는 생각한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의미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생각이라고 하는지, "생각"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가 먼저 확정되어야 한다. 그럴때에만 언어가 언어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초의 자리에 놓일 수는 없는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통찰로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철학적 전통을 뒤집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단단한 확실성의 토대를 발굴하는 고된 노역에서 해방되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철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덮어씌운 혼란의 그물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5.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홀리는 언어의 마법과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 언어, 즉 우리가 집에서 쓰는 말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의 당혹감은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될 때, "언어가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생겨난다. 어떤 것이 온통 붉으면서 동시에 푸를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심오한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법 규칙을 뿐이다. 아마 세계의 오지, 머나먼 정글의 어느 구석에는 관목이나 딸기 혹은 솥을 "온통 붉은 동시에 온통 푸르다"라고 묘사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부족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은 문제라기보다는 수수께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수께끼를 풀면서 우리는 러셀과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발굴한 것과 같은 숨은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 즉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다시 상기할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수 있을까? 일상적 어법에 따를 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을 타나내는 표현은 - "나는 빈이 오스트리아의 수도라는 것을 안다"처럼 - 의심의 가능성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태양은 지금 몇 시인가?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답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태양에서의 시간이라는 개념이 우리 언어 속에 차지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념의 적용을 규제할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6.
포퍼는 아마도 가장 유력한 마르크스주의 비판가였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내세우는 과학성은 포퍼에 의해 분쇄되었다. 포퍼에 따르면 유효한 과학은 자기 자신을 검증의 대상으로 만들며 그 진위를 시험해볼 수 있는 예측을 제시한다. 예측은 대담할 수록 좋다. 반면 사이비과학(포퍼는 네오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 범주에 집어넣는다)은 반증될 위험이 있는 분명한 예측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검증 자체를 회피하거나 예측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 예측에 명백히 어긋나는 증거를 어떻게든 다른 식으로 설명해버리려 한다.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형성이 가장 많이 진전된 국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 그건 말이지, 왜 그러냐 하면.." 자본주의는 부가 점점 더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 "아 그건 말이지, 왜냐하면.."네오마르크스주의가들의 이론은 이런 "아 그건말이지, 왜냐하면.."으로 가득 차 있다.(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예측을 제시했다. 초처는 비록 마르크스의 예측이 반증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높이 평가했다)
7.
진보가 시행착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포퍼의 생각은 20세기가 낳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이 대개 그렇듯이 그것은 극도로 단순하다...(중략)...포퍼는 민주주의를 한 나라가 어느정도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치품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통찰했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진보를 위한 필수 전제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내가 틀리고 네가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동의 노력을 통해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라는 식의 합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국민이 지배자를 선출할 수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진 것은 아니다. 포퍼는 "누가 통치할 것인가"라는 플라톤의 질문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합법성의 문제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자의적 통치를 가능케 한 수권법은 의회에서 다수결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나는 [열린 사회]에서 "누가 통치할 것인가"라는 플라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문제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 기존의 정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 것인가" 여기서 강조점은 정부를 선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를 제거하는 가능성에 놓여 있다.
8.
포퍼가 제기한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것이 온통 빨간 색이면서 동시에 온통 푸른 색일 수 있는가"라는 식의 질문을 배제하고 싶다면 그렇게 배제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허용될 수 있는 진술과 그렇지 않은 진술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의 이론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포퍼는 주장한다. 오직 수수께끼만이 존재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철학적 주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물론 옳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증명해야한다. 그런데 증명을 시도하다보면 그는 필연적으로 진짜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를 가르는 경계선의 정확한 위치를 어떻게 정학 것인가. 그러한 경계선이 정당한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러므로 설사 대부분의 철학이 문제보다는 수수께끼를 다루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가지 문제는 존재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