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나는 닫힌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행인의 이상한 걸음걸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같군요.

그 사람은 바깥에 폭풍이 불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폭풍때문에 행인이 땅에 발을 붙이기도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때 나는 그의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2.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저술활동을 한 오스트리아의 논리학자 알렉시우스 마이농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했다. 마이농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황금 산을 지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에 황금 산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물리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견지에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일각수, 부활절 토끼, 동화 속 요정, 유령, 도깨비, 네스 호의 괴물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라든가 "네스 호의 괴물은 큰 송어에 지나지 않는다"라든가 하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그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러셀은 매우 꼼꼼하고 질서 정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마이농이 지어낸 세계의 그림은 러셀이 보기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하고 무질서한 것이었다.

 

3.

대부분의 말에는 단 하나의 용법이 아니라 다수의 용법이 있게 마련인데, 이 다수의 용법들이 반드시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이라는 말을 예로 들었다. 온갖 종류의 게임이 있다. 페이션스, 체스, 배드민턴, 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 캐치볼 등등. 그 특성도 가지가지이다. 경쟁하는 게임, 협력하는 게임, 팀을 이루어 하는 게임, 개인이 하는 게임, 기술이 필요한 게임, 운에 달린 게임, 공을 이용한 게임, 카드를 이용한 게임, 그렇다면 이 모든 게임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답은 간단하다. "그런것은 없다" "게임"의 본질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단어들을 "가족 유사성" 개념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마치 가족과 같다. 가족 중 일부는 목선이 특징적이고, 일부는 꿰둟는 듯한 파란 눈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는 머리가 일찍 세고, 일부는 귀가 이상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가족 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단일한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을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이처럼 중첩되는 일련의 유사성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유사성들의 교차관계가 개념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념을 이런 점에서 실과도 같다. "실의 강도는 처음부터 끔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올이 중첩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가 그 저변에 깔린 논리적 구조를 잘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명제는 표면적으로 보아서는 그 논리적 구조를 잘 알 수 없다. 옷이 몸을 가리듯이 언어는 논리를 가린다. 헐렁한 점퍼는 진짜 몸매를 감출 것이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견해를 버리고 언어가 완벽하게 적동하는 질서에 따른다고 보았다. 언어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4.

언어는 규칙에 지배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공적인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실천과 "삶의 형식"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규칙은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허용되는 것과 허용될 수 없는 것을 정하는 기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의 언어, 즉 단 한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는 관념은 부조리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자기 내부에서 논박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찾으려 한 데카르트는 확실성이라는 성배의 탐색을 잘못된 방향에서 시작한 셈이다. "나는 생각한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의미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생각이라고 하는지, "생각"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가 먼저 확정되어야 한다. 그럴때에만 언어가 언어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초의 자리에 놓일 수는 없는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통찰로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철학적 전통을 뒤집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단단한 확실성의 토대를 발굴하는 고된 노역에서 해방되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철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덮어씌운 혼란의 그물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5.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홀리는 언어의 마법과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 언어, 즉 우리가 집에서 쓰는 말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의 당혹감은 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될 때, "언어가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생겨난다. 어떤 것이 온통 붉으면서 동시에 푸를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심오한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법 규칙을 뿐이다. 아마 세계의 오지, 머나먼 정글의 어느 구석에는 관목이나 딸기 혹은 솥을 "온통 붉은 동시에 온통 푸르다"라고 묘사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부족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은 문제라기보다는 수수께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수께끼를 풀면서 우리는 러셀과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발굴한 것과 같은 숨은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 즉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다시 상기할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수 있을까? 일상적 어법에 따를 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을 타나내는 표현은 - "나는 빈이 오스트리아의 수도라는 것을 안다"처럼 - 의심의 가능성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태양은 지금 몇 시인가?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답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태양에서의 시간이라는 개념이 우리 언어 속에 차지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념의 적용을 규제할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6.

포퍼는 아마도 가장 유력한 마르크스주의 비판가였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내세우는 과학성은 포퍼에 의해 분쇄되었다. 포퍼에 따르면 유효한 과학은 자기 자신을 검증의 대상으로 만들며 그 진위를 시험해볼 수 있는 예측을 제시한다. 예측은 대담할 수록 좋다. 반면 사이비과학(포퍼는 네오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 범주에 집어넣는다)은 반증될 위험이 있는 분명한 예측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검증 자체를 회피하거나 예측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 예측에 명백히 어긋나는 증거를 어떻게든 다른 식으로 설명해버리려 한다.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형성이 가장 많이 진전된 국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 그건 말이지, 왜 그러냐 하면.." 자본주의는 부가 점점 더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 "아 그건 말이지, 왜냐하면.."네오마르크스주의가들의 이론은 이런 "아 그건말이지, 왜냐하면.."으로 가득 차 있다.(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예측을 제시했다. 초처는 비록 마르크스의 예측이 반증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높이 평가했다)

 

7.

진보가 시행착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포퍼의 생각은 20세기가 낳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들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이 대개 그렇듯이 그것은 극도로 단순하다...(중략)...포퍼는 민주주의를 한 나라가 어느정도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치품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통찰했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진보를 위한 필수 전제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내가 틀리고 네가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동의 노력을 통해 진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라는 식의 합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런데 국민이 지배자를 선출할 수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진 것은 아니다. 포퍼는 "누가 통치할 것인가"라는 플라톤의 질문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합법성의 문제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자의적 통치를 가능케 한 수권법은 의회에서 다수결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나는 [열린 사회]에서 "누가 통치할 것인가"라는 플라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문제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 기존의 정부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 것인가" 여기서 강조점은 정부를 선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를 제거하는 가능성에 놓여 있다.

 

8.

포퍼가 제기한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것이 온통 빨간 색이면서 동시에 온통 푸른 색일 수 있는가"라는 식의 질문을 배제하고 싶다면 그렇게 배제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허용될 수 있는 진술과 그렇지 않은 진술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의 이론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포퍼는 주장한다. 오직 수수께끼만이 존재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철학적 주장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물론 옳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증명해야한다. 그런데 증명을 시도하다보면 그는 필연적으로 진짜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를 가르는 경계선의 정확한 위치를 어떻게 정학 것인가. 그러한 경계선이 정당한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러므로 설사 대부분의 철학이 문제보다는 수수께끼를 다루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가지 문제는 존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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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촘스키(이하 B):

만약 러시아가 미국을 정복한다면 로널드 레이건,조지 부시,엘리엇 에이브람스 등이 가장 먼저 침략자들의 편에 설 것입니다. 죄 없는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낼 것입니다. 전형적인 우파성향의 정치인들이니까요.


2.

B:

이런 과정에서 유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폭력문화를 키웠습니다. 이런 폭력 문화가 테크놀로지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테크놀로지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월등하지 못했으니까요.

유럽인들이 세상 방방곡곡에서 저지른 짓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야만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영국 상인들과 네덜란드 상인들-상인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상인의 탈을 쓴 전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이 아시아로 침입해 기존의 무역지대를 파괴해버렸습니다...(중략)...일본은 거의 완벽하게 서방 세계의 침략을 이겨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은 제3세계에 속하면서도 산업화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제3세계의 국가가 이제는 산업화된 세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중략)..."현 세계의 문제는 서방 세계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증오하며 식민정책을 종식시킨 것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대관용의 문명만이 식민정책처럼 고결한 과업을 해낼 수 있다. 식민 정책만이 전 세계의 야만인들을 비참한 상황에서 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그렇게 했고, 야만인들에게 막대한 선물과 혜택을 주었다. 하지만 그때 서방 세계의 지식인들은 그런 문화를 증오하며 위정자들에게 식민지에서 철수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가 현재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

나치가 남긴 문헌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중략)..그런데 이런 기사가 [월스트리트 저널]의 특집란에 실린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기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B:

미국의 사회학자가 여러 국가를 대상으로 종교성을 비교 연구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논문은 영국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축격적인 결과였습니다. 미국인의 4분의 3이 문자 그대로 종교의 기적을 믿고 있습니다. 악마,부활,하느님의 기적을 믿는 사람의 수가 그렇게 많다는 뜻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다른 산업국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비율은 이란의 모스크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수치일 것입니다. 시칠리아 섬의 노파를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할 때에나 가능한 수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민이 그렇습니다.

정확히 2년 전입니다.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묻는 여론 조사가 있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 9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통계조사의 오차를 감안한다면 무의미한 수치입니다. 하지만 미국인의 절반 정도가 신의 뜻에 따른 진화, 결국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40퍼센트가 이 땅이 수천년 전에야 창조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수치를 얻으려면 산업사회 이전 시대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4.

B:

리프먼의 표현을 빌면 방향을 상실한 무리에 불과한 민중은 참여자가 아닌 구경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민중은 2년마다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다른 곳에서 내린 결정을 비준하거나 그들을 대표할 지배계급을 선택하면 충분합니다. 이런 제도적 장치는 지배집단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5.

B:

한편 제퍼슨의 정의에 따르면 민주주의자는 민중과 일체감을 갖고 민중을 신뢰하며, 민중이 가장 현명하지는 않더라도 다수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 가장 정직하고 안전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며 소중히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달리 말해 민중이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민중에게 힘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자입니다...(중략)..특히 제퍼슨은 '금융기관과 돈을 추구하는 법인'을 경계하라고 가르치며, 그런 집단의 힘이 커질 경우 귀족집단이 결국 승리해서 미국 혁명의 열매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퍼슨이 가장 두려워했던 현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6.

B:

이익은 민간 기업에게 돌아가고 그에 따른 비용은 사회화시킨다는 원칙은 아미 도식화된 공식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용은 국가의 몫, 즉 국민의 몫인 반면에 이익은 국민의 것이 아닙니다.


7.

B:

그런데도 이런 현상은 '노동 시장의 유연성 증가'라는 말로 미화되었습니다. 유연성이 곧 개혁, 즉 좋은 것을 뜻하는 단어로 둔갑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연성은 불안정을 뜻할 뿐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일자리가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8.

B:

라디오를 민간 기업에 넘긴다는 것은 시장논리에 따라 국민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개념을 왜곡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의 힘은 당신이 소유한 달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민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하지만, 선택의 대상들이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9.

B:

얼마 전 나는 정보고속도로를 찬양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정확히 인용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새로운 쌍방향 테크놀로지의 경이로움과 힘을 찬양하며 두 가지 기본적 예를 제시했더군요.

먼저 여자에게는 쌍방향 테크놀로지가 한층 개선된 방식의 홈쇼핑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모델이 상품을 들고 나와 선전을 합니다. 당신에게 "그래, 저걸 사야 돼!"라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당신은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그럼 그들이 몇 시간 내에 그 상품을 당신 집까지 배달해줍니다. 쌍방향 테크놀로지가 이렇게 여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남자를 위해서는 슈퍼볼을 예로 들었습니다. 씩씩한 미국 남성이라면 슈퍼볼에 미쳐야 한다는 속설까지 있으니까요. 지금은 슈퍼볼을 볼 때 박수를 치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고작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쌍방향 테크놀로지는 게임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쿼터백이 동료들을 모아두고 다음 플레이를 지시하는 동안, 컴퓨터 앞에 앉은 사람들도 다음 플레이를 결정하는데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쿼터백이 패싱,런닝,펀팅 등을 선택해야 할 기로에 있을 때,네티즌들도 나름대로의 판단을 컴퓨터에 입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쿼터백의 행동에 실질적으로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다만 플레이가 끝난 후 텔레비전 채널에 투표 결과가 나옵니다. 예컨대 네티즌의 63퍼센트는 패싱을, 24퍼센트는 런닝을 선택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이 남자를 위한 쌍방향 테크놀로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이 세상일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고 선전합니다. 건강보험처럼 사소한 문제들은 어떻게 결정되든 신경쓰지 말라고 선전합니다.


10.

B: 

기업은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운영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11.

B: 

미국식으로 해석하면, 그런 부자들이 권력을 잡지 못한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닙니다.


12. 

라디오 청취자 : 개인적 차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중략)..대부분의 사람이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시간이 없습니다. 공공요금은 줄곧 인상되지만 누구도 공공요금을 인상시킬 수밖에 없는 객관적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업이 취득할 수 있는 이윤율에 한계를 두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물론 그런 조치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B :

나는 그런 조치도 충분히 민주적이라 생각합니다. 권력과 부가 민주주의를 왜곡시킬 정도로 집중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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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이비드 바사미언(이하 A):

내 경험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한 글들은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낱말들로 가득해서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노암 촘스키(이하 B):

나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직업병인 듯하고, 참여에서의 회피처럼 읽혀졌습니다.

 

 

2.

A:

내가 선생님과 인터뷰를 한다니까 선생님에게 선생님의 글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주 진지한 학술잡지인 [이론]에 실린 리처드 올린의 논문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이 논문에서 올린은 "[세계질서 과거와 오늘]은 이미 확인된 사실을 거듭 주장하고 인용구절로 가득한 넋두리"라고 평가절하하며, 선생님을 이데올로기의 포로라고 혹평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관점은 극우의 관점과 일치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구태의연한 원한으로 가득찬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B:

당신에게 올린의 평가가 설득력 있는 비판처럼 들린다면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중략)..올린이 나를 비난한 이유는 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나 미국을 '전체주의 국가' 혹은 '파시스트'라고 매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론]에 올린의 글이 게재된 시기에 우연히도 그리스와 런던에서 나와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두 곳 모두에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해외에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였습니다. "왜 당신은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라고 말하는가?" 다른 나라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결국 내 글에서 그런 부분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올린은 내가 미국을 전체주의국가이고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는 부분만을 읽었던 모양입니다.

또 올린은 내가 오웰리즘을 사용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마 [동물농장]의 서문에 해당되지만 발표되지 않는 오웰의 글에서 몇 구절을 인용했다고 그렇게 말한 듯 합니다. 하기는 오웰이, 필시 영국을 가리켰지만 아주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반골적인 생각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는다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자들이 언론을 소유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입니다. 부자들은 그들에게 불리한 사상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옥스퍼드나 캠브리지를 다녀도 "말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는 이상한 예법을 배웁니다. 그런 예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A:

하지만 확인된 사실을 거듭 주장하고 인용구절로 가득한 책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중략)..

 

B:

나만 그렇게 비난받는 것은 아닙니다.좌파에 속한 평론가라면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이 숙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단어마다 주석을 붙이지 않거나, 그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한다고 욕을 먹을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단어마다 주석을 붙이면 쓸데없이 현학적인 체 한다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오웰이 지적한대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3.

B:

과점구조를 유지하려면,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평등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합니다. 소극적이고 무관심하며 순종적인 소비자가 되어야 하고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물론 최상층 사람들은 더 많은 권리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들끼리는 평등합니다...

 

4.

B:

듀이는 "그림자가 약해진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림자가 약해지면 본질을 약화시킬 수 잇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브라질 농민들의 슬로건, 즉 "새장의 바닥을 넓히자"라는 슬로건을 생각해보십시오. 궁극적으로는 새장을 깨뜨려야하겠지만, 새장의 바닥을 넓히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을 향한 첫 걸음일 수 있습니다.

 

5.

B:

나는 좌익과 우익, 이런 개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좌익에는 레닌주의자도 포함되지만, 내 생각에 레닌주의자는 많은 점에서 극우에 가깝습니다. 레닌주의자들은 정치권력에 욕심을 냈습니다. 어느 집단보다 정치권력을 탐했습니다...(중략)..

좌익과 우익, 이런 전통적인 정치 용어는 이미 의미를 대부분 상실한 상태입니다. 너무나 왜곡되어 차라리 그런 용어 자체를 폐기하는 편이 더 나을 듯 싶습니다.

1980년대부터 아주 중요한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는 '평화의 증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은 편한 삶을 버리고 제 3세계의 마을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하얀 피부가 그들의 고국이 획책한 국가 테러에서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 주변 사람들을 보호해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좌익일까요, 우익일까요? 정의,자유,결속,연민 등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는 그들의 꿈은 전통적인 좌익의 이상과 완전히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보수적인 기독교 공동체 출신입니다. 나는 그들을 정치 스펫트럼에서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저 인간답게 행동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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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켈름
아이작 B. 싱어 지음, 황명걸 옮김 / 두레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그가 1978년 노벨 문학상을 탔을 때 타임지는 '현존하는 최대의 19세기 작가'라고 했단다. 내가 20세기에 만난 니체가 '21세기를 살았던 19세기의 사람'이라면, 21세기에 만난 아이작 싱어는 '19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이를 위한 이야기와 어른을 위한 이야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작가는 이 이야기를 '이 세상의 모든 슐레밀에게, 그리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무구한 가족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전쟁과 잔인한 박해로 인해 어른이 될 기회를 잃어버린 수많은 아이들에게 바친다고 한다. 정말 이 책을 바치기에 더없이 좋은 대상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사어가 되다시피한 이디시어로 작품을 쓰길 고집하는 유대인 미국작가의 스물 두편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두가지를 인정하게 된다. 하나는 그가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에 뒤쳐지는 것들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특히 '첫번째 이야기'에 포함된 여덞편의 이야기가 와닿았는데, 그것은 이 책의 제목하고도 잘 맞아떨어진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각각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로 묶여져있긴 하지만 그 관련성이 희박한 반면 첫번째 이야기에 실린 여덞편의 이야기들은 동일한 등장인물들이 있어서 마치 정말 켈름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접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독립된 이야기로서 갖는 재미도 갖추고 있다. 또 이 여덞편의 이야기들은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나머지가 철학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특히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모두가 행복했다는 결말과 따뜻함이 너무 좋다. 코메디 소재에 어울릴듯한 많은 바보들의 이야기가 이처럼 다가오다니...이 책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는 거짓이 아니었다.

 

합리적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우스운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켈름에 나도 한번쯤 가서 살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런 바보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된다. 작가는 이 이야기들로 어떤 가치판단을 종용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남들의 어리석음을 보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확인하든, 옛날에는 바보도 미친사람도 같이 살았다고 하는 말처럼 이들 모두를 사랑하는 작가를 보든, 우리의 현명함이 과연 현명함인지 한번쯤 의심을 갖든, 그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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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편집하다 - 기획자노트 릴레이
기획회의 편집부 엮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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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굳힌 요즘, 아직 발도 딛지 않았는데 불안하고도 설레는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곧 시작될 한겨레 문화센터의 강좌에서 이 책을 읽게 한다니 미리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해 학교에서 이 책을 빌렸다.

 

굳이 출판 편집자, 기획자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화의 숨은 뒷이야기가 재밌듯, 한권의 책에 숨은 뒷이야기를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읽어봐야겠다는 책이나 생각나는 잡념들을 메모해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 나는 책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여기 나오는 일들을 내 일마냥 간접경험하고 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나도 언젠가 기획회의에 이런 글을 쓰게 될 날이 올까? 

 

이런 일도 하는구나, 재밌겠는데?

음, 술을 정말 자주 마셔야하나 보군;;

 

집념,집중,초심,메모,관계,관심,정성,도전,안목...

 

책만드는 사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저자와 원고를 보는 안목과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자료 수집, 사회의 트렌드를 읽는 눈 등등...맘에 들고도 도전해보고싶은 능력들이다.

 

읽으면서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가 내게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소리인지 모른다. 나는 아직 출판계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 철학, 역사, 미술, 자연과학....그 외에 어린이책에 대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관심이 생겼다.

 

아마도 강좌를 들으면서 이 책을 또 읽게 되겠지만, 책에 대해서, 저자에 대해서, 책 만드는 일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 소중한 책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면 바쁘더라도 최소한 일년에 나무 한그루는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 만드는 일은 작게는 나무에, 크게는 지구에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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