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넘어졌어요"

여자는 이 사실을 털어놓고 선처를 호소하며 중얼거렸다.

"있잖아요, 난 넘어졌어요"

 

"당신 혼자만 넘어진 게 아니오"

휠체어를 탄 사람이 말했다.

 

-'응급실' 중..

 

2.

"저녁은 집에서 먹는 게 나을거요.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좋은 걸 식당에서 먹겠다는 거요? 놀러 다니고 돈을 쓰고 절대로 조용히 멈춰서 생각하는 법은 없고" 

그의 목소리는 상처받은 감정으로 가득찼다.

..(중략)..

"난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폭풍우' 중..

 

3.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궁금하겠지?" 그는 성급히 말하더니 그 말이 진부하게 들려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요, 궁금했어요" 그의 말에 응수하며 그녀는 꽃 가까이 앉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온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사온 꽃들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가스 불 옆 안락의자로 얼른 옮겨앉았다. 그 의자에 앉으면 허리가 똑바로 펴졌다. 그녀는 가볍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여자는 한숨 소리를 들으며 그 또한 그 소리를 듣고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중략)..

그는 일어날 듯 하다가 달리 옮겨 갈 곳이 없음을 알고 다시 앉았다. "여긴 별로 넓지 않군" 그가 말했다. 그것은 비난처럼 들렸고 그래서 그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넓을 필요 없어요" 이제 이 말이 비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짜증 섞인 몸짓을 했다.

 

-'흙구덩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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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은 통하지 않는다. 예컨데 나는, 강아지보다 지능이 훨씬 높았지만, 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에도 여전히 신문의 경제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략)..
육탄전 일보 직전까지 갔던 그날의 작은 소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다른 친구들의 현명한 예방조치 덕분에 그 정도로 끝이 났다. 내가 내린 그날의 결론은 이랬다. "경제학을 공부하면 인간성이 나빠진다."

 

2.
알아듣기 쉽게 '돼지 같은 인간'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이 돼지 또는 인간은 처음에는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먹어도 먹어도 남을 만큼 먹이를 많이 구했다. 막상 이렇게 되니까 돼지는 이제 먹을 것만 가지고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제가 싼 똥이 너무 더러워 기분이 나빠졌다. 돼지는 또 일해서 집을 깨끗이 수리하고 화장실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침대를 들여놓고 마누라도 구했다. 그런데도 돼지는 여전히 충분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룸살롱에 진출해서 날씬하고 예쁜돼지와  춤도 추고 2차도 갔다. 그것마저도 곧 싫증이 난 돼지는 호화유람선을 타고 세계일주 여행을 한다. 유람선 안에서 돼지는 생각한다. 나는 정말 행복한가?
..(중략)..
자원의 양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걸로 충족할 수 있는 욕구의 양 역시 유한하다. 방정식 우변의 분자는 유한한 크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충족시키고 싶은 욕구는 무한하다. 분모는 무한대라는 이야기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나누면 뭐가 되나? 답은 0이다. 이건 '수학적 진리'다. 돼지가 새로운 그 무엇을 소유하고 소비할 때마다 느낀 행복은 '심리적 착각'에 불과하다. 수학적으로 볼 때 '무한한 욕망'을 가진 돼지의 행복지수는 언제나 0이다.

 

3.
경제학에서 '합리적'이라는 표현은 단지 그런 의미일 뿐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거나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이걸 오해하면 절대 안 된다.
..(중략)..
현실의 인간은 시기심과 동정심을 가진 존재다. 그는 언제나 이웃집 담장 너머를 흘끔거리면서 남이 어떻게 사는지를 살핀다. 그러나 경제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언제나 혼자서 자기의 행복을 키우는 데만 관심이 있는 철두철미 이기적이고 고립된 존재다.
..(중략)..
경제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증명 없이 참으로 인정하는 명제, 즉 공리이다.

 

4.
물론 '자발적 매춘'이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일리가 있다. 먹고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누가 몸을 팔겠는가. 이런 점에서 모든 매춘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논리를 성매매에만 적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데 있다. 먹고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누가 막노동판에 나가겠는가. 먹고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누가 유독가스가 흘러 다니는 영세한 화학공장에 다니겠는가. 먹고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누가 남들이 다 곤히 자는 새벽길에서 냄새 나는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미화원을 하겠는가.

 

5.
한국 민간가계의 저축률은 미국이나 유럽국가는 물론이요 근면하기로 유명한 독일과 일본보다 더 높다. "온 국민의 과소비가 IMF위기를 불렀다"는 일부 정치인과 경제 전문가들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황당하고 실증적으로도 아무 근거가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베짱이보다는 개미 쪽에 훨씬 더 가깝다.

 

6.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말이 있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타당한 건 아니다. 나는 예컨대 1980년대의 전두환 정권이 당시 국민의 수준에 맞는 것이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의 민주주의 역량이 부족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삼청교육대와 국보위, 고문살인과 보도지침 따위에 어울리는 국민이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7.
유력 신문사들은 일부 언론학자와 경제학자들의 입을 빌어 1999년 정부 규제개혁위원회가 규제 완화 차원에서 폐기했던 '신문고시'를 되살리는 것이 정부의 신문 길들이기이며, 무가지 배포는 소비자에게 이익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보수적인 법률가 모임에서는 위헌심판 청구를 하겠노라고 했다. 신문사가 공정위의 '고객'인데 고객이 거부하는 신문고시를 왜 공정거래위원회가 강요하느냐고 쓴 신문기자도 있었다. 모두 다 헛소리다.
..(중략)..
만약 신문사가 공정위의 '고객'이라면 도둑놈도 경찰의 '고객'이 될 것이니 이런 해괴한 논리가 달리 또 있을까?
신문 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정부가 손대지 말고 신문업계의 '자율규체'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220여 년 전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 제 1편 제10장에 남겨두었던 유명한 말씀을 한번 되새김질해 볼 필요가 있겠다.


 

동업자들은 즐겁게 놀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서로 만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만나기만 하면 대화는 언제나 국민대중에 대한 음모로 끝난다.

 

8.
의사들이 즐겨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일약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던 어느 논객은 이것이 '의료 자본주의'와 '의료 사회주의'의 싸움이라고 주장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료 서비스 시장과 의료 보험 시장은 원래부터가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예외 영역이어서 국가의 개입과 통제는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하다.
..(중략)..
의사는 특별한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며, 자선사업가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살피는 목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되었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의사가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남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돈을 탐해서 안 될 이유는 없다.

 

9.
전염병과 인구 증가 사이의 역사적 상관관계를 연구한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약품과 수술 등 의료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평균수명 연장에 기여한 바는 상대적으로 매우 미미하다. 그보다는 상하수도의 분리와 방역 등 일반적인 공중보건정책, 그리고 주거환경과 식생활의 개선 등으로 영아사망률과 전염병 사망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이 평균수명 연장의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니 의료기술이 더 발달하면 나도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10.
국민건강보험은 사실 의료보험이 아니라 진료비 할인 제도에 불과하다. 보험 적용이 안 되는 게 너무 많고 본인 부담율이 너무 높아서 암이나 신장 계통 만성질병 등 정말 큰 병에 걸렸을 때는 보험기능을 하지 못한다. 연예인들이 암 환자를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모금을 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는데, 의료보험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이런 것은 필요가 없다. 원래 보험이라는 것이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대비한 것인데 정말 큰 위험이 닥칠 경우 소용이 없으니 이걸 어찌 보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11.
국가채무를 가구수로 나누어 뽑은 액수를 들이대며 온 국민이 다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분노와 공포감을 조성했지만, IMF차입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부채를 국내에서 조달했다는 사실, 따라서 그 어머어머한 나라 빚의 채권자 역시 우리 국민이라는 사실을 주목한 언론사와 정치인은 별로 없었다.
..(중략)..
100조 원에서 400조 원에 걸쳐 저마다 다른 수치를 들이대지만, 어쨌든 사람을 겁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규모다. 하지만 겁먹을 이유는 별로 없다. 경제학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악용하는 정치적 선동에 휘둘리면 자기만 손해다. 대한민국은 해마다 생기는 국민소득이 국가채무보다 훨씬 많은 나라다. 게다가 대부분의 국가채무는 결국 우리 국민이 자기 자신에게 빌린 돈이다. 자기 자신에게 꾼 돈의 액수가 너무 크다고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까?

 

12.
아주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이익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 정도 개인적 이익 때문에 번거로운 활동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적은 수의 사람들이 큰 이익을 얻는 문제가 있으면 강력한 이익단체가 생긴다.
..(중략)..
첫째 소수의 이익은 다수의 이익보다 조직하기 쉽다. 둘째 생산자의 이익은 소비자의 이익보다 조직하기 쉽다.

 

13.
공공재라는 따분한 이름을 가진 바구니에는 도둑을 잡고 산간벽지에 노선버스를 넣어주는 그런 좋은 것만이 아니라 독재와 인권유린 같은 끔찍한 '흉기'도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14.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투표를 통한 집단적 의사결정에서는 규칙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그리고 어떤 규칙이 다른 규칙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특정한 표결방식을 통해서 권력을 잡은 집권세력이 야당을 존중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15.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 대한 리스트의 비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영국적 세계'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고, 미국은 정보통신, 항공우주, 생명공학 등 현재 돈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돈이 될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했다. 자유무역론은 한때 영국의 이데올로기였지만 오늘날 그 이데올로기의 주인은 미국이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통화기금(IMF) 등 거의 모든 국제경제기구를 통제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이러한 미래지향적 전략산업을 국제경쟁에서 보호하거나 인위적으로 육성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다. 한때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율을 자랑했던, 그리고 조국 독일에서 추방당한 보호무역론의 원조 프리드리히 리스트를 위대한 경제학자로 떠받들었던 과거는 모두 망각 속에 묻어버린 채 말이다.

 

16.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국제 금융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를 일산 저택으로 초대해 극진한 대접을 한 적이 있다. 소로스는 1990년대 중반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 선진국 국민경제를 투기 대상으로 삼아 엄청난 돈을 벌었던 인물로서, 국제금융시장을 혼돈에 빠뜨리고 동남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 한국 등 멀쩡한 국민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범죄자라는 비난까지 듣고 있던 터였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조지 소로스의 만남은 국제적 자본 이동이 국민국가의 주권을 농락한다는 유럽지식인들의 진단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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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등지향적인 사회에서는 늦어도 모두가 천천히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경제의 끝은 어디인가. 왕회장의 눈물어린 감회를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하고 얼어붙은 세상이리라

 

2.

그런데 왜 헤어지는가. 결혼은 마치 암묵적인 장기계약과 같다. 경쟁시장에서 수많은 사람 중에 최고의 배우자를 선택하지만, 결혼하는 순간부터는 서로가 서로에게 꽉 얽매인 쌍방독점의 장기계약을 체결한 것과 같다. 이것은 마치 특정 기업에게만 가치있고 다른 기업에게는 쓸모없는 자본과 같다. 이런 특성 때문에 결혼 전후의 행동이 달라지고 이기심이 이타심을 압도하며 장기계약의 안정성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도덕적 해이 현상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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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 그레이트북스 1
페터 빅셀 지음, 김광규 옮김 / 문장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얇은 책을 읽고 느낀 감흥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이지 한방 맞은 느낌이다. 이 감흥의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붙잡고 풀어가야 할까. 손쉽게 책 자체부터 보기로 하자.

 

이 책을 읽는 중간에 친구를 만나 교보문고에 갈 일이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은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터라 지금 내가 빌려서 읽고 있는 책 말고 다른 판은 어떻게 생겼나 보고싶은 마음에 찾아봤다. 예담출판사로 기억되는데 책상은 책상이다라고 적혀 있는 책은 한 권뿐이었고 양장본이었다! 패이퍼백이 없다는 사실에 많이 실망했지만 그 책의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낀 실망하고는 차원이 다른, 아주 미미한 정도였다. 책을 넘겼을 때 나는 거기 삽입된 삽화들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이런 새로운 텍스트에 이런 진부하고 몽실몽실한 그림이라니..전혀 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므로 씹는 건 여기까지 하자.

 

이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말해볼까. 물론 페이퍼백일 뿐더러 값은 2500원이다. 같은 값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있는 브레히트 시집의 역자는 김광규씨다. 이 책의 역자도 김광규씨다. 문장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고 아마도 활자조판 시대에 만들어진 책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글자가 옆으로 누워있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책에는 그런 실수는 없고, 다만 그 페이지의 뒷면을 손으로 쓸어보면 오돌토돌 엠보싱처럼 만져지는 것이 있다. 자세히 보면 앞면의 글자가 종이에 베긴 것이다. 내가 이걸 알았을 때 얼마나 좋아했던가. 좋아한 일은 또 있다. 이 책에서 쓰인 한글은 지금의 맞춤법과 다르다. 못읽을 정도의 옛날 말이 아니라 '아무튼'을 '아뭏든'으로 적는다든지, '-습니다'를 '-읍니다'로 적는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걸 발견했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책 내용이 맘에 든 것과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낸다. 한자도 드물게 섞여있는 것도 좋았다.

뭐니뭐니해도 이제하 화백의 그림이 압권이다. 교보문고에 갔을 때만해도 누가 그린 건지 몰랐는데 가서 양장본으로 요새 나온 책의 그림을 보고 실망하면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그림은 아마 원서에 있는 원판 그림인가보다'하고 생각했다. 후에 우리나라 작가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저런 생각을 한 것이 정말 부끄러웠다. 왜 괜찮은 그림을 보고 당연하다는 듯 외국 사람이 그린 것으로 생각했을까. '아뭏든',  나는 이 책을 돌려주기 전에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로 그림들을 다 찍어둘 생각이다.

 

다음, 내용을 볼까.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는 온갖 괴상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2부는 그야말로 '창조적 글쓰기'란 이런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김광규씨의 해설에도 나와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기존 문학 장르의 어느 방안에 넣어야 하나. 3부는 한편의 이야기로 어떻게 읽으면 이것이 무슨 문학이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나도 읽으면서 그랬다. 하지만 이건 60년대의 '문학작품'으로 엄연히 대접받고 있다고 한다.

 

내게 이 책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것은 처음의 이야기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죽 마음에 들었던 것이 더 큰 이유겠지만 '첫' 이야기는 '첫인상'과 같다.) '지구는 둥글다'는 이 이야기를 읽고 쥐스킨트가 생각났다. 왜 생각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메리카는 없다'에서의 상상력에서는 탄복했고, '요도크 아저씨'에서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유명한 씬-모든 사람들이 '말코비치' 이 한 단어로 대화하는 장면-은 분명히 이 이야기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여기서만큼 빛을 발한 이야기도 없다고 생각된다.)

 

2부의 이야기는 그림이요, 영화요, 연극이다. 이 모두이면서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본인은 번역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생객해볼 때, 번역은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2부에서 그렇다.) 읽으면서 머리 속으로 문장들을 그림으로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내가 방금 쓴 표현이 너무나 흔한 표현이라 잘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혹자는 평소에 내가 상상력이라고는 전혀 없이 글을 읽을 때 머리 속에도 역시 글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은 아니다. 

 

3부 '스위스인의 스위스'를 읽으면서 좀 덜 전투적이고 좀 더 감성적인 조지 오웰의 글을 읽는 듯 했다.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보수보다는 변혁에 방점을 두는 작가의 사고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통찰력이 대단하다.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내가 읽은 이 책, 문장사에서 나온 다소 옛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책은 더 훌륭하다. 지극히 개인적 감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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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은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늙은 것을 젊게" 만들고, 심지어 "문둥병조차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만들며, "늙은 과부에게도 '젊은 청혼자들'이 오게" 만든다고('아테네의 타이먼' 4막 3장). 맑스는 "화폐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며 이 구절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

 

2.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아니 오늘날에 더욱 셰익스피어의 말을 실감할 것이다. 최근 어느 화폐 심리학자는 화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실감케 하는 말을 했다. "조사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돈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만큼 돈에 대한 예속을 잘 보여주는 말이 또 있을까.

 

3.

물물교환을 했다고 해서, 혹은 저질 주화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들이 곧바로 큰 불편을 겪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화폐가 삶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불평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

..(중략)..

기층 민중들은 화폐가 없어서 불편했다기보다, 화폐가 없으면 불편한 상황 속으로 내던져졌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폴라니가 잘 지적했듯이 생존을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에서만이 어떤 불편,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공포가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4.

이처럼 화폐를 확보하는 것이 모두에게 관건이 되면,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와 화폐 형태로 부를 축적한 자산가들은 곧바로 경제 전반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5.

화폐 유통이 특정한 인간관계를 전제한다는 손쉬운 증거 중의 하나는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 화폐 거래를 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친밀감이 높고 내적인 결속이 강한 공동체에서 화폐 거래는 어떤 어색함을 불러일으킨다.

 

6.

모두가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떨어져 있는 상황. 각자는 자기 생존에 필요한 재화들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재화를 '교환'을 통해서 얻어야 한다. 자신의 생산물 중 남는 부분을 타인의 생산물 중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과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욕구의 이중적 우연일치'라고 하는 불편이 생겨난다.

..(중략).

이때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어떤 하나의 상품(타인들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상품)을 확보하도록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스미스가 화폐의 기원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각자가 자기 생존을 위해 타인과 교환하고 그 과정에서 화폐가 생겨난다는 주장의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공동체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중략)..

원시공동체들에서 판단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다.

 

7.

각 공동체들은 대외적 자율성과 대내적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 과제 때문에 경제 운용에 있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자급자족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의 형성을 방지'하는 것이다. 생산이 너무 부족하면 다른 공동체에 의존해야 하고, 생산이 너무 많아 잉여가 생기면 그것 때문에 권력의 분화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일반화된 등가물로서 화폐는 신분이나 연령 등의 체계는 물론이고 공동체들 사이의 온갖 차이들을 제압해버린다.

 

8.

맨더빌은 아예 '적선할 바엔 사치를 하라'고 했다. 적선이 가난한 자들을 더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가난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환원하는 것은 부를 개인의 노력의 결과로 간주하는 것만큼이나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출처도 불분명한 이야기가 빈민 문제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메기가 사는 곳의 미꾸라지가 건강하듯이, 빈곤의 공포가 빈민들을 나태하지 않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9.

가장 경계할 것은 지배적 유형과 우수한 유형을 혼동하는 진화론적 편견이다.

 

10.

화폐는 어떤 질적인 차이도 알아보지 못한다. 화폐는 자신이 마주한 사람의 혈통, 성별, 나이를 묻지 않는다. 화폐는 철저한 평등주의자이며, 모든 차이들을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동일자이기도 하다.

 

11.

화폐를 앞에 두고 그 정체를 묻는다면, 우리는 한꺼번에 울려오는 여러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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