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은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늙은 것을 젊게" 만들고, 심지어 "문둥병조차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만들며, "늙은 과부에게도 '젊은 청혼자들'이 오게" 만든다고('아테네의 타이먼' 4막 3장). 맑스는 "화폐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며 이 구절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

 

2.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아니 오늘날에 더욱 셰익스피어의 말을 실감할 것이다. 최근 어느 화폐 심리학자는 화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실감케 하는 말을 했다. "조사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돈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만큼 돈에 대한 예속을 잘 보여주는 말이 또 있을까.

 

3.

물물교환을 했다고 해서, 혹은 저질 주화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들이 곧바로 큰 불편을 겪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화폐가 삶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불평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

..(중략)..

기층 민중들은 화폐가 없어서 불편했다기보다, 화폐가 없으면 불편한 상황 속으로 내던져졌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폴라니가 잘 지적했듯이 생존을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에서만이 어떤 불편,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공포가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4.

이처럼 화폐를 확보하는 것이 모두에게 관건이 되면,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와 화폐 형태로 부를 축적한 자산가들은 곧바로 경제 전반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5.

화폐 유통이 특정한 인간관계를 전제한다는 손쉬운 증거 중의 하나는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 화폐 거래를 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친밀감이 높고 내적인 결속이 강한 공동체에서 화폐 거래는 어떤 어색함을 불러일으킨다.

 

6.

모두가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떨어져 있는 상황. 각자는 자기 생존에 필요한 재화들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재화를 '교환'을 통해서 얻어야 한다. 자신의 생산물 중 남는 부분을 타인의 생산물 중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과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욕구의 이중적 우연일치'라고 하는 불편이 생겨난다.

..(중략).

이때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어떤 하나의 상품(타인들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상품)을 확보하도록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스미스가 화폐의 기원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각자가 자기 생존을 위해 타인과 교환하고 그 과정에서 화폐가 생겨난다는 주장의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공동체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중략)..

원시공동체들에서 판단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다.

 

7.

각 공동체들은 대외적 자율성과 대내적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 과제 때문에 경제 운용에 있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자급자족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의 형성을 방지'하는 것이다. 생산이 너무 부족하면 다른 공동체에 의존해야 하고, 생산이 너무 많아 잉여가 생기면 그것 때문에 권력의 분화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일반화된 등가물로서 화폐는 신분이나 연령 등의 체계는 물론이고 공동체들 사이의 온갖 차이들을 제압해버린다.

 

8.

맨더빌은 아예 '적선할 바엔 사치를 하라'고 했다. 적선이 가난한 자들을 더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가난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환원하는 것은 부를 개인의 노력의 결과로 간주하는 것만큼이나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출처도 불분명한 이야기가 빈민 문제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메기가 사는 곳의 미꾸라지가 건강하듯이, 빈곤의 공포가 빈민들을 나태하지 않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9.

가장 경계할 것은 지배적 유형과 우수한 유형을 혼동하는 진화론적 편견이다.

 

10.

화폐는 어떤 질적인 차이도 알아보지 못한다. 화폐는 자신이 마주한 사람의 혈통, 성별, 나이를 묻지 않는다. 화폐는 철저한 평등주의자이며, 모든 차이들을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동일자이기도 하다.

 

11.

화폐를 앞에 두고 그 정체를 묻는다면, 우리는 한꺼번에 울려오는 여러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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