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번째가 먹을 것이요, 그 다음이 조직이다. 둘 다 사는 데는 불가결한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골라 그들에게 책임을 맡기는 것. 이곳 병실에서 공존하기 위한 규칙을 세우고 승인하는 것. 바닥을 쓴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세탁을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들의 규칙을 정하는 것.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평할 것이 없다. 그들은 심지어 비누와 세제도 주었다. 늘 우리 침대를 정돈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잃지 않는 것이고, 우리를 경비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인 군인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사상자는 더 이상 원치 않는다. 저녁에 이야기나 우화나 일화같은 것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줄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야지. 혹시 성경을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창조된 이후의 모든 일을 되새겨볼 수 있을 텐데.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2.

말이란 그런 것이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 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3.

내 목소리가 나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말하자면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40대만 넘으면 '원로'로 자처하면서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열정을 쉽사리 접어버린다는 것이다.

 

 

2.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드는 지식이란 쉬임없이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거기에서는 원로의 권위나 노년의 안식 따위는 필요없다.

 

 

3.

더 폼나게 말하면, 심해를 탐사하는 고래의 충혈된 눈과 단 몇걸음에 히말라야를 종단하는 거인의 다리를 지녔다고나 할까.

 

 

4.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앎이 기쁨이라는 전제는 잊혀진 지 오래되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앎이란 그저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는 것, 고통을 감내하면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

세상에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6.

문턱을 한꺼번에 넘기는 어렵지만 하나씩 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개는 단번에 정상에 도달하려 하기 때문에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법이다.

 

 

7.

자신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사는 건 바보다. 타인의 능력과 제대로 접속하면 내가 지닌 능력의 몇십 배의 능력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8.

가족주의의 속내는 참 허망하기 그지없다. 중형 아파트, 근사한 자동차, 남부럽지 않은 소비, 일류대학교, 노년을 위한 보험-. 우리 시대 가족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지표들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상류층이건 하층민이건 거의 예외가 없다.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이미 거기에 도달한 경우는 거기서 좀 더 상승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셈이다.

 

 

9.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10.

왜냐하면 사랑이 생에 대한 기쁨이라면 그 충만함은 흘러 넘치게 마련이다. 흘러 넘치지 않고 단지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멈추어버린다면? 그렇다면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짧은 열정 뒤의 긴 권태. 그리고 그 이후에는 권태를 제도와 도덕의 힘으로 버티려는 안간힘. 그리하여 다시 연민과 희생이라는 수렁 속으로 들어가면서 체념하는 것. 다른 하나는 변태적 쾌락의 길.

 

 

11.

다만 다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그 길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그것도 행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남보다 덜 불행해지기 위해서일 뿐이다.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살다니.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12.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신체가 수동적, 방어적으로 될 뿐 아니라 계속 다른 사람들과 불협화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중략)..

건강할 때는 저절로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배려는 근본적으로 의무나 희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임을 그때 알았다. 하지만 몸의 균형이 깨어지면 타인을 배려할 수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 전에 잘 하던 것까지 귀찮아진다. 더욱 문제인 것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이 풀릴 리 없다. 좋은 사람이 와도, 훌륭한 기회가 와도 감당하지 못한다.

 

 

13.

나는 여성의 사회적 소외의 단적인 예가 체육교육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몸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 아니 그 이전에 몸을 능동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교육과정을 마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대한 조절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여성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14.

흔히 공동체라고 하면 이념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진지한 집단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진지함은 공동체의 치명적 약점이다. 그런 공동체들은 내적으로는 상하위계가 작동하게 되는 한편, 외적으로는 안팎의 경계가 뚜렷해짐으로써 결국에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돈과 권위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들의 성격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떤 유형이건, 어떤 상처와 기억을 갖고 있건 나는 코뮌이 살아 움직이려면 '유머러스'해야 된다고 굳게 믿는 바이다. 웃음이야말로 일상의 축제를 만들어내는 기초이자 원동력인 까닭이다.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떡하냐고?

..(중략)..

웃기지 못하면 잘 웃기라도 해라.

 

 

15.

돈과 지위, 명성 따위를 버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말 버리기 어려운 건 무의식에 새겨진 자의식이다. 그것은 때로는 교만과 욕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과잉겸손과 나약함으로, 때로는 감상과 무력함으로,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관계와 활동을 가로막는다.

 

 

16.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17.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 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중략)..

자신의 분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우리 시대 전문성의 실체이다.

..(중략)..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런 부조리와 이러한 지적 생산방식과는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 아니다.

 

 

18.

인간의 악덕은 동물에서 찾고, 미덕은 인간만이 점유하는, 참 유치하고도 조잡한 '언어 게임' 아닌가.

 

 

19.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 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 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한편 대사회적으로 그것은 가족의 안녕을 모든 가치의 우위에 두는 가족이기주의를 낳았다.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공공적 삶은 설 땅을 잃게 만들었다. 공동체적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제외한 여타 공동체는 한국인들의 삶에서 사실상 관념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임지현,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 중..

 

 

2.

걸핏하면 언론이나 정부가 사회불안을 강조하면서 '안보 의식 해이' '기강 이완'이니 '우리 내부의 허점' '뒤숭숭한 세태' 운운할 때 뻔히 요청되고 강화되는 것은 '풀어줬더니 군기가 빠졌다'는 식의 군사주의적 질서 의식이다.

 

3.

반세기를 넘게 재생산된 반공주의 회로는 모든 불법적이고 부패한 현실을 코 앞에서 보면서도 그럭저럭 순응하고 사는 버릇("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세상이 다 그런거지"), 그것에 대한 도전이 도전자 개인에게 쓸모없는 고통과 번민을 안겨 줄 것이라는 공포("너 혼자 그래봐야 너만 손해야, 세상이 바뀌겠냐?"), 이것을 통해 유지되는 집단적 범죄 행위에 대한 동참과 인정("너나 나나 다 그렇게 뜯어먹으며 사는 거지, 도덕 군자라고 별 수 있냐?")의 정치 사회적 문화를 더욱 강화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권혁범, '내 몸 속의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 중..

 

 

4.

모든 저항을 무조건 물리력으로 분쇄하려는 파시스트적 국가와 그에 대한 맹종에 길들여진 냉소적인 사회에 절대적 도덕적인 원칙을 위해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이해하였다.

 

-박노자,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 중..

 

 

5.

그래서 '우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 '우리'가 누구를 지시하는 것이냐는 공식적인 질문은 거의 제기하지 않는다.

 

-김은실,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문화 논리와 가부장성' 중..

 

 

6.

어쩌면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민주 시민 사회를 갈망하고 아무조건 없이도 활동할 수는 있어도,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는 권위를 스스럼없이, 강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사실 그런 조직 구조에 더 쉽게 적응하는 게 우리들이 아닐까요?

 

7.

그 익숙함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략)..

저는 1970년대의 이념과 문화 코드 속에 젖어살았던, 다시 말해 그 이념과 문화에의 익숙함이 1980년대 격렬했던 학생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습니다.

..(중략)..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구체성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주 적절한 주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염원하지만 민주주의를 모르기에 싸움을 위한 조직체에 적합한 인간상들이었습니다.

 

-권인숙, '진보, 권위 그리고 성 차별' 중..

 

 

8.

우리는 백인의 흰 피부에서 세련과 문명을 연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연상되는 세련성과 문명의 이미지는 선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이처럼 백인이 '세련성', '문명', '역사'과 연관된 문화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은 다분히 야성적, 야만적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중략)..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주류를 이루는 동남아시아인은 같은 아시아인이지만, 인식의 거리상으로는 황인종보다 흑인종에 가깝게 취급된다. 한국인의 인식에서 황인종은 중국인, 일본인의 범주로 국한되고 동남아시아인은 배제되다. 해외 여행을 하는 한국인이 아시아인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서양인으로부터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혼동되는 경우는 그러려니 이해하면서도, 베트남인이나 타이인과 혼동되면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우리의 머릿속에 '검은 피부'로 인식되는 그들과 동일시된 데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9.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도 안다. 자기 위에 군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실은 이 사회의 위계 서열에서 말단에 놓여 있으며, 돌아서면 욕을 하기는 하지만 면전에서는 사장이나 상사들에게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존재라는 것을. 그들이 별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것도, 또 그들이 뻐기는 '많은 월급'으로는 자식 교육시키기도 어렵다는 것도 안다.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랑하며 검은 피부에 이종 차별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한국인들이 실은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것도, 또 미국 사람들에게는 헤픈 미소를 흘린다는 것도 그들은 안다.

 

-유명기, '한국의 제3국인, 외국인 노동자' 중..

 

 

10.

이러한 기하학적 공간에서 만들어진 복잡한 호칭으로 자신과 타자를 인식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인식할 때 좌표적 인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인척 관계가 전혀 없는 남하고도 이런 인상에 의거해서 관계를 맺으려 한다. 젊은 엄마들이 각자의 아기들을 놓고 비교할 때 생일이 하루라도 빠르면 자기 아이가 형 행세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선험성의 반복이자, 아기가 장래에 겪을 학번 비교놀이의 첫걸음이 되는 셈이다.

 

-김근, '너 뉘집 아들이야?' 중..

 

 

11.

단, 예수담론의 특이성은 다른 중계자들/메시아들과는 달리, 그분 가 자신이 곧 신이라는 데 있다. 신 자신이 중계자라는 건, 신이 인간이 된다는 건, 곧 신의 자기부정을 의미한다. 더욱이 육화된 신이 왕이나 현자의 모습이 아니라 더없이 비참한 몰골의 사람이요 더없이 사나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신의 자기 해체가 가히 발본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담론은 신이 자신을 가능한 한 최악으로 비하함으로써,(인간적 존재가 신의 부름을 받아 스스로가 고양되고 완성됨으로써가 아니라) 신이 자신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메시아적 역할, 즉 쌍방 교신의 통로를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기도의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를 상징하는 중차대한 재해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김진호,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 중..

 

 

12.

집의 내장은 바꿀 줄 알아도 집 외부의 관리는 무척 소홀하다. 자기 집 외관이 어떻게 주변에 보여지는지 관심이 없다. 남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이 그냥 싫은 거다. 더욱이 집 주변의 도로, 담장, 나무 등등과의 관계는 말할 나위 없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단정하고 살아가는 듯하다.

..(중략)..

시민의 자의식이 출발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계는 자기가 사는 집의 내부를 감싸고 있는 집의 외부에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전진삼, '한국 건축, 파시즘의 증식로' 중..

 

 

13.

그러나 한국에서 파시스트들의 몰락은 수준 낮은 비극 소설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편의 잘 꾸며진 희극 공연이었다. 십여 년 전 전두환의 5공화국 신헌법의 제정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관객들은 그가 경상남도 합천 고향집에서 끌려나와 감옥으로 향하자 연도에 몰려나와 박수를 친다. 그래도 그의 고향 사람들은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끌려가는 그를 동정하며 이 한국적 코미디에 비장감을 보태고 극적 효과를 높인다. 법정에서 검사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이 대목은 분명 클라이맥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아무도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이 역시 한국 정치 코미디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유는 그에게 사형 구형을 내리는 자나, 그 자신이나, 관객 중 어느 누구도 그가 실수로라도 사형당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14.

'기억의 정치'? 그런건 기억이라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적 능력을 스스로 내던진 대한민국엔 없다.

 

15.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그는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직무를 수행하는 '사유하지 않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 점에 있어선 이근안도 마찬가지다.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2.

우리의 사랑이야기가 우리에게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이 되지 못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 누군가 비행기를 놓치거나 전화번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쓰이지 못했던 로맨스들을 간과해버릴 수 있었다.

..(중략)..

주사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향으로 구르지만, 우리는 미친 듯이 필연성의 패턴을 그려보려고 한다.

 

3.

잠시 후 나는 클로이가 나를 향해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통스럽고 약간 불안해보이는 표정이었는데, 나중에 나는 그것이 그녀의 평상시 표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5.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6.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

 

7.

내가 필자였다면 견고하고, 단단하고, 문법적으로 강력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할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펜을 잡는다)

 

8.

나는 듣기보다는 해석을 했다.

 

9.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자기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중략)..
진정한 연인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안 선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랑에 걸려 넘어지고, 욕망에는 명료한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는 나의 말의 변비를 자작의 능란한 어휘와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10.

클로이의 질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다. 무심결에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그녀를 불쾌하게 만드는 내용이 들어간 대답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1.

생각만큼 섹스와 대립하는 것은 없다. 섹스는 육체의 산물이다. 무분별하며, 디오니소스적이며, 직접적이며, 이성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며, 희열을 동반한 육체적 욕망의 해소이다.

 

12.

신화에 나오는 정열적인 사랑의 행위는 팔찌가 걸린다든가, 다리에 쥐가 난다든가, 상대의 쾌락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하다가 상대를 아프게 한다든가 하는 사소한 방해물로부터 자유롭다. 엉킨 머리카락이나 팔다리를 풀어내다보면, 욕망만 존재해야 하는 곳에 당혹스러울 정도의 이성이 침투할 수밖에 없다.

 

13.

인간은 둘로 나우어져 행동을 하는 동시에 뒤로 물러나서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분열로부터 반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분열을 다시 통합할 수 없다면, 어떤 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면, 그것은 자의식 과잉이라는 병이 된다.

 

14.

자연적인 것이라는 관념에는 모순이 있다. 자연이라는 신화는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자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에 나타난 것으로, 원시주의에 대한 향수와 사라진 에너지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15.

사랑을 바라지만,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면 상대가 실망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마르크스주의자는 자신의 핵심적 자아가 남들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것이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자신이 협잡꾼이라는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6.

나는 그녀에게서 내 자신 안에서 생겨날까봐 두려워하는 의존성을 비난했다. 그러나 연약성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건, 독립성 역시 그 나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7.

철학자들은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생각할 때 그곳을 차이가 용해되는 용광로로 생각하기보다는 비슷한 마음과 통일성, 유사성과 동일성, 공동의 목표와 가정을 기초로 세워진 사회로 보는 것 같다.

 

18.

보들레르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여자와 하룻동안 파리를 걸어다닌 남자에 대한 산문시를 쓴 적이 있다. 그들은 아주 많은 것들에 대해서 의견이 같았기 때문에, 저녁이 되었을 무렵 남자는 자신의 영혼과 결합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완벽한 벗을 만났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목이 말라서 대로 한 구석에 있는 화려한 새 카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남자는 가난한 노동계급 가족이 카페의 판유리 너머에서 우아한 손님들, 눈부신 흰 벽, 황금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가난한 구경꾼들의 눈은 실내의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화자는 동정심과 더불어 자신이 그런 특권있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에 수치를 느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눈에도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여자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영혼의 결합을 준비하고 있던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불쌍한 사람들이 눈에 거슬린다며, 남자더러 주인한테 이야기해서 그들을 쫓아내버리라고 말했다. 모든 사랑 이야기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19.

상대가 우리더러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다면 그것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0.

낭만적 사랑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일반성이 아니라 독특함이다. 그것은 이웃 A가 자기와는 다른 미소나 주근깨나 웃음이나 의견이나 발목 때문에 이웃 B를 사랑하게 되는 문제이다. 예수는 사랑에 기준을 갖다붙이지 않음으로써 이 까다로운 문제를 피해갈 수 있었다. 사랑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은 기준 때문이다.


21.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중략)..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없이 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22.

그녀는 플라톤주의자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각도에서는 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플라톤적으로 완벽한 얼굴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아름다움은 추함과 고전적 완벽성 사이의 동요의 영역에서 발견된다.


23.

진정한 아름다움은 흔들리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하다.
..(중략)..
추를 향하여 계산된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것에 미는 있을 수 없다.
..(중략)..
고전적인 비례를 갖춘 사람을 "아름답다"도 생각하는 데에 무슨 독창성이 있을까?


24.

다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너무 신중하여 그것을 (사랑을 합병하고 있는)낭만의 닳아빠진 사회적 언어로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녀의 감정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음에도, 묘한 의미에서, 그 감정들은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5.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독창적이고, 개인적이고, 완전히 사적이기를 바라는 순간에 나는 마음의 언어의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성격과 마주치게 되었다.
..(중략)..
'사랑'과의 거울 단계 동일화가 필요하지만, 나 자신을 그 말과 동일화하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말에는 이질적인 역사가 너무 풍부했다. 음유시인들로부터 카사블랑카까지 모든 것이 그 단어를 이용해왔다.


26.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중략)..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27.

의학사를 보면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례가 나온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찢어질까봐" 아니면 "노른자가 흘러나올까봐"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사는 그의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진정제 등 온갖 약을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어떤 의사가 미망에 사로잡힌 환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늘 토스트를 한 조각 가지고 다니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앉고 싶은 의자 위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앉을 수가 있고, 노른자가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환자는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녔으며,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8.

갑자기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
전에는 아무도 내 표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지만, 클로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그 말이 그때까지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운 슬픔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되면서, 내 우울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중략)..
고아에게 고아라고 말해줌으로써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29.

"이 꿈틀꿈틀거리는 건 다 뭐야?" 내가 물었다.
"아, 그건 내가 너하고 있을 때는 흔들리는 느낌이기 때문이야"


30.

나는 그녀의 내적인 삶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지, 절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중략)..
클로이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그녀는 결국 다른 인간-그 말이 가지는 모든 신비와 거리를 지니고 있는-일 뿐이었다.


31.

내가 현재 그녀에게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어떤 정의("남자", "남자친구") 안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클로이의 눈에 비친 존재(그 존재들 중에서는 특별하다고 해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32.

나는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지만, 1년 내내 나무는 변하고 있다.


33.

행복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눈앞에 다가오면 무시무시하고 불안해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중략)..
아침의 기대, 현실에서의 불안, 저녁의 유쾌한 기억.
..(중략)..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고, 아름다워 보이는 클로이는 내 옆에 앉아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어서 그 사건이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4.

우리는 서로 소리를 지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서로 소리지르는 것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보기 위해서라도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35.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36.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중략)..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보다는 (운동신결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중략)..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37.

그녀의 짝이 자신의 목에 입을 맞추는 방식, 책장을 넘기는 방식, 농담을 하는 방식에 유혹을 당했던 여자는 바로 이 연결점들 때문에 짜증을 낸다.
..(중략)..
나는 내가 하는 말이, 과거에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들렸던 말이, 갑자기 왜 화를 돋우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38.

한편에는 여자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남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을 병과 동일시하는 천사가 있었다.


39.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40.

모든 삐치는 일의 밑바닥에는 그 즉시 이야기를 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수 있는 잘못이 놓여 있다. 그러나 상처를 받은 쪽에서는 그 일을 나중을 위해서, 좀더 고통스럽게 폭발시키기 위해서 쌓아둔다.


41.

그녀의 눈물 때문에 내 짐도 잠시 유예를 받았다. 나는 이 상황의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를 배반함으로 해서 생긴 고통을 놓고 배반당한 남자가 배반한 여자를 위로하고 있다니.


42.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43.

예수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이 된 것은 단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려놓은 울 듯한 눈과 창백한 안색 때문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착하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배반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중략)..
그 인물은 모든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사람들은 그 관대한 메시지를 그의 면전에 내던져버렸다.


44.

세상은 내 행복에 기꺼이 편의를 제공했지만, 이제 클로이가 떠났다고 해서 무너져내리지는 않았다.


45.

오랫동안 내 소파와 함께 살고 나서야 클로이가 드레싱 가운을 입고 거기 누워있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 그 위에서 책을 읽고 있는 친구의 이미지라든가 내 외투가 가로놓여 있는 이미지로 바뀌었다.


46.

그러나 사랑이 미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중략)..
우리가 바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현자가 되지는 않았다.


47.

금욕주의자들은 사랑을 고통과 비합리성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으로 사랑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논증을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좇다보면 틀림없이 받게 되는 상처를 피해갔다고 하지만, 감정적 요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반면 낭만적 실증주의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심리적 지혜로 문제를 단순화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면 모두 고통 없는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지혜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하지만, 그 지혜의 교훈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무시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그는 말수는 적지만 우스갯소리는 좋아했다. 함께 안동 갔을 때의 얘기다. 그는 유도회에서 일하는 한학자인 옛친구를 소개하면서 말했다. "이 친구는 유도는 못하면서 유도회 회장인기라." 그러자 그 친구는 대거리했다. "이 친구는 전우익이면서 만날 좌익만 안 하는기요."

 

-신경숙의 서문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 중..

 

 

2.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3.

철 따라 옷 바꾸어 입는 일에 골몰한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에 귀기울이게 할 순 없을까? 더 값진 집과 승용차에 인생을 건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이 먹혀들어 갈 수 있을까?

 

 

4.

세월이 가는 걸 본 사람도 나무가 크는 걸 본 사람도 없는데, 세월은 가고 나무는 자랍니다.

 

 

5.

일을 변화시켜 노동의 고역(비지땀 흘리며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게 아니고 나와 내 자식만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일을 변화시키는 일이 생활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결국은 자신과 세상도 변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해 봅니다.

..(중략)..

오늘날 일이 크게 둘로 양분되어 정신 노동, 육체 노동으로 나누어졌는데 이것도 빨리 어우러져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역시 경독(耕讀)의 일체화라고 여겨요. 참된 경은 독을 필요로 하며, 독도 경을 통해서 심화되고 제구실도 할 수 있겠지요. 

방에 틀어박혀 책상 붙들고 앉아서 천하명문이 나온다면 천하는 무색해질 것입니다.

 

 

6.

그런데 스님, 이 하늘 밑 어디에 과연 구경거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구경꾼에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몸뚱이도 구경거리가 되는가 봅니다.

..(중략)..

땅 위에 돋아난 풀 한 포기에서 하늘에 뜬 구름까지 거기에 구경거리는 없습니다.

..(중략)..

달포 전 팀스피리트 작전이 벌어졌을 때 신문에서, 중단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미군 사령부에 들어가 항의하려다 잡혀 갔다는 기사와 사진을 보았습니다만, 그때 마침 제천 지방을 지나다가 팀스피리트 훈련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이색적인 외국군이 신기한 최신 무기를 들고 국토를 종횡으로 쏘다니는 것도 색다른 구경거리가 되나 봅니다. 이 나라의 구경꾼들이 돈 안내고 보는 구경거리라고 미안했는지 동방예의지국의 국민답게 환영 현수막으로 예의를 대신한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7.

씨의 공통점은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고 묻기 쉬우며 땅에도 별 부담감을 주지 않습니다. 나무도 어린 묘목을 심어야 많이 심고 살기도 잘 삽니다. 큰 나무는 옮기기도 심기도 힘들고 살리기도 힘듭니다. 옮겨 심은 큰 나무는 몇 해 몸살을 앓다가 겨우 살아나거나 말라 죽기 일쑤입니다.

스님, 종교 교리와 민족 해방, 인간 해방이란 이론도 무슨 씨 비슷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그 씨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을 때 심어졌는지도 모르게 심어 그 사람이 씨를 싹틔워 키우고 꽃피워 열매 맺게 한다고 느끼곤 합니다.

 

 

8.

닭은 없어졌는데 달걀은 더 많이 먹게 된 얄궂은 농촌이 되었습니다. 마치 밀밭이 흔적도 없는데 온 나라에 밀가루 음식이 판을 치는 것과 맥이 통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9.

스님, 의료보험료를 내라고 끈덕지게 고지서가 오더니 한 번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그 중에서 좀 높아 보이는-가장 비인간적인-사람이 보혐료를 내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라면서, 전화를 압류하라고 부하들한테 명령을 합디다. 그렇게 하랬더니 그냥 갔습니다.

 

 

10.

우리는 너무나 아프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아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맙니다.

..(중략)..

수월하게 살아보자고 아픔을 피하는 동안 아픔이 홀로 커서 감당하기 힘들게 된 거죠.

 

 

11.

과연 인간들의 축제를 위해서 주위의 생명들이 떼죽음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힘센 자들이 약한 자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도 수긍되어야 하고, 우르과이라운드라는 것도 비난할 것이 못 되지요.

 

 

12.

인간만이 남의 흉내를 내기 위해 안달을 하고 그걸 못하면 좌절하는 것 같아요.

 

 

13.

피로 쓴 정규도 세월과 더불어 빛이 바래는데 먹으로 쓴 구호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리는 없겠지요. 그걸 보고 감동할 천진난만한 사람들은 이 살벌한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14.

도장을 새기는 데 음각과 양각이 있듯, 책을 읽을 때도 노상 그럴 수는 없지만 때로는 도장처럼 마음에 새기게(心刻) 됩니다. 그럴 때는 아파서 좀 읽다 덮고 그 통증이 사라져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15.

예식이 끝나자 사진을 찍대요. 이 사진 찍는 데 사진장이가 별의 별 간섭을 다해요. 그뿐 아니라 모두들 그의 말에는 순순히 잘도 따라요. 언제부터 사진 찍는 풍토가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마치 모리꾼이 짐승을 몰듯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얼굴 표정과 몸가짐을 간섭해요.

 

 

16.

줏대없고 자신없는 잘못된 몸가짐에 대한 궁색한 변명이 시대를 들먹이며 책임을 시대탓으로 넘기는 걸 많이 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