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편 대사회적으로 그것은 가족의 안녕을 모든 가치의 우위에 두는 가족이기주의를 낳았다.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공공적 삶은 설 땅을 잃게 만들었다. 공동체적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제외한 여타 공동체는 한국인들의 삶에서 사실상 관념 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임지현,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 중..

 

 

2.

걸핏하면 언론이나 정부가 사회불안을 강조하면서 '안보 의식 해이' '기강 이완'이니 '우리 내부의 허점' '뒤숭숭한 세태' 운운할 때 뻔히 요청되고 강화되는 것은 '풀어줬더니 군기가 빠졌다'는 식의 군사주의적 질서 의식이다.

 

3.

반세기를 넘게 재생산된 반공주의 회로는 모든 불법적이고 부패한 현실을 코 앞에서 보면서도 그럭저럭 순응하고 사는 버릇("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세상이 다 그런거지"), 그것에 대한 도전이 도전자 개인에게 쓸모없는 고통과 번민을 안겨 줄 것이라는 공포("너 혼자 그래봐야 너만 손해야, 세상이 바뀌겠냐?"), 이것을 통해 유지되는 집단적 범죄 행위에 대한 동참과 인정("너나 나나 다 그렇게 뜯어먹으며 사는 거지, 도덕 군자라고 별 수 있냐?")의 정치 사회적 문화를 더욱 강화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권혁범, '내 몸 속의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 중..

 

 

4.

모든 저항을 무조건 물리력으로 분쇄하려는 파시스트적 국가와 그에 대한 맹종에 길들여진 냉소적인 사회에 절대적 도덕적인 원칙을 위해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이해하였다.

 

-박노자,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 중..

 

 

5.

그래서 '우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 '우리'가 누구를 지시하는 것이냐는 공식적인 질문은 거의 제기하지 않는다.

 

-김은실,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문화 논리와 가부장성' 중..

 

 

6.

어쩌면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민주 시민 사회를 갈망하고 아무조건 없이도 활동할 수는 있어도,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는 권위를 스스럼없이, 강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사실 그런 조직 구조에 더 쉽게 적응하는 게 우리들이 아닐까요?

 

7.

그 익숙함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중략)..

저는 1970년대의 이념과 문화 코드 속에 젖어살았던, 다시 말해 그 이념과 문화에의 익숙함이 1980년대 격렬했던 학생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습니다.

..(중략)..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구체성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아주 적절한 주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염원하지만 민주주의를 모르기에 싸움을 위한 조직체에 적합한 인간상들이었습니다.

 

-권인숙, '진보, 권위 그리고 성 차별' 중..

 

 

8.

우리는 백인의 흰 피부에서 세련과 문명을 연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연상되는 세련성과 문명의 이미지는 선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이처럼 백인이 '세련성', '문명', '역사'과 연관된 문화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은 다분히 야성적, 야만적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중략)..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주류를 이루는 동남아시아인은 같은 아시아인이지만, 인식의 거리상으로는 황인종보다 흑인종에 가깝게 취급된다. 한국인의 인식에서 황인종은 중국인, 일본인의 범주로 국한되고 동남아시아인은 배제되다. 해외 여행을 하는 한국인이 아시아인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서양인으로부터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혼동되는 경우는 그러려니 이해하면서도, 베트남인이나 타이인과 혼동되면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우리의 머릿속에 '검은 피부'로 인식되는 그들과 동일시된 데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9.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도 안다. 자기 위에 군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실은 이 사회의 위계 서열에서 말단에 놓여 있으며, 돌아서면 욕을 하기는 하지만 면전에서는 사장이나 상사들에게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존재라는 것을. 그들이 별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것도, 또 그들이 뻐기는 '많은 월급'으로는 자식 교육시키기도 어렵다는 것도 안다.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랑하며 검은 피부에 이종 차별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한국인들이 실은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것도, 또 미국 사람들에게는 헤픈 미소를 흘린다는 것도 그들은 안다.

 

-유명기, '한국의 제3국인, 외국인 노동자' 중..

 

 

10.

이러한 기하학적 공간에서 만들어진 복잡한 호칭으로 자신과 타자를 인식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인식할 때 좌표적 인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인척 관계가 전혀 없는 남하고도 이런 인상에 의거해서 관계를 맺으려 한다. 젊은 엄마들이 각자의 아기들을 놓고 비교할 때 생일이 하루라도 빠르면 자기 아이가 형 행세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선험성의 반복이자, 아기가 장래에 겪을 학번 비교놀이의 첫걸음이 되는 셈이다.

 

-김근, '너 뉘집 아들이야?' 중..

 

 

11.

단, 예수담론의 특이성은 다른 중계자들/메시아들과는 달리, 그분 가 자신이 곧 신이라는 데 있다. 신 자신이 중계자라는 건, 신이 인간이 된다는 건, 곧 신의 자기부정을 의미한다. 더욱이 육화된 신이 왕이나 현자의 모습이 아니라 더없이 비참한 몰골의 사람이요 더없이 사나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신의 자기 해체가 가히 발본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담론은 신이 자신을 가능한 한 최악으로 비하함으로써,(인간적 존재가 신의 부름을 받아 스스로가 고양되고 완성됨으로써가 아니라) 신이 자신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메시아적 역할, 즉 쌍방 교신의 통로를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기도의 이원론적 세계관에는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엄청난 변화를 상징하는 중차대한 재해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김진호,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 중..

 

 

12.

집의 내장은 바꿀 줄 알아도 집 외부의 관리는 무척 소홀하다. 자기 집 외관이 어떻게 주변에 보여지는지 관심이 없다. 남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이 그냥 싫은 거다. 더욱이 집 주변의 도로, 담장, 나무 등등과의 관계는 말할 나위 없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단정하고 살아가는 듯하다.

..(중략)..

시민의 자의식이 출발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계는 자기가 사는 집의 내부를 감싸고 있는 집의 외부에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전진삼, '한국 건축, 파시즘의 증식로' 중..

 

 

13.

그러나 한국에서 파시스트들의 몰락은 수준 낮은 비극 소설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 편의 잘 꾸며진 희극 공연이었다. 십여 년 전 전두환의 5공화국 신헌법의 제정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관객들은 그가 경상남도 합천 고향집에서 끌려나와 감옥으로 향하자 연도에 몰려나와 박수를 친다. 그래도 그의 고향 사람들은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끌려가는 그를 동정하며 이 한국적 코미디에 비장감을 보태고 극적 효과를 높인다. 법정에서 검사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이 대목은 분명 클라이맥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아무도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이 역시 한국 정치 코미디의 특징 중 하나인데, 이유는 그에게 사형 구형을 내리는 자나, 그 자신이나, 관객 중 어느 누구도 그가 실수로라도 사형당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14.

'기억의 정치'? 그런건 기억이라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적 능력을 스스로 내던진 대한민국엔 없다.

 

15.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그는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직무를 수행하는 '사유하지 않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 점에 있어선 이근안도 마찬가지다.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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