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하자면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40대만 넘으면 '원로'로 자처하면서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열정을 쉽사리 접어버린다는 것이다.
2.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드는 지식이란 쉬임없이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거기에서는 원로의 권위나 노년의 안식 따위는 필요없다.
3.
더 폼나게 말하면, 심해를 탐사하는 고래의 충혈된 눈과 단 몇걸음에 히말라야를 종단하는 거인의 다리를 지녔다고나 할까.
4.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앎이 기쁨이라는 전제는 잊혀진 지 오래되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앎이란 그저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는 것, 고통을 감내하면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
세상에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6.
문턱을 한꺼번에 넘기는 어렵지만 하나씩 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개는 단번에 정상에 도달하려 하기 때문에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법이다.
7.
자신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사는 건 바보다. 타인의 능력과 제대로 접속하면 내가 지닌 능력의 몇십 배의 능력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8.
가족주의의 속내는 참 허망하기 그지없다. 중형 아파트, 근사한 자동차, 남부럽지 않은 소비, 일류대학교, 노년을 위한 보험-. 우리 시대 가족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지표들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상류층이건 하층민이건 거의 예외가 없다.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이미 거기에 도달한 경우는 거기서 좀 더 상승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셈이다.
9.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10.
왜냐하면 사랑이 생에 대한 기쁨이라면 그 충만함은 흘러 넘치게 마련이다. 흘러 넘치지 않고 단지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멈추어버린다면? 그렇다면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짧은 열정 뒤의 긴 권태. 그리고 그 이후에는 권태를 제도와 도덕의 힘으로 버티려는 안간힘. 그리하여 다시 연민과 희생이라는 수렁 속으로 들어가면서 체념하는 것. 다른 하나는 변태적 쾌락의 길.
11.
다만 다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그 길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그것도 행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남보다 덜 불행해지기 위해서일 뿐이다.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살다니.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12.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신체가 수동적, 방어적으로 될 뿐 아니라 계속 다른 사람들과 불협화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중략)..
건강할 때는 저절로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배려는 근본적으로 의무나 희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임을 그때 알았다. 하지만 몸의 균형이 깨어지면 타인을 배려할 수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 전에 잘 하던 것까지 귀찮아진다. 더욱 문제인 것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일이 풀릴 리 없다. 좋은 사람이 와도, 훌륭한 기회가 와도 감당하지 못한다.
13.
나는 여성의 사회적 소외의 단적인 예가 체육교육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몸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 아니 그 이전에 몸을 능동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교육과정을 마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대한 조절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여성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14.
흔히 공동체라고 하면 이념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진지한 집단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진지함은 공동체의 치명적 약점이다. 그런 공동체들은 내적으로는 상하위계가 작동하게 되는 한편, 외적으로는 안팎의 경계가 뚜렷해짐으로써 결국에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돈과 권위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들의 성격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떤 유형이건, 어떤 상처와 기억을 갖고 있건 나는 코뮌이 살아 움직이려면 '유머러스'해야 된다고 굳게 믿는 바이다. 웃음이야말로 일상의 축제를 만들어내는 기초이자 원동력인 까닭이다.
농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떡하냐고?
..(중략)..
웃기지 못하면 잘 웃기라도 해라.
15.
돈과 지위, 명성 따위를 버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말 버리기 어려운 건 무의식에 새겨진 자의식이다. 그것은 때로는 교만과 욕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과잉겸손과 나약함으로, 때로는 감상과 무력함으로,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관계와 활동을 가로막는다.
16.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17.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 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중략)..
자신의 분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우리 시대 전문성의 실체이다.
..(중략)..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런 부조리와 이러한 지적 생산방식과는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 아니다.
18.
인간의 악덕은 동물에서 찾고, 미덕은 인간만이 점유하는, 참 유치하고도 조잡한 '언어 게임' 아닌가.
19.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 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