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말수는 적지만 우스갯소리는 좋아했다. 함께 안동 갔을 때의 얘기다. 그는 유도회에서 일하는 한학자인 옛친구를 소개하면서 말했다. "이 친구는 유도는 못하면서 유도회 회장인기라." 그러자 그 친구는 대거리했다. "이 친구는 전우익이면서 만날 좌익만 안 하는기요."

 

-신경숙의 서문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 중..

 

 

2.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알겠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3.

철 따라 옷 바꾸어 입는 일에 골몰한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에 귀기울이게 할 순 없을까? 더 값진 집과 승용차에 인생을 건 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는 말이 먹혀들어 갈 수 있을까?

 

 

4.

세월이 가는 걸 본 사람도 나무가 크는 걸 본 사람도 없는데, 세월은 가고 나무는 자랍니다.

 

 

5.

일을 변화시켜 노동의 고역(비지땀 흘리며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게 아니고 나와 내 자식만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극히 이기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일을 변화시키는 일이 생활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결국은 자신과 세상도 변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해 봅니다.

..(중략)..

오늘날 일이 크게 둘로 양분되어 정신 노동, 육체 노동으로 나누어졌는데 이것도 빨리 어우러져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역시 경독(耕讀)의 일체화라고 여겨요. 참된 경은 독을 필요로 하며, 독도 경을 통해서 심화되고 제구실도 할 수 있겠지요. 

방에 틀어박혀 책상 붙들고 앉아서 천하명문이 나온다면 천하는 무색해질 것입니다.

 

 

6.

그런데 스님, 이 하늘 밑 어디에 과연 구경거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구경꾼에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몸뚱이도 구경거리가 되는가 봅니다.

..(중략)..

땅 위에 돋아난 풀 한 포기에서 하늘에 뜬 구름까지 거기에 구경거리는 없습니다.

..(중략)..

달포 전 팀스피리트 작전이 벌어졌을 때 신문에서, 중단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미군 사령부에 들어가 항의하려다 잡혀 갔다는 기사와 사진을 보았습니다만, 그때 마침 제천 지방을 지나다가 팀스피리트 훈련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이색적인 외국군이 신기한 최신 무기를 들고 국토를 종횡으로 쏘다니는 것도 색다른 구경거리가 되나 봅니다. 이 나라의 구경꾼들이 돈 안내고 보는 구경거리라고 미안했는지 동방예의지국의 국민답게 환영 현수막으로 예의를 대신한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7.

씨의 공통점은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고 묻기 쉬우며 땅에도 별 부담감을 주지 않습니다. 나무도 어린 묘목을 심어야 많이 심고 살기도 잘 삽니다. 큰 나무는 옮기기도 심기도 힘들고 살리기도 힘듭니다. 옮겨 심은 큰 나무는 몇 해 몸살을 앓다가 겨우 살아나거나 말라 죽기 일쑤입니다.

스님, 종교 교리와 민족 해방, 인간 해방이란 이론도 무슨 씨 비슷한 데가 있지 않습니까? 그 씨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을 때 심어졌는지도 모르게 심어 그 사람이 씨를 싹틔워 키우고 꽃피워 열매 맺게 한다고 느끼곤 합니다.

 

 

8.

닭은 없어졌는데 달걀은 더 많이 먹게 된 얄궂은 농촌이 되었습니다. 마치 밀밭이 흔적도 없는데 온 나라에 밀가루 음식이 판을 치는 것과 맥이 통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9.

스님, 의료보험료를 내라고 끈덕지게 고지서가 오더니 한 번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그 중에서 좀 높아 보이는-가장 비인간적인-사람이 보혐료를 내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라면서, 전화를 압류하라고 부하들한테 명령을 합디다. 그렇게 하랬더니 그냥 갔습니다.

 

 

10.

우리는 너무나 아프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아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맙니다.

..(중략)..

수월하게 살아보자고 아픔을 피하는 동안 아픔이 홀로 커서 감당하기 힘들게 된 거죠.

 

 

11.

과연 인간들의 축제를 위해서 주위의 생명들이 떼죽음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힘센 자들이 약한 자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도 수긍되어야 하고, 우르과이라운드라는 것도 비난할 것이 못 되지요.

 

 

12.

인간만이 남의 흉내를 내기 위해 안달을 하고 그걸 못하면 좌절하는 것 같아요.

 

 

13.

피로 쓴 정규도 세월과 더불어 빛이 바래는데 먹으로 쓴 구호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리는 없겠지요. 그걸 보고 감동할 천진난만한 사람들은 이 살벌한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14.

도장을 새기는 데 음각과 양각이 있듯, 책을 읽을 때도 노상 그럴 수는 없지만 때로는 도장처럼 마음에 새기게(心刻) 됩니다. 그럴 때는 아파서 좀 읽다 덮고 그 통증이 사라져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15.

예식이 끝나자 사진을 찍대요. 이 사진 찍는 데 사진장이가 별의 별 간섭을 다해요. 그뿐 아니라 모두들 그의 말에는 순순히 잘도 따라요. 언제부터 사진 찍는 풍토가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마치 모리꾼이 짐승을 몰듯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얼굴 표정과 몸가짐을 간섭해요.

 

 

16.

줏대없고 자신없는 잘못된 몸가짐에 대한 궁색한 변명이 시대를 들먹이며 책임을 시대탓으로 넘기는 걸 많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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