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열의 속성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2.
현실 세계에서 공공재의 제공은 집단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반면에 온라인에선 단 한 사람의 정보나 조언의 기여도 공공재로 변화될 수 있다.
..(중략)..
우선 온라인에서의 공유와 협동을 가능케 하는 동기부여 요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가장 중요한 게 ‘인정욕구’다. 쉽게 말해 남들이 알아주는 맛이라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는 맛이라는 건 오프라인 세계에도 있지만 매우 부실하다. 공동체가 깨졌기 때문에 언론을 통해서 알려져야만 한다. 이게 대단히 번거롭다.
3.
낸시 에트코프는 “시기심은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했던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는 모든 것을 달성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키기 불가능한 갈망의 상태로 몰아넣는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어플루엔자다. 어플루엔자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든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4.
이런 시각에 대해 지나친 문화적 상대주의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취향의 문제에 대해 절대적 가치를 적용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떨까. “우리의 자존심은 자기의 의견에 대한 비난보다는 자기 취향에 대한 비난에 의해 더욱 상하게 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 폭력성의 위험에 공감한다면, 프랑스의 인류사회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1987년에 한 다음과 같은 말을 명품과 패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회건 여러 종류의 비합리적인 믿음들이 없인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들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비판과 분석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지요.”
5.
브룩스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부르주아(중산층)의 물질주의를 경멸했다는 걸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략)..특히 무엇보다 부르주아는 비영웅적이었다. 과거의 귀족들은 적어도 나름대로 원대함을 동경했다. 농부 계층에는 그리스도적인 성스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중산층은 초월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지루하고 평범했다...(중략)..”
부르주아에 대한 비난엔 당대의 유명 문인들이 총동원되었다. 스탕달은 부르주아가 “자기들의 작은 계획을 실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은 그들을 볼 때마다 “울고 싶은 동시에 토하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6.
생각해보라. 지금과 같은 미의 기준이 달라지면 다이어트, 미용, 유행 산업이 붕괴되고 엄청나게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될 것이다. 그래서 그 산업 종사자들은 그게 바뀌지 않게끔 심혈을 기울인다. 다이어트, 미용, 유행 산업의 목적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중략)..“왜 투표를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부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뜻밖의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투표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는 것이다...(중략)..”
생각해보자. 투표 안 하면 민주시민의 자격이 없다고 욕하는 것과 투표하는 데에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가운데 어떤 게 더 효과적일까?
8.
미국인은 하루 평균 3천여 개의 광고 메시지를 접한다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그걸 기억할 수 있겠는가.
9.
20세기 중반,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인’ 성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라이시는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리스먼의 타인 지향적인 미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단체에(조직에) 잃을 지도 모를 위험 속에 있었다. 신경제의 출발점에 있는 시장 지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팔아야 하는 위험 속에 있다. 어떤 것이 더 위험할까? 과거만 해도 어떤 사람에 대한 최악의 말은 자신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팔지 못한다는 것이 최악의 말이 될 것이다.”
10.
얼 쇼리스는 <세일스맨의 나라>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음울한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다.
“전문화는 우리 모두를 몽유병자로 만든다. 1960년대의 예언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던 지구촌은 고립된 몽상가들로 채워진 전자적 별장들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우리는 이웃들을 알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금융 전문가라면, 우리는 화학자 앞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만약 우리가 학자라면, 우리는 상인들의 찌푸린 얼굴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외로운 분자들의 나라이다.”
11.
그렇게 자신의 작은 관심 분야에만 몰두하는 ‘극소화’, 그래서 전체 국민의 동시적 경험의 가능성이 축소되는 ‘비동시성’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12.
한국의 한 대학생이 자살을 택하면서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과연 무얼 의미하는 걸까?
“난 레벨 낮으니 그만 살아도 되잖아.”
13.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을 더 많이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가족과 접촉하는 빈도와 사회적으로 관여하는 그룹의 규모가 모두 줄었고 동시에 우울증과 소외감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대상이 된 사람들은 인터넷을 주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 사용했는데, 그 결과 오히려 고립을 촉진했기 때문에 ‘인터넷 패러독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4.
삶의 피곤함은 빈부격차를 따지지 않는다. 세계 경제계 명사들의 클럽인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2000년 총회에 참석했던 미국의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략)..오늘날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하느냐 죽느냐, 전송망을 갖추고 효율적으로 이용하느냐 아니면 갖추지 못하거나 이용하지 못해 망하느냐, 언제 어느 곳에서건 24시간 일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라는 것. 그러나 미국 소니사 회장 하워드 스트링거가 이렇게 하소연했다. ‘이 같은 말들을 들어보면 바로 지옥을 묘사하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면 언제 성생활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습니까? 차라리 지구에서 내리고 싶습니다.’ 모두들 그의 말에 공감했다.”
15.
인터넷 이용자도 때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읽기 때문에 매체를 이용하는 소비시간은 점점 늘어갈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아직 이용할 수 있는 건 잠자는 시간뿐이다.
16.
휴대폰이 제공한다는 여러 기능들이란 건 사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다.
17.
문자 메시지 기능 덕분에 비단 핀란드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남녀간 교제 신청이 쉬워졌다. 무엇보다도 면전에서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최근 말레이시아 법원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혼이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18.
존 나이스비트의 ‘하이테크-하이터치’ 개념에 따르면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이스비트는 우리의 삶에서 하이테크(첨단기술)을 많이 쓰면 쓸수록 우리는 하이터치(고감성)를 찾아 균형을 취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삶이 기술에 젖어들면 들수록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더 많이 원하게 되고(극장에서, 박물관에서, 독서클럽에서, 아이들 축구 경기장에서), 의학이 하이테크 쪽으로 접어들면 들수록 대체 치료제나 치료방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육체가 아닌 머리로 컴퓨터에 몰두하면 할수록 레저활동이 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방향(정원 일, 요리, 목공일, 새 키우기 등)으로 기운다는 것이다.”
19.
남에게 조금이라도 지기 싫어하는 마음은 자기 발전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지거나 무관심해도 될 만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남들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을 갖게 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불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