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우리는 연예인들끼리의 수다와 연예인들에 관한 이야기에 그토록 크고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걸까? 혹 동어반복 현상은 아닐까? 스타는 유명인인데, 유명인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인일 뿐, 다른 큰 의미는 없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나의 관심조차 나의 내부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남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나도 관심을 갖고 내가 관심을 갖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갖는 그런 반복과 순환의 게임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2.
포털피해자 모임 대표 변희재는 “주간 단위로 제공 뉴스의 30% 이상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것”이라는 조항 때문에 “현재 인터넷에서 막강한 언론권력을 누리고 있는 포털사이트와 조선닷컴, 조인스닷컴 등 종이신문의 온라인 닷컴이 신문법에서 제외되게 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그걸 신문법과 언론중재법에 따른 규제와 지원을 놓고 벌인 ‘일종의 밀실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인터넷신문협회 정도의 매체들은 정부의 지원금이 필요하니 언론으로서 등록하는 것이고, 포털이나 온라인닷컴들은 굳이 그런 푼돈에 연연할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마음대로 영업이나 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이런 발상들이 기가 막히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포털과 온라인닷컴ㅂ을 동시에 빼내줄 수 있는 독자적 기사 생산 30%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3.
미국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포춘>마저 1997년 1월 13일자에서 “지금의 인터넷은 사상의 자유로운 교환을 수반하는 공적 네트워크로 갈 것이라는 소중한 기대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한국에선 그런 목소리를 냈다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4.
거대한 적을 상대로 하는 약자들의 연대와는 달리, 상호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진 세력끼리의 갈등에서 나타나는 연대는 ‘인터넷 패거리’라고 하는 새로운 유형의 패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갈등 구조에선 강경파와 비분강개파와 근본주의파가 득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갈등해소’보다는 양쪽의 강경파끼리 사실상 서로 돕는 ‘적대적 공존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5.
‘네티즌 정치’는 연예인 팬클럽의 메커니즘과 비슷해서 네티즌들은 한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어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고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친다 해도 절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었다는 걸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오기 또는 ‘정서적 기득권’ 때문이다.
인터넷의 그런 질서가 몸에 밴 사람들은 그걸 ‘개혁’이라 강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갈등과 투쟁의 격화마저 ‘성장통’으로 이해하거나 역사의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는 묘한 낙관론 또는 자기기만이 횡횅하고 있다. 반면 그 반대파들은 밤에 울부짖는 늑대처럼 나라 망한다고 아우성치기에 바쁘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략, 전술은 오직 초전박살을 위한 것이다.
여덞째, 인터넷은 ‘지식인의 종언’을 현실화하는 마지막 일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의 지식인은 더 이상 ‘근대적’ 의미의 보편적 또는 절대적 지식과 가치를 소유하지 못하며, 단지 파편화되고 모호하며 상대화된 문화적 상황과 조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해 주는 ‘지적 간이식품 공급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과분한 평가다.
6.
다음은 다음(多音)이다. 연세대 전산학과와 대학원을 나온 이재웅이 프랑스 유학을 통해 다양한 문화에 매료되면서 다양한 소리의 조화를 위해 다음이라는 회사명을 생각해낸 것이다. 다음카페도 그의 프랑스 유학의 산물이었다.…(중략)…
이건 이해가 되는데, 이재웅이 프랑스 유학시절 영화로 본 노엄 촘스키의 일대기가 다음을 세우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는 건 뜻밖이다.
“촘스키는 독립적이고 비영리적인, 그리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미디어를 제시했어요, 바로 이거라고 생각했죠, 사람들과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중략)…”
오늘날의 다음이 과연 좌파 부정부주의자인 촘스키의 뜻에 합당한 것일까?
7.
이에 대해 특히 지식검새그로 업계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네이버 등 경쟁사는 상도의와 저작권 문제를 언급하며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네이버 측은 “네이버 이용자들이 생성해 낸 정보를 동의도 받지 않고 무작위로 다른 사이트에 퍼 넘기는 것은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다.”면서, “검색 업체는 일부 데이터에 대해 외부 업체가 함부로 퍼가지 못하도록 막아놓는데 엠파스 측이 사전 요청 없이 우리 자료를 가져가는 것은 상도의적으로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네이버는 또 열린 검색은 기술적으로 적용 가능한 서비스지만 상도의적 문제 때문에 시행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엠파스는 “네이버의 사용자 생성 콘텐츠와 지적재산권은 네티즌에게 속하기 때문에 열린검색은 문제될 것이 없다.”며, “또 링크를 걸어놔 클릭이 될 경우 해당 사이트로 이동하기 때문에 지적재산권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8.
광고 대행사 LG애드의 영상사업팀 대리 정성욱은 PMP,DMB,3세대 휴대용 비디오 게임기 등이 개인 멀티미디어가 누리는 인기의 이유를 ‘공백에 대한 증오’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전에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아무 것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았으나, 지금의 세대는 그러한 순간을 극도로 혐오하는 듯하다. ‘심심함’을 퇴치의 대상으로 여기는 문화는 그렇게 기술 발달과 손잡고 우리 생활의 여백을 ‘재미’로 꽉꽉 채워가고 있다. 어린 자녀의 두뇌를 마치 스펀지 쪼가리인 듯 맹신한 채 자기가 배우지 못한 여러 가지 지식을 넘치도록 우겨넣는 부모들의 모습들처럼 이 세대가 정보의 과잉과 오락의 과잉에 진하게 찌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중략)…”
9.
각 분야에서 맹렬하게 전개되는 유비쿼터스 예찬론을 듣다보면 놀라운 기술 진보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도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예컨대 휴가를 떠났으면 모든 걸 다 잊고 푹 쉬면서 자연을 바라보고 홀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유비쿼터스 예찬론’은 그 순간에도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와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10.
휴대전화는 2년만 쓰면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고 고장이 난다. 그러나 기술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 불만을 토로하는 소비자에게 휴대전화 제조업체 관계자는 “몇 년 전 일본의 한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몇 년 써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을 내놨다가 망했다.”며 “휴대전화 산업을 살린다 생각하고 새것으로 바꾸라.”고 권고한다.
11.
여가수가 라커룸으로 가서 옷을 입으려고 하는 순간 플래시 불빛이 번쩍했다.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카메라폰을 누르고 있었다. 여가수가 깜짝 놀라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학생은 몇 장을 더 찍고 있었다. 여가수는 여학생에게 재빨리 다가가 카메라폰을 뺏고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면서 사진을 찍은 이유를 물었다. 답은 ‘그냥’이었다.
사진학자 정한조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냥’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는 ‘찍고 찍히고 퍼가는 세상’에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우리는 너무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사진으로 찍어도 되는 것, 사진으로 찍으면 안 되는 것, 사진으로 찍을 필요가 없는 것, 이런 것들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라면서,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이 카메라를 갖고 있다면, 여러분이 사진을 찍을 줄 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찍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중략)…
카메라폰은 총과 같다. 수전 손택이 잘 지적했듯이, “카메라를 사용할 때에는 항상 공격성이 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손택은 “사람들을 촬영하는 것은 그들을 폭행하는 것”이며, “총이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을 중독시키는 환상적인 기계이다.”고 말했다.
12.
정보의 과잉은 관심의 빈곤을 가져온다.
13.
소크라테스는 ‘기억력 저하’를 이유로 문자의 사용에 반대했지만, 이제 현대인은 디지털 시대를 맞아 기억을 몸과 분리시켰다.
14.
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잠시라도 미디어와 접촉하지 않으면 불편하게 여기는 걸까? 이동 중에 세상 풍경을 바라보거나 홀로 생각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자신의 공백을 스스로 채울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걸까?
15.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대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티티테인먼트는 entertainment와 엄마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6.
서구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정치 이슈’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17.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사람들의 인정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 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욕구 충족에 있어 일렬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원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서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 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18.
쉽진 않겠지만 자신을 낯선 이방인으로 여기면서 한국 사회를 정색을 하고 다시 보기 바란다. 역설 같지만 한국처럼 활짝 열려 있는 사회도 드물다. 당장 떠오르는 사례로 노암 촘스키라는 미국 지식인을 생각해 보자. 촘스키의 이념적 위상은 복잡하지만 미국의 주류 매체가 아예 언급조차 꺼리는 좌파 중의 좌파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보수신문들도 촘스키를 껴안으면서 대서특필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사대주의’, ‘미국 비판의 상품성’, ‘보수 물타기 전술’ 때문이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19.
아주대 강사 윤진은 “거대자본 위에 선 대형 할인매장들이 구축해낸 가격의 신화에는 분명 폭력이 어른거린다. 이 물건을 우리보다 더 싸게 파는 곳이 있다면 몇 배를 보상해 주겠다는 자신만만한 태도는 과연 납품업자들에게 똑같은 물건을 다른 회사에 더 싼 가격으로 납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강요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대형 할인마트가 어떤 물건을 지나치게(!) 싸게 파는 깜짝 이벤트를 벌일 때 그로 인한 이윤의 감소는 과연 누가 감당하는 것일까? 굳이 주변 상권의 몰락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거대자본에 눌려 울며 겨자를 먹는 사람들의 눈물이 곳곳에 흘러내린다. 대형 할인매장의 가격의 신화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가리는 가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