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우리는 연예인들끼리의 수다와 연예인들에 관한 이야기에 그토록 크고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걸까? 혹 동어반복 현상은 아닐까? 스타는 유명인인데, 유명인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인일 뿐, 다른 큰 의미는 없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나의 관심조차 나의 내부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남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나도 관심을 갖고 내가 관심을 갖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갖는 그런 반복과 순환의 게임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2.

포털피해자 모임 대표 변희재는 “주간 단위로 제공 뉴스의 30% 이상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것”이라는 조항 때문에 “현재 인터넷에서 막강한 언론권력을 누리고 있는 포털사이트와 조선닷컴, 조인스닷컴 등 종이신문의 온라인 닷컴이 신문법에서 제외되게 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그걸 신문법과 언론중재법에 따른 규제와 지원을 놓고 벌인 ‘일종의 밀실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인터넷신문협회 정도의 매체들은 정부의 지원금이 필요하니 언론으로서 등록하는 것이고, 포털이나 온라인닷컴들은 굳이 그런 푼돈에 연연할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마음대로 영업이나 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이런 발상들이 기가 막히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포털과 온라인닷컴ㅂ을 동시에 빼내줄 수 있는 독자적 기사 생산 30%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3.

미국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포춘>마저 1997년 1월 13일자에서 “지금의 인터넷은 사상의 자유로운 교환을 수반하는 공적 네트워크로 갈 것이라는 소중한 기대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한국에선 그런 목소리를 냈다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4.

거대한 적을 상대로 하는 약자들의 연대와는 달리, 상호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진 세력끼리의 갈등에서 나타나는 연대는 ‘인터넷 패거리’라고 하는 새로운 유형의 패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갈등 구조에선 강경파와 비분강개파와 근본주의파가 득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갈등해소’보다는 양쪽의 강경파끼리 사실상 서로 돕는 ‘적대적 공존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5.

‘네티즌 정치’는 연예인 팬클럽의 메커니즘과 비슷해서 네티즌들은 한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어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고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친다 해도 절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었다는 걸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오기 또는 ‘정서적 기득권’ 때문이다.

인터넷의 그런 질서가 몸에 밴 사람들은 그걸 ‘개혁’이라 강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갈등과 투쟁의 격화마저 ‘성장통’으로 이해하거나 역사의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는 묘한 낙관론 또는 자기기만이 횡횅하고 있다. 반면 그 반대파들은 밤에 울부짖는 늑대처럼 나라 망한다고 아우성치기에 바쁘다. 이들에게 있어서 전략, 전술은 오직 초전박살을 위한 것이다.

여덞째, 인터넷은 ‘지식인의 종언’을 현실화하는 마지막 일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의 지식인은 더 이상 ‘근대적’ 의미의 보편적 또는 절대적 지식과 가치를 소유하지 못하며, 단지 파편화되고 모호하며 상대화된 문화적 상황과 조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시해 주는 ‘지적 간이식품 공급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과분한 평가다.




6.

다음은 다음(多音)이다. 연세대 전산학과와 대학원을 나온 이재웅이 프랑스 유학을 통해 다양한 문화에 매료되면서 다양한 소리의 조화를 위해 다음이라는 회사명을 생각해낸 것이다. 다음카페도 그의 프랑스 유학의 산물이었다.…(중략)…

이건 이해가 되는데, 이재웅이 프랑스 유학시절 영화로 본 노엄 촘스키의 일대기가 다음을 세우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는 건 뜻밖이다.

“촘스키는 독립적이고 비영리적인, 그리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미디어를 제시했어요, 바로 이거라고 생각했죠, 사람들과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중략)…”

오늘날의 다음이 과연 좌파 부정부주의자인 촘스키의 뜻에 합당한 것일까?




7.

이에 대해 특히 지식검새그로 업계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네이버 등 경쟁사는 상도의와 저작권 문제를 언급하며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네이버 측은 “네이버 이용자들이 생성해 낸 정보를 동의도 받지 않고 무작위로 다른 사이트에 퍼 넘기는 것은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다.”면서, “검색 업체는 일부 데이터에 대해 외부 업체가 함부로 퍼가지 못하도록 막아놓는데 엠파스 측이 사전 요청 없이 우리 자료를 가져가는 것은 상도의적으로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네이버는 또 열린 검색은 기술적으로 적용 가능한 서비스지만 상도의적 문제 때문에 시행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엠파스는 “네이버의 사용자 생성 콘텐츠와 지적재산권은 네티즌에게 속하기 때문에 열린검색은 문제될 것이 없다.”며, “또 링크를 걸어놔 클릭이 될 경우 해당 사이트로 이동하기 때문에 지적재산권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8.

광고 대행사 LG애드의 영상사업팀 대리 정성욱은 PMP,DMB,3세대 휴대용 비디오 게임기 등이 개인 멀티미디어가 누리는 인기의 이유를 ‘공백에 대한 증오’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전에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아무 것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았으나, 지금의 세대는 그러한 순간을 극도로 혐오하는 듯하다. ‘심심함’을 퇴치의 대상으로 여기는 문화는 그렇게 기술 발달과 손잡고 우리 생활의 여백을 ‘재미’로 꽉꽉 채워가고 있다. 어린 자녀의 두뇌를 마치 스펀지 쪼가리인 듯 맹신한 채 자기가 배우지 못한 여러 가지 지식을 넘치도록 우겨넣는 부모들의 모습들처럼 이 세대가 정보의 과잉과 오락의 과잉에 진하게 찌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중략)…”




9.

각 분야에서 맹렬하게 전개되는 유비쿼터스 예찬론을 듣다보면 놀라운 기술 진보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도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예컨대 휴가를 떠났으면 모든 걸 다 잊고 푹 쉬면서 자연을 바라보고 홀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유비쿼터스 예찬론’은 그 순간에도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와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10.

휴대전화는 2년만 쓰면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고 고장이 난다. 그러나 기술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 불만을 토로하는 소비자에게 휴대전화 제조업체 관계자는 “몇 년 전 일본의 한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몇 년 써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을 내놨다가 망했다.”며 “휴대전화 산업을 살린다 생각하고 새것으로 바꾸라.”고 권고한다.




11.

여가수가 라커룸으로 가서 옷을 입으려고 하는 순간 플래시 불빛이 번쩍했다.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카메라폰을 누르고 있었다. 여가수가 깜짝 놀라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학생은 몇 장을 더 찍고 있었다. 여가수는 여학생에게 재빨리 다가가 카메라폰을 뺏고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면서 사진을 찍은 이유를 물었다. 답은 ‘그냥’이었다.

사진학자 정한조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냥’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는 ‘찍고 찍히고 퍼가는 세상’에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우리는 너무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사진으로 찍어도 되는 것, 사진으로 찍으면 안 되는 것, 사진으로 찍을 필요가 없는 것, 이런 것들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라면서,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이 카메라를 갖고 있다면, 여러분이 사진을 찍을 줄 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찍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중략)…

카메라폰은 총과 같다. 수전 손택이 잘 지적했듯이, “카메라를 사용할 때에는 항상 공격성이 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손택은 “사람들을 촬영하는 것은 그들을 폭행하는 것”이며, “총이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을 중독시키는 환상적인 기계이다.”고 말했다.




12.

정보의 과잉은 관심의 빈곤을 가져온다.




13.

소크라테스는 ‘기억력 저하’를 이유로 문자의 사용에 반대했지만, 이제 현대인은 디지털 시대를 맞아 기억을 몸과 분리시켰다.




14.

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잠시라도 미디어와 접촉하지 않으면 불편하게 여기는 걸까? 이동 중에 세상 풍경을 바라보거나 홀로 생각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자신의 공백을 스스로 채울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걸까?




15.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대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티티테인먼트는 entertainment와 엄마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6.

서구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정치 이슈’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17.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사람들의 인정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 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욕구 충족에 있어 일렬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원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서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 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18.

쉽진 않겠지만 자신을 낯선 이방인으로 여기면서 한국 사회를 정색을 하고 다시 보기 바란다. 역설 같지만 한국처럼 활짝 열려 있는 사회도 드물다. 당장 떠오르는 사례로 노암 촘스키라는 미국 지식인을 생각해 보자. 촘스키의 이념적 위상은 복잡하지만 미국의 주류 매체가 아예 언급조차 꺼리는 좌파 중의 좌파라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보수신문들도 촘스키를 껴안으면서 대서특필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사대주의’, ‘미국 비판의 상품성’, ‘보수 물타기 전술’ 때문이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19.

아주대 강사 윤진은 “거대자본 위에 선 대형 할인매장들이 구축해낸 가격의 신화에는 분명 폭력이 어른거린다. 이 물건을 우리보다 더 싸게 파는 곳이 있다면 몇 배를 보상해 주겠다는 자신만만한 태도는 과연 납품업자들에게 똑같은 물건을 다른 회사에 더 싼 가격으로 납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강요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대형 할인마트가 어떤 물건을 지나치게(!) 싸게 파는 깜짝 이벤트를 벌일 때 그로 인한 이윤의 감소는 과연 누가 감당하는 것일까? 굳이 주변 상권의 몰락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거대자본에 눌려 울며 겨자를 먹는 사람들의 눈물이 곳곳에 흘러내린다. 대형 할인매장의 가격의 신화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가리는 가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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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루소의 허접한 역사철학에서 끄집어내야 하는 것.

아마 혼자서는 절대 읽지 않았을 책. 여자친구의 경우와는 다르게 내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책 제목이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그 기원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았다.(하지만 확실히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말 나이스한 제목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불평등에 관한 나름의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불평등에 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세상은 원래 평등하거나 공평하지 않다. 그랬던 적도 없고.’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불공평이나 불평등에 관한 푸념들, “아,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지?” 그건 세상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

-반대로 “세상 참 공평해”라고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는 경우(주로 남의 불행에 고소해하거나 자신의 행운에 뿌듯해 하는 경우가 많다.)도 많다는 걸 떠올려보면 불평등에 관한 인간의 생각들이란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다 자기 경우에 맞춰서 그때그때 적절하게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사용되고 정의되는 것이 아닐까. 예로부터 사슴 가죽에 가로왈(녹피에 가로왈)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이 이야기는 이쯤으로 끝.

 

루소의 역사철학은 맑스의 유물사관이나 헤겔의 관념사관처럼 많이 논의되지 않는다.(루소의 역사에 대한 생각에 역사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그 내용을 고려할 때 과분한 것인지 모르겠다.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듯싶으나 나는 철학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루소의 그것도 철학이라고 해주고 싶다.) 루소 자신도 가설의 역사라고 하고 있을 뿐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 적용하고 있지 않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사유재산제에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역사를 가져다 붙인 느낌이 들 정도인데 개인적으로는 그 기원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논문이라고 하기에는 과학적이지 못하고 인간이 가진 그 무엇에 호소하기에는 약하다. 호소력이 부족한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의 이상을 ‘과거’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뒤에 붙은 역자의 ‘해제’ 마지막 부분에도 소개되어 있듯 루소 자신도 이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비교적 젊은 시절의 작품인 이 책을 쓸 당시에는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루쉰이 그랬다. ‘물론 현재에 불만일 수 있다. 하지만 뒤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앞에도 길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이상향으로 상정하고 있는 이 책은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옛날이 좋았지’하고 말아버린다.

루소에게는 자연상태의 인간이 이상적이다. 그런데, 자연상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을 따르고자 해도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자연상태라는 개념도, 자연법이라는 개념도 애매모호하다. ‘자연’이 무엇인가? 루소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 자연상태를 가정했는데 둘의 결론은 전혀 달랐다. 홉스는 인간을 본래 악하다고 봤고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악의 개념조차 없다고 했다. 나는 어느 쪽 말이 더 타당한지 따지는 것처럼 소모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연상태의 인간’이란 각자의 추론에 따라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 왜 자연상태를 가정해야 하는지부터 잘 모르겠다. 루소의 ‘자연상태’란 강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상태다. 루소의 자연상태가 타당하기 위해서는 온 지구의 환경이 사람이 살기에 좋아야 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난 땅에서 배부르고 평화롭게 잘 살아야 한다. 민족이동의 개념은 당연히 없다.


또 루소는 인간의 본성을 ‘자기애와 연민’으로 보고 있는데, 이 둘이 균형을 이뤄서 자연상태의 인간은 서로서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서 루소는 ‘동물은 이 인간의 본성에서 제외된다.’고 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전혀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또, 인간에게 동족이 다치거나 죽는 것에 대한 혐오감(연민의 근원)만 있을까? 그렇다면 그가 자연상태를 찬양하며 예로 들고 있는 상황, 누군가 나를 쫓아낸다든가, 괴롭힌다든가, 노예로 삼으려 한다든가 하는 상황들은 왜 일어나는가? 루소는 그런 상황들에 대해서도 도망가든가 나를 노예로 삼으려하는 자를 죽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후대의 학생들이 얼마나 편했을까? 그런 상황들이 극단적으로 일어나거나 누적되어 전쟁이나 살육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또 그는 불평등을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과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으로 나누고 전자에 대해서는 기원을 알 수 없다고 하고 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약속과 동의에 의해 생긴다고 하면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불평등이 정말 이렇게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일까? 타고난 불평등이 다른 불평등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없을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낙관적 판단과 이 두 불평등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는 듯 한쪽의 기원만 찾고 있는 태도가 아쉽다. 그밖에도 무질서는 법과 함께 생겼다거나 언어와 사회는 섬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렇다면, 루소의 이 책이 그렇게 형편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루소의 생각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것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루소의 인간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소와 볼테르의 대립에 얽혀 있었다는 계급의식이다.

사회화와 문명화는 인간의 노예화와 겁 많은 인간을 낳았다거나, 인간은 촉각과 미각보다는 시각과 청각이 더 발달했다는 지적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통찰은 인간사회를 타락시킨 근원으로 금과 은 대신에 철과 밀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그 밖에도 법과 소유권의 설정에서 행정권력의 제도화로 넘어오는 단계에서 부자와 빈자가, 제도화된 행정권력이 합법적권력이 되는 단계에서 강자와 약자가, 합법적 권력이 독단적 권력(전제군주제)이 되는 단계에서 주인과 노예가 생겨났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다시 생각해볼만 하다. 루소는 전제군주제에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선과악의 개념이 없어진다고 했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다는 것이다. 출발지인 자연상태는 순수한 자연인 반면 도착지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다.(따라서 루소에 따르면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루소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이미지는 ‘계몽된 귀족’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전혀 귀족이 아니었다. 그는 진짜 민중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곧 민중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다. 주석에서 발견한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마침 있어서 찾아본 루소에 대한 부분은 루소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유재산에 불평등의 기원을 두고 역성혁명을 피력한 루소의 사상을 접하면서 맑스의 유물사관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연약하고 겁많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주인인 자연상태의 인간에 대한 찬양에서는 니체의 초인이 떠올랐다.

책과 독서에 대한 수많은 말들 중에 나는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식상한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과식이나 폭식, 편식은 좋지 않다. 우리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던가? ‘식도락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는 말에 나는 공감할 수는 없지만 동의할 수는 있다. 또 음식은 같이 먹어야 맛있는 법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의 편식을 막아주고 함께 먹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 준 여자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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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 묻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삶을 한탄하는 사람들밖에 찾아볼 수 없으며,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자기 삶을 포기하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합쳐도 이 무질서를 간신히 막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미개인이 일찍이 삶을 한탄하여 자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런 후에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어느 쪽이 정말로 비참한가를 판단해보기 바란다.




2.

홉스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들에 대해 추론할 때, 자연 상태란 우리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3.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인간은 약한 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건강해진다.




4.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중략)…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5.

나는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늘 듣는다. 여기서 이 억압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자가 폭력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람들은 강자의 온갖 변덕에 굴복하여 한탄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원시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다.…만일 누가 나를 어떤 나무에서 쫓아낸다면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어떤 장소에서 누가 나를 괴롭힌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된다. 그것을 누가 방해하겠는가? 또 나보다 힘이 아주 센데다가 상당히 타락하고 게으르며 사납기까지 한 사나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자기를 먹여 살리라고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는 잠시도 나에게서 눈을 데지 않고 자는 동안에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나를 자기에게 꼼짝없이 매어두려고 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도망치거나 그를 죽일지도 모르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피하려고 하는 고통이나 그가 나에게 주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자진해서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7.

그리하여 사람들은 편리함을 누려도 행복하지 않은 반면에 그것을 잃으면 몹시 불행해지게 되었다.




8.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마음속에 형성되자, 누구나 자기가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의범절의 의무가 미개인들 사이에도 생기게 되었으며 고의적인 범행은 모두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그 범행으로 인해 초래되는 손해보다는 인격을 모욕당했다는 점 때문에 더 감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가 받은 모욕만큼 상대에게 벌을 가했으므로 복수는 더욱 끔찍해지고 인간은 살생까지 저지를 정도로 잔인해졌다.




9.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중략)…그러므로 그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권위적이고 냉혹하다.




10.

국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가 그에게 예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1.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항상 활동하면서 땀을 흘리고 불안해하며 더욱더 힘든 일을 찾아 끊임없이 번민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때때로 살아있는 상태에 놓여 있기 위해 죽음으로 내달리며, 불명을 찾아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증오하는 세력가와 자신이 경멸하는 부자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영예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비굴과 그들의 보호를 거만하게 자랑한다. 자신의 노예상태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는 그 노예상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감을 가지고 얘기한다.




12.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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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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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조, 당신은 자살하거나 종교를 통해 구원받아야 했소. 당신의 수기는 백발이 성성한 27살 이후로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아서 정말로 자살했거나 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르겠군. 아니, 어쩌면 당신은 자살하지도 않고, 종교도 없이 계속 그렇게 살면서, 당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 살면 인간으로서 실격이다.’라든가 ‘저렇게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도록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지.

 

당신이 수기의 앞부분에 쓴 여자에 대한 불가해함에 대해서는 나도 200퍼센트 동의하는 바요. 같은 인류인 듯 하면서도 남자와는 전혀 다른 생물,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들은 ‘외계인’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소. 당신은 아마 여자에게 데었겠지. 그래서 ‘여자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거고. 당신은 잠깐 뇌병원에서(출판사 별로 당신의 수기를 번역하는 데 조금씩 차이가 있소. 민음사에서는 희극 단어와 비극 단어 놀이를 ‘희’나 ‘비’라고 번역한 데 반해, 웅진씽크빅이라는 출판사에서는 ‘코미’, ‘트래’라고 번역했지. ‘뇌병원’은 어느 쪽 같소? 웅진씽크빅이오. 민음사에서는 ‘정신병원’이라고 번역했지. 난 왠지 웅진 쪽 번역이 좀 더 맛이 있다고 생각되는군.) 당신의 소원을 이루었지. 그곳은 온통 남자들뿐이었으니. 하지만 수기의 마지막에 가서 당신은 또 다시 여자와 살고 있더군. 아마도 여자일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인간으로서 이미 실격된, 그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당신의 운명인가 보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소. 인간을 구제할 수는 있어도 구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온갖 음악, 영화와 소설에서 구원의 대상뿐만 아니라 구원의 주체까지도 인간으로 그려지지. 그것도 여자로 말이오. 한때는 널 구원이라 생각했다는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라는 노래의 가사에서부터 카프카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여자를 구원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모티브일거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소.(내가 이렇게 강조하는 까닭은 당신처럼 될까봐 두려워서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오. 솔직히 말하면 심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싶소.) 만약 인간의 영역에 구원이 있다면 당신의 27살의 모습과 같은, 결국은 여성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구원이랄까.

 

당신의 수기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소. 푹푹 찌는 한 여름의 땡볕에서 당신의 수기를 읽고 있자니 <이방인>의 뫼르소도 생각났고…. 남을 의심할 줄 몰랐던 당신의 요시코가 더럽혀졌듯 당신은 마담의 말처럼 ‘좋은 사람’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실격됐소. 인간 세상이란 그렇다오. 당신 같은 좋은 사람은 살 곳이 못되지. 절대 선은 이 더러운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것이오. 당신이 절대 선인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외다. 무엇하나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 없이 ‘싫은 것을 마다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있는 말이 어울릴 듯하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런 당신이 유일하게 자신의 뜻으로 한 행동이 자살이었지.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쪽으로 흘러가기가 얼마나 쉬운 지 이제 당신도 알겠지.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원하지 않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시간은 ‘순간’이오. 매 순간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오. 누구하나 상처받는 사람 없이(사실은 모두가 모두에게 상처받으면서) 밝고 명랑하게 서로를 속이는, 인간이 인간을 밀어젖혀도 죄가 되지 않는 인간세상에서 살기 위해 말이오. 노래 말마따나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일 수도 있듯, 너무 많은 이타심이 오히려 극도의 이기심일 수도 있는 거요. 바로 당신의 경우처럼 말이지.

 

마담의 말처럼 당신의 아버지가 나쁜 것일지도 모르지.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내게 카프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소.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은 많아. 당신이 그렇게 된 까닭은 어느 누구에게도 있지 않소. 바로 당신에게 있지. 인간이 만약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이오. 행복조차도 두려워한 겁쟁이 요조. 당신이 한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말은 니체가 병원에 가기 전 말을 붙잡고 했을 법한 바로 이 말이오. “아아, 인간은 서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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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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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에스에서 6개월 동안 강의한 <동물의 세계>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대학수준의 강의를 방송에서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또 그것을 다시 책으로 내다보니 그런건지 '~했다.'와 같은 대학교재를 비롯한 책에서 많이 쓰는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하더군요', '~했지요'와 같은 문체를 쓰고 있다. 그런데, 같은 대화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책 <대담>(도정일,최재천 공저)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 뭔가 흐름을 뚝뚝 끊는 것이 들어왔다. 비문(非文)이 왜 이렇게 많을까? 어쩌면 이런 느낌은, 이 텍스트를 짧은 시간에 굵게 읽는, 눈을 통해 읽는 것이 아니라, 6개월 동안 매주 1회씩, 정말 그의 목소리를 통해 귀로 들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과 글의 차이에 대해, 대상을 소화하는 시간에 대해 잠깐 딴 생각을 해본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책은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최재천은 이 책을 대학교재로 사용해도 될 거라고 서문에서 쓰고 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리 훌륭한 교재는 아닌 것 같다. 풍부한 사진 자료 등 책에 들인 공은 느껴지지만 오히려 사례가 너무 풍부하다는 것이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을 '단순한 사례의 나열' 정도로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사례는 각각 모두 흥미로웠지만, 이쁜 부분만을 모아놓는다고 미인이 되지 않듯, 맛있는 것을 섞는다고 맛을 보장할 수 없듯 각각의 사례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말이다.

 

같은 내용을 말로, 글로 접할 때의 차이나, 책으로서의 편집에 대한 것은 이 정도에서 멈추기로 하고 내용에 대해 생각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다 읽고 이 수많은 사례와 실험, 연구들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물, 식물의 공존을 위해서일 것이다. 보호하고(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들을 사랑해야 하고 (최재천이 늘 말하듯이)알면 사랑하게 되므로 이들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삐딱한 나는 아무래도 동물들이 불쌍하다. 실험실 실험 대상 동물은 물론이고 자연상태의 연구 대상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동물행동학도 결국은 인간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이고(동물행동학 자체가 사람이 만든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공존'이니 하는 것들은 명목상 붙인 명분이자 이상이 아닐까? 어떤 학문이 응용분야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 학문이 그만큼 가치있는 학문이라는 의미겠지만 그 가치는 역시 인간의 기준에서 본 가치겠지. 동물 행동학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의 동물 행동학은 굉장히 실용적인 목적이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실용적인 학문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것 같다. '공존'을 위해서 정말 그렇게나 많은 실험과 연구들이 필요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인간만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인간만의 특징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보통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어떤 특정한 답 하나를 유도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 특징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를 깔아놓는다는 점이다. 인간의 특징이 어떻게 하나만 될 수 있겠는가. 그 특징 하나가 다른 모든 동물들과 인간을 결정적으로 구별해주지는 않는다. 다른 동물들이 그렇듯 인간에게도 몇 가지 특징이 조합되어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식 역시 상대적인 것이다. 예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심지어 머리를 쓰는 간단한 테스트에서 인간과 침팬지를 대결시켰는데 챔팬지가 훨씬 잘했다. 인간과 동물은 그저 다를 뿐이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항상 되묻고 있다.)

 

다른 책들이 많이 생각났던 책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잭 런던의 <야성이 부르는 소리>를 비롯한 동물이 주인공인 소설들과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봐서 실망했던 베르베르의 <개미>, 별로 유명한 책은 아닌 듯하지만 뜻밖의 보물같은 책이었던 마크 트웨인의 <동물과의 대화로 본 세상 다시보기>, 도정일, 최재천의 <대담> 등이 생각났다.

 

수많은 사례 중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다른 곤충들도 함께 사는 개미 사회와 흰개미의 체액만 빨아먹고 시체를 흰개미집 입구에서 흔들어 더 많은 흰개미를 잡아먹는다는 자객벌레, 자기 딸을 물어죽이는 여왕벌, 그리고 자식들에게 싱싱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먹이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마비만 시켜 그 위에 알을 낳는 기생말벌 등이었고, '흥미있었던' 사례는 개미와 벌들에게서 발견되는 '여왕물질', 다른 개체들로 하여금 판단의 착오는 물론 생리적인 변화(불임)까지 만들어내는 물질과 암컷이 나무구멍 속에 들어가 알을 낳으면 수컷이 진흙으로 구멍을 막고 먹이를 날라다주는 코뿔새와 가사분담을 정확히 반으로 나눈다는 갈매기 등이었다.

 

가장 무거운 이야기이자 나의 문제의식. 자연스러운 것은 다 좋은가? 아직까지 내 생각은 이렇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이 이야기 역시 맥락을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다 좋다면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듯 관용보다는 불관용 쪽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이 숭배해 마지 않는 다윈 역시 그렇다. 아래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 인용한 글이다.       

 

'우익의 물줄기를 흘려보내는 다윈이라는 샘. 이것이 첫 번째 다위니즘이다. 이 다위니즘에 따르면 다윈은 평등의 적이고 모든 진보주의의 적이다. 만약에 다윈이 옳다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이나 약육강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에 평등이나 진보를 향한 우리의 열망이 정당하다면, 다윈은 헛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다위니즘이 있다. ..(중략).. 토르에 따르면 다윈은 옳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론이나 그것의 현대적 버전인 사회생물학은 '진짜' 다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토르는 진정한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낳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중략).. 이 지점에서 토르는 <종의 기원>의 인기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거의 읽히지 않은 다윈의 또 다른 책 <인간의 계보>를 독자들에게 들이민다. 이 책에서 다윈은 문명화가 진척된 상황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자연선택 이론의 창시자이지만, 그 선택의 법칙이, 특히 그 도태의 측면에서, 문명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끝으로, 학문간 통섭은 가능할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상 위의 생물들이 그러하듯 학문도 서로 모두 얽혀있다. 전문화라는 흐름 때문에 서로 다른 분야에서 하는 소리는 전부 해석이 필요한 시대. 학문간 경계 허물기는 재미있을 뿐더러 필요하고 학문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위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자기가 하는 공부에 자부심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이런 자부심은 자칫 오만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간 경계를 허문다는 말은 경계를 허물고 함께 무언가를 하지만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생물학, 물리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물리학, 인문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학문은 인문학이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학문간 벽을 허무는 일은 이제 막 걸음마를 땠다. 말하기보단 '듣기'가 중요하겠다. 세상에 절대적인 학문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사회생물학의 득세는 다소 위험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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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재천 선생님의 답장
    from 소요당(逍遙堂) 2009-09-07 15:13 
    이승환님   보내주신 독후감 감사합니다. 제 책을 이처럼 꼼꽁하게 읽고 여러 모로 생각해 보신 분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럼 하신 말씀 몇 가지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지적하신 사항들 잘 새겨두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학에서 동물행동학을 강의할 때 거의 완벽하게 이 구도를 따르고 있고 학생들은 오히려 예가 많은 걸 대체로 좋아합니다. 물론 수업 시간에는 예만 늘어 놓는 게 아니라 실험 결과들에
 
 
프레이야 2007-08-1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인님, 반갑습니다. 좋아하는 최재천교수의 책이군요.
리뷰 잘 읽고 추천합니다.^^

sensationalbuff 2007-08-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도 반갑습니다 :)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을 추천까지 해주시다니요 헐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