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말의 위세가 큰 것은 그러니까 언어 바깥 사정, 구체적으로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다. 한국어 방언 가운데 영남 방언이 비교적 패기 있게 서울말에 맞서고 있는 사정 역시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2.
뛰어난 연시戀詩가 대체로 이별의 시이듯, 뛰어난 혁명시도 흔히 좌절한 혁명의 시다. 혁명의 좌절은 그 주체의 불행이겠으나, 시의 잠재적 행복이다.
3.
그러니까,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4.
오늘날 언론의 힘은 너무나 커져서, 이젠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거론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5.
시청률 경쟁이 미디어의 논리라면, 미디어에 대한 경쟁이 정치의 논리가 돼버린 셈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는 전통적 편견은 이제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말을 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토론하는 능력은 한 사람의 총체적 정신 능력의 큰 부분을 보여주므로,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자를 포함한 대중 앞에서의 토론이 근본적으로 ‘연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토론자들은 토론 상대자에게 얘기한다기보다 시청자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6.
다시 말해 ‘국어’는 ‘한국 국민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꼭 갈라놓아야 할까?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를 지금처럼 꼭 ‘국어’라 불러야 할까?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냈듯, 나는 ‘국어’보다는 ‘한국어’라는 말을 선호한다. 딱히 국가주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라는 말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주의나 주관주의는 정신적 미숙의 표지다. ‘국문학’이나 ‘국사’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외국인 한국어학자, 외국인 한국문학자, 외국인 한국사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어학자, 한국인 한국문학자, 한국인 한국사학자도 보고 싶다.
7.
가족에게 건네는 헌사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시인 황지우가 세 번째 시집 <나는 너다>(1987)에 붙인 문장이다. “나를 길러주신 나의 장형長兄 우성宇晟 스님께, 세상의 부채負債를 지고 지금도 땅밑을 기는 나의 아우 광우에게,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 바칩니다.”
이 헌사에 담긴 정보는 시인의 형이 승려고 시인의 동생이 혁명가라는 사실이다.
…(중략)…
시집 후기의 “선사禪師들은 검객을 닮았다. 내 골통을 반半으로 가르는 가장 빠른 생각은 메모다. 메모랜덤: 기억을 위한 부적符籍!”이라는 문장은 이 아우라에 더욱 두터운 신비의 켜를 보탰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 문장에 이어, 시집 <나는 너다>에 묶인 작품들이 “두 번째 시집을 묶을 때 함께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메모 같은 시들”이라며 사양지심을 보였으나, 이 사양의 몸가짐은 그보다 앞서 발설된 선사와 검객의 유비에서 이미 효력이 반감될 운명이었다. 선사(승려)는 검객(혁명가)을 닮았다! 그리고 선사와 검객 사이에 끼인 우리 시인은 선사로서, 검객으로서 (궁핍한 시대의) 기억을 위한 부적을, 메모랜덤을 날린다!
8.
문학평론가 김현(1990년 몰)이 서울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흘린 말은 ‘녹즙’이었다고 한다. 김현의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은 고인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 일화를 전하며, “그것(녹즙)이 선생이 상상한 가장 순결한 음식, 생명의 엑기스였을까?”라고 덧붙이고 있다. 김현의 이 녹즙은, 그보다 반세기 앞서 소설가 이상(1937년 몰)이 도쿄대 병원에서 발설했다는 ‘멜론’(이 아니라면 ‘레몬?)을 연상시킨다.
1970년대를 열어제친 전태일(1970년 몰)의 분신 이후 적잖은 공적 자살자들은 사회를 향한 요구를 유언으로 남겼다. 전태일은 제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이 다하기 직전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이 마지막 말은 그가 몸을 사르며 외쳤던 정치 구호를 육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유언이다.
9.
넓은 의미의 정치광고, 곧 의견광고의 역사에서 누락시킬 수 없는 것이 1975년 첫 사분기에 <동아일보> 지면을 메웠던 격려광고일 테다.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에 비판적 논조를 보였던 <동아일보>에선 1974년 12월 중순부터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여기 정권의 손이 작용했다고 판단한 이 신문 독자들이 이듬해 신년호부터 유료 격려광고를 내 자유언론 운동을 지지하는 유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익명으로 나간 첫 격려광고를 낸 이가 당시의 ‘재야인사’ 김대중씨였음이 올해 들어서야 밝혀졌거니와, 이 광고 이후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국민을 우롱할 수가!” “배운 대로 실행 못해 부끄럽다” “나도 이 작은 마음을” “동아여 암흑에 한 줄기 빛을” “동아 탄압 발상發想한 자여! 세세손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같은 카피의 광고들이 익명이 반半익명 또는 단체의 이름으로 쉼 없이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시민들의 격려 대상이었던 비판적 기자들을 그 해 3월 무더기로 쫓아냄으로써 정권에 무릎을 꿇었고, 이내 <동아일보> 광고 난은 ‘정상화’됐다.
10.
그는 또 소설 습작기에 <청춘> <황금> <희생> 3부 ‘거작’ 장편소설을 구상했으나 끝내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전말을 그린 <문주文酒의 벗들>이란 글의 ‘3부작 장편’ 대목은 전형적 ‘희문’이다. 소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궁리하느라 동서 고전의 첫줄을 살피던 무애는 마침내 밀턴의 <실낙원>이 전차사로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다.(“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at fruit/ Or that forbidden tree…"). 그래서 이를 좇아, 서양말 전치사에 해당하는 우리말 조사 ‘가, 를, 의, 에, 와, 는, 아…’ 따위를 늘어놓고 심량深量하다가, 이내 소설 쓰기를 단념했다는 얘기다.
11.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12.
홍승면은 <직업으로서의 신문기자>라는 글에서, 국민과 신문기자의 관계를 사령관과 참모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다. “참모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고 사태 전망을 적절하게 판단해야 하고 현명한 행동을 건의해야 한다. 그것은 사령관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이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13.
경어체계는 언어예절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이다. 예절은 한 공동체의 파열을 막는 거푸집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자질구레할 땐, 또 너무 경직되게 운용될 땐 공동체 구성원의 생기와 친밀감을 옥죄는 사슬이 될 수도 있다. 경어체계가 형식화하고 있는 예절은 거푸집보다는 사슬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 예절이, 특히 한국어 경어체계에서 보듯,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이고, 상호적이라기보다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어체계는 아주 깊은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다. 한국어 경어체계의 흔들림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통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