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말의 위세가 큰 것은 그러니까 언어 바깥 사정, 구체적으로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다. 한국어 방언 가운데 영남 방언이 비교적 패기 있게 서울말에 맞서고 있는 사정 역시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2.

뛰어난 연시戀詩가 대체로 이별의 시이듯, 뛰어난 혁명시도 흔히 좌절한 혁명의 시다. 혁명의 좌절은 그 주체의 불행이겠으나, 시의 잠재적 행복이다.

 

3.

그러니까,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4.

오늘날 언론의 힘은 너무나 커져서, 이젠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거론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5.

시청률 경쟁이 미디어의 논리라면, 미디어에 대한 경쟁이 정치의 논리가 돼버린 셈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는 전통적 편견은 이제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말을 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토론하는 능력은 한 사람의 총체적 정신 능력의 큰 부분을 보여주므로,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자를 포함한 대중 앞에서의 토론이 근본적으로 ‘연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토론자들은 토론 상대자에게 얘기한다기보다 시청자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6.

다시 말해 ‘국어’는 ‘한국 국민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꼭 갈라놓아야 할까?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를 지금처럼 꼭 ‘국어’라 불러야 할까?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냈듯, 나는 ‘국어’보다는 ‘한국어’라는 말을 선호한다. 딱히 국가주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라는 말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주의나 주관주의는 정신적 미숙의 표지다. ‘국문학’이나 ‘국사’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외국인 한국어학자, 외국인 한국문학자, 외국인 한국사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어학자, 한국인 한국문학자, 한국인 한국사학자도 보고 싶다.

 

7.

가족에게 건네는 헌사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시인 황지우가 세 번째 시집 <나는 너다>(1987)에 붙인 문장이다. “나를 길러주신 나의 장형長兄 우성宇晟 스님께, 세상의 부채負債를 지고 지금도 땅밑을 기는 나의 아우 광우에게,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 바칩니다.”

이 헌사에 담긴 정보는 시인의 형이 승려고 시인의 동생이 혁명가라는 사실이다.

…(중략)…

시집 후기의 “선사禪師들은 검객을 닮았다. 내 골통을 반半으로 가르는 가장 빠른 생각은 메모다. 메모랜덤: 기억을 위한 부적符籍!”이라는 문장은 이 아우라에 더욱 두터운 신비의 켜를 보탰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 문장에 이어, 시집 <나는 너다>에 묶인 작품들이 “두 번째 시집을 묶을 때 함께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메모 같은 시들”이라며 사양지심을 보였으나, 이 사양의 몸가짐은 그보다 앞서 발설된 선사와 검객의 유비에서 이미 효력이 반감될 운명이었다. 선사(승려)는 검객(혁명가)을 닮았다! 그리고 선사와 검객 사이에 끼인 우리 시인은 선사로서, 검객으로서 (궁핍한 시대의) 기억을 위한 부적을, 메모랜덤을 날린다!

 

8.

문학평론가 김현(1990년 몰)이 서울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흘린 말은 ‘녹즙’이었다고 한다. 김현의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은 고인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 일화를 전하며, “그것(녹즙)이 선생이 상상한 가장 순결한 음식, 생명의 엑기스였을까?”라고 덧붙이고 있다. 김현의 이 녹즙은, 그보다 반세기 앞서 소설가 이상(1937년 몰)이 도쿄대 병원에서 발설했다는 ‘멜론’(이 아니라면 ‘레몬?)을 연상시킨다.

1970년대를 열어제친 전태일(1970년 몰)의 분신 이후 적잖은 공적 자살자들은 사회를 향한 요구를 유언으로 남겼다. 전태일은 제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이 다하기 직전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이 마지막 말은 그가 몸을 사르며 외쳤던 정치 구호를 육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유언이다.

 

9.

넓은 의미의 정치광고, 곧 의견광고의 역사에서 누락시킬 수 없는 것이 1975년 첫 사분기에 <동아일보> 지면을 메웠던 격려광고일 테다.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에 비판적 논조를 보였던 <동아일보>에선 1974년 12월 중순부터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여기 정권의 손이 작용했다고 판단한 이 신문 독자들이 이듬해 신년호부터 유료 격려광고를 내 자유언론 운동을 지지하는 유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익명으로 나간 첫 격려광고를 낸 이가 당시의 ‘재야인사’ 김대중씨였음이 올해 들어서야 밝혀졌거니와, 이 광고 이후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국민을 우롱할 수가!” “배운 대로 실행 못해 부끄럽다” “나도 이 작은 마음을” “동아여 암흑에 한 줄기 빛을” “동아 탄압 발상發想한 자여! 세세손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같은 카피의 광고들이 익명이 반半익명 또는 단체의 이름으로 쉼 없이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시민들의 격려 대상이었던 비판적 기자들을 그 해 3월 무더기로 쫓아냄으로써 정권에 무릎을 꿇었고, 이내 <동아일보> 광고 난은 ‘정상화’됐다.

 

10.

그는 또 소설 습작기에 <청춘> <황금> <희생> 3부 ‘거작’ 장편소설을 구상했으나 끝내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전말을 그린 <문주文酒의 벗들>이란 글의 ‘3부작 장편’ 대목은 전형적 ‘희문’이다. 소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궁리하느라 동서 고전의 첫줄을 살피던 무애는 마침내 밀턴의 <실낙원>이 전차사로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다.(“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at fruit/ Or that forbidden tree…"). 그래서 이를 좇아, 서양말 전치사에 해당하는 우리말 조사 ‘가, 를, 의, 에, 와, 는, 아…’ 따위를 늘어놓고 심량深量하다가, 이내 소설 쓰기를 단념했다는 얘기다.

 

11.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12.

홍승면은 <직업으로서의 신문기자>라는 글에서, 국민과 신문기자의 관계를 사령관과 참모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다. “참모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고 사태 전망을 적절하게 판단해야 하고 현명한 행동을 건의해야 한다. 그것은 사령관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이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13.

경어체계는 언어예절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이다. 예절은 한 공동체의 파열을 막는 거푸집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자질구레할 땐, 또 너무 경직되게 운용될 땐 공동체 구성원의 생기와 친밀감을 옥죄는 사슬이 될 수도 있다. 경어체계가 형식화하고 있는 예절은 거푸집보다는 사슬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 예절이, 특히 한국어 경어체계에서 보듯,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이고, 상호적이라기보다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어체계는 아주 깊은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다. 한국어 경어체계의 흔들림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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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 1-16은 끊임없이 불안에 쫓기며 도망다니던 시절에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작품이다. 역사가들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일 거라 추정한다. 잘 알려진 대로 여기서 목이 잘린 골리앗의 얼굴은 카라바조의 초상이다. 그림에 사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 이 괴팍한 화가는, 서명 없이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독특하게 그리기도 했지만 이렇듯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존재 증명을 하기도 했다. 이왕이면 성서의 영웅인 다윗의 얼굴에 자산의 얼굴을 그려 넣을 일이지 비참하게 목이 잘린 괴수의 얼굴에 그려 넣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목이 잘린 괴수 골리앗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직 살아 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소리지른다. 반면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소년 다윗을 표정을 보라. 신의 말씀에 따라 적장의 목을 치긴 했으나 승리에 도취한 모습이라기보다는 피곤하고 연민에 잠긴 모습이다.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모습을 다윗에 의해 목이 잘린 골리앗에 대입한 카라바조의 초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지 않은가?

2.
전시를 중단한다는 베를린 미술가 협회의 결정은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당장 80명의 미술가 협회 회원이 이에 반대해 회의장을 뛰쳐나왔다. 그들은 그날 자정에 '자유 예술가 협회'를 발족했다. 하지만 이들이 뭉크의 새로운 예술에 찬성을 했거나 그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협회의 결정에 반발하고 그들만의 독립된 협회를 만들어 나온 이유는, 단지 외국에서 초청된 화가를 무례하게 대접한 것에 대해 윤리적인 측면에서 반발한 것이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고 예술 비평가이기도 한 프란츠 세르베스의 글을 읽어 보자. "뭉크의 그림은 추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보이코트는 우습다. 이는 예술가를,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단지 과장되었을 뿐인 그의 예술 방향을 가지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국가 범죄자나 되는 듯이 다루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거부할 가치가 있다. 나는 뭉크의 예술적 신념에 대한 진정함을 믿는다. 그리고 그의 재능도 믿고 다른 무엇보다 그의 용기를 믿는다. 내가 믿지 않는 단 한 가지는 그의 취향이다."

3.

그림 5-4는 뒤샹의 그림을 패러디한 캐리커쳐다. 이 캐리커쳐에 따르면 뒤샹의 그림이,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계단을 밀려 내려오는 궁중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거다.(내가 보기엔 무시할 수 없는 연상 능력이다. 캐리커쳐만이 할 수 있는…….) 뒤샹의 이상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고 그림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이처럼 풍자하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신문들마다 이 그림에 대해 떠들어 댔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적인 사건이 가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아메리칸 아트 뉴스>라는 잡지에선 10달러를 상금으로 걸고 이 그림의 설명을 현상 공모하기도 했다. "가장 그럴싸한 설명을 하는 분에게 10달러의 상금을 드립니다!" 이 상금을 타게된 건 어떤 사람의 시였는데 그 시에는, 사람들이 이 그림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모습을 찾으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실패한 이유는 그 인물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기 때문이라고 씌어 있다.

4.

그가 생산하는 건 예술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다. 그는 다른 노동자들처럼 작품을 생산하고 이를 상품이라 이름붙인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뒤샹이 상품을 예술로 만들어 버린 것과 반대로 워홀이 상품이라 이름붙인 작품은 시장 속에서 예술이 된다. 그는 사인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중략)…그리고 그림 5-19에서처럼 사형할 때 쓰는 전기 의자 등을 앞뒤 맥락 없이 특정한 부분만을 가져와서 사용하기도 한다. 대중 매체를 충분히 활용한 이런 작품 주제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처음에 받았던 충격이 점차로 둔화된다. 주변 정황을 알려 주는 정보에서 멀어진 데다가 색의 조작으로 낯설게 되어 버린 이 장면들은 어느 순간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워홀의 전기 의자는 12개를 한 화폭에 담은 것도 있지만 색을 달리해 하나씩 제작된 것도 있다. 사실 전기 고문 기계란 얼마나 소름끼치고 비극적이며 끔찍한 대상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 중 마음에 드는 색으로 골라 사서 자기 집 벽에 걸어 놓는다. 마네 때만 해도 예술적인 새로움은 뒷전이고 그림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만을 트집잡았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 우리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에서도 미적인 부분만 끄집어 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다.

5.
외부로부터 강제로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해 행동에 옮겨본 사람은 안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이를 지속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6.
보이스의 정치 활동에 관해서는 의외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가 제7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행한 7000개의 떡갈나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녹색당 활동을 하고 있던 보이스는 1980년부터 카셀 시내 곳곳에 7000그루의 떡갈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7회 도큐멘타에서 실현시킨 것이다. 박정희 시절부터 매년 4월 5일이면 전국민이 대대적으로 나무심기 운동에 참여하는 우리나라에선 이게 별스럽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하루 만에 몇 만 그루도 심는데 뭘……. 하지만 한 개인이 당시 돈으로 350만 마르크에 달하는 자금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미술전시에서 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로서는 매우 의외의 사건이었다. 나무를 심겠다고 아무 데나 심을 수도 없는 일. 심어야 할 곳의 행정기관에 가서 허가받고 협상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모금운동과 홍보활동을 하고, 나무와 돌을 구해 설치하는 데만 수년이 걸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거다. 보이스는 카셀 시내 곳곳에 돌 하나씩을 옆에 둔 7000그루를 목표로 떡갈나무를 하나하나씩 심기 시작한다. 보이스는 이 일을 시작하고 진행했으나 완성되기 전에 죽는다. 그가 죽은 1986년에 5500그루가 심어졌고, 그의 아들 벤젤이 1987년 도큐멘타8에서 마지막 나무를 심는 것으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오염되고 각박해지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서, 그리고 예술이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 가장 필요한 걸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안하고 실행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7.
그의 이러한 교육적 신념은 1972년에 있었던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100일간의 강의와 토론에 이어, 1977년 6회 도큐멘타에서 다시 한번 표현된다. 보이스는 도큐멘타가 열리는 100일 동안 세미나를 열고 '삶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독일의 68운동을 이끌었던 루디 디취케도 2년 동안 자유 국제 대한FIU의 멤버였다고 한다. 여기서 보이스는 인간의 창조력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본질적인 자본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적은 것일지라도 그렇다. 그 능력은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그리고 능력과 더불어 자본 개념이 자본주의의 권력구조에서 해방되고 자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될 경우에만 계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창조력이 바로 자본이다."
자본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뒤엎는 이 발언은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그의 생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일 거다. 그런데 유명한 만큼 쉽게 오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이 말은, 모든 사람이 화가나 조각가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모든 사람에게 예술가적 능력이 잠재되어 있고 이것을 일깨우는 말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거리로 나가 생전 그림이라곤 그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림 그리게 해서 그걸 작품이라고 걸어놓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발견하고 계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때 창조되는 대상은 미술관에 있는 것 같은 작품이 아니라 '사회'다.

8.

자본주의와 그 문화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를 했던 보이스를 워홀과 대비시키는 건 그런 점에서 여러 모로 흥미롭다. 둘 다 자기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면서 소비-상품 시대에 관심이 있었고 삶과 예술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공통점을 지닌다. 은빛 가발과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한 워홀은 은색으로 도배된 '공장'에서 '상품'으로의 예술작품을 생산했고, 펠트 천 모자와 낚시 조끼를 입은 보이스는 누구에게나 개발되어 있는 자유 국제 대학FIU에서 창조적 유목 생활을 무형의 행위들로 채웠다. 워홀은 말이 없고 수줍었으며 자본주의를 긍정했고 그 안에서 예술가인 자신을 헐리우드 스타처럼 등장시킴으로써 예술은 곧 돈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반면에 보이스는 말이 정말 많았고 자본주의에 거리를 두면서 선지자와 같은 예술가상을 제시해 예술은 곧 확장된 사랑과도 같은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 둘은 이렇게 동시대를 사는, 전혀 반대의 작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이스는 1979년 5월 18일,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드니즈 르네/한스 마이어에서 워홀과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만난 후 "비록 워홀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하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내 형제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보이스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하여간 이 만남 후 워홀은 그림 6-17에서 보듯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보이스 초상화를 제작했고 보이스가 추진한 7000그루 떡갈나무 프로젝트에 스폰서를 하는 것으로 상대 예술가에 대한 마음을 표했다.
오늘날 그가 남긴 작품은 아무나 손댈 수 없는 위엄과 권위를 갖고 미술관 안에 전시되어 있으나 어쩌면 그건 보이스가 바라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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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까? '경제'가 모든 것이 된 세상, 경제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건드린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덜어낸다는 느낌으로, 시작.


1. 제목, 문체, 유감
제목에 경의를 표한다. 문장형의, 다소 긴 제목이기는 하지만 임펙트는 정말 강력하다. 러미스는 원래 제목을 <21세기의 커먼센스를 위해서>라고 붙이려 했다는데 그런 제목을 달고 나왔다면 내가 이 책을 잡는데 훨씬 더 오래걸렸을 것이다. 현재의 제목은 [외면일기] - 경제는 꼭 성장해야만 할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고 있어 한번 입력되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문제의식을 잠시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머리말'을 지나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습니다'라는 종결어미로 된 문장들을 읽으며 다소 간지럽기도 하고, 번역가가 좀 더 신경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장들은 자칫 객관성을 잃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라는 종결어미로 끝났다면 이 책은 지금처럼 큰 감흥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문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는 내용들을 차분하면서도 호소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이 책은 '쓰여진 것'이 아니라 녹음기에 대고 '말해진 것'이기 때문에 번역에 있어서도 이런 문체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면서도 적절한 선택인 것이다.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모두 절절한 공감을 끌어내었지만 그 중에서 다소 아쉬웠던 장은 제2장 '비상식적'인 헌법?이다. 러미스는 근대국가를 정의하면서 그 본질을 오직 '정당한 폭력'에서 찾고 있는데, 그 근거는 막스 베버가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공부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좀 불친절한 설명인 듯하다. 이 장 전체가 전쟁을 포함한 '국가의 폭력'에 할애되어 있기 때문에 글의 전개상 이런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렇게 엉성한 근거로는 얼마든지 이견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말하면 제2장에서 이 부분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근대국가를 애써 정의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국가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좀 더 뒤에 가면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 이외 다른 큰 나라에서도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특히 남자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인간으로 된다'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내게는 참 미스테리하고 어리둥절한 문장이다. 러미스씨, 좀 오버하신 것 같아요. 
     

2. 상식
'상식'이라는 말이 주변에서 쓰이는 경우들을 떠올려보면 이 단어가 주는 뉘앙스와는 달리 얼마나 주관적으로 쓰이는지 알 수 있다. '상식'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나온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알아야 하는 지식'? 의무 교육을 말하는 걸까? '알아야 한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견문',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기준을 정하기가 애매한 단어들이다.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따위는 개인의 깜냥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일반화시키고는 있지만 사람들의 상식은 천차만별이며 거기에서 교집합을 찾는다는 것은 소모적이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각종 수험서에 보이는 '일반상식'이라는 표현을 떠올려본다. 합격자와 탈락자, 내부자와 외부자를 가르는 시험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상식의 정의에 주어로 사용된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식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그것을 보유한 쪽과 그것을 보유하지 않은 쪽으로 나누는 힘이 있다. 상식이라는 말이 쓰이는 상황들은 대게 상식이 없거나 부족한 대상,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토론이나 논쟁 중에 쓰이는 '그것은 상식이다', '상식적으로'라는 말은 결국 '내 말이 맞다니까', '당장 입증할 수는 없지만 내 편이 더 많다'는 의미다.

상식은 이렇게 정치적인 단어이며 그런 면에서 일종의 '편견'이라고까지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 러미스가 책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식' 역시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러미스는 지금의 상식과는 다른 인도적이고 인간해방적인 이런 생각들이 패권을 잡은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내게 이 말은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말,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기의 편견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우리의 편견을 역사에 대한 인도적 관점이라는 방향으로 두는 게 좋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러미스는 그런 변화는 반드시 일어난다고 덧붙이고 있다. "먼 미래냐 가까운 미래냐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이른바 패러다임의 전환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오늘의 비상식이 상식이 되고, 오늘의 상식은 비상식이 되는, 그런 전환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일어나버리면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내가 어떻게 했는지, 그것이 이상하여 헛웃음이 날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이런 변화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는 근거는 이미 이 사회 속에 '급여를 좀 줄어도 좋다, 그보다는 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이다.

확실히 '성장제일주의'와는 다른 사고방식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복지는 거래도 시혜도 아닌 권리라는 생각, '이건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분명 뭔가 달라졌다. '경제' 때문에 벌어지는 황당한 사건과 경험들이 늘어나면서 특별히 어떤 정치적 성향을 띠거나 전문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또 그런 생각과 느낌들이 논의되는 장소도 인터넷의 발달로 과거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예를 들면 네이버 지식in(왜 무조건 계속 경제성장 해야하나요? )처럼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굴러가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빈익빈 부익부는 이미 누가 그것을 설명해주기 전에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상식이 된 듯한, 아직 그렇게까지는 안됐다면 곧(?) 될 듯한 분위기다. 아직은 무력감이 더 크긴 하지만 상황이 무르익고 있다는 느낌. (아니, 어쩌면 이것은 나의 태도를 투영한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성장과 분배 중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식(파이를 키우자)은 다음 두 가지 사실만으로 간단하게 무너질 것 같다.  
1. 파이를 만들 재료가 무한하지 않다.(자원, 환경)
2. 내 몫이 큰 것은 누군가의 몫을 가로챘기 때문이다.(빈곤, 분배) 

하지만.



3. (잿빛) 희망은 어디에?
쉽지 않다. 쉽지 않을 뿐더러 불가능해보이기까지 한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러미스는 분배의 문제는 경제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라고 말하며 정치에서 희망을 찾는 듯 보인다. 책의 후반에 나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으로 보아 확실히 정치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보들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자본은 사람들이 어렴풋하게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도덕과 경제의 등가라는 계약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분배의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많아지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정치적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일까?

한국의 정치적 상황들을 보면서 쌓여온 것들의 정체가 러셀의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를 읽고 난 후 분명해졌다. 성급하고 비이성적인 결론이겠지만(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정당 정치가 지속되고 중요한 사안들이 그런 식으로 결정되는 한 정치에서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당 정치인들이 중요시하는 정책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그 정책이 국민 일부만을 겨냥해야 한다. 둘째, 정책을 합리화하는 논변은 극히 단순해야 한다.
…(중략)…
나아가 정치인들은 라이벌 집단끼리 갈리기 때문에, 전쟁 시처럼 외부의 적에 대항해 뭉칠 때 외에는 나라 전체를 분열로 몰고 간다. 즉 그들은 의미 없는 소리와 분노를 삶의 원칙으로 삼는다. 설명하기 힘든 것이나, 국가들 간에 혹은 한 국가에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 일, 나아가서는 정치인들 계층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은 이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김용신의 <진보와 보수의 정신분석>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을 하고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 제도가 앞선 서구에서도 정당 간의 차이는 매우 미비하게 되고 말았다. 프랑스 정치학자인 두베르제(Manrice Duverger)가 1964년 발표한 그의 저서 <정치의 관념(The Idea of Politics)>에서 소련이나 미국의 20년 후 국가 발전 청사진은 거의 비슷하다고 말함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이념의 무의미성을 지적한 사실이 입증이라도 되듯이 현대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간의 이념적 구별은 어렵게 되고 더 나아가서 정책적 차별성마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이처럼 이념과 정책의 차별성이 약화된 자리에는 감성의 정치가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략)… 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각 선거는 거의 유흥(entertainment)화 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가장 민주주의적인 선거는 제비뽑기'라는 저자의 주장은 정말 그럴 듯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이유는 누구나 선출될 확률이 있으므로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이 높아질 것이고, 당선되었다고 뻐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뻐긴다'는 표현은 정말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선거방식을 조금만 바꾸면 같은 선호도를 가진 유권자들이라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과학적인 이론(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이 있는데 현재의 상황이 이런 까닭은, 정치인들의 수준미달과 겸손의 결여에 있는 것일까?

정당 정치에는 희망이 없을 지 몰라도 넓은 의미의 정치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희망은 정치에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럴 때의 정치는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미 사람들이 '정치'라는 단어에 갖는 무관심과 혐오의 정도를 생각해볼 때 무의미한 구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용어를 만드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정치'라는 단어를 계속 쓰면서 분배를 논하고 풍요를 논하는 것은 희망의 주체들을 은연 중에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4. 우리는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좋은 시절을 늘 과거에서 찾는 사람들의 입버릇은 장미빛 미래를 꿈꾸고 달리고는 있지만 '앞으로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무의식의 표현일까? 많은 사람들이 비관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투성이의 '방사능이 있는 유토피아'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만약 늦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저자의 이 말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용써봤자 예전 혹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는 없어. 그저 브레이크나 거는 거지'라는 의미가 아닐까. 상황을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면 '고민하지 말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외치는 쪽의 승리다. '행복'은 여전히 개인적인 것이 된다. 이런 태도를 비난할 수는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서야 그것이 미덕임을 알게 된 '관용'도 아직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덕목이 아닌데, '더불어 잘 살기'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까. 우리는 생각보다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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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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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렇게 들었었다. 지하철에서 이 소설을 읽다가 바닥을 굴렀다느니, 하는, 아무튼, 존나 웃기다는 소문. 나는 정말 소설을 읽으면서 존나 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내용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무려 한겨레 문학상 8회 수상작이기도 하거니와, 따라서 그러한 까닭에, 라기보다는 세월도 하 지난 뒤에 읽었으니 그동안 참 많이도 들려왔다. 프로보다는 아마추어가 더 행복하다는 내용. 나도 안다.

이 책을 왜 들었는지 모르겠다. 한 분야의 책을 5권 정도 연속해서 읽자는 혼자만의 다짐이 무색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을 다 읽은 날 밤,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잠이 들었으나 깨고나니 그런 비중있는 고민들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총 3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소설의 2장이 시작되자, 나는 갑자기 지루해졌다. 박민규의 문장은 과연 짧고 현란했으나, 1장에 이어 2장에서도 그 화려하고 재기 넘치는 문장들은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지루한 음악을 듣고 있는 기분이 되었다. 더군다나,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미 1장에 다 나와있었고, 그러니까, 2장과 3장은 그 뒷이야기쯤 될까?

그리고 깨달았다. '아, 재미있는 소설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걸 보고 형이 웃기지 않냐며 특히 자기는 앞부분에서 열라 웃었다는 얘길 해줬다. 나는 어디서 웃었던가. "파를요?"에서 웃었던 것 같다. 형에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2장이 시작된 뒤였고, 나는 아무튼 존나 웃기다는 그 소설이 나를 존나 웃겨주기를 내심기대하고 있었으나, 아뿔사, 존나 웃기다는 부분은 1장이었고, 1장은 나를 크게 웃겨주지 못하고 이미 끝나버렸던 것이다. 남들은 웃기다는 데 나는 안 웃기는, 나의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엄격한 유머감각.(안 웃긴 건 안 웃긴 거다.) 하지만 좀 더 읽다보니 그것은 내 유머감각 때문이 아니었다. 

이 소설을 읽기 오래 전, 대학교 문학입문 시간에 나는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제법 남들에게 추천도 하고 있다. 아마도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잡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는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그 인상 때문이리라. 그랬다. 과연 재미있는 소설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걸 본 박민규의 소설을 아는 사람들은, 첨엔 재밌었는데 이젠 안 읽는다고 했다. 다 똑같다는 것이다. 나는 이후 별 기대없이 책을 읽었고, 책은 역시나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결말과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그래서 이미 다 느껴버린- 인상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같은 소설을 쓴다는 건 멋진 일이다.

책을 다 읽고 형에게 말했다. "형, 박민규 소설 저게 처음이지?"
형은 그렇다고 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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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 합리적 회의주의자의 에세이
버트런드 러셀 지음, 김경숙 옮김 / 푸른숲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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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이었던가? 홀든이 그랬던 것 같다. 진짜 좋은 책은 읽고 났을 때 작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고. 버트런드 러셀과 움베르토 에코는 내가 뭣도 모르면서 좋아라하는 작가들이다. 이 책을 읽고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이전까지는 이들의 책을 읽고나서 이들과 얘기를 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책,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는 죽은 러셀을 깨워서라도 얘기를 해보고 싶다. 

 

1928년 처음 출간되었다는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은 몇 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젋고 신선하다. 내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고 느꼈던 바로 그 인상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8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쓴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지만, 동시에 그가 살던 시대에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읽는 사람을 서글프게도 한다.




 

   
  우리에게 ‘자유 경쟁’이 필요한 곳은 생각이지 경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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