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 1-16은 끊임없이 불안에 쫓기며 도망다니던 시절에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작품이다. 역사가들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일 거라 추정한다. 잘 알려진 대로 여기서 목이 잘린 골리앗의 얼굴은 카라바조의 초상이다. 그림에 사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 이 괴팍한 화가는, 서명 없이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독특하게 그리기도 했지만 이렇듯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존재 증명을 하기도 했다. 이왕이면 성서의 영웅인 다윗의 얼굴에 자산의 얼굴을 그려 넣을 일이지 비참하게 목이 잘린 괴수의 얼굴에 그려 넣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목이 잘린 괴수 골리앗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직 살아 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소리지른다. 반면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소년 다윗을 표정을 보라. 신의 말씀에 따라 적장의 목을 치긴 했으나 승리에 도취한 모습이라기보다는 피곤하고 연민에 잠긴 모습이다.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모습을 다윗에 의해 목이 잘린 골리앗에 대입한 카라바조의 초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지 않은가?

2.
전시를 중단한다는 베를린 미술가 협회의 결정은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당장 80명의 미술가 협회 회원이 이에 반대해 회의장을 뛰쳐나왔다. 그들은 그날 자정에 '자유 예술가 협회'를 발족했다. 하지만 이들이 뭉크의 새로운 예술에 찬성을 했거나 그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협회의 결정에 반발하고 그들만의 독립된 협회를 만들어 나온 이유는, 단지 외국에서 초청된 화가를 무례하게 대접한 것에 대해 윤리적인 측면에서 반발한 것이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고 예술 비평가이기도 한 프란츠 세르베스의 글을 읽어 보자. "뭉크의 그림은 추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보이코트는 우습다. 이는 예술가를,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단지 과장되었을 뿐인 그의 예술 방향을 가지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국가 범죄자나 되는 듯이 다루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거부할 가치가 있다. 나는 뭉크의 예술적 신념에 대한 진정함을 믿는다. 그리고 그의 재능도 믿고 다른 무엇보다 그의 용기를 믿는다. 내가 믿지 않는 단 한 가지는 그의 취향이다."

3.

그림 5-4는 뒤샹의 그림을 패러디한 캐리커쳐다. 이 캐리커쳐에 따르면 뒤샹의 그림이,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계단을 밀려 내려오는 궁중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거다.(내가 보기엔 무시할 수 없는 연상 능력이다. 캐리커쳐만이 할 수 있는…….) 뒤샹의 이상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고 그림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이처럼 풍자하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신문들마다 이 그림에 대해 떠들어 댔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적인 사건이 가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아메리칸 아트 뉴스>라는 잡지에선 10달러를 상금으로 걸고 이 그림의 설명을 현상 공모하기도 했다. "가장 그럴싸한 설명을 하는 분에게 10달러의 상금을 드립니다!" 이 상금을 타게된 건 어떤 사람의 시였는데 그 시에는, 사람들이 이 그림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모습을 찾으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실패한 이유는 그 인물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기 때문이라고 씌어 있다.

4.

그가 생산하는 건 예술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다. 그는 다른 노동자들처럼 작품을 생산하고 이를 상품이라 이름붙인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뒤샹이 상품을 예술로 만들어 버린 것과 반대로 워홀이 상품이라 이름붙인 작품은 시장 속에서 예술이 된다. 그는 사인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중략)…그리고 그림 5-19에서처럼 사형할 때 쓰는 전기 의자 등을 앞뒤 맥락 없이 특정한 부분만을 가져와서 사용하기도 한다. 대중 매체를 충분히 활용한 이런 작품 주제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처음에 받았던 충격이 점차로 둔화된다. 주변 정황을 알려 주는 정보에서 멀어진 데다가 색의 조작으로 낯설게 되어 버린 이 장면들은 어느 순간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워홀의 전기 의자는 12개를 한 화폭에 담은 것도 있지만 색을 달리해 하나씩 제작된 것도 있다. 사실 전기 고문 기계란 얼마나 소름끼치고 비극적이며 끔찍한 대상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 중 마음에 드는 색으로 골라 사서 자기 집 벽에 걸어 놓는다. 마네 때만 해도 예술적인 새로움은 뒷전이고 그림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만을 트집잡았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 우리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에서도 미적인 부분만 끄집어 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다.

5.
외부로부터 강제로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해 행동에 옮겨본 사람은 안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이를 지속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6.
보이스의 정치 활동에 관해서는 의외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가 제7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행한 7000개의 떡갈나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녹색당 활동을 하고 있던 보이스는 1980년부터 카셀 시내 곳곳에 7000그루의 떡갈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7회 도큐멘타에서 실현시킨 것이다. 박정희 시절부터 매년 4월 5일이면 전국민이 대대적으로 나무심기 운동에 참여하는 우리나라에선 이게 별스럽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하루 만에 몇 만 그루도 심는데 뭘……. 하지만 한 개인이 당시 돈으로 350만 마르크에 달하는 자금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미술전시에서 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로서는 매우 의외의 사건이었다. 나무를 심겠다고 아무 데나 심을 수도 없는 일. 심어야 할 곳의 행정기관에 가서 허가받고 협상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모금운동과 홍보활동을 하고, 나무와 돌을 구해 설치하는 데만 수년이 걸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거다. 보이스는 카셀 시내 곳곳에 돌 하나씩을 옆에 둔 7000그루를 목표로 떡갈나무를 하나하나씩 심기 시작한다. 보이스는 이 일을 시작하고 진행했으나 완성되기 전에 죽는다. 그가 죽은 1986년에 5500그루가 심어졌고, 그의 아들 벤젤이 1987년 도큐멘타8에서 마지막 나무를 심는 것으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오염되고 각박해지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서, 그리고 예술이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 가장 필요한 걸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안하고 실행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7.
그의 이러한 교육적 신념은 1972년에 있었던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100일간의 강의와 토론에 이어, 1977년 6회 도큐멘타에서 다시 한번 표현된다. 보이스는 도큐멘타가 열리는 100일 동안 세미나를 열고 '삶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독일의 68운동을 이끌었던 루디 디취케도 2년 동안 자유 국제 대한FIU의 멤버였다고 한다. 여기서 보이스는 인간의 창조력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본질적인 자본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적은 것일지라도 그렇다. 그 능력은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그리고 능력과 더불어 자본 개념이 자본주의의 권력구조에서 해방되고 자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될 경우에만 계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창조력이 바로 자본이다."
자본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뒤엎는 이 발언은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그의 생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일 거다. 그런데 유명한 만큼 쉽게 오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이 말은, 모든 사람이 화가나 조각가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모든 사람에게 예술가적 능력이 잠재되어 있고 이것을 일깨우는 말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거리로 나가 생전 그림이라곤 그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림 그리게 해서 그걸 작품이라고 걸어놓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발견하고 계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때 창조되는 대상은 미술관에 있는 것 같은 작품이 아니라 '사회'다.

8.

자본주의와 그 문화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를 했던 보이스를 워홀과 대비시키는 건 그런 점에서 여러 모로 흥미롭다. 둘 다 자기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면서 소비-상품 시대에 관심이 있었고 삶과 예술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공통점을 지닌다. 은빛 가발과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한 워홀은 은색으로 도배된 '공장'에서 '상품'으로의 예술작품을 생산했고, 펠트 천 모자와 낚시 조끼를 입은 보이스는 누구에게나 개발되어 있는 자유 국제 대학FIU에서 창조적 유목 생활을 무형의 행위들로 채웠다. 워홀은 말이 없고 수줍었으며 자본주의를 긍정했고 그 안에서 예술가인 자신을 헐리우드 스타처럼 등장시킴으로써 예술은 곧 돈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반면에 보이스는 말이 정말 많았고 자본주의에 거리를 두면서 선지자와 같은 예술가상을 제시해 예술은 곧 확장된 사랑과도 같은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 둘은 이렇게 동시대를 사는, 전혀 반대의 작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이스는 1979년 5월 18일,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드니즈 르네/한스 마이어에서 워홀과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만난 후 "비록 워홀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하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내 형제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보이스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하여간 이 만남 후 워홀은 그림 6-17에서 보듯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보이스 초상화를 제작했고 보이스가 추진한 7000그루 떡갈나무 프로젝트에 스폰서를 하는 것으로 상대 예술가에 대한 마음을 표했다.
오늘날 그가 남긴 작품은 아무나 손댈 수 없는 위엄과 권위를 갖고 미술관 안에 전시되어 있으나 어쩌면 그건 보이스가 바라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