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까? '경제'가 모든 것이 된 세상, 경제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건드린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덜어낸다는 느낌으로, 시작.


1. 제목, 문체, 유감
제목에 경의를 표한다. 문장형의, 다소 긴 제목이기는 하지만 임펙트는 정말 강력하다. 러미스는 원래 제목을 <21세기의 커먼센스를 위해서>라고 붙이려 했다는데 그런 제목을 달고 나왔다면 내가 이 책을 잡는데 훨씬 더 오래걸렸을 것이다. 현재의 제목은 [외면일기] - 경제는 꼭 성장해야만 할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고 있어 한번 입력되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문제의식을 잠시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머리말'을 지나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습니다'라는 종결어미로 된 문장들을 읽으며 다소 간지럽기도 하고, 번역가가 좀 더 신경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문장들은 자칫 객관성을 잃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라는 종결어미로 끝났다면 이 책은 지금처럼 큰 감흥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문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는 내용들을 차분하면서도 호소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이 책은 '쓰여진 것'이 아니라 녹음기에 대고 '말해진 것'이기 때문에 번역에 있어서도 이런 문체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면서도 적절한 선택인 것이다.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모두 절절한 공감을 끌어내었지만 그 중에서 다소 아쉬웠던 장은 제2장 '비상식적'인 헌법?이다. 러미스는 근대국가를 정의하면서 그 본질을 오직 '정당한 폭력'에서 찾고 있는데, 그 근거는 막스 베버가 그렇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공부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좀 불친절한 설명인 듯하다. 이 장 전체가 전쟁을 포함한 '국가의 폭력'에 할애되어 있기 때문에 글의 전개상 이런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렇게 엉성한 근거로는 얼마든지 이견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말하면 제2장에서 이 부분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근대국가를 애써 정의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국가의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좀 더 뒤에 가면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 이외 다른 큰 나라에서도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특히 남자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인간으로 된다'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내게는 참 미스테리하고 어리둥절한 문장이다. 러미스씨, 좀 오버하신 것 같아요. 
     

2. 상식
'상식'이라는 말이 주변에서 쓰이는 경우들을 떠올려보면 이 단어가 주는 뉘앙스와는 달리 얼마나 주관적으로 쓰이는지 알 수 있다. '상식'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나온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알아야 하는 지식'? 의무 교육을 말하는 걸까? '알아야 한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견문',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기준을 정하기가 애매한 단어들이다.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따위는 개인의 깜냥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일반화시키고는 있지만 사람들의 상식은 천차만별이며 거기에서 교집합을 찾는다는 것은 소모적이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각종 수험서에 보이는 '일반상식'이라는 표현을 떠올려본다. 합격자와 탈락자, 내부자와 외부자를 가르는 시험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상식의 정의에 주어로 사용된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식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그것을 보유한 쪽과 그것을 보유하지 않은 쪽으로 나누는 힘이 있다. 상식이라는 말이 쓰이는 상황들은 대게 상식이 없거나 부족한 대상,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토론이나 논쟁 중에 쓰이는 '그것은 상식이다', '상식적으로'라는 말은 결국 '내 말이 맞다니까', '당장 입증할 수는 없지만 내 편이 더 많다'는 의미다.

상식은 이렇게 정치적인 단어이며 그런 면에서 일종의 '편견'이라고까지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 러미스가 책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식' 역시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러미스는 지금의 상식과는 다른 인도적이고 인간해방적인 이런 생각들이 패권을 잡은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내게 이 말은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말,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기의 편견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우리의 편견을 역사에 대한 인도적 관점이라는 방향으로 두는 게 좋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러미스는 그런 변화는 반드시 일어난다고 덧붙이고 있다. "먼 미래냐 가까운 미래냐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이른바 패러다임의 전환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오늘의 비상식이 상식이 되고, 오늘의 상식은 비상식이 되는, 그런 전환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일어나버리면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내가 어떻게 했는지, 그것이 이상하여 헛웃음이 날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이런 변화가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는 근거는 이미 이 사회 속에 '급여를 좀 줄어도 좋다, 그보다는 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이다.

확실히 '성장제일주의'와는 다른 사고방식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복지는 거래도 시혜도 아닌 권리라는 생각, '이건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분명 뭔가 달라졌다. '경제' 때문에 벌어지는 황당한 사건과 경험들이 늘어나면서 특별히 어떤 정치적 성향을 띠거나 전문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또 그런 생각과 느낌들이 논의되는 장소도 인터넷의 발달로 과거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예를 들면 네이버 지식in(왜 무조건 계속 경제성장 해야하나요? )처럼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굴러가는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빈익빈 부익부는 이미 누가 그것을 설명해주기 전에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상식이 된 듯한, 아직 그렇게까지는 안됐다면 곧(?) 될 듯한 분위기다. 아직은 무력감이 더 크긴 하지만 상황이 무르익고 있다는 느낌. (아니, 어쩌면 이것은 나의 태도를 투영한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성장과 분배 중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식(파이를 키우자)은 다음 두 가지 사실만으로 간단하게 무너질 것 같다.  
1. 파이를 만들 재료가 무한하지 않다.(자원, 환경)
2. 내 몫이 큰 것은 누군가의 몫을 가로챘기 때문이다.(빈곤, 분배) 

하지만.



3. (잿빛) 희망은 어디에?
쉽지 않다. 쉽지 않을 뿐더러 불가능해보이기까지 한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러미스는 분배의 문제는 경제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라고 말하며 정치에서 희망을 찾는 듯 보인다. 책의 후반에 나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으로 보아 확실히 정치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보들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자본은 사람들이 어렴풋하게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도덕과 경제의 등가라는 계약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분배의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많아지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정치적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일까?

한국의 정치적 상황들을 보면서 쌓여온 것들의 정체가 러셀의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를 읽고 난 후 분명해졌다. 성급하고 비이성적인 결론이겠지만(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정당 정치가 지속되고 중요한 사안들이 그런 식으로 결정되는 한 정치에서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당 정치인들이 중요시하는 정책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그 정책이 국민 일부만을 겨냥해야 한다. 둘째, 정책을 합리화하는 논변은 극히 단순해야 한다.
…(중략)…
나아가 정치인들은 라이벌 집단끼리 갈리기 때문에, 전쟁 시처럼 외부의 적에 대항해 뭉칠 때 외에는 나라 전체를 분열로 몰고 간다. 즉 그들은 의미 없는 소리와 분노를 삶의 원칙으로 삼는다. 설명하기 힘든 것이나, 국가들 간에 혹은 한 국가에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 일, 나아가서는 정치인들 계층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은 이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김용신의 <진보와 보수의 정신분석>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을 하고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 제도가 앞선 서구에서도 정당 간의 차이는 매우 미비하게 되고 말았다. 프랑스 정치학자인 두베르제(Manrice Duverger)가 1964년 발표한 그의 저서 <정치의 관념(The Idea of Politics)>에서 소련이나 미국의 20년 후 국가 발전 청사진은 거의 비슷하다고 말함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이념의 무의미성을 지적한 사실이 입증이라도 되듯이 현대 자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간의 이념적 구별은 어렵게 되고 더 나아가서 정책적 차별성마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이처럼 이념과 정책의 차별성이 약화된 자리에는 감성의 정치가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략)… 단적으로 말하면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각 선거는 거의 유흥(entertainment)화 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가장 민주주의적인 선거는 제비뽑기'라는 저자의 주장은 정말 그럴 듯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이유는 누구나 선출될 확률이 있으므로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이 높아질 것이고, 당선되었다고 뻐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뻐긴다'는 표현은 정말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선거방식을 조금만 바꾸면 같은 선호도를 가진 유권자들이라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과학적인 이론(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이 있는데 현재의 상황이 이런 까닭은, 정치인들의 수준미달과 겸손의 결여에 있는 것일까?

정당 정치에는 희망이 없을 지 몰라도 넓은 의미의 정치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희망은 정치에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럴 때의 정치는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미 사람들이 '정치'라는 단어에 갖는 무관심과 혐오의 정도를 생각해볼 때 무의미한 구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용어를 만드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정치'라는 단어를 계속 쓰면서 분배를 논하고 풍요를 논하는 것은 희망의 주체들을 은연 중에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4. 우리는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좋은 시절을 늘 과거에서 찾는 사람들의 입버릇은 장미빛 미래를 꿈꾸고 달리고는 있지만 '앞으로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무의식의 표현일까? 많은 사람들이 비관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투성이의 '방사능이 있는 유토피아'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만약 늦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저자의 이 말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용써봤자 예전 혹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는 없어. 그저 브레이크나 거는 거지'라는 의미가 아닐까. 상황을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면 '고민하지 말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외치는 쪽의 승리다. '행복'은 여전히 개인적인 것이 된다. 이런 태도를 비난할 수는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서야 그것이 미덕임을 알게 된 '관용'도 아직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덕목이 아닌데, '더불어 잘 살기'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까. 우리는 생각보다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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