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문이 트이는 것도 느리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고, 한글도 늦게 뗀 아들을 보는 엄마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남매를 기르는 엄마는 종종 둘을 비교하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딸은 과외며 학원이며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는데, 아들은 도통 공부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공차기나 좋아하고 집에서는 게임기만 붙잡고 있다. 말을 해도 흘려듣고 숙제나 준비물도 챙겨주지 않으면 빼먹기 일쑤다. 물론 모든 아들들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중략)…

남아는 여아와 다른 발달 순서를 밟는데,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발달 순서에 불리한 환경을 제공받는다. 게다가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능력은 얄궂게도 대부분 여아의 발달 단계에 맞춰져 있고, 학습 과정 또한 그렇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항상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아는 소근육과 사고, 언어가 먼저 발달하는 데 비해, 남아는 대근육과 행동이 먼저 발달한다. 여자아이는 발달 시기에 맞게 말하기와 읽기, 쓰기를 배우고, 별 어려움 없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실력을 발휘해서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남자아이들에게 그 시기는 대근육을 발달시키는 시간이다. 한창 움직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우리는 앉아서 공부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시기에 남자아이의 대근육 발달은 여자아이를 능가하지만, 아무도 아이의 대근육 발달을 칭찬해주지 않는다.

 


2.

아기를 갖게 된 순간부터 엄마 아빠는 아이의 미래를 구상한다. 처음의 바람은 소박했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충분하다 싶었다. 심성 곱고 반듯한 아이면 더 바랄 것이 엇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엄마 아빠는 하나둘 욕심을 보태기 시작한다.

이제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왜 옆집 아이보다 걸음마를 빨리 떼지 못하는가 안달하더니, ‘엄마’ ‘아빠’라는 말을 언제 시작하는지 조바심 내고, 생후 18개월에 기저귀 뗐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러고는 누구보다 한글을 빨리 떼겠다며 교재, 교구의 힘을 빌려 경쟁에 돌입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기자 명단에 올려둔 유명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언제 연락이 오나 노심초사하고, 막 세 돌이 되었을 뿐인데 요즘 트렌드라는 각종 교육기관으로 아이를 내몬다……. 처음의 소박한 바람으로 일관했던 부모도 ‘남들은 다 한다’는 생각에 점차 불안해지긴 마찬가지. 웬만한 강심장 부모 아니고서는 소신 있게 아이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3.

아이가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부모의 착각이다.

 


4.

부모 역할극에서 아이들이 대신 보여준 부모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네가 잘못을 하니까 걔가 네 이름을 적는 거 아니야”, “너 공부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평생 못살아”,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을 나쁘다고 그러면 안 되지” 등은 아이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에 해당한다. 부모들이 가장 흔히 취하는 태도다.

두 번째 “네가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려봐”, “친구들하고 같이 놀면 친구들이 널 좋아하잖아. 그러면 반장 뽑을 때 널 잘 뽑지 않을까?”, “그럼 네가 한번 반장이 돼봐” 등은 ‘설득’에 해당한다. 설득형 부모는 자신은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마지막 세 번째 “뭐 그런 선생님이 다 있어”라는 대답은 ‘공감’에 속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모의 태도다.

 


5.
사소한 이야기란 아이와 엄마 사이에 아무런 심리적 이해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쉽게 말해서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꽃이 피었구나”, “바람이 차구나” 같은 이야기인데, 혹시라도 추우니까 나가지 말라는 식의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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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2 - 산문 김수영 전집 2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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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


6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그것도 돈을 주고 사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던 다음과 같은 김수영의 문장 때문이다.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문장이 포함된 글이 이 책에 실렸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김수영의 전집 중에서도 산문을 모아놓은 이 책이라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하고 선뜻 주문한 것이다. 이게 벌써 몇 개월 전이다. 들고 다니며 읽기에는 무거워서, 잠자리의 머리맡에 두고 잠들 때마다 틈틈이 읽었다. 책은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일상과 현실, 창작과 사회의 자유를 다룬 1부와 2부의 글들은 '빛나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의 전공의 세계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시론과 문학론(3부), 시작 노트·편지·일기초(4부), 시 월평(5부), 미완성 장편소설 '의용군'(6부) 등은 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문청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국의 근대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닌 나같은 사람에게는 다소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다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문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참으로 고매하면서도 한없이 유약한 김수영의 인감됨이다.

내게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물론 그동안 내가 읽은 글 중에는 수많은 시인의 산문이 있었을 것이나 나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강정의 <나쁜 취향>이다. [책/독후잡문] - 나쁜 취향-강정 어떤 시인의 산문이 기억에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한 것은 그것이 아마 불편함이 아닌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면에서 시인 강정의 <나쁜 취향>은 분명 의미있는 책이지만 나에게 '시인의 산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것도 토할 것 같은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다는 면에서 손가락질을 당해 마땅하다. 게다가 이 책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쌈마이'인 척, 로우클래스인 척 한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마케팅 차원에서 결정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강정의 산문과 김수영의 산문을 단지 '시인의 산문'이라는 직업적 형식적 공통점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강정의 책은 분명 그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야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은 다양한 목적의 산문들을 모아놓은 책이기 때문에 글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김수영도 그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시세계에 관한 글을 보면 사뭇 낯설고 어려운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강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워낙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애꿎은 강정을 여기서 계속 들먹이는 것이 적당한 것인가조차 판단이 잘 서질 않지만 대체로 강정의 문장은 그 현란한 어휘들로 인해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고 어지럼증만 느꼈던 기억이 있고, 김수영의 문장은 비록 문학이라는 전문적인 세계에 대한 글에서는 어려운 말,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일상과 현실(1부)의 글들은 대문호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쉽고 평이한 문장들이었다. 김수영은 말한다. '내가 써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다'  

그가 살던 시절은 특수한 시절이었으나 그의 시의적인 글은 오늘의 현실에도 잘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그 시절이나 오늘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는 셈이다. 아니,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시절이 오히려 좀 더 리버럴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이 더 나빠졌다는 증거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아파할 줄 알았고, 시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했다. 그런가 하면 여편네를 팼고, 술을 먹고 잠자리에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자학의 미덕에 대신할만한 종교를 찾지 못했고, 글씨의 나열에 오천원을 받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는 점잖다기보다는 오히려 반대쪽이다. 그는 젊다. 김수영은 청춘이다. 그의 표현대로 '아직 늙기에는 빠르다'


사족-
대부분 5~60년대 쓰여진 글들을 읽으면서 새삼 한글의 변화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나같은 80년대생이라면 그래도 무리없이 읽겠지만 내 짐작에 지금의 90년대생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느끼는 것보다도 더 큰 이질감을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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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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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월이 다 가면 날 깨워줘. 9월의 언제였던지 아무튼 회사에서 보안 어쩌고 하면서 네이트 온을 못쓰게 하는 바람에 간만에 마음에 드는 대화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어 버렸다. 아무튼 내 대화명은 '9월이 다 가면 날 깨워줘'고, 물론 그린데이의 '웩 미 업 웬 셉템버 엔'을 번역한 문장이다.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내일이 오면 누군가 날 깨워줬으면 좋겠다.

내가 읽은 김연수의 소설들은 다음과 같다.

뿌넝숴(不能設)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거짓된 마음의 역사
달로 간 코미디언
뉴욕제과점

이건 모두 단편이다. 김연수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내게 <밤은 노래한다>나 <사랑이라니, 선영아> 같은 장편을 강권했다. 하지만 내가 잡은 책은 소설이 아닌 <청춘의 문장들>이다. 그리고 나는 하루만에 이 책을 다 읽었다. 29일 출근을 하면서 시작한 독서는 퇴근 후 잠자리에서 읽으면서, 그러니까 30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끝이 났다. 그리고 9월의 마지막 날을 이 책을 덮으면서 시작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날 깨워줄 이는 내가 되는 것이 좋겠지만 김연수의 이 책이 조금은 도와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출근하는 지하철에 앉아서 읽다가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했는데, 그것은 꽤 황망한 일이었다. 책을 읽다가 울어버린 것이다. 이덕무의 글을 빌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슬픈 생각에 고요히 귀기울이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였다.

그 얘기는 이쯤 해두고.

며칠 전인가 나는 <풋,>이라는 제목의,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계간지를 통해 박민규의 단편 하나를 읽게 되었다. 제목하여 <마이 퍼니 발렌타인>. 어땠냐고? 묻지 마시라. 아무튼지간에 박민규와 김연수는 둘 다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들이다. 내가 문학의 스펙트럼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으나 둘이 비슷한 부류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 것 같다. 박민규는 예나 지금이나 '삼류' 예찬론자고, 김연수는 프로 소설가로서 꽤 착실한 이미지다.(물론 박민규가 착실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착실하다. 김연수가 착실하다는 말은…내 부적절한 어휘선택을 자책하고 이쯤하는 편이 낫겠다.) 박민규의 문장 중에는 스타카토식으로 짧고 반복적인 문장들이 많고, 그는 이런 문장들이 자아내는 효과를 잘 알고 쓰는 것 같다. 김연수의 문장은 촘촘하다. 이 책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외려 그의 문장에 조금은 실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밀도는 과연 높았다. 흠, 이런 개도 웃고 갈 어줍잖은 평은 집어치우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박민규는 쌈마이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김연수는 프로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고나 할까.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분명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재미있고', 김연수의 소설들은 '진중하다.' 그러니까 박민규는 트렌드다. 박민규와 김연수가 내 바람 따위에 귀 기울일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개인적인 바람을 적어본다면 박민규는 문체의 변화를 시도했으면 좋겠고, 김연수는 전혀 다른 장르(이를테면 추리소설이나 환타지?)의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애니웨이.    

내가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박민규를 들먹거린 것은 내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진중하다는 김연수의 소설과는 달리(꽤나 다작多作하는 작가인 김연수를 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게 읽긴 했지만) 소설이 아니라 그랬는지 나는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눈물의 기습뿐 아니라 웃음의 기습도 꽤나 받았다. 그렇게 간간이 터지는 웃음은 프로 소설가의 가볍다면 가벼운,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책의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울고 웃었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된 계기를 소개하면서 쉰 살이 가까워지더라도 삼단논법 정도는 구사할 줄 아는 여자친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거나 관사관리병으로 근무하던 시절 사랑니를 뽑고 돌아와 대대장이 주는 캔맥주를 의사를 들먹이며 거부한 이병 김연수(아마도 군대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게 왜 웃긴지 짐작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정말 폭소를 터뜨렸는데, 처음으로 내가 군복무를 마쳤다는 것이, 그래서 이 상황에서 충분히 웃을 수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열일곱 살에 만난 여자아이가 즉석떡볶이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같이 살면 요리를 잘 할까 하고 생각했다는 부분은 큰 웃음을 선사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시를 읽을 줄 아는 그의 능력에 감탄도 하고, 내가 읽는 글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추어보기도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 여기저기에서 종종 등장하는 그의 멘토가 된 시인이다. 멘토가 있다는 사실. 자기 안에 있는 가능성을 직접 가리켜 말을 하고, 비꼬는 투로 '시나 써야겠다'고 말해도 외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궁금하다'고 말해주는 멘토.(후자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김연수의 표현대로 정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존재를 만난 그가 사무치도록 부러웠다. 더불어 대학교 때 선생님이 생각났는데, 나는 그동안 그분의 말을 까먹고 살았다. 그 선생님은 그러셨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가라고. 그러면 누군가 반드시 손을 내밀어 올 거라고. 반드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나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가슴 깊이 담아두고 있었으나, 너무 깊이 담아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가 김연수의 글을 읽고 다시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자신이 없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반드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았고, 다시 찾은 생각이라는 점에서 일견 희망적이기도 하다.

시인의 산문을 읽는 것이 조금은 낯뜨거울 수 있는 것처럼 소설가의 수필을 읽는 것 역시 그런 느낌이 없지는 않다. 이 책에 나온 예를 들면 음악다방의 DJ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뮤직박스에 앉아 있는 카리스마적 모습에서 각종 '인간적인' 모습이 연상되고, 그러면 DJ의 생명은 물론 열혈 청취자의 생명도 끝나게 된다,라는 것과 조금은 비슷하다고 할까? 게다가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 김연수의 온갖 개인적인 일들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실린 글들은 김연수가 지금의 프로 소설가가 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청춘이었고 지금도 청춘인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음악다방의 DJ와는 달리 소설가로서의 생명은 물론 열혈 독자들의 생명도 꺼지기는커녕 더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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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 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2.

그는 모든 자기의 생활의 벽을 향하여 몸을 꽝꽝 부딪으며 나간다.



3.

술이 깬 후에도 나는 골치가 아프지 않았지만 머리맡에 놓은 주사약 상자를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즐거웠다. 이것만 다 맞으면 아주 현기증이 없어질 것이다. 정신이상에 대한 공포도, 일체의 강박관념도 씻은 듯 부신 듯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약상자들은 마치 나의 구주나 다름없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4.

일전에 D신문의 <시단평>을 통해서 나는 <한국의 현대시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르겠다!’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글을 보고 모 소설가가 <모르겠다고 해서야 쓰겠나, 잘 키워가도록 해야지>라는 말을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이 소설가는 이 글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자포자기가 돼서야 쓰나, 아무리 보수가 적은 번역일이라도 끝까지 정성을 잃지 말아야지>라고. 나는 그를 평소부터 소설가라기보다는 학교교사로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더욱 그 감이 심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급 <속물>이 참 많다.



5.

입장료도 무섭지만 입장료를 안 받는 것은 더 무섭다.



6.

그에 비하면 토끼는 하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토끼도 (닭에 못지않게) 기르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 보다도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아내는 아직도 나의 이 <역경주의(力耕主義)>에는 그리 신뢰를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7.

그러나 책임은 아무래도 나의 눈과 머리와 마음에 더 많은 것 같다. 허위에 흐려져 있는 눈, 타성에 젖어 있는 머리, 어줍지 않게 오만해진 마음.

그러나 더 캐고 보면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벌써 나는 재주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다. 내가 재주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재주라는 것은 생각하면 한이 없는 것이고, 세상에 재주만 생각하고 있다가는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재주의 딜레마의 막바지에서 행동으로 옮겨간 나는, <머리가 좋다>는 말처럼 이 <재주>라는 말이 싫기까지도 하다. <우리집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요> 하는 학부형들의 치사한 자기 아이 변명에서부터 <나는 머리는 좋은데 두뇌가 나빠> 식의 라디오 약광고의 코메디에 이르기까지, 이렇게까지 머리와 재주가 노이로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이상한 시대풍조, 이것은 현대의 새로운 거대한 미신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재주와 머리가 우상화되고 있으면서 무릇 다른 진정한 가치가 그렇듯이 이 가치도 현실면에서는 여전히 천시 학대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8.

필경 나도 누구를 지식인이 아니라고 욕할 만한 권한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처지에 있고, 그런 절망적인 처지에 이길 가망이 도저히 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현대시인 솔제니친의 시에 나오는 개미와 같은 낡은 생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감명적인 시라고 생각되어서 최근에 《사상계(思想界)》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서 소개한다.


개미와 불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작은 나무쪽은 불 속에 던져 넣었는데, 그것은 개미들이 오밀조밀 집을 짓고 있던 통나무쪽이었다.

통나무 껍질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할 때 개미들은 절망 속을 기어 허위적거렸다. 껍질로 기어나와 날름대는 불꽃 속에서 타죽어가고 있었다. 얼른 통나무의 한쪽을 들어올려 비벼대었다. 많은 개미들이 도망쳐 모래밭을 횡단, 낮은 솔잎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 기운을 피해 아주 달아나 버리지 않았다. 일단 절박한 위험을 극복하자마자 개미들은 다시 타고 있는 통나무 주의로 기어들었다. 마치 어떤 힘이, 개미들을 그들이 포기해 버린 고향으로 다시 되돌려 보낸 듯이 많은 개미 떼가 불타는 통나무로 다시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기어코 타 죽을 때까지 개미들은 그 불붙는 집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9.

나에게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죽음의 구원. 아직도 나는 시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40여 년을 문자 그대로 헛 산 셈이다. 가난의 구원. 길가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역사를 긴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나는 40녀 년 동안을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한 셈이다. 매명의 구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



10.

세상에서는 자학이 나쁘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학의 미덕에 대신하는 종교를 찾지 못하고 있소. 속되어 가는 나 자신에 대한 이나마의 변명이라도 없이는 어디 살겠소?

…(중략)…

그것은 그냥 글씨의 나열이오. 미안하오. 그 글씨의 나열에 대해서 오천 원이나 받아서 미안하오.



11.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십이 층인가의 고층 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 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 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12.

요즘의 시대는 <머리가 좋다>는 것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세상이라, 중학교 아이들까지도 무슨무슨 별에는 인간의 두뇌의 몇 갑절 머리 좋은 생물이 살고 있단 말을 곧잘 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어른들까지도 「팔이 셋이나 있다지?」 하면서 멀쑥해지지만, 나의 경우는 시의 덕분으로 우선 양키의 미인보다도 더 아름답게, 추한 아내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이라도 둔하게 된 것을 그나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자위하고 있다.



13.

무허가 이발소의 딱딱한 평상에 앉아서 순차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 시내의 다방이나 술집 중에서 어수룩한 한적한 분위기를 찾아다니는 것을 단념한 지는 벌써 오래이고, 변두리인 우리 동네의 이발관에까지도 요즘에 와서는 급격하게 <근대화>의 병균에 오염되어서, 라디오 가요의 독재적인 연주에다가 미인계를 이용한 마사지의 착취까지가 가미되어 좀처럼 신경을 풀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좌석버스나 코로나 택시에서까지도 가요 팬의 운전사를 만나게 되면, 사색은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재수가 염려될 만큼 신경고문과 세뇌교육이 사회화되고 잇는 세상에서는 신경을 푼다는 것도 하나의 위법이요 범죄라는 감이 든다. <무허가> 이발소에서야 비로고 군색한 사색을 위한 신경휴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색이 범죄라고 아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무허가 이발소에도 라디오의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군무장(鄕軍武裝)을 보도하는 투박한 뉴스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인기배우를 모델로 한 전축광고 포스터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승객들의 사전 양해도 없이 제멋대로 유행가를 마구 틀어놓는 운전사의 무지와 무례에 비하면, 무료한 이발사의 이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소박한 편에 속한다.

이런 뒷골목 이발소의 고객들이란 주로 동네꼬마들과 시골서 올라온 인근 공장의 직공아이들인데, 스무 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정중하게 인두질을 해주고 게다가 우스갯소리까지 해주면서 기껏해야 50원을 받는 이 영리행위는 너무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이 불쌍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저 다 헤어진 신에, 저 더러운 옷에 저 반짝거리는 머리가 어떻게 어울린다고 저 불필요한 치장을 하나 하고 처음에는 화도 내보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불쌍한 저 아이가 저렇게 정중한 우대를 받고 사람대우를 받는 것은 무허가 이발소에서밖에 있으랴 하는 측은한 감이 들고,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얼마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인가 하는 원시적인 겸손한 반성까지도 든다. 참 할 일이 많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



14.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 (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 평화 시절에만 국한될 한사(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중략)…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15.

그런데 이보다도 더 위험한 일은 지식층들의 피로다. 이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보면 그뿐이겠지만 좌우간 비어홀이나 고급 술집의 대학교수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목석 같은 사나이가 나를 울린다」를 부르면 좋아하지만, 언론자유 운운하면 세련되지 않은 촌닭이라고 핀잔을 맞는 것이 상식이다.

…(중략)…

계를 드는 여편네를 막을 수가 없고, 돈을 빌려 쓰지 않을 수가 없고, 딱한 경우에 돈을 꾸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16.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부연(敷衍)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진달래꽃」을 쓴 소월(素月)은 자기 반의 부유한 아이들을 10여 명씩 모아놓고 고가의 과외공부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6학년 선생이나 중학교 3학년의 담임선생은 될 수 없었다.

…(중략)…

나의 이상으로는 개성 있는 시인의 대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매너리즘에 빠진 오늘날과 같은 치욕적인 추천제도에는 도저히 응해지지 않을 것이오. 오늘날의 문단의 추천제는 「007」의 영화를 보려고 새벽 8시부터 매표구 앞에 줄을 지어 늘어선 관객들을 연상케 하는 치욕적인 것이오.



17.

악(惡)도 이만큼 빈틈없이 세련되면 한번 싸워볼 만하다.



18.

외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항용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는 논설이나 회화에 있어서 <주장>만 있지 <설득>이 없는 것이 탈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런 경우에 <주장>이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명령>으로 화하는 성질의 것이고, 이런 현상은 으레 문화의 기반이 약하고, 정치적으로는 노상 독재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회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중략)…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방향」의 필자는 <문화를 무시한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이 나쁘다고 했지만, 나는 논법으로는 오히려 문화를 무시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19.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두려워해야 할 <숨어있는 검열자>는 그가 말하는 <대중의 검열자>라기보다도 획일주의가 강요하는 대제도의 유형무형의 문화기관인 <에이전트>들의 검열인 것이다.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대행하는 것이 이들이고, 이들의 검열 제도가 바로 <대중의 검열자>를 자극하는 거대한 테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검열자>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검열자라고 <문예시평>자는 말하고 있지만, 대제도의 검열관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명사가 바로 질서라는 것이다.



20.

일전에도 또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가지고 고반소에 데리고 갔다는데 나중에 여편네 말을 들으니 고반소의 순경을 보고 내가 천연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이 말을 듣고 겁이 났고 그렇게 겁을 내는 자신이 어찌나 화가 났던지 화풀이를 애꿎은 여편네한테다 다 하고 말았었다. 겁을 낸 자신이, 술을 마시고 <언론자유>를 실천한 내 자신이 한량없이 미웠다.



21.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고향은 변모하여 가고 있다. (……) 비록 계수나무를 뽑아내고 옥토끼를 학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로켓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그의 평론집을 읽고 난 이튿날 새벽에 제일 먼저 나의 머리에 떠오른 평범한 구절이 바로 이것이었다.



22.

<인생이 비극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이츠 자신의 말이다.



23.

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과 옥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고, 옥을 보지 못한 사람도 옥과 돌의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4.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 분별이란 것이 그것이다. 술을 먹을 때도 몸을 아끼며 먹는다.

그리고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이, 젊은 사람들과 대할 때면 완연히 체면 같은 것을 의식해서 말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되고 주정도 자연히 삼가게 된다. 이쯤 되면 거지가 되거나 농부가 되거나 죽거나 해야 할 텐데 그것을 못한다. 나이가 먹으면서 거지가 안 된다는 것은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판단한다. 하다못해 술친구들까지도 자기하고 생활 정도가 비슷한 사이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지만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라고, 생활에 과히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 도시 마음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 약간의 사치를 하는 것도 싫지 않고, 남이 하는 사치도 자기의 사치보다 더 즐겁게 생각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역사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25.

<네가 어떤 죄를 저지르든 간에, 수많은 성인들이 벌써 그것을 저지르고 있단 말야.>

<위대한 성인들의 병과 쇠약을 이 몸이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전자의 날카로운 아이러니는 그린의 취미에 맞는 것이고, 후자의 기발한 진지성(眞摯性)은 스파크의 취미다. 그런데 이 두 작가의 개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제각기의 작품 속에서 이런 인자스러운 관념에 부여하고 있는 역할일 것이다. 그린은 전자를, 자기는 이미 구원을 받을 여지가 없는 죄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한 등장인물의 정신착란에 걸린 마지막 자존심을 때려부수기 위해서 사용한다. 스파크는 여명(餘命)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환자들의 비참하고도 익살맞은 생활을 가차없이 묘사하는 문장 속에서, 어쩌다 새어들어온 밝은 햇빛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며시 후자를 삽입하고 있다.



26.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심각하게 모방하면 실패하지만 유쾌하게 모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7.
내가 써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다. 혹은 서적어와 속어의 중간쯤 되는 말들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고어(古語)도 연구해 본 일이 없고 시조에 대한 취미도 없다. 어느 서구 시인이 시어는 15세까지 배운 말이 시어가 될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의 시어는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과 신문에서 배운 시사어의 범위 안에 제한되고 있다.




28.

너무 좋은 책은 집에 두고 싶지 않다. 집의 서가에는 고본옥에서도 사지 않는 책만 꽂아두면 된다. 이왕 속물근성을 발휘하려면 이류의 책이나 꽂아두라.



29.

그들은-그들이란, 출판업자나 잡지 편집자나 신문기자들-우리들이 얼마큼 시를 싫어하는지를 모른다. 공연히 겸손해서 하는 말로 생각하고 있다. 현대의 작가들은 자기들의 문학을 불신한다는 카뮈의 선언은, 시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랭보의 말만큼 중요하다. 이것이 오늘의 척도다. 그러나 이런 건 말로 하면 싱겁다. 그냥 혼자 알고 있으면 된다. 이런 고독을 고독대로 두지 않기 때문에 <문학>이 싫다는 것이다.



30.

애인은 오지 않았지만, 애인을 만나고자 기다리는 순수한 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다.



31.

작은 눈으로 큰 현실을 다루거나 작은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지 말고 큰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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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처럼 보이는 어떤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갔는데 사람들은 웃지 않고 아주 근엄하게 그 광대의 말을 경청하는 거예요. "우리 독일인들이 최고입니다. 우리가 우수한데 왜 전쟁에 졌습니까? 유태인들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입니다." 난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바보같으니라구, 사람들은 과거가 어땠는지를 기억한다고. 네 입을 다물게 만들 거야." 맙소사,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거예요. 그 광대는 말했어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게 가능합니다!" 수천수만 명이 손을 들고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외치는 거예요. "하일, 히틀러!"
…(중략)…
그러더니 이번에는 손수레로 그들을 실어 날라 아주 커다란 화로 같은 데서 태워버렸어요. 모든 게, 기차에서부터 굴뚝까지의 모든 것이 마치 기계가 움직이는 거 같았어요. 그놈들이 사람들한테 빼앗은 안경들이 거대한 산처럼 쌓여갔어요.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고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졌어요. 그 뿌연 흐릿함 속에서 난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 광대 히틀러가 약속한 것, "모든 것이 가능하다"가 이루어졌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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