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이란 우스운 것이야. 나도 모르게 내가 빠지는 것이고, 또 내가 빠져 있는 것이고 한 것이 운명이야.



2.

그는 모든 자기의 생활의 벽을 향하여 몸을 꽝꽝 부딪으며 나간다.



3.

술이 깬 후에도 나는 골치가 아프지 않았지만 머리맡에 놓은 주사약 상자를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즐거웠다. 이것만 다 맞으면 아주 현기증이 없어질 것이다. 정신이상에 대한 공포도, 일체의 강박관념도 씻은 듯 부신 듯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약상자들은 마치 나의 구주나 다름없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4.

일전에 D신문의 <시단평>을 통해서 나는 <한국의 현대시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르겠다!’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글을 보고 모 소설가가 <모르겠다고 해서야 쓰겠나, 잘 키워가도록 해야지>라는 말을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이 소설가는 이 글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자포자기가 돼서야 쓰나, 아무리 보수가 적은 번역일이라도 끝까지 정성을 잃지 말아야지>라고. 나는 그를 평소부터 소설가라기보다는 학교교사로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더욱 그 감이 심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급 <속물>이 참 많다.



5.

입장료도 무섭지만 입장료를 안 받는 것은 더 무섭다.



6.

그에 비하면 토끼는 하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토끼도 (닭에 못지않게) 기르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얼마가 남느냐 보다도 얼마나 힘이 드느냐를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아내는 아직도 나의 이 <역경주의(力耕主義)>에는 그리 신뢰를 두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7.

그러나 책임은 아무래도 나의 눈과 머리와 마음에 더 많은 것 같다. 허위에 흐려져 있는 눈, 타성에 젖어 있는 머리, 어줍지 않게 오만해진 마음.

그러나 더 캐고 보면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벌써 나는 재주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다. 내가 재주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재주라는 것은 생각하면 한이 없는 것이고, 세상에 재주만 생각하고 있다가는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재주의 딜레마의 막바지에서 행동으로 옮겨간 나는, <머리가 좋다>는 말처럼 이 <재주>라는 말이 싫기까지도 하다. <우리집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요> 하는 학부형들의 치사한 자기 아이 변명에서부터 <나는 머리는 좋은데 두뇌가 나빠> 식의 라디오 약광고의 코메디에 이르기까지, 이렇게까지 머리와 재주가 노이로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이상한 시대풍조, 이것은 현대의 새로운 거대한 미신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재주와 머리가 우상화되고 있으면서 무릇 다른 진정한 가치가 그렇듯이 이 가치도 현실면에서는 여전히 천시 학대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8.

필경 나도 누구를 지식인이 아니라고 욕할 만한 권한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처지에 있고, 그런 절망적인 처지에 이길 가망이 도저히 없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소련의 현대시인 솔제니친의 시에 나오는 개미와 같은 낡은 생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감명적인 시라고 생각되어서 최근에 《사상계(思想界)》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그대로 옮겨서 소개한다.


개미와 불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작은 나무쪽은 불 속에 던져 넣었는데, 그것은 개미들이 오밀조밀 집을 짓고 있던 통나무쪽이었다.

통나무 껍질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타기 시작할 때 개미들은 절망 속을 기어 허위적거렸다. 껍질로 기어나와 날름대는 불꽃 속에서 타죽어가고 있었다. 얼른 통나무의 한쪽을 들어올려 비벼대었다. 많은 개미들이 도망쳐 모래밭을 횡단, 낮은 솔잎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 기운을 피해 아주 달아나 버리지 않았다. 일단 절박한 위험을 극복하자마자 개미들은 다시 타고 있는 통나무 주의로 기어들었다. 마치 어떤 힘이, 개미들을 그들이 포기해 버린 고향으로 다시 되돌려 보낸 듯이 많은 개미 떼가 불타는 통나무로 다시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기어코 타 죽을 때까지 개미들은 그 불붙는 집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9.

나에게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좀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죽음의 구원. 아직도 나는 시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40여 년을 문자 그대로 헛 산 셈이다. 가난의 구원. 길가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역사를 긴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나는 40녀 년 동안을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한 셈이다. 매명의 구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나>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



10.

세상에서는 자학이 나쁘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학의 미덕에 대신하는 종교를 찾지 못하고 있소. 속되어 가는 나 자신에 대한 이나마의 변명이라도 없이는 어디 살겠소?

…(중략)…

그것은 그냥 글씨의 나열이오. 미안하오. 그 글씨의 나열에 대해서 오천 원이나 받아서 미안하오.



11.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십이 층인가의 고층 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 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 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12.

요즘의 시대는 <머리가 좋다>는 것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세상이라, 중학교 아이들까지도 무슨무슨 별에는 인간의 두뇌의 몇 갑절 머리 좋은 생물이 살고 있단 말을 곧잘 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어른들까지도 「팔이 셋이나 있다지?」 하면서 멀쑥해지지만, 나의 경우는 시의 덕분으로 우선 양키의 미인보다도 더 아름답게, 추한 아내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이라도 둔하게 된 것을 그나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자위하고 있다.



13.

무허가 이발소의 딱딱한 평상에 앉아서 순차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 시내의 다방이나 술집 중에서 어수룩한 한적한 분위기를 찾아다니는 것을 단념한 지는 벌써 오래이고, 변두리인 우리 동네의 이발관에까지도 요즘에 와서는 급격하게 <근대화>의 병균에 오염되어서, 라디오 가요의 독재적인 연주에다가 미인계를 이용한 마사지의 착취까지가 가미되어 좀처럼 신경을 풀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좌석버스나 코로나 택시에서까지도 가요 팬의 운전사를 만나게 되면, 사색은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재수가 염려될 만큼 신경고문과 세뇌교육이 사회화되고 잇는 세상에서는 신경을 푼다는 것도 하나의 위법이요 범죄라는 감이 든다. <무허가> 이발소에서야 비로고 군색한 사색을 위한 신경휴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색이 범죄라고 아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무허가 이발소에도 라디오의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군무장(鄕軍武裝)을 보도하는 투박한 뉴스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인기배우를 모델로 한 전축광고 포스터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승객들의 사전 양해도 없이 제멋대로 유행가를 마구 틀어놓는 운전사의 무지와 무례에 비하면, 무료한 이발사의 이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소박한 편에 속한다.

이런 뒷골목 이발소의 고객들이란 주로 동네꼬마들과 시골서 올라온 인근 공장의 직공아이들인데, 스무 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정중하게 인두질을 해주고 게다가 우스갯소리까지 해주면서 기껏해야 50원을 받는 이 영리행위는 너무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이 불쌍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저 다 헤어진 신에, 저 더러운 옷에 저 반짝거리는 머리가 어떻게 어울린다고 저 불필요한 치장을 하나 하고 처음에는 화도 내보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불쌍한 저 아이가 저렇게 정중한 우대를 받고 사람대우를 받는 것은 무허가 이발소에서밖에 있으랴 하는 측은한 감이 들고,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얼마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인가 하는 원시적인 겸손한 반성까지도 든다. 참 할 일이 많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



14.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 (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 평화 시절에만 국한될 한사(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중략)…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15.

그런데 이보다도 더 위험한 일은 지식층들의 피로다. 이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보면 그뿐이겠지만 좌우간 비어홀이나 고급 술집의 대학교수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목석 같은 사나이가 나를 울린다」를 부르면 좋아하지만, 언론자유 운운하면 세련되지 않은 촌닭이라고 핀잔을 맞는 것이 상식이다.

…(중략)…

계를 드는 여편네를 막을 수가 없고, 돈을 빌려 쓰지 않을 수가 없고, 딱한 경우에 돈을 꾸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건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서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16.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부연(敷衍)이 되고 전자는 후자의 부연이 되는 법이다. 사카린 밀수업자의 붓에서 「두이노의 비가」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진달래꽃」을 쓴 소월(素月)은 자기 반의 부유한 아이들을 10여 명씩 모아놓고 고가의 과외공부를 가르치는 국민학교 6학년 선생이나 중학교 3학년의 담임선생은 될 수 없었다.

…(중략)…

나의 이상으로는 개성 있는 시인의 대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매너리즘에 빠진 오늘날과 같은 치욕적인 추천제도에는 도저히 응해지지 않을 것이오. 오늘날의 문단의 추천제는 「007」의 영화를 보려고 새벽 8시부터 매표구 앞에 줄을 지어 늘어선 관객들을 연상케 하는 치욕적인 것이오.



17.

악(惡)도 이만큼 빈틈없이 세련되면 한번 싸워볼 만하다.



18.

외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항용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는 논설이나 회화에 있어서 <주장>만 있지 <설득>이 없는 것이 탈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런 경우에 <주장>이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명령>으로 화하는 성질의 것이고, 이런 현상은 으레 문화의 기반이 약하고, 정치적으로는 노상 독재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회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중략)…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방향」의 필자는 <문화를 무시한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이 나쁘다고 했지만, 나는 논법으로는 오히려 문화를 무시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19.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두려워해야 할 <숨어있는 검열자>는 그가 말하는 <대중의 검열자>라기보다도 획일주의가 강요하는 대제도의 유형무형의 문화기관인 <에이전트>들의 검열인 것이다.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대행하는 것이 이들이고, 이들의 검열 제도가 바로 <대중의 검열자>를 자극하는 거대한 테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검열자>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검열자라고 <문예시평>자는 말하고 있지만, 대제도의 검열관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각조차 할 수 없는 숨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명사가 바로 질서라는 것이다.



20.

일전에도 또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가지고 고반소에 데리고 갔다는데 나중에 여편네 말을 들으니 고반소의 순경을 보고 내가 천연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이 말을 듣고 겁이 났고 그렇게 겁을 내는 자신이 어찌나 화가 났던지 화풀이를 애꿎은 여편네한테다 다 하고 말았었다. 겁을 낸 자신이, 술을 마시고 <언론자유>를 실천한 내 자신이 한량없이 미웠다.



21.

<그러나 지금 우리의 고향은 변모하여 가고 있다. (……) 비록 계수나무를 뽑아내고 옥토끼를 학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로켓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그의 평론집을 읽고 난 이튿날 새벽에 제일 먼저 나의 머리에 떠오른 평범한 구절이 바로 이것이었다.



22.

<인생이 비극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이츠 자신의 말이다.



23.

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돌과 옥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고, 옥을 보지 못한 사람도 옥과 돌의 구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4.

나이를 먹으면 주접이 붙는다. 분별이란 것이 그것이다. 술을 먹을 때도 몸을 아끼며 먹는다.

그리고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이, 젊은 사람들과 대할 때면 완연히 체면 같은 것을 의식해서 말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되고 주정도 자연히 삼가게 된다. 이쯤 되면 거지가 되거나 농부가 되거나 죽거나 해야 할 텐데 그것을 못한다. 나이가 먹으면서 거지가 안 된다는 것은 생활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을 느끼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판단한다. 하다못해 술친구들까지도 자기하고 생활 정도가 비슷한 사이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지만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라고, 생활에 과히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 도시 마음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 약간의 사치를 하는 것도 싫지 않고, 남이 하는 사치도 자기의 사치보다 더 즐겁게 생각된다. 하늘은 둥글고 땅도 둥글고 사람도 둥글고 역사도 둥글고 돈도 둥글다.



25.

<네가 어떤 죄를 저지르든 간에, 수많은 성인들이 벌써 그것을 저지르고 있단 말야.>

<위대한 성인들의 병과 쇠약을 이 몸이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전자의 날카로운 아이러니는 그린의 취미에 맞는 것이고, 후자의 기발한 진지성(眞摯性)은 스파크의 취미다. 그런데 이 두 작가의 개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제각기의 작품 속에서 이런 인자스러운 관념에 부여하고 있는 역할일 것이다. 그린은 전자를, 자기는 이미 구원을 받을 여지가 없는 죄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한 등장인물의 정신착란에 걸린 마지막 자존심을 때려부수기 위해서 사용한다. 스파크는 여명(餘命)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환자들의 비참하고도 익살맞은 생활을 가차없이 묘사하는 문장 속에서, 어쩌다 새어들어온 밝은 햇빛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며시 후자를 삽입하고 있다.



26.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심각하게 모방하면 실패하지만 유쾌하게 모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7.
내가 써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다. 혹은 서적어와 속어의 중간쯤 되는 말들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고어(古語)도 연구해 본 일이 없고 시조에 대한 취미도 없다. 어느 서구 시인이 시어는 15세까지 배운 말이 시어가 될 것이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의 시어는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과 신문에서 배운 시사어의 범위 안에 제한되고 있다.




28.

너무 좋은 책은 집에 두고 싶지 않다. 집의 서가에는 고본옥에서도 사지 않는 책만 꽂아두면 된다. 이왕 속물근성을 발휘하려면 이류의 책이나 꽂아두라.



29.

그들은-그들이란, 출판업자나 잡지 편집자나 신문기자들-우리들이 얼마큼 시를 싫어하는지를 모른다. 공연히 겸손해서 하는 말로 생각하고 있다. 현대의 작가들은 자기들의 문학을 불신한다는 카뮈의 선언은, 시는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랭보의 말만큼 중요하다. 이것이 오늘의 척도다. 그러나 이런 건 말로 하면 싱겁다. 그냥 혼자 알고 있으면 된다. 이런 고독을 고독대로 두지 않기 때문에 <문학>이 싫다는 것이다.



30.

애인은 오지 않았지만, 애인을 만나고자 기다리는 순수한 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다.



31.

작은 눈으로 큰 현실을 다루거나 작은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지 말고 큰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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